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코리타 님의 서재입니다.

세상에 나쁜 영애는 없다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로맨스

새글

코리타
작품등록일 :
2024.03.21 21:26
최근연재일 :
2024.05.15 21:30
연재수 :
40 회
조회수 :
1,120,791
추천수 :
44,474
글자수 :
358,147
유료 전환 : 18시간 남음

작성
24.03.23 21:30
조회
31,667
추천
1,240
글자
17쪽

듀플레인 (2)

DUMMY



처음 용병 바닥에서 데릭을 본 자들은 하나 같이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곤 했다.

너무 어린 것도 어린 것이오, 건실한 모습으로 괜찮은 장비를 두르고 있긴 하나 인상이 워낙 선량해 보인다.


어리거나, 선량하거나.

둘 중 하나만 해도 이 바닥에서는 뒷통수 맞고 내팽개쳐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데릭의 인상은 그 둘을 모두 품고 있다.

어떻게 이런 어리고 선량한 소년이 용병 바닥에서 잘 살아남아 있는가. 그 누가 되었든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허나, 진실 하나만큼은 명확했다. 데릭은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소년시절 때부터 용병의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게 뭘 의미하는 건지는 데릭과 함께 전장에 나가보면 알 수 있었다.



- 화악! 파악!


- 케에에에엑!


1성급 마법 마력화살에 당한 고블린이 검붉은 피를 뿜으며 숲 한복판에 나가 떨어졌다.


듀플레인 공작령 외곽, 에벨스타인으로 통하는 숲에 난 자그마한 오솔길.


오른손에 든 장검으로 그 기분 나쁜 생물의 콧잔등을 찌르고 반으로 갈라버리니, 데릭의 안면에 팍 하고 피가 튀었다.

그 와중에 한 쪽 팔이 잘린 고블린이 피를 흘리며 달려들었지만, 데릭은 놈의 도끼질을 뒷걸음질 한 번으로 피해버리고, 고블린의 안면을 팍 움켜쥔 채 전력을 발현했다.


- 파지지지직!

- 크에에에엑!


고블린이 감전되어 비명을 지르는 동안, 허벅지 춤에 있는 단검을 꺼내 들어서 목에 박아넣어버린다.

붉은 선혈이 시야를 뒤덮으며 한 차례 피비린내가 피어올랐지만 데릭의 표정엔 미동조차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기계처럼 냉혈한 모습도 아니다. 오히려 주점에서 보았던 선량하고도 심지 굳은 소년의 모습 그대로다. 다만 뒤집어쓴 피가 그 괴리를 한층 더 강렬하게 드러낼 뿐이다.

이 소년은 살아 움직이는 생물을 죽이는 데에 일말의 거부감조차 없었다. 식사를 하고 잠을 자는 것처럼, 일상적으로 당연하게 행해왔던 일이기 때문이다.


“다친 데는 없습니까?”


그렇게 검을 털며 친절하게 질문을 던지는 소년의 몸은 고블린의 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 주변엔 토막 난 고블린들의 육편이 가득하다.


마차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멜빈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한 차례 삼키고 말았다.


거친 용병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마물들을 찢어발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천진하게 뛰놀 나이의 소년이 피칠갑이 된 채 세상 다 산 듯 한 표정으로 그리 묻는 것은 사람의 본능적인 위화감을 자극하는 부분이 있다.


마법이 고상한 귀족들의 전유물이 된 시대, 소년은 길바닥 위에서 자란 마법사다.

온실 속의 화초들과는 걸어온 길부터가 다르다는 것을 누구든지 직감할 수 있는 광경이었다.




*



“역시 데릭이랑 동행하면 일이 편해져서 좋구만. 탐색 마법으로 적들을 식별해내기도 편하고, 먼 거리의 적들도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고.”

“포장 잘해주셔서 좋긴 한데, 마물족들 8할은 단장 아저씨가 잡았잖아요.”

“쯧.. 진짜 귀여운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놈. 좀 띄워주고 칭찬해주면 기뻐할 줄도 알아라.”


제이든은 혀를 차면서 데릭의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


주점에서는 그토록 무례했던 멜빈이었으나,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는 말수가 꽤 줄어있었다.


제이든이 예상했던 대로 공작가의 정체불명 3인방이 들고 온 의뢰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간단하기 그지 없었다.

