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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타 님의 서재입니다.

세상에 나쁜 영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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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타
작품등록일 :
2024.03.21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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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7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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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디엘라 (2)

DUMMY

- 저벅 저벅



당직을 서는 사용인들을 제외하고선 모두가 잠든 야심한 시간.

데릭은 별채로 향하는 정원을 가로지르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결국 1성급 마법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기초적인 마력부터 발현시켜야 한다.

마력을 이끌어내는 법도 모르는 상태로 성급 마법을 다루겠다는 건 총알 없이 총을 발사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모든 마법의 기초는 마력을 인식하고 발현하는 것.

그것을 지금까지 디엘라를 가르쳐왔던 마법사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하나같이 다 실패한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마력의 기초적인 자질을 단련시키는 건 정립된 이론도 없고, 학파마다 의견이 분분하여 다들 어려워했다. 마법사마다 마력을 다루는 방식과 본능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머리를 싸맬 수밖에 없어지니, 마법 교사가 고급 인력이란 것도 이해가 갔다.

대륙의 귀족 집안들이 괜찮은 마법 교사 하나 자기 가문으로 데려오기 위해서 경쟁을 해대는 이유도 납득이 간다. 마법을 가르친다는 건 그토록 심오한 일인 것이다.


‘규율학파 방식으로 안 됐으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수밖에 없다.’


데릭은 걸음걸이를 계속했다.

이미 마력에 관한 이론적인 내용은 애먼 옛날에 다 배웠을 것이다. 발현을 위한 계기가 없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규율학파는 마력의 활용 과정을 네 단계로 나눈다. 인식, 추출, 조작, 발현이다. 이 네 단계를 순탄히 거쳐 마지막 발현까지 완료하면, 비로소 몸의 마력을 이리저리 다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데릭은 그런 식으로 마법을 배우지 않았다.

데릭에게 마법을 가르쳐 준 것은 참고서와 잉크, 그리고 깃펜이 아니다. 목전에 들어온 칼날이었으며, 날아드는 화살이었고, 고블린이 휘두르는 도끼자루였다.


어린 데릭이 최초로 마력을 발현 했을 때가 언제였는가.

마른풀이라도 뜯어먹기 위해 뒷산을 오르다 야생멧돼지를 마주쳤을 때다.

바로 물밑까지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가, 살기 위해 발버둥 쳐야한다는 당장의 현실이 어린 데릭의 마력을 발현시켰다. 그 때가 바로 데릭이 처음으로 마법을 썼던 순간이다.


그게 야생학파 마법사들이 사는 방식이었다.

그들은 언제나 극한의 생존본능 속에서 마력을 발현해왔던 것이다.


"..."


데릭은 여백이 가득하던 디엘라의 그림들을 떠올리고선,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 걸어나갔다.



*





- 쾅!


데릭이 저택 별채의 문을 박차고 들어오자, 홀 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화들짝 놀랐다.


늦은 밤. 달빛을 받으며 별채 정문을 박차고 들어온 로브의 소년. 그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기가 더 힘들다.

그 얼굴을 드러내어 데릭이라는 사실을 알리자 시녀들은 더욱 난처해졌다.


“어, 어쩐 일로...”

“수고하십니다.”


데릭은 시녀들을 지나쳐서 홀을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강직함마저 느껴지는 그 걸음걸이에 시녀들은 뭐라 저지하지도 못했다. 그는 대공에게 직접 권한을 받은 디엘라의 담당 교사였다.


그대로 디엘라의 방으로 향하기 전에 부엌에 들른다.

시녀들이 다음 날 요리를 위해 미리 떠다놓은 깨끗한 냉수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오크나무로 된 물통을 통째로 들고 중앙 홀 계단을 올라간다. 시녀들의 불안한 눈빛을 지나치고, 쭉 걸어 나가 디엘라의 방으로 향하는 문을 발로차서 열어젖혔다.


- 쾅!


레이스가 잔뜩 달린 침대 한 가운데에서, 공주처럼 파묻혀서 잠에 들어있는 디엘라가 눈에 들어왔다.

예쁜 파자마와 더불어 한쪽으로 내려묶은 머리에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잠든 모습만 보고 있으면 이런 요조숙녀가 따로 없다.


- 촤아악!


그대로 데릭은 인정사정 보지 않고 물을 쏟아부어버렸다.

불안해서 따라 올라온 시녀들이 히이익 거리면서 놀랐고, 잠에서 깬 채로 비몽사몽 올라온 영지 기사들도 그대로 표정이 굳어버렸다.


“꺄아악!”


마른하늘에 날벼락, 아니 물벼락을 맞은 디엘라가 화들짝 놀라서 잠에 깼다.

