퀵바

코리타 님의 서재입니다.

세상에 나쁜 영애는 없다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로맨스

새글

코리타
작품등록일 :
2024.03.21 21:26
최근연재일 :
2024.05.15 21:30
연재수 :
40 회
조회수 :
1,121,554
추천수 :
44,497
글자수 :
358,147
유료 전환 : 17시간 남음

작성
24.04.19 21:30
조회
28,244
추천
1,066
글자
23쪽

엘렌테 (2)

DUMMY

“정석적인 마법 대련이니만큼 제약되는 조건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무엇보다, 수많은 귀족들이 참관하는 대련이니 최소한의 품위를 지켜야만 하겠지요.”


데릭은 언제나 진중한 표정이었다.

침착함은 전염되는 것이었다. 엘렌테는 방금 전까지 감정적으로 대꾸하고 있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아무리 몸이든 정신이든 궁지에 몰려 있었다고 한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침착하게 품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 귀족가의 영애였다.

허나, 데릭은 신경 쓰는 기색조차도 없었다.


“그래도... 인정하기 싫지만 아이셀린 영애는 나보다 한 수 위야.”

“모든 면에서 한 수 위는 아닐 겁니다. 엘렌테 아가씨께서 더 한 수 위인 부분을 찾아내면 됩니다.”


모든 말을 단언하듯 늘어놓는 데릭의 모습은 망설임이나 불안감 따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엘렌테가 데릭을 쏘아 붙이는 것조차도 모두 상정하고 있었던 일인 것인 듯 했다. 엘렌테는 한낱 평민에 불과한 데릭이 마치 경험 많은 노장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한계 직전으로 몰아붙이면서 해온 마법 수련이 아무런 의미도 없었겠습니까? 다 아이셀린 영애를 이기기 위해 필요한 밑작업이었습니다. 이제 정말 핵심이 되는 과정만 남았습니다.”

“뭐, 뭘 따로 준비해둔 게 있는 거야?”

“...엘렌테 아가씨의 의지를 꼭 확인해봐야겠다고 제가 말씀드렸었지요?”


데릭이 한층 더 진중해진 눈으로 엘렌테를 바라보자, 엘렌테는 마른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 말았다.

그런 엘렌테 영애의 반응이 무색할 정도로, 데릭은 시원하게 말을 꺼냈다.


“이제부터 진짜 지옥일 겁니다. 잘 따라오셔야 합니다.”


이제부터 진짜 지옥이라면, 지금까지는 대체 뭐였단 말인가?

엘렌테는 눈앞의 저 소년이 낫을 든 사자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난리를 피워댔으니, 이제 와서 뒤로 무를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



말을 타고 벨미어드 백작령의 거대한 초원을 따라 달려가다 보면, 이른 아침부터 소작농들이 밭을 일구고 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수확기를 막 맞이한 밀밭이 거대한 평야를 따라 쫙 펼쳐져 있었다.

대륙 서부 최대의 곡창지대인 볼레론 평야를 한참동안 가로지르고 나면 지평선 너머에서부터 큼지막한 요새가 보인다. 남서쪽 해안의 국경지대 전반을 관리하는 영지이니만큼, 으리으리한 군사 요새가 잘 관리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 다가닥, 다가닥.


펠미어는 그렇게 한참동안 말을 타고 달렸다.

어차피 당분간은 그 용병 나부랭이가 전담해서 마법을 가르칠 것이니 자신의 역할도 없었다.

어차피 잠깐의 일탈일 뿐이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밀린 일도 처리하고, 백작을 만나 요즘 상황도 전하기 위해 벨미어드 영지에 들른 것이다.


논밭을 달리던 때와 달리, 요새 근처에 오면 본격적으로 분위기가 살벌해지기 시작한다.

남방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능선에는 감시 초소들 따위가 서있는데, 본격적으로 거대한 산지가 나오기 시작하면 길가를 따라 늘어선 깃대들이나, 심드렁한 표정으로 장병기를 휘어잡고 순찰을 도는 군인들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요새 초입을 따라 말을 타고 달려서 들어가니, 도열해있는 군인들이 그를 제지하려다 말았다.



