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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타 님의 서재입니다.

세상에 나쁜 영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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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타
작품등록일 :
2024.03.21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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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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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엘렌테 (3)

DUMMY

아이셀린이 귀족 구획의 마법 대련장에 접어들었을 때에는 이미 사람이 꽤 많이 몰려 있었다.


기본적으로 귀족가의 마법 대련은 서로 간의 마법 성취를 확인하고, 실력을 갈고 닦으며, 친목 활동의 성격도 띠는 고풍스러운 취미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력가 자제들이 마법 대련을 한다는 소문을 들으면 얼른 참관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곤 하였는데, 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었다.


순수하게 마법 자체에 흥미를 품고 있는 자들이 첫째요, 귀족이랑 연줄 한 번 걸쳐보겠다는 꿍꿍이를 품은 자들이 둘째다.


전자의 경우 남서부 지방의 마법 학회 회원들이나 황실계 귀빈들, 후자의 경우엔 부유한 상인들이나 유력가 자제들인 경우가 많았다.


사람이 모여들면 안전 유지를 위해 기사, 병사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현장을 지휘하는 자들도 섞여들게 되니 어쩔 수 없이 혼잡해질 수밖에 없다.


유력가의 자제란 언제나 사람을 끌고 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아이셀린은 이런 풍경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듀플레인 가문과 벨미어드 가문 간의 마법 대련이니까, 아무래도 사람이 더 모여들 수밖에 없겠지...’


그래봐야 연습 대련이다.

이런 대련 결과야 시간이 지나면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사가들은 이런 사소한 마법 대련의 결과를 가지고 수군거리기도 하였다.


아이셀린은 그런 근시안적인 사람들의 태도가 싫었지만, 그렇다고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만인에게 모두 친절한 인물이었다.



“안녕하세요, 아이셀린 영애. 추위가 많이 풀렸네요.”

“네, 타니엠 영애께서도 이럴 때일수록 아무쪼록 건강에 주의하세요.”

“아이셀린 영애께서 저번 다도회 때 말씀해주셨던 서책을 살펴보았답니다. 말씀하신대로 표현과 묘사에 애절한 감정이 잘 살아있더라구요.”

“어머, 정말 읽어주셨군요. 라카일 영애께서 마음에 드셨다 하니 제가 다 기쁜걸요.”


아이셀린은 들러붙는 추종자를 화사한 웃음으로 맞이해주었지만, 발걸음 속도는 느려지지 않았다. 지금 바로 대련 준비를 하러가서 몸을 풀고, 엘렌테 영애와의 마법 대련을 얼른 마무리 하고 싶었다.


그녀를 따르는 하급 귀족 추종자들은 바빠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흠칫 몸을 떨었지만, 그럼에도 지금 이럴 때가 아니면 그녀와 말을 섞을 기회가 없었다.

어떻게든 한 마디라도 나누어보고 싶은 사람들 사이에서, 얼른 고풍스러운 복도를 가로지르는 일은 꽤나 고생스럽다.


그렇게 대련장 중심부를 향해 나아가고 있자니, 복도 구석에서 자그마한 서책을 훑고 있던 한 소년이 눈에 밟혔다.


“...!"


아이셀린 영애가 휙 고개를 돌리자, 그녀를 뒤따르던 추종자나 사용인들이 발걸음을 멈췄다.


“잠시, 실례할게요.”


아이셀린 영애는 재잘재잘 거리며 자기를 따르던 소녀들에게 사과를 한 뒤, 그 사이를 얼른 가로질러서 다소곳하게 걸어갔다.


그렇게 대련장 복도의 구석에서 인파들 사이에 섞여 마법 역사에 관한 책을 읽고 있던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새하얀 머리칼이나 붉은 눈동자, 선량해 보이는 한 편으로 자세히 보면 굳센 기질이 드러나는 이목구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데릭 씨!”


아이셀린이 화색이 되어 말을 걸자, 소년의 동공이 약간 떨렸다.

주변에 인파가 워낙에 가득해서 차마 의식하지 못했는지, 소년이 약간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늘 그렇듯 단아한 드레스를 예쁘장하게 차려입은 아이셀린 영애가 발랄한 어조로 말을 걸고 있었다.

그 뒤로는 온갖 하급 귀족들과 추종자들, 사용인들이 쳐다보고 있었다. 소년은 순간적으로 상황을 판단 하기 위해 머리를 굴려야만 했다.