그 눈에 데릭이 들어온다.

빈 물통을 바닥에 던지고, 늘 그렇듯 소름끼치는 새빨간 눈동자로 디엘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이, 이게 무슨 짓이야! 너.. 너어..!”

“지금 잠이 옵니까?”

“뭐?”

“지금 잠이 오시냐고요.”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수도원 행이다.

그 사실을 디엘라도 직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는 사교계 데뷔는커녕, 이 저택에조차 남아 있을 수 없다.


하다하다 자다가 냉수벼락을 맞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는지, 디엘라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데릭을 노려보았다. 구정물을 뒤집어쓴 것보다는 나으니 데릭의 입장에서는 자비로운 처사였다.



데릭은 그대로 디엘라의 팔을 잡아끌었다. 강압적인 태도에 디엘라가 반항하려 했으나, 근력의 차이는 어찌할 수 없었다.


“꺄악! 뭐, 뭐해! 다들! 왜 구경만 하는 거야! 말려! 이 천민을 말리라고!”

“...”


방문 밖에서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사용인들은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다.

정말로 이래도 되나 싶은 불안감이 샘솟고 있었으나, 어찌됐든 정당성은 데릭에게 있었다.


디엘라가 어떻게든 데릭의 팔을 뜯어내려 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데릭은 그대로 디엘라를 끌고 저택 계단을 성큼 성큼 내려갔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디엘라를 끌고 홀까지 내려오니, 집사장 델론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허나 델론은 데릭을 막을 명분이 없었다. 데릭은 그저 고개를 내리고 꾸벅 인사한 채, 그대로 디엘라를 데리고 별채 밖으로 나갔다.


“너...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


데릭은 그대로 별채 뒤쪽으로 나가서 저택의 바깥까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렇게 난리를 피워대는 디엘라 영애를 잡아끈 채 저택 바깥으로 걷고 걷고 또 걷는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연행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야심한 시각.

하늘을 가득 메운 달빛이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저택에서 한참은 떨어진 초원 한복판까지 나와서야, 데릭은 그대로 팔을 휘둘러서 디엘라를 풀밭 위에 내쳤다.


- 철퍼덕


“꺄앗!”


물에 젖은 파자마에 잔디풀이 눌어붙었다.

예쁜 비단 같던 금빛 머리칼에도 온갖 풀잎들이 눌어붙어, 도저히 귀족가 영애라고 보기가 힘든 모습이다.

디엘라는 손끝을 덜덜 떨고 있었으나, 이윽고 어떻게든 웃음을 띠며 말했다.


“하... 하하...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

“마법을 가르치겠다고?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너밖에 없었을 것 같아? 나는 노력 안 해봤을 것 같아? 미안하지만 꿈 깨. 귀족들 가르치는 교사 놀이는 다른 데 가서 해!”


디엘라는 몸을 덜덜 떨면서도 할 말은 다 하고 있었다.

물벼락을 맞고, 풀 바닥에 내팽개쳐져도 그 당당한 어조만큼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천민 주제에...!”


기어이 소리를 내지르는 디엘라를 가만히 내버려두고 있던 데릭은, 이윽고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 디엘라와 시선을 맞추고서는 이야기 한다.


“듣는 귀도 없고, 저택에서도 멀리 나왔으니 이참에 말씀드리죠.”

“뭘...”

“저는 딱히 디엘라 아가씨께 마법 같은 거 가르칠 마음이 없습니다.”

“──뭐?”


이윽고 데릭의 입 꼬리가 섬짓하게 올라갔다.

어둠이 자리한 심야에도 달빛은 밝게 빛난다. 그 달빛을 받은 데릭의 붉은 동공과 더불어, 소름끼치는 미소가 흘렀다.


“저는 그냥 귀족들을 두들겨 패는 게 좋은 것뿐입니다.”

“뭐...라고...?”


듀플레인 공작저에서는 최소한의 품위를 갖추고 있던 사내다.

허나, 보는 눈이 없어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날 것의 모습이 흘러나온다.


“말했듯이 저는 밑바닥 출신 천민입니다. 그냥 귀족의 피를 타고 났다는 것만으로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거만하게 내리깔아보는 귀족들을 제가 좋아해야할 이유가 있습니까?”

“무슨...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교사니 뭐니 하는 것도 다 명분일 뿐입니다. 특히 아가씨 같이 콧대높고 건방진 귀족들을 두들겨 패고 비명소리를 듣는 게 좋을 뿐입니다. 이렇게 합법적으로 보란 듯이 두들겨 팰 수 있는데, 이만한 명분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심지어 돈까지 주는데.”