해가 질 무렵에는 이미 눈에 보이는 마물도 없어서, 금방 에벨스타인으로 돌아가는 마차에 탑승할 수 있었다.


“일처리 솜씨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군.”


멜빈은 여전히 표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끝끝내 고평가를 내려주었다.

제이든은 흡족한 미소를 짓더니 마차의 좌석에 앉은 채로 검면의 피를 닦아내었다.


“과찬입니다. 그럼 걱정하시던 문제는 다 해결되었으니 잔금을 치러주시죠.”

“알겠소.”


착수금이 금화 1닢, 의뢰 달성비가 금화 2닢.

어지간한 토벌 의뢰들이 은화만 주고받는 걸 생각해보면, 절로 입 꼬리가 올라갈 수밖에 없는 수입이었다.

제이든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가죽주머니 속에 금화를 던져 넣었다.


“고생했다, 데릭. 주점 돌아가면 네 몫도 정산해줄게.”


데릭은 좌석에 걸터앉은 채로 알았다며 고개를 대충 끄덕이고선, 저물어가는 태양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크게 피곤할 일은 없었으나, 마력을 좀 썼기 때문에 노곤한 감각이 좀 남아있었다.

데릭은 팔짱을 끼고 마차 벽에 몸을 뉘인 채 휴식을 좀 취하려고 했다.


“1성급 마법을 다양하게 다룰 줄 아시던데요.”


허나, 로브 모자를 뒤집어쓴 검사관이 데릭에게 말을 건네 왔다.

오늘 내내 나서서 말을 꺼낸 적이 거의 없는 자였다. 청아한 목소리에 소녀의 티가 묻어나지만, 데릭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몸을 뉘인 그대로 대답해주었다.


“이것저것 많이 익혔습니다. 용병 바닥에서 먹고 살려면 다재다능한 게 좋지 않겠습니까.”

“올해 열여섯이라고 하셨지요? 저랑 나이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대단하시네요.”


데릭이 슬쩍 곁눈질로 주변을 보니, 멜빈이라는 노인과 델리아라는 메이드가 마른 침을 삼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견습 검사관이라는 작자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모양이었다. 쭈뼛거리는 듯 한 모습을 자꾸 보이는 것이, 아무렇지 않게 몸을 뉘인 채 대화하는 데릭의 태도에 불편을 느끼는 듯 했다.


사실 내심 놀란 것은 데릭도 마찬가지였다. 소녀는 데릭과 나이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다고 밝힌 것이다.

솔직히 데릭은 상대가 최소 성인은 될 줄 알았다. 행동거지에 묘하게 성숙함이 묻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은 어떻게 익히셨나요?”

“길바닥에서 먹고 살다보니 익혀졌습니다.”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으신 것 같은데,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1성급 마법을 몇 개나 다룰 줄 아시는데요?”


묘하게 질문이 많다. 데릭은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신경 쓰지 않는 양 행동했다.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것 같다라...’


일반적인 평민들이 그런 거창한 성인식 행사 같은 걸 벌이는 경우는 잘 없다.


“1성급 마법은 너덧 개 정도 다룰 줄 압니다.”

“네 개면 네 개고, 다섯 개면 다섯 개일텐데... 너덧 개라고 표현하는 건 좀 묘하네요.”


데릭이 몸을 뉘인 상태 그대로 검사관 쪽을 살펴보니, 로브모자 아래로 은은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필시, 그보다 더 많이 다룰 줄 아시는 거겠죠?”

“...”

“너무 감추려고 할 필요 없어요. 저는 그저 순수하게, 그런 나이에 그 정도로 마법을 다루실 줄 안다는 게 신기해서 물어보는 거랍니다.”


데릭의 스승인 카티아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지나치게 비범한 재주는 귀족들의 적대를 살 수 있다고.

상대는 누가 뭐라해도 최고의 마법가문 중 하나인 듀플레인 공작가문과 깊은 접점을 가진 인물이다. 데릭은 본인의 실력을 그대로 드러내서 좋을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식으로 애매하게 표현한 건, 제가 현재 마법계의 주류학파인 규율학파의 이론을 따르는 마법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

“저는 야생학파 출신입니다. 규율학파가 마법의 체계와 규율에 대해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다면, 야생학파는 그런 것에서 좀 동떨어져 있습니다.”


데릭이 몸을 일으키고 나서 본격적으로 이야기했다.