“오랜만입니다. 아이셀린 아가씨.”


일단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이 정답이다.

늦봄에 헤어져서 지금은 늦겨울이니... 아이셀린 영애를 만나는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었던 셈이다.


“대련을 구경하러 오셨군요. 데릭 씨.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는데 변한 게 하나도 없으시네요.”

“예. 아이셀린 아가씨는 늘 그렇듯 아름다우십니다. 더 고풍스러워지셨군요.”

“어머, 과찬이에요. 데릭 씨는 숙녀를 칭찬하는 법이 능숙해지셨네요. 귀족 구획에서 일을 좀 하시다보니 그런 걸까요? 우후후.”


아이셀린이 이리 반가운 듯 한 기색을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데릭은 아이셀린이 몇 년은 품고 살았던 가장 고된 고민을 해결해준 인물이자, 마법적으로도 굉장히 출중한 실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인품 또한 잘 갖춰진 인물이나, 용병 특유의 투박함은 있다. 아이셀린 영애는 그런 데릭의 투박함을 무례하다기보다는 자유분방하다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다만, 그녀의 주변에 있던 추종자들과 사용인들의 시선은 꽤 의미심장해져있었다.

그렇게 들러붙어서 아이셀린의 시선을 한 번이라고 받아보자고 열심히 굴던 인물들이니 만큼, 갑자기 아이셀린이 반갑다는 듯이 아는 척을 하는 자는 선망이자 경계의 대상이었다.


“...”


데릭은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인물이다. 딱 붙는 튜닉과 바지, 가죽 부츠, 망토 대신 뒤집어쓴 로브, 오른쪽 허리춤에 단검, 반대쪽에 장검. 아직 앳된 소년의 티가 조금은 남아있지만, 이미 청년을 향해 달려 나가고 있는 나잇대였다.


대관절 저 별 거 없는 평민에게 아이셀린이 이토록 화색이 되어 반기는 이유는, 그 대화를 들으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좋은 차를 대접할테니 한 번쯤 저택에 들러달라고 말씀드린 게 무색하게, 벌써 겨울이네요.”

“면목 없습니다. 그 배려는 정말 감사한 일입니다만, 먹고 살려니 정신이 없었습니다.”

“듣기로는 엘렌테 영애의 마법을 좀 봐주시고 있다던데요.”

“소식이 빠르시군요. 잠시 연이 닿아서 몇 가지 알려드렸습니다.”


주변에 있던 자들은 비로소 엘렌테 영애가 말하는 그 떠돌이 마법 스승이라는 작자가 저 눈앞의 사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듀플레인 가문의 망나니를 갱생시키고, 엘렌테 영애가 전적으로 마법 대련 수업을 믿고 맡긴 인물이 바로 저 용병인 것이다.


다만, 아이셀린 영애는 꽤나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너무 가혹하게 한 것은 아니지요...?”

“...?”

“엘렌테 영애께서 최근 너무 피로한 모습을 많이 보이셔서... 조금 걱정했어요.”


아이셀린 영애는 동생 디엘라의 증언을 통해, 데릭의 마법 수업은 일반적인 귀족가 영애가 버틸 수 있는 그런 부류의 수업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디 기사 수련을 떠나는 것도 아니고, 고풍스럽고 아리따운 영애한테 어지간한 군인들이나 겨우 감당할 수련을 밀어붙이는 인물이 어디에 있는가.

허나, 데릭은 의뢰인의 목표를 이루어주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였다.


데릭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아이셀린을 보고 있다가, 이윽고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이셀린 아가씨. 아니, 오히려 상대를 너무 걱정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네...?”

“너무 방심하지는 마십시오.”


데릭은 그리 말하고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아이셀린 영애도 바쁜 와중이고, 주변에 모여든 시선도 지나치게 부담스럽다.

아이셀린 영애는 지금 이 상황 자체가 데릭에게 큰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서는, 난처한 미소와 함께 데릭에게 말했다.


“다, 다음에 저택에 오셔서 한 번 환담을 나누어요, 데릭 씨. 저는 다음 일정이 있어서 이만.”

“예, 들어가십시오.”


데릭은 그렇게 로브의 모자를 뒤집어쓰고선 아이셀린 영애와는 반대편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아직 성인식이 1년이나 남은 소년이었으나, 그는 종종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이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참으로 신묘한 소년이었다.