- 히이잉! 히잉!

- 타닥


요새 최심부의 첨탑으로 향하자, 축일을 위한 사열식 훈련에 여념이 없는 병사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위치에 비해서 꽤나 젊어보였다. 자잘 자잘한 주름살은 그가 보낸 세월이 짧지만은 않았음을 이야기해주고 있으나, 다른 영지 귀족들에 비하면 여전히 눈에 총기가 살아있었다. 그 떡 벌어진 어깨와 건장한 체격이 그가 아직 현역임을 방증해주고 있었다.


그는 이 영지의 주인인 트리스탄 아넬트 벨미어드 백작이었다.

어지간한 수도의 백작가 가주들도 이 변경백 앞에선 고개를 숙이고 예를 취할 정도로, 제국 서부에선 그 이름이 드높은 인물이었다.


“오, 펠미어! 에벨스타인에서 돌아왔는가!”

“몸 건강하셨습니까, 백작 저하. 백작저에 계신 줄 알았는데, 요새까지 나와 계셨군요.”

“내가 어디 방구석에만 쳐박혀서 깃펜이나 놀릴 자인가. 가끔씩은 몸도 놀려줘야지.”



벨미어드 백작은 성격이 호방하고 아랫사람을 아끼는 이였지만, 군인 출신답게 카리스마를 타고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자기 사람은 잘 챙기면서도 적대하는 이는 철저히 응징하는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내 딸 엘렌테의 얼굴을 본지도 너무 오래되었구나. 그 보물을 곁에 끼고 살았을 때는 매일 웃음이 끊이질 않았는데. 에벨스타인에서는 잘 지내던가?”

“예, 물론입니다. 근래에 마법 단련에 더 집중하시겠다고 여러 도전도 많이 하고 계십니다.”


펠미어는 잠시 고민하다가, 데릭이라는 용병에 대해 보고하는 것을 일단 보류해두었다. 일단 두루뭉술하게 설명해둘 뿐이다.


엘렌테 영애가 한낱 용병에게 마법을 배우고 있다는 사실에 백작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가 없었다. 펠미어는 데릭에게 마법을 배우는 엘렌테의 기행이 한 때의 일탈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애초에 엘렌테 영애가 그런 용병을 기용한 것은 아이셀린 영애에 대한 승부욕 때문인 것이 컸고, 아무리 그래도 그런 평민에게 밀려서 마법 수업을 쉬고 있다는 것은 자신의 치부에 불과하기도 하다.


“그것 참 다행이군. 에벨스타인에 남서부 교역로의 관세 문제로 한 번 방문할 일이 생겼거든. 백작저의 고위 가신들을 통해서 미리 서신을 보낼까 했는데, 펠미어가 이리 직접 찾아와주니 그럴 필요도 없겠군.”

“그, 그렇습니까?”


그러나 그런 펠미어의 처신이 무색하게, 벨미어드 백작은 조만간 에벨스타인에 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남서부의 고위 귀족이 에벨스타인까지 방문하는 일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이리 갑작스럽게 방문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니, 꼭 전달할 필요도 없나. 가끔은 내 보물인 엘렌테에게 깜짝 선물을 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 굳이 따로 알릴 필요는 없네. 다만, 선물을 뭘 들고가야할지 같이 좀 생각이나 해주게.”

“그래도 미리 말씀 드리는게... 엘렌테 아가씨께서 크게 기뻐할 것 같습니다.”

“엘렌테가 타지의 저택 생활을 잘 적응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기도 하거든. 아비의 걱정이란 게 다 그렇지 않은가.”


벨미어드 백작은 에벨스타인의 귀족 구획을 몇 번 방문해보았다.