학파에 대한 구분을 이야기하자, 로브를 뒤집어쓴 소녀는 흥미롭다는 듯이 눈에서 영롱한 빛을 뿜어냈다.


“야생학파라고요...?”

“귀족계 규율학파가 완전한 주류로 자리잡은지도 긴 세월이 지났지만, 지엽적으로 비주류 학파들의 마법 연구는 계속 이루어지고 있지요.”


데릭의 마법 스승인 카티아 또한 규율학파 계열의 마법사였지만, 정작 데릭은 그런 규율로부터 벗어나 있는 인물이었다.

처음 노인에게 마법을 배워서 학파 선택을 해야 했을 때, 데릭은 야생학파를 택했던 것이다.


“야생학파는 규율과 규정에 신경 쓰기보다는, 실전적인 마력활용과 직접적인 생존에 필요한 마법들을 위주로 익힙니다. 온갖 변수가 가득한 모험 길에 사용하는 마법들이 주류이고, 상황에 따라 마력의 활용방안을 비틀어 꺾는 임기응변에 능하지요.”

“그런 관점으로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들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직접 만나본 적은 처음이에요.”

“뭐, 저라고 해서 대단히 수준 높은 마법을 쓰는 건 아니기 때문에... 그저 이론을 말하는 것 뿐입니다. 말했듯 저는 그저 평민 출신 1성급 마법사일 뿐입니다.”


데릭은 스스로를 최대한 낮추고자 했으나, 이미 로브를 쓴 검사관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 서려있었다.

마법에 관심이 많은 자다. 그런 직감이 들었다.


“당연히 귀족계 규율학파의 마법이 가장 연구도 많이 되어있고, 체계도 잘 발달되어 있습니다. 비주류가 비주류인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그래도 데릭 씨가 야생학파의 길을 택한 데에도 다 이유가 있겠죠? 그게 뭔지 물어봐도 되나요?”


대관절 그런 것은 왜 궁금해 한단 말인가. 묘하게 면접 같은 분위기가 불편했지만 상대는 거금을 지불한 의뢰주이니 막 대하기도 뭐했다.


받은 돈에 비해서 처리한 일이 너무 쉬웠기 때문에, 이 정도는 서비스의 일환이라 생각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며, 데릭은 손에 마력을 모았다.


“마법에 대해 조예가 있으신 분인 것 같으니 간단히만 말씀드리자면, 그게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데릭이 손에서 마력을 모으자, 그 손바닥 위로 작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마력을 이용해 발현한 불꽃은 연료가 없이도 허공에서 타오른다. 마법에 문외한인 자들이 본다면 신기한 광경이지만, 조금이라도 마법에 대해 알고 있으면 그게 그리 높은 수준의 마력 활용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파견관 멜빈도, 메이드 델리아도 그 불꽃을 보며 그리 신기하단 눈치를 보이진 않았다.

듀플레인 공작가에서 일하는 두 사람이라면 이 정도 마법은 몇 번이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검사관이라고 불리는 소녀는 그 불꽃을 보며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라?”


귀족가에서 이 정도 마법은 얼마든지 봤을 텐데도, 소녀는 데릭의 불꽃을 요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것이었다.


“...뭐, 뭔가 마력을 끌어내는 과정이 되게 간략한 것 같은데요?”


‘이 양반 봐라?’


데릭은 소녀의 지적을 듣고서 내심 놀랐다.

마력의 움직임을 감지할 줄 안다. 요컨대 상대도 최소 1성급의 마법사란 뜻이었다.


“예. 규율학파에선 마력의 활용 과정을 인식, 추출, 조작, 발현의 네 단계로 구분지어서 생각하죠. 하지만 야생학파에선 그렇게 세세한 구분을 하지 않습니다. 마력을 활용하는 과정 자체를 하나로 뭉뚱그려서 감각에 의존하는 거죠.”

“...항상 이런 식으로 마법을 써왔던 거에요?”

“예. 장점도 있지만, 당연히 단점도 있습니다. 세세한 부분까지 다 말씀드리자면 이야기가 너무 장황해집니다만...”


데릭은 여기서 더 구구절절 설명을 이어가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이다. 데릭은 적당 적당히 넘어가며, 이야기를 얼른 매듭지어버려고 했다.


“요컨대 그냥 마법의 분야가 좀 다르다고만 이해하시면 될 겁니다.”