보기만 해도 팔 끝에 닭살이 오르는 그 미소를 보자, 디엘라는 순간적으로 숨을 머금고 말았다.

애초에 데릭이 정말로 디엘라를 위해 움직인다고 생각한 것이 오산일까.

디엘라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데릭은 부츠를 신은 발로 디엘라의 어깨를 밀어차버렸다.


“꺄앗!”


- 콰당탕!


- 스릉


그대로 나가떨어진 디엘라가 다시금 시선을 올려보았을 땐, 데릭이 장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서슬 퍼런 검날에 달빛이 반사되어 시야에 들어온다. 디엘라의 손끝이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너, 너, 너... 미, 미쳤어...?”

“저는 아가씨 같이 오만한 귀족들이 갈라지는 비명 소리를 내지르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참을 수 없이 좋습니다. 본인의 고고한 신분만 믿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던 놈일수록 더 좋습니다.”

“이, 이, 이런 짓을 하면... 목숨이 무사할 것 같아?”

“목격자도 없는데 뭐 어떻습니까? 그리고 어차피 곧 수도원으로 끌려가실 신분인데 누가 아가씨 말이나 믿어주겠습니까? 이 저택에 아가씨 편이 있을 것 같습니까?”


데릭이 칼끝을 털며 성큼성큼 다가오자, 디엘라는 얼른 손으로 풀밭을 밀어대며 뒷걸음질 쳤다.

허나 나자빠진 상태에서 도망치려 해봤자 금방 따라잡힐 뿐이다.


“걱정 마십시오. 원숙한 용병들은 후유증은 남기지 않으면서 고통만 주는 법을 압니다. 사람의 신체는 의외로 금방 아무는 부위가 많습니다. 손톱이라든가.”

“...허억... 허어...”

“그리고 또 후유증 좀 남으면 어떻습니까?”


달빛을 받으며 성큼성큼 걸어오는 저 사내는 분명 미치광이다. 디엘라는 온 몸이 미친 듯이 떨려오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만나자마자 따귀를 걷어 올리는 것부터가 정상인 놈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이 모든 게 미리 예고되어있었던 일인 듯 하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제가 죽음으로 사죄하면 그만인 일이겠지요.”

“꺄... 꺄앗...!”


디엘라는 손에 잡히는 흙을 움켜쥐어서 얼른 데릭의 눈에 흩뿌렸다.


- 촤악!


“크윽.”


데릭은 재빨리 팔꿈치로 얼굴을 가리며 흙더미를 막았다. 그 틈을 타 디엘라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서서 가까운 숲쪽을 향해 뛰쳐나갔다.

저택 방향 초원지대는 어차피 금방 잡힌다. 그 잠깐의 와중에도 디엘라는 숲속으로 피신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어둠속에 몸을 감추고, 풀숲 속에서 일단 저 미치광이를 따돌려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달려 나가는 것도 잠시.


일대에 한차례 바람이 모이는 듯 한 부유감이 들었다.


- 화아아아악!


어떻게든 도망가려고 숲을 향해 달려 나간다. 허나 주변을 감도는 위화감에 못 이겨 뒤를 돌아보았을 땐,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보다도 더 커다란 크기의 화염덩어리.

검을 들고 있지 않은 손에 마력을 끌어모은 데릭의 영향력이 일대를 덮는 듯 하다.


‘저, 저, 저게 뭐야...!’


2성급 마법, 화염구.

귀족들 중에서도 슬슬 마법에 원숙해진 자들이나 쓰는 전투계 마법이었다. 심지어 그 흔한 영창조차도 하지 않았다.


남매 중에서도 가장 마법 자질이 뛰어났던 발레리안조차 2성급 마법에 입문하기 위해서 몇 달을 방 안에 틀어박혀 있어야만 했다.


데릭의 손에서 그런 수준의 마법이 튀어나오고 있는 광경엔 아예 현실감이 없다.

아니, 차라리 현실이 아니길 빌 수밖에 없다.

상대는 디엘라를 잡아서 두들겨 패며 쾌락을 얻고자 하는 미치광이일 뿐이다.


그대로 순간적으로 엄청난 압력이 모여들더니, 그의 손에서 발사된 불덩어리가 디엘라를 향해 날아들었다.


“꺄아아아악!”


디엘라는 몸에 생채기가 나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으며 몸을 날려 피했다.

디엘라가 서있던 곳 바로 옆으로 거대한 화염구가 쳐박히더니, 이윽고 불기둥이 한 차례 솟아올랐다.


- 콰아아앙!


- 화르르르륵!