그곳은 겉보기에는 화려하고도 귀족적인 지상낙원처럼 보이지만, 한 꺼풀 들어가 보면 서로 간에 얼마나 많은 신경전을 주고받아야 하는 곳인지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곳에 딸을 보내놓고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기는 힘들었다. 틈날 때마다 여러 선물들이나 지원품들, 딸의 생활을 도와줄 유능한 가신들을 보내주곤 했지만, 부모 마음이란 것이 겨우 그 정도 가지고 본분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 것이다.


백작저에 와서 화색을 띠며 에벨스타인에서 있었던 일을 늘어놓는 엘렌테는 아무 걱정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벨미어드 백작은 이미 그녀의 딸이 성숙하단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타지 생활을 하는 자신 때문에 벨미어드 백작이 걱정할까봐 어렵사리 화색을 띠고 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벨미어드 백작 입장에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성적으로는 어른이 된지 오래지만, 감성적으로는 아직 아이 같은 부분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듀플레인 대공이 근엄하고 묵직한 가장이라면, 벨미어드 백작은 호방하면서도 직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딸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면 일정 조금 조율하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딸에 관련된 일에서만큼은 바보가 되는 인물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일정을 좀 당기지. 내가 에벨스타인으로 향하는 날에 펠미어 그대도 동행하게.”

“...그,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펠미어는 난처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시간이 마치 쏜 살과 같구나. 데릭.』


스승인 카티아가 보낸 편지의 첫 문구는 그렇게 시작했다.


데릭은 시간이 쏜 살과 같다는 그 표현을 꽤 좋아했다.

활대를 떠난 화살이 올곧게 나아가는 것처럼, 시간은 뒤로 돌아오는 일조차 없이 쭉 곧게 나아간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하루, 한 계절, 한 해가 다 지나있는 것을 보면 그 표현이 꼭 자기 삶을 요약하고 있는 것만 같다.


엘렌테 영애를 가르치는 동안 느꼈던 감각도 썩 비슷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보름 남짓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데릭은 아이셀린 영애를 이길 수 있도록 만들어주겠다고 했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 본인의 의지였다. 그래서 그녀가 데릭의 수업을 잘 감당했느냐 하면, 그건 또 두고 볼 일 이었다.


- 다각, 다각.


흔들리는 마차의 벽에 뒷머리를 기대고 앉아 조용히 편지를 읽고 있자니, 시야 구석에 나자빠져 있는 엘렌테 영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에 타고 다니는 귀족 마차도 아니고, 용병들이나 타는 이 허름한 마차 안에는 흙먼지가 가득했다.


백작가 영애 정도 되는 인물이 평생토록 연이 없을 이런 낡고 허름한 마차 안.

늘 입던 프릴드레스가 아닌, 가볍고 편한 복장 위에 로브를 뒤집어 쓴 모습.

지나가던 사람들이 보면 이 소녀가 정말 귀족이 맞긴 한가 싶을 정도로 망가진 모습으로, 소녀는 드러누워서 기진맥진 헛숨을 흘리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가 귀족이란 사실은 철저히 비밀로 붙여놓고 있었다.


데릭은 그런 엘렌테 영애를 곁눈질로 보다가, 다시금 편지로 눈을 돌렸다.


『에벨스타인에서 떠난지도 거의 2년은 된 것 같은데, 내 연락이 너무 늦었구나. 이 엘베스터 영지에 온 뒤로 할 일이 잔뜩 쌓여 있어서 이제야 여유가 좀 나는 느낌이란다. 내가 직접 맡게 된 프레이아 백작 영애께서는 생각보다 학구열이 드높아서, 당분간 마법을 가르치는 데에만 정신을 집중하고 살았던 것 같아.』


『요즘은 좀 여유가 생기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래도 에벨스타인 주점 거리를 거닐며 네게 마법을 가르쳤던 시절이 좀 더 자유로웠던 것 같긴 하구나. 그 때는 지금처럼 유복하게 생활할 수는 없어도,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지 갈 수 있었으니 말이야.』


“표정이 무슨 연애편지라도 읽는 것 같네.”

“정신 차리셨습니까?”

