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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타 님의 서재입니다.

세상에 나쁜 영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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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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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1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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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4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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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듀플레인 (3)

DUMMY

“제 동생 디엘라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 없으시겠죠.”


마물족을 토벌하러 갈 때에 탔던 마차에 비해 몇 배는 더 호화로운 실내.

듀플레인 공작가문의 인장이 박혀있는 마차엔 온갖 금테와 화려한 장식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어서, 올라타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그 안에 사용인들과 함께 아이셀린 영애가 앉아있었고, 맞은 편에는 벨더른 용병단의 대표격 인물이자 데릭의 동행인으로 온 제이든이 앉아 있었다. 데릭 또한 그 옆에 가만히 앉아서 주변을 훑어보고 있었다.


다각다각 마차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를 배경으로, 제이든과 아이셀린 영애의 대화가 오갔다.


“디엘라 영애... 듀플레인 가문의 가계도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긴 합니다.”


제이든은 더 이상 경박하게 웃지 않았다.

코앞에 앉아있는 듀플레인 가문의 영애는 아무렇게나 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본인들이 신분을 밝히지 않았을 때야 능청스럽게 웃어댈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좀 상황이 달라진 셈이었다.


“다만 대외적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으신 분이죠.”

“네, 맞아요.”


데릭은 아이셀린 영애의 시선이 한 차례 내리깔리는 것을 확인했다.

보아하니 그녀의 동생인 디엘라 영애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게 썩 즐거운 일은 아닌 듯 했다.


‘듀플레인 가문의 후계 구도는... 그래, 2남 2녀였었나.“


5성급 마법사인 레이몬드 오스왈드 듀플레인 대공의 슬하에는 네 명의 자식이 있었다.

그 중 셋째와 넷째가 듀플레인 가문의 영애로 대접받으며 사교계에 데뷔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까진 들었다.


다만, 셋째인 아이셀린 영애가 얼마나 기품 있고 자애로운지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돌았으나, 넷째인 디엘라 영애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알려진 바가 없었던 것이다.


“디엘라에게는 마법 스승이 필요해요.”

“...그래서 이런저런 용병들에게 의뢰를 맡겨가며 자질을 검증하고 계시던 겁니까?”

“예. 신분을 속인 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드러내서 좋을 것도 없는 일이라.”


옆에서 조용히 있던 시녀장 카타리나가 조신한 모습으로 홍차를 따랐다.


마차 바퀴는 사람만하고, 마차를 끄는 말은 여섯 마리나 된다. 이쯤 되니 마차도 거의 흔들리질 않아서 뜨거운 차를 어렵지 않게 마실 수 있을 정도다.

좌석 사이에 있는 작달막한 테이블 위에 고급스러운 향이 올라오는 찻잔이 도열해 있었다.

다만, 그 찻잔에 손이 가는 일은 없었다.


“이상한 일이군요. 듀플레인 공작가의 영애를 가르치는데 평민 출신 마법 스승이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제이든의 지적은 타당했다. 데릭 자신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이상한 일이었다.

귀족들의 특권 의식과 권위 의식은 상상 이상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런 귀족 영애의 스승으로 밑바닥 용병 출신 마법사들을 물색하고 있는 건 너무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말했듯, 귀족이란 작자들은 자기 자식에게 좋은 마법 스승을 붙이기 위해서라면 간이고 쓸개고 다 내다 팔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이다.

듀플레인 공작의 권위 쯤 되면 얼마든지 이름 있고 혈통 좋은 마법스승을 구해다가 붙여줄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뭐라해도 이 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가 아니던가.


사실 외부 인력을 동원할 필요 없이, 당장 가문 안을 뒤져보기만 해도 마법적 조예가 깊은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을 터였다.

그러니, 아이셀린 영애가 직접 스승을 물색하러 나온 것부터가 일반적인 상황은 아니라는 사실을 방증하는 셈이다.


데릭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듀플레인 가문에는 알려진 4성급 마법사만 서너 명은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좋은 스승들을 놔두고 용병단을 뒤질 이유가 있습니까?”

“...마법에 조예가 깊은 것과, 마법을 잘 가르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분야의 능력이에요.”

“...그건 그렇지요.”