*





아이셀린 영애도 엘렌테 영애가 자신에게 품은 열등감에 대해선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었다. 사실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다. 그녀는 그릇이 넓기 때문이다.


꼭대기에 올라선 자에게 있어서 시기와 질투 같은 건 당연스럽게 달고 사는 것이다. 애당초 그녀에게 질시를 품은 인물이 엘렌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엘렌테가 유독 더 심하고 진득하긴 했지만, 그녀만 못한 인물들도 잔뜩 나타나 아이셀린에게 때를 묻히고자 했다.

그 수많은 견제 속에서도 고고히 서있을줄 알아야만이 비로소 듀플레인 가문의 영애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아이셀린 영애가 자신에게 질투를 품은 자들에게 품은 감정은 동정심이다.

부정한 감정에 휩싸여서 자기 자신을 깎아먹는 이들이, 하루라도 빨리 그런 영양가 없는 굴레에서 빠져 나오길 바라고 있었다. 아이셀린에게도, 그녀들에게도 썩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엘렌테 또한 마찬가지다.

부질없는 질투는 자기를 깎아먹을 뿐이다. 빨리 그런 굴레를 벗어던지고, 함께 환담을 나누고 교양을 익히며 선의의 경쟁자가 되자고 권하고 싶었다. 다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이셀린 영애.”

“평안히 잘 지내셨나요, 엘렌테 영애. 그간 살롱 회동에 잘 안 나오셨죠? 대련 준비에 힘쓰시고 있다고 들었는데... 저도 긴장해야겠는걸요.”

“...”


대련장 위에 올라온 엘렌테 영애의 눈에는 독기가 서려있었다.

큼지막한 대련 무대 위, 참관인석에는 온갖 유력인사나 귀족가 영애들이 모여 앉아서 마법에 대한 담론을 나누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선 엘렌테 영애와 아이셀린 영애가 오늘 무대에서 합을 겨룰 주인공들이었다.



두 아리따운 장미가 무대에서 옷매무새를 정리하자, 연단 위를 향해 정갈한 박수가 쏟아져 내려왔다.

고급스러운 대련장의 주변엔 방호 마법이 펼쳐져 있었다.

대련의 규칙은 늘 그렇듯 10분 안에 결판, 영애의 장신구에 새겨진 방호 마법이 먼저 발동되면 패배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아이셀린 영애가 마력을 모으며 엘렌테에게 인사를 보냈다.

엘렌테는 똑같은 말을 되돌려주며 조용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 눈에 서린 한기는 어디에선가 본 듯한 느낌이었다.


“...”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위화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엘렌테 영애는 늘 그렇듯 그 아름다운 붉은색 머릿결을 늘어뜨리고는 차분하게 서있을 뿐이다.

허나, 아이셀린을 가만히 바라보는 그 눈빛에 평소와는 다른 위화감이 서려있다.


아이셀린은 차분히 생각에 잠긴 채 그런 엘렌테 영애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래지 않아, 그 위화감의 정체를 파악해낼 수 있었다.


아이셀린과 담화를 나눌 때마다, 엘렌테의 눈에는 묘한 감정적 동요가 서려있다.

허나, 지금 이 자리에서 다소곳이 아이셀린을 바라보며 마법에만 집중하고 있는 엘렌테에게 그런 기색이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불처럼 뜨겁던 엘렌테 영애의 눈이 어느 샌가 얼음장처럼 차가워져 있다. 대련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혹시, 드디어 엘렌테가 오랜 시간 자신을 괴롭히던 그 질시어린 마음에서 벗어난 것일까?

스승으로서 훌륭한 인물인 데릭이, 그 어두 칙칙한 시기의 굴레에서 이 엘렌테 영애를 빼내준 것일까?


그런 희망이 샘솟는 순간이었다. 허나,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니, 온 시야가 붉어졌다.

아이셀린 영애는 그제서야 엘렌테 영애의 이글거리는 불꽃 화살이 모든 전장을 뒤덮고 있음을 깨달았다.


화염의 한 가운데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한 엘렌테 영애의 모습이 불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




- ‘순수한 마법 기량 승부로 끌고 가면 절대 못 이깁니다. 전투의 흐름을 다른 쪽으로 끌고 가십시오.’