뜨거운 열기가 몰아닥쳤다. 이윽고 마법이 직격한 장소를 보니 완전히 불타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바스락거리며 사라지는 검은 잿더미들 뿐이었다.

맞으면 즉사내지 최소 빈사다. 그 위력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디엘라가 떨리는 눈으로 데릭 쪽을 보니 열기가 빠져나간 손을 탁탁 털어내고 있었다.

그 희번득거리는 눈동자로 디엘라를 보더니 이윽고 혼잣말을 내뱉었다.


“빗나갔네.”


디엘라는 온몸에서 소름이 돋아오는 감각을 느껴야만 했다.



*




- 타닥, 탁!



그대로 디엘라는 숲쪽을 향해 달려 나갔다.

초원지대에서 성큼성큼 걸어오는 데릭은 마치 이 상황을 사냥놀이처럼 즐기는 것인지, 그다지 급한 기색조차도 없었다. 내리쬐는 달빛 아래, 말려 올라간 입꼬리와 붉은 눈동자가 한 없이 공포감을 불러 일으킬 뿐이다.


- 파박, 팍!


디엘라는 달려 나가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나자빠졌다. 그대로 어떻게든 다시금 몸을 일으켜서 숲쪽으로 도망치는 것까진 성공했으나, 완전히 거리를 벌리지는 못했다.


- 파사삭! 팍!


어떻게든 풀숲 사이로 몸을 밀어 넣었다. 허나 아직은 더 도망쳐야만 했다.

그러나 공포감에 부르르 떨리는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다.


‘움직여...! 움직여 움직여 움직여...! 제발...!’



- 화아아악!


- 파바바박!



날아든 마력의 기운이 주변의 나뭇가지에 직격해서 박살내버린다.

1성급 공격술 마법, 마력화살. 심지어 3연발이었다.

같은 1성급 마법이라도 숙련도가 다르다. 한 대라도 맞으면 유약한 디엘라의 몸으론 절대 버티지 못할 충격이었다.


“안 맞았나...?”


풀숲 저 너머에서부터 데릭의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스럽게도 디엘라의 체구는 왜소하다. 숲 전체에 깊게 자리한 어둠은 그녀의 편이였다.

온갖 설치류 동물들이 풀숲 사이를 오가고, 바람에 나뭇잎이 쓸리는 소리가 가득하다.

이런 곳에서 풀숲 사이에 엎드려 숨은 디엘라를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터다.


- 사악, 사악, 사악.


미치광이의 발걸음이 디엘라의 귓가에 들려온다.

바로 앞 풀숲 너머에서, 검을 이용해 여기저기 가지를 쳐내며 디엘라를 찾는다.


디엘라는 입에 손을 욱여넣고, 숨소리가 흘러나갈까 무서워 숨을 꽉 참았다.

콧노래를 부르며 여기저기 디엘라가 있을만한 곳을 뒤지고 있는 데릭의 모습은 마치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포식동물 그 자체다.


- 쿵.


이윽고 풀숲에 엎드려 있는 디엘라의 몇 뼘 앞에 데릭의 부츠가 보였다. 암순응이 끝난 눈으로도 겨우 보일까말까 할 정도로 주변에 자리한 어둠은 짙었다.


디엘라는 당장이라도 폭발해버릴 것만 같은 심장소리를 어떻게든 죽이며,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아랫입술이 덜덜덜 떨리며 호흡까지 불규칙해졌다. 숨을 내쉬고 있는 건지 들이쉬고 있는 건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인가 데릭의 발이 주변을 훑는 듯이 돌아다니더니, 이윽고 숲속 더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갔다.


‘허억... 허억...’


조금씩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하자 디엘라에게도 생각을 정리할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저, 저택까지 도망가야 해... 하, 하지만 엄폐물 없는 초원지대를 그냥 달려 나가면 마법에 당하고 말거야...! 그, 그럼 어떡하지? 지, 지금이야 이렇게 숨어 있을 수 있지만...! 어, 언젠가는 들킬 텐데...!’


어둠속에서 머리를 꾹 부여잡고 엎드린 채 소녀는 터질 듯한 심장을 어떻게든 진정시켰다.


‘진정해, 진정해, 진정해.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방법이 있을 거야...!’


이윽고 시야에 큼지막한 바위 하나가 들어왔다.

거의 디엘라의 머리만한 크기였다. 그쪽까지 어렵사리 기어가서 돌을 어떻게든 만져보니, 꽤 무겁지만 어떻게든 들어올릴만 했다.


참으로 다행인 점은 어둠이 내려앉은 심야 시간이라는 것이다.