“그리고 당연히 그런 스승들을 많이 붙여보았죠. 하지만 생각처럼 잘 되진 않았거든요...”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함축적인 표현이지만, 아이셀린 영애의 표정은 참으로 복잡해 보였다.

그래도 기저에 깔린 마음은 하나다. 하나뿐인 여동생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디엘라는... 절망적일 정도로 마법에 재능이 없어요.”

“...”


제이든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잘 이해가 되질 않았기 때문이다.

듀플레인 가문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한 마법 명가다. 그런 곳의 혈통을 안고 태어났음에도 마법적 재능이 없다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아마 이대로 가면 사교계 공부를 시작하지도 못한 채 애물단지 취급만 받게 될 거에요. 전 디엘라가 그런 취급을 받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어요.”


벨코스 지방의 귀족 영애들은 나이가 차면 사교계 예습을 위해 에벨스타인으로 오는 경우가 많았다. 보통 저택을 하나 통째로 증여받아 안주인 역할까지 연습하게 된다.

당장 데릭의 눈앞에 앉아 있는 아이셀린 영애도 공작령이 아닌 에벨스타인의 귀족계에 몸을 담고 있다.

북쪽 성벽 너머, 귀족들이 거주하는 부촌 지역에서 여러 교류를 하고 공부도 하며 품위 있는 숙녀로서의 자질을 갖춰나가는 중인 것이다.


허나, 그것도 최소한의 자질이 있을 때의 이야기다.

무려 듀플레인 가문의 혈통을 타고 났음에도 마법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하는 자라면, 귀족으로서는 너무 치명적인 결함을 품고 있는 것이다.

듀플레인 가문의 자랑이라기보다는 치부가 될 가능성이 훨씬 큰 인물이다. 이미 공작저에서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그 디엘라라는 소녀가 어떤 취급을 받고 있을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렇군요. 하지만 그게 용병단을 뒤지고 있는 이유로 적합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법을 배우는 데에 애를 먹고 있다면, 오히려 더 능력이 출중한 스승을 찾으시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

“...제가 결례가 되는 질문을 했습니까?”

“아니요. 단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을 뿐이에요.”


아이셀린 영애는 근심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서는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디엘라는 지난 8개월동안 스무 명이 넘는 스승을 갈아치웠어요. 더 이상 그 애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

“그래도 전 포기 못해요.”


그리 말하는 아이셀린 영애의 표정은 진중해져 있었다.


"데릭 씨는 지금까지 왔던 나이 많은 마법사들과는 사고방식도 다르고, 마법을 다루는 방식도 많이 다르니까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전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볼 생각이에요."


슬슬 데릭도 감이 오기 시작했다. 요컨대 그 디엘라라는 영애는 가르치기 쉬운 인간은 아닌 듯 했다.



자고로 귀족 영애들이란, 싸가지가 없거나 머리가 꽃밭이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디엘라라는 소녀는 둘 중 어느 쪽일지, 지금 시점에서는 잘 가늠이 가질 않았다.




*




- 쾅!



벨코스 지방에서 제일가는 위용을 자랑하는 듀플레인 대공의 저택.

그 위대한 대공의 집무실 문이 부서질 듯이 열렸다. 어지간한 귀족들조차도 눈을 맞추지 못하는 대공의 집무실 문을 그렇게 열어젖힐 수 있는 인간은 많지 않았다.


“아버지! 발레리안 형님! 말씀 나누는 중에 죄송하게 됐습니다!”


집무실 안에는 레이몬드 오스왈드 듀플레인 대공이 으리으리하게 큰 집무용 책상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는 금발을 늘어뜨린 청년이 이번 분기 공작령 세수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장남 발레리안은 훤칠한 키에 체격 좋은 미남이었다.

차기 가주로 내정된 그는 작년에 성인식을 치렀는데, 성인식 당시에 이미 2성급 마법 초입을 익혔을 정도로 영재이기도 했다. 듀플레인 가문의 큰 어른들은 이미 그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는 보고를 올리던 서류를 집무용 탁자위에 올려놓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그. 대체 무슨 난리냐? 품위를 좀 지켜가면서 행동해라.”

“제 말 좀 들어보세요, 형님! 이제 진짜 저는 더 못 참습니다!”


레이그라고 불린 청년은 복도에 있던 메이드 하나를 잡아끌어서 집무실 바닥에 내팽개쳤다.