- ‘...다른 쪽으로 끌고 가라니...? 마법 대련에서 마법 기량이 아니면 뭘로 승패를 가른단 말이야?’


일반적인 귀족 영애들은 반들반들하게 바닥이 잘 닦인 연습장에서 이름난 스승과 함께 고풍스럽게 마법을 수련해나간다.

허나, 엘렌테 영애는 피비린내가 올라오고 썩은 점액질이 온 곳에 가득한 미궁의 한가운데에서, 바닥에 주저앉은 채 데릭에게 고개를 들어 물었다.


이미 온 몸은 기진맥진해져 있었고, 하루 종일 마물들의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광경을 본 끝에 구역질을 한 상태였다. 얼굴도 완전히 초췌해진 것이, 과연 데릭이 말한 지옥이 이런 것이구나 하고 납득해버린 모습이다.


그런 초췌한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데릭은 가르침을 이어나갔다. 그는 받은 의뢰는 반드시 수행해내는 사람이었다.



- ‘정신력입니다.’


그 말을 들은 엘렌테 영애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말았다.

정신력 있으면 좋은 거 모르는 이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정신력만으로 마법 대련에서 이길 수 있다면, 세상에 마법의 성급 구분은 왜 있는 것이고 마법사들의 선민의식은 왜 존재하겠는가.


허나, 데릭은 무의미한 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다. 요 몇 주간 데릭의 수업에 어울리면서 엘렌테 영애는 확신하고 있었다. 분명 그 말에 내포된 뜻이 있을 것이었다.


- ‘저와 함께 수업하시면서 극한의 극한까지 마력을 긁어모으는 경험을 몇 번이고 반복하셨잖습니까?’

- ‘그랬지... 네 악취미인줄 알았어.’

- ‘그런 취미 없습니다. 서로 간에 마력이 완전히 바닥난 상태에선, 마법 기량 자체보다는 그 사람의 정신력으로 승패가 갈릴 때가 더 많습니다.’


데릭의 목소리는 한층 더 진지해져 있었다.


- ‘최대한 화려하고 성대하게 마법을 흩뿌리면서 소모전으로 끌고 가십시오. 마지막의 마지막에는... 정말 더 긁어내도 나올 것 같지 않은 마력을 어떻게든 이끌어낸 자가 승리하도록 말입니다.’

- ‘...아이셀린의 마력량이 나보다 많으면 어떻게 해?’

- ‘그럼 지는 겁니다.’

- ‘...’

- ‘물론 사람의 마력량이라는 게 태생적으로 타고나는 부분이 크지만, 벨미어드 가문의 피를 타고난 엘렌테 아가씨께서 그리 크게 꿀리진 않을 겁니다. 그러니... 자신을 믿으십시오.’


데릭은 마물족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사람 몸집보다 커다란 거미를 혼자서 칼로 도륙내고, 마법으로 불태워버린 뒤였다.

마물족을 잡아 죽이는 그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그를 따라 미궁을 나다니는 매 순간 순간이, 진짜 마물이 있다면 바로 이 소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의 연속이었다.


이곳은 안전이 보장되어 있는 마법 대련장이 아니라, 한 순간의 방심으로 목숨이 오가는 마물족 소굴이다.

이런 곳에서 평생을 살아왔다면, 연단 위의 대련 따위는 소꿉장난으로밖에 느껴지질 않을 것이다.


목숨을 건 전투에서라야 사람은 자신의 극한을 끌어내는 법이었다.

한 번의 방심으로 모든 것을 다 잃을 수 있는 살얼음판 위에서라야 인간은 무의식 속에 숨어있던 모든 힘을 끌어낸다. 그 감각은 억만금을 준다 하더라도 쉽게 배울 수 없다.


그렇기에, 데릭은 엘렌테 영애를 미궁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루 종일 마법을 쓰게 만들었다.

달려드는 고블린들 사이에서 도끼질을 피하고, 트롤들의 콧대를 불태워버리게 만들었다.

삶과 죽음. 그 사이의 현장.

덕지덕지 두른 방호마법조차 언제 깨부숴질지 모른다는 압박감.

가만히만 서있어도 올라오는 식은 땀. 벌벌 떨리는 두 다리. 몽롱해져가는 시야.


그런 환경에서라야, 밑바닥의 밑바닥에 남아있던 모든 힘을 끌어내는 감각을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다.