학파의 차이란 것은 그렇게 칼로 자르듯이 쉽게 나뉠 수 있는 게 아니다.

대충 그렇게 싸잡아서 정리해버리고, 데릭은 다시 마차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그래봤자 명문가 양반들의 시선에는 1성급 마법사에 불과할테다. 4성급, 5성급 마법사들도 실제로 보고 사는 사람들에게, 1성급 비주류 학파의 마법 따위는 그저 잡기술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데릭은 눈을 지그시 감고 노곤한 몸의 피로를 풀고 있었으나.


데릭을 쳐다보는 소녀의 눈에는 묘한 반짝거림이 감돌고 있었다.




*



그렇게 그 기묘한 가신 3인방을 다시 볼 일이 없을 줄 알았으나, 그 다음 주에 그들은 또 주점에 찾아들었다.

들고 온 의뢰는 비슷했다. 공작령 외곽에 또 다시 마물족이 출몰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씀씀이가 화끈한 자들이다. 당연히 제이든은 입이 귀에 걸려서 응대했다.

다만, 또 마법사를 대동해야겠다고 조건을 걸어댔기에 데릭은 계속 동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물족들을 토벌하고, 또 헤어지고, 또 그 다음 주에 나타나서 또 의뢰하고...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

매번 아인족들을 잡아 죽였고, 마차에서 돌아오는 길에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일이나 마법에 대한 담화를 좀 나누었다. 가만히 있자니 어색해서 나누는 의례적인 대화들일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마물을 죽이는 일에는 항상 충실했다.

고블린, 트롤, 코볼트... 경험 없는 자들에게는 위험천만한 적이겠으나, 이미 잔뼈가 굳은 용병들에게는 신중하게만 상대하면 큰 위험이 없을 적들이다.

그렇게 몇 번이고 공작령을 오가며 외곽지대의 마물들을 처리해주고 꽤나 쏠쏠하게 돈을 만졌다.



제이든은 하루 종일 입이 귀에 걸려서 콧노래를 부르는 지경이 되었으며, 데릭도 자기 몫을 정산 받고나니 썩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돈이란 놈은 항상 옳았다.


그렇게 간만에 비싼 고기 요리들도 좀 입에 대고, 장비들도 싹 한 번 정비를 맡기면서 풍족하게 생활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그간 마물족 토벌을 하던 것을 보니, 실력은 믿을만 한 것 같더군. 이번 의뢰는 공작저에서 아이델 금화 열 다섯닢을 내주었네.”

“...열 다섯닢이라고요? 제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요?”


에벨스타인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주화인 아이델화는 금화 한 개만으로 갓 구운 빵으로 방 한 칸을 꽉 채울 수 있었다.

열다섯 닢이면, 과장 없이 이 주점건물을 통째로 새 것으로 갈아치울 수 있는 액수다.


“으하하, 통도 크셔라! 이번엔 좀 감당하기 힘든 마물인가 봅니다? 걱정 마십시오! 이 벨더른 용병단이 얼마나 일처리가 깔끔한지 지난 두 달간 충분히 확인하셨잖습니까! 준비기간만 충분히 주시면 지옥의 악마라도 목을 베다 드리지요! 크하하!”


제이든의 얼굴에 비친 화색이 그야말로 상쾌함을 넘어서 황홀경에 이르러 있었다.

다 늙은 아저씨가 황홀에 찬 모습을 보는 것도 썩 보기 힘든 꼴이지만, 자신에게 떨어질 정산 분을 생각해보면 데릭도 마른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 씀씀이에 대한 이야기는 건너건너 듣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 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늘 하던 의뢰와는 좀 다르네. 그래도 항상 그랬던 것처럼 마차를 타고 동행해줘야겠어.”

“예, 마차 수배는 이미 해놨습니다. 하루 이틀 본 사이가 아니잖습니까, 이제. 허허허.”

“그럼 내 소개부터 하지.”

“이미 저희는 각별한 사이 아닙니까! 아하하!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무슨 소개입니까! 편하게 대해주십시오! 편하게!”

“듀플레인 공작저의 총 지배인인 델론이라고 하네.”


살갑게 웃어대던 제이든의 미소가 뚝 하고 끊겼다.


멜빈이라는 이름은 가명이었다.