“무, 무슨 소리야. 난 계속 정신 차리고 있었어.”


엘렌테는 자존심을 세우면서도 몸을 일으키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럴만 했다.

이번 보름 간 데릭은 엘렌테 영애를 데리고 다니면서 에벨스타인 외곽의 미궁들을 답파했다. 빈말로도 귀족 영애에게 시킬만한 경험은 아니었다.


베테랑 모험가들도 최심부까지 들어가기 위해선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는 곳이 바로 마물족들의 근원이 되는 미궁이다.

비록 데릭이 데리고 들어간 곳은 그래봐야 초입부에서 조금 더 깊은 심부까지였을 뿐이지만, 이미 그곳에서만의 경험으로도 엘렌테는 죽음 비스무리한 공포를 느껴야만 했다.


물론, 정말로 인명 피해라도 생겼다가는 뒷감당을 못할 것이기 때문에, 데릭은 자신보다도 훨씬 더 베테랑 용병인 제이든을 동행시켰고, 혹시 몰라서 펠린느까지도 함께 미궁을 드나들어야만 했다. 데릭 혼자서라도 미궁 초입부 정도는 별 사고 없이 답파할 수 있었겠지만, 혹시 모를 가능성이 있으니 안전을 기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보름의 기간 동안 엘렌테가 본 것은 지옥 그 자체였다.


‘...’


사실 엘렌테를 실전 전투의 대가로 만드는 방법은 간단했다. 실전 경험을 시키면 그만이다.

데릭이 엘렌테에게 주입시키고자 한 것은, 규중규수들은 평생토록 경험하지 못할 그 살벌한 현장의 날 것 같은 풍경이다.


단순히 에벨스타인 외곽에 출몰하는 마물족을 좀 죽이는 것과, 그 마물족들의 근원이 되는 미궁에 뛰어들어서 도살해대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유혈이 낭자하고, 도끼와 칼이 날아드는 그 살벌한 현장.

제 아무리 방호 마법을 몇 중 몇 겹으로 두르고 저택을 나섰어도, 그 구역질나는 현장의 처절함을 직접 목도하면 사람의 눈은 벌벌 떨리기 마련이다. 그건 엘렌테 본인의 안전이 보장되어있다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다.


결국 데릭이 키워주려고 한 것은 엘렌테의 ‘눈’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시야의 넓이다.


엘렌테와 데릭의 대련에서, 그녀가 느꼈던 아득한 차이는 바로 그 시야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온갖 종류의 처절한 전투 속에서 바로서온 데릭의 눈에,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으며 품위 따위나 챙기는 이런 대련 전장은 어린아이들이 노니는 흙놀이터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더 큰 넓이의 세계를 경험하고 나면, 그 아래 영역의 성취 따위는 순식간에 해내는 경우가 많았다.

1000 미터를 달릴 줄 아는 이는 당연히 100 미터 정도는 뛰는 법이다. 물론 100 미터를 달릴 때 숙지해야할 것은 미묘하게 다를 수 있지만, 그 기본기만큼은 애먼 옛날에 다 자동으로 갖춰져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데릭과 엘렌테의 차이였다.


다만, 겉보기엔 쉬워 보이는 기본기를 자연스럽게 갖추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갖추는 과정은 단아한 귀족 영애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엘렌테에게 몇 번이고 물어보고, 또 확인했던 것이다. 각오가 되어 있냐고.


엘렌테는 첫 날에 유혈이 낭자한 미궁 속 풍경을 보고 구역질을 했다. 벌벌 떨리는 손끝으로 벽을 짚었지만, 그곳에 들러붙은 진물들을 보고선 아연실색을 하고 말았다.


둘째 날에도 마찬가지였고, 셋째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만 3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평생을 고풍스러운 미술품이 가득한 저택에서 살아온 귀족 영애에게, 그 피칠갑이 된 현장 속에서 거니는 것은 지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상 충격 요법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렌테는 포기하지 않았다. 사실 이제 와서는 포기할 수 없다는 것에 가까웠다.