언제나 고풍스러운 저택에 앉아 품위 놀음이나 하고 있어서는 절대 깨달을 수 없는 영역이란 것이 있는 법이다.

온실 속의 화초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모른다. 밑바닥의 밑바닥까지 모두 긁어내서 딛고 일어서는 그 감각을 절대 배울 수 없다.

스승으로서의 데릭은, 그런 것들을 일깨우는 법을 아는 인물이었다.



- 화아아아아아아악!


- 콰과과과과과광!



연단 근처에서 마법 대련을 보던 참관인들이 모두 감탄을 내질렀다.

아무리 마법 활용이 출중하고 마력량이 방대하다 하더라도, 1성급 마법의 한계라는 것이 결국 정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단을 다 뒤덮을 정도로 창대하게 발하는 엘렌테의 불꽃 마법들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 휘이이이익!


재빠르게 마력을 휘감아 자신의 몸을 보호한 아이셀린이 얼른 눈을 굴려서 엘렌테의 위치를 쫓았다.


사방이 불꽃으로 가득한 연단 위, 뜨거운 열기 속에서 마치 마녀처럼 온몸에 불을 두른 엘렌테가 똑바로 아이셀린을 노려보고 있다.


그 눈에 서린 건 역시나 질투심이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아이셀린을 향해 발하는, 장대한 규모의 질시와 그 속에 섞여든 아주 약간의 자기혐오다.


그 눈을 읽어낸 아이셀린은 깨달았다.

한 편으로는 너무나도 감정적이면서, 또 대련에 있어서는 이성을 잃지 않는 그 눈은 자신의 동생인 디엘라가 레이그를 상대할 때 보였던 바로 그것이다.


데릭의 제자들은 가슴에는 뜨거운 불을 품고, 그 눈에는 차가운 한기를 품는다.

그 스승이 제자들에게 가르쳐놓는 것은, 승리를 향한 뜨거운 열망과 더불어 승부를 바라보는 차가운 이성이었다.

열기와 한기가 뜨겁게 맞부딪히는 눈빛이다. 맞상대로 선 자로 하여금 마른 침을 삼키게 만드는 귀기가 흐른다.


그제야 아이셀린은 그 날의 레이그가 디엘라를 상대로 온 힘을 다해 분전해야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데릭의 제자들은, 일반적인 귀족 영애들과는 승부에 나서는 그 의지부터가 다르다.

그 집착에 가까운 집념을 처음 마주하면 누가 되었든 한 번은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맞은편에 선 자는 아이셀린 엘레노어 듀플레인이었다.


‘그래도... 내가 이겨.’


그녀는 자신의 성취를 뽐내고 다니는 인물은 아니지만, 자기 실력에 대한 확신만큼은 충분한 인물이었다.


제 아무리 데릭의 제자라고 한들, 아이셀린은 2성급을 바로 목전에 둔 인물이다. 엘렌테와 같은 1성급 마법사라 할지라도 그 격의 차이는 상당하다.

작정하고 기량 승부로 나아간다면 절대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아이셀린의 몸에서 한기를 품은 빙결 마법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엘렌테가 눈을 부릅떴다. 그 수를 셀 수도 없을만큼 엄청난 양의 불꽃 화살이 반대편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


엘렌테는 지난 몇 주간 데릭이 살던 세상을 훑어보고 왔다.

그녀가 엿보고 온 세상의 흔적이 그 눈동자에 비쳐 보인다. 그 대부분은 피다. 그 외의 것들도 참혹하다.


눌러붙은 진액, 코를 찌르는 악취, 잘려나간 괴물의 팔, 독거미의 알, 널브러진 시체, 돌바닥의 한기, 살육의 흔적, 펼쳐져 있는 피바다, 괴물들의 비명.


그런 것들의 틈바구니에서 다시금 벽을 짚고 올라와 원래 살던 곳에 바로 서니, 모든 곳이 안온하고 따사로운 초원처럼 보인다.

수많은 마법이 난사되는 이 대련장 위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소녀는 이 장대한 마력의 틈바구니에서도 냉철히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력과 마력이 맞붙으며 거대한 휘광이 대련장을 감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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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사제 (5) +45 24.04.04 30,118 1,196 20쪽
14 사제 (4) +30 24.04.03 29,882 1,130 15쪽
13 사제 (3) +66 24.03.31 30,826 1,198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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