상대가 신분을 낮춰 부르고 있었다는 사실이야 데릭도 어느 정도는 예측하고 있었다. 허나, 지금 시점에서 그것을 밝힌다는 게 뭘 의미하는가.


그런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총 지배인 옆에 있던 메이드도 덩달아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올렸다.


“공작저 시녀장 카타리나입니다.”


파견관이 아니라 총지배인, 스컬러리 메이드가 아니라 시녀장.


총지배인은 사용인들 중에서도 서열 3위에 해당하는 인물이고, 시녀장은 저택의 메이드장 바로 다음가는 인물이었다.

어지간해서는 공작저 밖으로 나오지 않는, 사용인들의 수뇌부에 해당하는 인물들인 셈이다. 그들은 일반 평민이 수십 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급여를 단 몇 개월만에 버는 자들이다.


그리고 검사관이라던 소녀도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 모자를 조신하게 내리고서는, 단아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아이셀린 엘레노어 듀플레인.”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한 눈동자에 도는 청아함. 그 영롱한 시선이 데릭을 향하는 듯 하다.

그렇게 데릭을 똑바로 바라보는 소녀의 목소리엔 늘 그렇듯 알 수 없는 기품이 서려있었다.


“...”

“어머.”


가만히 데릭을 바라보고 있던 소녀가 조용히 덧붙여 물었다.


“...놀라지 않으시네요?”


그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녀의 정체에 대해서는 데릭도 추측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신분이 범상치 않다는 사실은 알고도 모른 척 했다. 데릭은 이대로 일처리나 계속 해주면서 금화나 받아먹을 생각 뿐이었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그들이 먼저 신분을 밝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는 뻔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듀플레인 공작저까지 동행해주실 수 있을까요?”


듀플레인 공작가는 이 제국 전체를 통틀어서도 명망이 자자한 3대 귀족가 중 하나였다.

소녀는 최대한 예를 갖추어 정중하게 이야기 하고 있지만, 데릭에게 거부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55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세상에 나쁜 영애는 없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유료 전환 / 골드 이벤트 공지 24.05.14 1,787 0 -
공지 월화수목금 오후 10시에 업로드 됩니다 +14 24.04.04 25,655 0 -
40 마법 (2) NEW +51 6시간 전 5,657 411 24쪽
39 마법 (1) +65 24.05.14 13,071 700 19쪽
38 드니스 (4) +68 24.05.13 16,474 804 26쪽
37 드니스 (3) +54 24.05.09 20,250 887 17쪽
36 드니스 (2) +52 24.05.08 20,122 868 20쪽
35 드니스 (1) +68 24.05.07 21,418 929 22쪽
34 3성급 (4) +49 24.05.06 23,132 889 24쪽
33 3성급 (3) +93 24.05.03 25,079 1,088 18쪽
32 3성급 (2) +42 24.05.02 23,877 1,043 22쪽
31 3성급 (1) +58 24.05.01 24,171 982 16쪽
30 엘렌테 (5) +45 24.04.30 23,452 990 16쪽
29 엘렌테 (4) +58 24.04.29 23,871 1,146 25쪽
28 엘렌테 (3) +65 24.04.22 27,546 1,117 19쪽
27 엘렌테 (2) +44 24.04.19 28,233 1,065 23쪽
26 엘렌테 (1) +45 24.04.18 27,674 1,083 23쪽
25 벨미어드 (5) +68 24.04.17 28,875 1,148 20쪽
24 벨미어드 (4) +69 24.04.16 29,353 1,183 20쪽
23 벨미어드 (3) +69 24.04.15 29,534 1,214 21쪽
22 벨미어드 (2) +67 24.04.12 30,904 1,146 17쪽
21 벨미어드 (1) +63 24.04.11 31,705 1,180 21쪽
20 여정 (4) +72 24.04.10 30,576 1,370 21쪽
19 여정 (3) +50 24.04.09 29,879 1,275 16쪽
18 여정 (2) +47 24.04.08 30,397 1,213 17쪽
17 여정 (1) +37 24.04.06 31,444 1,204 18쪽
16 사제 (6) +79 24.04.05 30,177 1,219 16쪽
15 사제 (5) +45 24.04.04 29,860 1,189 20쪽
14 사제 (4) +30 24.04.03 29,628 1,123 15쪽
13 사제 (3) +66 24.03.31 30,558 1,190 2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