4일차쯤 되자 이 악물고 마법을 부려서 마물족을 공격할 수 있게 되었고, 5일차에는 처음으로 마물족을 죽였다.

그 벌벌 떨리는 손으로 검푸른 피를 바라보고 있던 엘렌테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녀는 귀족 영애이지만, 가장 밑바닥의 용병이 어떤 식으로 마물족을 죽이고 있는지 비로소 이해하는 인물이 되었다.


5일, 6일이 되었고... 그녀는 점차 적응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7일차에는 미궁에 나타난 거대한 크기의 미노타우르스를 보더니 다시금 핑 도는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펠린느는 귀족인 그녀가 이렇게까지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서는, 일이 끝난 뒤 주점에서 한참동안 배꼽을 잡고 웃었다. 엘렌테의 앞에선 원숙한 용병인 척 하지만, 내심 귀족들이 망가지는 꼴을 보니 참으로 기쁜 듯하였다.


엘렌테는 그 와중에도 착실히 포기하지 않고, 매일 아침이 되면 데릭을 기다리고 있다가 로브를 뒤집어쓰고 저택을 나섰다. 사용인들의 동행조차도 허가하지 않고, 그렇게 주점 거리에 섞여서 진짜 밑바닥의 전장이 무엇인지를 익혀갔다.


그렇게 지금에 이르자, 엘렌테는 그럭저럭 미궁 초입까지는 극복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물론, 하루 종일 싸우다보면 지쳐서 기진맥진해있을 수밖에 없었다.


“엘렌테 아가씨. 여기 물을 가져왔어요.”

“고, 고맙구나... 그대는 참 친절하군...”


마차 구석에 있던 펠린느가 세상 온화한 표정으로 웃으며 냉수를 건네자, 엘렌테는 얼른 그 물을 받아서 들이켰다.

세상 힘들어 보이는 그런 엘렌테의 모습을 보는 게 즐거운 것인지, 펠린느는 우훗 하며 웃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친절한 소녀처럼 보일지 모르겠으나, 데릭은 그 내면을 잘 알고 있기에 혀를 내두르고 있을 뿐이었다.


데릭은 다시금 편지에 눈길을 보냈다.


『네 마법 성취는 어느 정도가 되어 있을까? 그래도 스승인 것인지, 이따금씩 그런 생각이 들곤 하더구나. 누가 뭐라해도 너는 내가 평생을 봐왔던 자들 중에 가장 재능 있는 마법사였으니 말이야. 마법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는, 너 같은 제자를 욕심내는 인물이 많겠지.』


『그럴 리 없겠지만 좀 더 높은 성급의 마법을 익혔을까? 그건 너무 과한 추측일지도 모르겠지만, 너라면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프레이아 백작 영애께서는 최근 1성급 마법을 완전히 원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셨어.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니, 네 어릴 적 모습이 생각나서 가슴이 푸근해지더구나.』


『또 볼 일이 있다면 그 땐 꼭 네 마법을 보여주렴. 후일 제국 서부에 들를 일이 있다면 연락을 넣도록 하마. 네 오랜 스승, 카티아 플레임하트가.』


스승님. 저도 스승님처럼 누군가를 가르치며 삶을 보내고 있어요.

그런 독백을 품은 데릭이 조용히 편지를 집어넣고 사색에 잠겼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이끈다는 것은 나름대로 보람이 있는 일인 것은 물론이오, 참으로 놀랍게도 데릭 자신의 마법적 성취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부분을 다시금 되새김질 하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고, 때때로 그 제자의 마법을 좀 더 원숙하게 다루게 하려다 보면 자신의 마법도 원숙해지곤 했다.

1성급 마법인 얼음창과 불꽃 화살은, 엘렌테를 가르치면서 더 세련된 활용법을 스스로도 고안해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스스로를 가르치기도 하는 행위인가.

그런 생각지도 못했던 깨달음에, 데릭은 마법 스승이라는 작자들이 왜 그리도 좋은 제자에 집착하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엘렌테 아가씨.”