- 타닥!


“꺄앗!”


메이드가 집무실 바닥을 나뒹굴자, 향초 냄새만 은은하게 나던 집무실에 코를 찌르는 지린내가 돌았다.

메이드는 걸레 빤 물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메이드복 여기저기가 찢어발겨져 있었고, 머리는 완전히 풀어헤쳐져 있었다. 누가 보아도 해코지 당한 흔적이었다.


“하다하다 제 전속 사용인들한테 손대고 있잖습니까. 디엘라 그 자식 말이에요!”

“레이그. 언성을 좀 낮춰서 얘기해라.”

“저도 참다 참다 못 참아서 얘기하는 거 아닙니까! 저번 달에 그 자식 때문에 관둔 사용인이 두 자릿수를 넘어가요. 걔가 기분 나쁘다고 깨트린 그릇은 이미 수백장이 넘었을 겁니다! 심심하다는 이유로 건물도 쳐부수고... 언제까지 우리가 그 망나니를 묵인해주고 있어야 합니까? 아직 어리고, 막내면 다입니까?”


집무실 가운데까지 걸어 들어온 레이그는 책상 너머에서 서류들을 훑고 있던 듀플레인 대공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아버지! 대답을 좀 해주세요!


살피던 서류들을 조용히 내려놓은 듀플레인 대공이 레이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눈에 서린 감정을 레이그는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


레이그는 잠시 숨을 머금더니, 결국 한풀 꺾인 목소리로 한탄하듯 이야기 했다.


“정말 그 왈가닥이 듀플레인의 이름에 걸맞은 언행이 가능하기나 하겠습니까? 저희도... 저희도 할 만큼 했잖습니까... 가족으로서... 그리고 귀족으로서... 저희는 본분을 다했어요.”

“그건 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레이그.”

“아니요, 아버지. 비록 제가 형님에 비할 바는 못하다 할지라도 엄연히 듀플레인 가문의 일원입니다. 저도 할 말은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슬슬 인정해야만 합니다. 디엘라 그 애는 우리 가문의 치부이자 결함이에요.”


부드러운 귀공자 같은 발레리안과 달리, 레이그는 각진 장군과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둘 중 연상을 골라보라면 많은 사람들이 레이그를 고르겠지만 엄연히 그는 이 듀플레인 가문의 차남이었다.


“아버지. 비록 디엘라가 가문에 걸맞은 인물이 되지 못하더라도... 아이셀린이 있잖습니까. 신께서는 디엘라와 나누어야 했을 귀족으로서의 기품을 그저 아이셀린에게 몰아주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디엘라는 이만 놓아줍시다.”

“레이그. 아버지 앞에선 말을 좀 골라서 하는 게 좋을 거다.”

“형님. 형님도 같은 생각이시지 않습니까.”


레이그가 그리 쏘아붙이자, 발레리안도 곧바로 대답하지는 못했다. 그의 난처한 표정에 레이그는 탄력이라도 받은 듯, 듀플레인 대공에게 넌지시 말했다.


“...집사장을 시켜서 안헬 지방에 있는 수도원을 하나 알아봤습니다.”

“레이그!”

“누군가는 단호해져야만 합니다! 아무도 안한다면 그 역할을 제가 할 수밖에 없습니다.”


레이그는 듀플레인 대공에게 다시금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귀족 자제들이 많이들 모여드는 곳이라 시설도 좋고, 제국 쪽에서도 잘 살핀다고 합니다. 이런 곳에서 애물단지 취급이나 받으며 사느니, 신의 뜻을 받드는 게 디엘라에게도 좋지 않겠습니까? 이대로 놔뒀다가 가문에 큰 후환이 될 바에는 차라리...”


- 쾅!


레이그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듀플레인 대공이 그대로 레이그의 머리를 잡아서 책상에 처박아버렸기 때문이다.


“크악!”


비명을 지르는 레이그의 머리를 짓누르며, 듀플레인 대공이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판단할 일이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크윽.. 윽... 아버지...”

“같은 말을 두 번하게 만들어야겠나?”


책상에 얼굴을 짓눌리면서도, 레이그는 끝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버지. 결단할 때는... 결단하셔야 합니다...”


- 쿵!