숲 전체에 짙게 깔린 어둠은 안 그래도 왜소해서 숨기 쉬운 디엘라의 몸을 더 완벽하게 감춰줄 것이다. 기습하기 좋은 환경이라는 뜻이다.


건장한 체구의 사내를 상대로 연약한 디엘라에게 승산은 없다.

하물며 상대가 정말로 2성급 마법사라면, 그냥 저항조차도 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고민의 답은 어둠을 틈탄 기습으로 귀결된다.

어떻게든 기습할 수 있으면 빈틈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운이 좋으면 기절 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어둠 속에 몸을 감춘 채 기회를 기다리다, 상대가 방심하는 틈을 타 뒤를 치는 것이다.

오로지 그것말고는 승산이 없다.


디엘라는 몸을 벌벌 떨면서도, 바위를 끌어와서 풀숲 옆에 내려놓았다.

양손으로 바위의 끝을 꽉 잡아 쥔 채로 언제든지 들어올릴 수 있도록 준비태세를 한다.


그렇게 어둠속의 풀숲에서 감각에 날을 세운다.

하지만, 신경을 곤두세우면 곤두세울수록 가슴 속 공포도 함께 밀려올라온다.


- 뚝, 뚝, 뚝.


바위 위로 망울진 눈물이 떨어졌다.

울컥거리는 소리를 이를 악물고 참았다. 뭉텅뭉텅 떨어져 내리는 눈물방울들을 닦을 기력조차 없다.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울음소리 내면 안 돼.’


밀려올라오는 감정을 이성으로써 밀어낸다. 여기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주마등이 밀려온다.

한 때 활발하게 웃고 떠들며 저택 주변을 뛰놀다가, 캔버스와 이젤을 들고 나가서 풍경화를 그리던... 그런 마냥 천진난만하던 시절이 떠오르고 만다. 매일 매일이 걱정 없고 행복했던 때다.

그 뒤로 떠오르는 건 실패와 좌절의 기억이다. 그리고 앞서나가는 남매들 사이에서 도태된 기억. 측은한 가족들의 시선. 격려해주는 가족. 부족한 성취. 노력, 실패, 또 실패. 끝 없는 실패.

동정어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사용인들. 귀여운 외모 빼고는 특출난 게 없다는 구설수들. 듀플레인 가문의 영애로 태어나서 참으로 다행이라는 저 너머 귀족계의 험담들.

그리고, 자기한테 남은 것은 이제 혈통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 남 앞에서 드러내고, 그 가치를 증명 받을 수 있는 거라곤 이 고귀한 혈통 하나밖에 없다는 그 차가운 사실.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


부정한 기억들을 떨쳐내며 디엘라가 이를 악물었다. 저 미치광이를 잡아내고 어떻게든 저택으로 돌아간다. 숲에 자리한 어둠은 디엘라의 편이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 순간이었다.



- 화아아아아악!


디엘라의 유일한 아군이었던 숲의 어둠이 사라져간다.


1성급 변환계 마법 ‘빛 발현’

저 수풀 너머에서 피어오르는 거대한 광원이 주변의 모든 것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용병들 사이에서 가장 듬직한 아군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그 어떤 전장 상황에도 대처할 수 있는 저런 유연함 덕분이다. 특히 유동적인 전장 조율은 데릭의 주특기였다.


물론 디엘라의 입장에선 그저 청천벽력일 뿐이다.

숲에 자리한 어둠은 이미 완전히 사라져있었다.


‘허억...!’


어둠 속에 숨는 전략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차라리 엄폐물을 찾아야겠다며 전략을 수정하고선, 디엘라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저 멀리서 빛의 구체를 띄우던 백발의 미치광이가, 디엘라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찾았다.”


소년은 입이 찢어지도록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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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벨미어드 (4) +69 24.04.16 29,555 1,187 20쪽
23 벨미어드 (3) +69 24.04.15 29,733 1,218 21쪽
22 벨미어드 (2) +67 24.04.12 31,104 1,151 17쪽
21 벨미어드 (1) +63 24.04.11 31,896 1,184 21쪽
20 여정 (4) +72 24.04.10 30,760 1,377 21쪽
19 여정 (3) +50 24.04.09 30,071 1,283 16쪽
18 여정 (2) +47 24.04.08 30,587 1,221 17쪽
17 여정 (1) +37 24.04.06 31,647 1,210 18쪽
16 사제 (6) +79 24.04.05 30,368 1,227 16쪽
15 사제 (5) +45 24.04.04 30,056 1,193 20쪽
14 사제 (4) +30 24.04.03 29,821 1,128 15쪽
13 사제 (3) +66 24.03.31 30,768 1,197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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