물론, 그렇게 포근한 독백이나 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긴 했다.


“이제 대련이 이틀 남았군요.”

“...”

“기분이 어떻습니까?”


마차 위에 드러누워있던 엘렌테는 흔들거리는 천장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다가, 어렵사리 대답했다.


“확실히, 데릭 네 말대로 요 며칠간 말도 안 되는 경험을 많이 쌓은 기분이야. 끝없이 단련하면서 내 마법 수준도 예전 이상으로 더 원숙해진 기분이 들어.”

“...”

“그래도... 이길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


엘렌테 영애는 불안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데릭은 엘렌테의 마법 숙달을 빠른 속도로 늘려주고 있었지만, 과연 아이셀린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해졌냐 하면 확신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귀족 구획의 영애들 중에서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래도 지금 당장 엘렌테가 할 수 있는 일은 전적으로 데릭을 믿는 것 밖에 없었다. 이미 대련은 가까이 다가왔고, 적어도 엘렌테의 내면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스승은 데릭 정도 밖에 없었다.


엘렌테는 드러누운 채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아이셀린 영애와의 대련이었다.


마차 벽에 기댄 채 눈을 붙이기 시작한 데릭에게는, 아무런 근심도 없어 보였다.



*




“아이셀린 아가씨. 수채화 수업을 받으실 시간입니다.”


메이드가 정중하게 아이셀린의 개인 연습실 문을 두드렸다.

허나 안 쪽에서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인기척은 느껴지는데 굳이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면 집중하고 있는 듯 했다.


메이드는 잠시 고민을 하고 있다가, 그래도 다음 일정에 아이셀린을 늦게 만들 순 없으므로 실례를 범하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열고 들어가겠습니다.”


그렇게 고풍스러운 목제 문을 열자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내부가 드러났다.



내부에선 아이셀린 영애가 멍하니 하늘을 보며 마법을 영창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묘한 귀기가 서려있었다.

아이셀린을 어렸을 적부터 보좌해온 메이드가 뭐라 목소리를 높이려다 말문이 막혔다.

방 안을 가득 매운 푸르스름한 마력, 그와 대비될 정도로 칠흑 같은 묵빛 머리칼이 부유하듯 흔들리고 있고. 영롱한 눈동자에 가득 맺힌 그 마력의 흔적이 마치 하해를 형상화한 것만 같다.


방 안에는 여러 규율학파의 마법서가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평소에 주변 정리를 깔끔하게 하는 아이셀린 영애의 방 치고는 다소 난잡했다. 그 정도로 소녀는 방 안에 널찍이 펼친 마력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눈이 천장이 아닌, 저 먼 건너편의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 했다.

그것은 하늘이다. 방안에 펼쳐진 반짝거리는 마력의 향연은 별하늘을 형상화 하고 있는 듯 하다.


소녀는 규율학파 마법서를 질릴 때까지 탐독한 모범생 중의 모범생이었다.


규율학파의 대부이자 마법의 성급 체계를 가장 먼저 규정한 역사 속의 대마법사, 아델베르트의 수많은 어록과 이론적 통찰이 그녀의 머릿속에 살아 숨쉬고 있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던 그 수많은 통찰들을 자신의 지식처럼 받아들여, 이윽고 손끝으로 화한 모습이다.


최초의 규율학파 마법사인 아델베르트는 마법의 성급을 저 하늘의 북두칠성을 보고 고안했다고 했다. 어렸을 적 소녀가 읽었던 아델베르트 일대기의 서장이었다.


별들로서 규율된 그 마법의 체계는 무질서함을 경계하고, 정돈된 이론들의 정합성을 강조해왔다. 그가 체계를 잡은 마법들은 비로소 규율학파 뿐만이 아니라 모든 마법의 기본이 되었다.

잘 정립된 그 규율 속에서 소녀의 눈에 떠오른 그 마력의 흐름이 뭉쳐 있다가 팽창했다.