군주의 피를 나눠받은 아들답게 레이그는 쉽게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대공의 손에 짓눌리면서도 끝까지 뜻을 관철하다, 이윽고 대공의 마력에 휩쓸려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잠시 정적.

집무실에는 겁에 질린 메이드가 흐느끼는 소리만 나지막이 울려 퍼지고 있을 뿐이었다.


대공은 그대로 집무용 의자에 다시금 주저앉아서, 잠시 미간을 꾹 눌렀다.

군주에게 근심과 걱정이란 평생을 따라다니는 동반자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익숙해지는 일은 없다.


노곤한 표정을 짓고 있는 대공을 가만히 바라보던 발레리안은 의식을 잃은 레이그를 조용히 부축해 세웠다.

그리고 바닥에서 흐느끼고 있는 메이드의 어깨도 툭툭 털어주었다.


“고생 많았겠구나. 일단 내 시녀장에게 따로 일러둘 테니, 오늘은 몸을 씻고 숙소에서 쉬거라.”


부드러운 목소리로 메이드를 다독이고선, 레이그를 부축해 세운 채 대공에게 말했다.


“세수에 대한 안건은 당장 급한 일은 아니니 오늘은 일단 들어가 보겠습니다. 좀 쉬십시오, 아버지.”

“그래.”


그렇게 발레리안이 레이그와 메이드를 챙겨서 집무실을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발레리안.”

“...예.”


집무용 의자에 앉아 미간을 누르고 있던 대공이 나지막이 깔린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자식을 공평히 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구나.”

“...”


발레리안은 쓴웃음을 짓고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집무실을 나섰다.




*




“어머, 발레리안 오라버니.”


집무실 앞 복도.

간만에 공작저에 돌아온 아이셀린은 집무실에서 나오는 발레리안과 마주쳐서 반갑게 인사하려 했다.


허나, 그가 의식을 잃은 레이그를 부축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표정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구정물을 뒤집어 쓴 채 따라 나오고 있는 메이드 또한 마찬가지다.


“오, 오라버니...”

“오. 아이셀린. 간만에 얼굴 보니 반갑구나. 에벨스타인은 지낼만 하니?”


발레리안은 애써 웃음을 지어주며, 아이셀린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보다시피 상황이 좀 복잡해서, 회포는 좀 나중에 풀어야겠구나.”

“...네에.”


발레리안이 레이그를 부축한 채 아이셀린을 지나쳐가려하니, 몇몇 사용인들이 뛰어나와 레이그를 받들었다. 그 과정에 발레리안은 아이셀린이 대동한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평소에 데리고 다니는 사용인들과 더불어서, 척 봐도 공작저 바깥에서 온 듯 한 용병을 둘 대동하고 있었다. 제이든과 데릭이다.


“...”


아이셀린이 막내 동생인 디엘라를 위해 불철주야 뛰고 있다는 사실이야 알고 있었다.

허나, 발레리안은 그녀가 데려온 면면을 보고 측은한 미소를 띨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아이셀린도 4성급 마법사 중에서 이름난 교사들을 데려왔다.

허나, 그 누구도 디엘라를 감당하지 못했다. 모멸당하거나, 다치거나, 아예 먼저 포기하고 나가는 자들이 계속 나왔다.


그렇게 상류층 사이에서 디엘라가 망나니라는 악명이 퍼지면서, 스승자리에 자원하는 인물이 조금씩 없어져 갔다.

그래도 아이셀린은 포기하지 않고 여기저기 수소문 해가며 3성급, 2성급 마법사일지언정 뚝심 있고 강직한 인물들을 어떻게든 데려왔던 것이다.


허나, 그런 인물들조차도 궁해져서 이제는 용병단에서 공수해온 마법사가 공작저에 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노력은 가상하나, 지켜보는 오라버니 입장에서는 입에 쓴맛이 돌 수밖에 없다. 이젠 정말 데려올 사람이 없다는 것이 실감날 뿐이다.


발레리안은 아이셀린을 지나쳐서 조용히 복도를 나아갔다.

가슴속에 육중한 무게추가 달려있는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아이셀린. 에벨스타인 생활은 어떻더냐?”

“아버님께서 신경써주신 덕분에 매일매일이 즐거워요. 요즘은 인물화를 배우고 있는데, 시간이 나면 아버님 초상화를 그려드리고 싶네요.”