좋은 혈통을 타고 태어나, 출중한 재능을 품고, 차곡차곡 노력까지 쌓아온 소녀의 마력이 이윽고 저 별하늘의 은하수로 화한다.


- 화아아악!


이윽고 소녀의 손에 모여든 마력이 다시금 방안으로 퍼져나가더니, 거대한 관현악단의 연주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매우기 시작했다. 아이셀린 영애가 가장 좋아하는 교향곡이었다.


자그마한 수련실 안에서 거대한 합주가 들려오는 모습은 사람의 눈을 의심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 웅장한 소리는 조금 이어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말라비틀어지는 듯 한 느낌의 소리와 함께 다시 잦아들고 말았다.

소녀는 아직은 이 정도 규모의 마력을 활용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듯 했다. 아직 온전하게 사용할 수는 없는 마법이었다.


“하아... 하아... 또 실패했네.”


단정한 목소리로 그리 곱씹는 아이셀린 영애의 독백만 조용해진 방 안에 자리할 뿐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메이드는 두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소녀가 방금 구현한 것은 2성급 착란계 마법 ‘환청’이었다. 열네살 무렵의 데릭이 최초로 독학해냈던 2성급 마법이었다.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잠깐 정신이 팔려있었어요. 늦으면 예의가 아니니 빨리 나가야겠어요.”


그제야 메이드가 들어온 것을 발견한 아이셀린 영애가 화들짝 놀랐다.

얼른 드레스 자락을 정리하며 방 밖으로 나가는 아이셀린 영애의 모습을, 메이드는 가만히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4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세상에 나쁜 영애는 없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유료 전환 / 골드 이벤트 공지 24.05.14 1,796 0 -
공지 월화수목금 오후 10시에 업로드 됩니다 +14 24.04.04 25,667 0 -
40 마법 (2) NEW +52 6시간 전 5,783 413 24쪽
39 마법 (1) +65 24.05.14 13,120 700 19쪽
38 드니스 (4) +68 24.05.13 16,499 804 26쪽
37 드니스 (3) +54 24.05.09 20,270 887 17쪽
36 드니스 (2) +52 24.05.08 20,138 868 20쪽
35 드니스 (1) +68 24.05.07 21,432 930 22쪽
34 3성급 (4) +49 24.05.06 23,145 890 24쪽
33 3성급 (3) +93 24.05.03 25,094 1,089 18쪽
32 3성급 (2) +42 24.05.02 23,889 1,044 22쪽
31 3성급 (1) +58 24.05.01 24,185 983 16쪽
30 엘렌테 (5) +45 24.04.30 23,468 991 16쪽
29 엘렌테 (4) +58 24.04.29 23,885 1,147 25쪽
28 엘렌테 (3) +65 24.04.22 27,561 1,118 19쪽
» 엘렌테 (2) +44 24.04.19 28,245 1,066 23쪽
26 엘렌테 (1) +45 24.04.18 27,684 1,083 23쪽
25 벨미어드 (5) +68 24.04.17 28,886 1,148 20쪽
24 벨미어드 (4) +69 24.04.16 29,365 1,183 20쪽
23 벨미어드 (3) +69 24.04.15 29,548 1,214 21쪽
22 벨미어드 (2) +67 24.04.12 30,925 1,146 17쪽
21 벨미어드 (1) +63 24.04.11 31,725 1,180 21쪽
20 여정 (4) +72 24.04.10 30,595 1,371 21쪽
19 여정 (3) +50 24.04.09 29,897 1,276 16쪽
18 여정 (2) +47 24.04.08 30,417 1,215 17쪽
17 여정 (1) +37 24.04.06 31,464 1,205 18쪽
16 사제 (6) +79 24.04.05 30,192 1,221 16쪽
15 사제 (5) +45 24.04.04 29,875 1,189 20쪽
14 사제 (4) +30 24.04.03 29,645 1,123 15쪽
13 사제 (3) +66 24.03.31 30,575 1,190 2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