“그런가. 완성되면 저택 홀에 걸어두어야겠구나.”

“아버님도 참. 아직 그 정도 실력은 아니에요. 사용인들이 보고 흉을 보지 않을 실력은 갖춰야 되니 조금 기다려주세요.”


화색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셀린이 환담을 건네자, 근심과 걱정이 가득하던 대공의 표정도 조금은 풀어졌다.

누가 뭐라해도 아이셀린은 공작저 사람들의 사랑을 잔뜩 받는 몸이다. 귀족 영애로서의 품성과 기품을 안고 태어나, 부모는 물론 두 오라버니와 가신들까지도 모두 그녀를 귀여워했다.


그런 그녀이기에 나이가 차자마자 에벨스타인의 부촌에 저택 하나를 증여받고 사교계 공부를 시작하는 것도 일사천리였다. 말 그대로 듀플레인 가문의 보석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아, 그리고 이 쪽은 미리 보고 드리려고요. 에벨스타인 쪽에서 마법사를 한 명 데려왔어요.”

“...그런가.”


데릭을 보는 대공의 미간이 잠깐 좁아졌다.

아이셀린이 디엘라의 스승이랍시고 데려온 인물은 한 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누가되었든 간에 몇 주도 채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이제 와서 누구를 더 데려온들 큰 의미를 두기도 힘들었지만, 어쨌든 사랑해 마지않는 딸 아이셀린이 알아보고 온 인선이다.


“그래.”


다만, 해줄 말은 그게 다였다.

듀플레인 대공은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길게 의견을 내지 않았다.

아이셀린은 그런 대공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이내 조용히 쓴 미소를 흘렸다.


“그럼 일단 여독을 좀 풀고 올 테니 접견실에서 따로 환담을 더 나눠요. 아버님. 쌓여있는 말이 많아요.”

“그래. 조금 있다가 보자꾸나.”


그렇게 아이셀린이 인사를 올리고, 집무실에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거기, 그대는 남게.”


대공이 데릭을 불러 세웠다.



*




조용한 집무실.

듀플레인 대공은 깃펜을 사각대며, 한참동안 서류 하나를 골똘히 살펴보고 있었다.


아마도 영지 운영에 관련된 중요 안건인 듯 했다.

대공은 무엇 하나 대충 처리하지 않고, 깊게 고민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는 하루 종일 이렇게 바쁜 일에 치여 사는 듯 했다.


그렇게 당장에 처리해야할 서류 하나에 사인을 한 후, 대공은 시선조차 맞추지 않고 던지듯 말했다.


“나이가 많이 어리군.”

“예.”

“열여섯이라고?”

“그렇습니다.”


대공은 다시 다음 서류를 훑다가, 깃펜으로 몇 번 줄을 그었다.

안건들을 처리하면서 그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마법은 어느 정도로 다룰 줄 아나?”


깃펜을 놀리며 묻자, 데릭은 딱히 거칠 것도 없이 대답했다.


“1성급 마법을 조금 다룰 줄 압니다.”

“허허..”


대공이 나지막이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의 의미를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고작 열여섯 나이에 제대로 된 마법을 익히고, 남에게 가르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은 평민 치고는 놀라운 일이다.

그것에 대한 경외감이 조금 섞여있었고, 나머지는 한탄이다.


그래봐야 평민들 수준이다.

그런 이에게 딸아이의 마법 스승을 맡겨야 된다는 사실에 한탄의 웃음을 내뱉은 것일까.

데릭은 그렇게 예상해 보았으나─ 그 예상은 절반만 정답이었다.


“굳이 거짓말은 하지 말게.”


어느샌가 듀플레인 대공의 희번득거리는 눈동자가 데릭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그 눈에 마력의 잔향이 일렁거렸다.


"겸손이 항상 미덕으로 작용하는 건 아니야."


그는 데릭의 마법 수준이 고작 1성급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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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사제 (6) +79 24.04.05 30,547 1,234 16쪽
15 사제 (5) +45 24.04.04 30,238 1,199 20쪽
14 사제 (4) +30 24.04.03 29,998 1,135 15쪽
13 사제 (3) +66 24.03.31 30,952 1,203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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