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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초 님의 서재입니다.

전상에의 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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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살초
작품등록일 :
2013.02.26 17:49
최근연재일 :
2013.08.28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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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2.2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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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글자
17쪽

빙의

DUMMY


4월. 시난트로푸스라고도 불리는 4월 중순 약 10일 간은, 달이 태양의 정 반대편으로 넘어가 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절기이다. 이 절기에 날씨라도 흐릴 지면 그날의 밤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완전한 암흑이 찾아오지만, 다행히도 오늘은 밤하늘이 맑게 개었고 잔별들이 열심히 반짝거리며 대지를 비추는 탓에 주변을 분간할 정도는 되었다.

웰치는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감금되어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으로 적적함을 달래려 진영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물론 그가 부지런하거나 업무를 열심히 하는 성격이라서는 아니었다. 단지 심심하고 좀이 쑤셨을 뿐. 그 뿐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자신을 버리고 혼자 재미를 보러 전장에 나가버린 슈아죌에 대한 원망도 한 몫 했다. 배알이 뒤틀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고 해야 맞는 설명이 되리라.

더럽고 치사한 슈아죌. 저 혼자만 재미를 잔뜩 보고 왔다 이거지. 싸우고 싶어 몸이 안달 나 있다는 걸 그리 보여주었음에도, 제일 잘 알만한 녀석이 치사하게 당첨 제비를 뽑아버리다니. 그것 좀 바꿔준다고 어디 덧나냐고. 결국 여기까지 와서 손톱만 물어뜯다 돌아가야 되잖아.

웰치는 슈아죌을 만나도 부러 콧방귀를 뀌며 반가운 기색을 애써 감추었다. 그 이후로도 그가 말을 걸면 무시하고 딴청을 피웠다. 그래도 싸다. 저 혼자 재미를 보았으니까.

분이 풀리지 않아 투덜거리며 걷던 웰치의 귀로 남녀가 아웅 거리는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그 순간 웰치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재밌는 일은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그의 직감이 슬슬 발동이 걸린 것. 웰치가 잽싸게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달려갔다.

"왜요? 왜 안 된다는 건데요!"

"허, 이 아가씨 정말 막무가내여. 젊은 아가씨가 왜 그래요. 안된다니까."

"그러니까. 왜 안 되냐고요!"

"명령이라니까요. 나란들 이러고 싶겄어?"

"쫌!"

웰치가 도착한 수레엔 경비 한 명이 난처한 얼굴로 열심히 설명을 하고 있었고, 수레 안에는 웬 여자가 따박따박 경비에게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눈에 핏발을 세우며 경비를 협박하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포로가 뭐 저리 기가 세?

"이 시간엔 안 돼요. 제발. 조금만 참아요."

"쌀 것 같다니까!"

"풋. 푸하하하!"

결국 웰치가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예상치 못한 제 삼자의 등장에 둘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큭. 큭. 크하하!"

쌀 것 같다니. 정말 고상하기도 한 말솜씨군. 도대체 어느 나라 예법이야?

웰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끅끅거리며 양 볼을 잔뜩 부풀리고 배를 부여잡은 채 금방이라도 볼일을 봐 버릴 표정의 여인을 쳐다봤다.

재밌는 여자다. 재밌는 것 발견.

"어, 어쩐 일이십니까?……."

웰치를 발견한 병사가 급히 경례를 하고 그의 의중을 물었다. 그는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정체불명의 여인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도 그의 기사복을 보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순찰. 재밌어 보이는데, 무슨 일이야?"

"재미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이 여자가 볼일이 급하다고 하도 보채서."

"응? 보내줘. 쌀 것 같다잖아. 큭, 큭. 싸면 큰일이지. 레이디인데."

"안 될 말씀이십니다. 커멘더께서 해가 완전히 진 이후에는 절대 포로들을 내보내지 말라고 하셔서. 더군다나 이 여자는 커멘더께서 강조하신 특별 관리 대상이지 말입니다."

"슈아죌이? 왜? 왜?"

웰치는 슈아죌이 특별히 당부했다는 병사의 설명에서 또 한 번 흥미가 돌았다. 그 녀석이 누굴 특별 취급할 리가 없는데. 확실히 특이한 여자긴 하지만. 예쁘기도 하고.

"내가 책임질게. 아니, 아예 내가 데리고 다녀오지 뭐. 어때? 싫어? 이봐, 나 슈아죌이랑 동직이야. 무시하는 거 아니지?"

"하, 하지만-"

그 때 수레 안에 있던 여인이 끼어들었다.

"거- 아저씨! 멋쟁이 기사분께서 책임지신 다잖아요. 빨리 꺼내줘요."

병사는 정말 불쌍하게도 안절부절 못하다 결국 웰치에게 열쇠를 빼앗겼다. 여인은 재빨리 수레 밖으로 튕기듯 나왔고, 그 반동으로 앞으로 휘청, 하며 웰치에게 안기듯 넘어졌다.

"아. 미안해요. 그리고 꺼내줘서 고마워요."

"별로. 재밌어 보여서. 이름은?"

"뮤즈카 조르셰에요."

웰치는 씩 웃어주고 그녀를 사람들이 없는 멀찍한 곳으로 데려갔다. 적당한 수풀이 나오자 그녀는 달려가서 황급히 치마를 걷어 올렸고, 웰치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이렇게 가까이 있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어이. 끝나면 불러요."

그는 그녀가 있는 곳에서 살짝 떨어져 나왔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그녀에게 신호가 없었고 혹시나 싶어 살짝 뒤를 돌아본 웰치는 기어코 웃음을 터뜨렸다.

"도망? 푸하하! 기가 막히는데? 정말 재밌는 여자네."

그녀는 온데간데없었다. 을씨년스런 바람이 그녀가 사라져 텅 빈 수풀을 휑, 하고 훑고 지나갔다.




"하아… 하아."

아인은 여기저기 성기게 솟아난 수풀들을 헤치며 내달렸다. 아주 극적으로 탈출하기는 했지만 이대로 안심할 순 없었다. 곧 자신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기사가 부리나케 쫒아올 테니까. 이젠 되돌릴 수도 없다. 분명 붙잡히면 즉결을 당하리란 걸 알기에 아인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줄달음질을 쳤다.

"악!"

그러나 그녀는 아무 장애물도 없는 맨 땅에서 혼자 발을 헛디뎌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온몸이 순식간에 흙투성이가 되고 여기저기가 까져 벌건 핏물이 고였다. 그렇잖아도 지친 상태였는데 완전히 힘이 빠져 일어날 힘도 사라져버렸다.

"정말이지… 이게 뭐람."

기껏 보기 좋게 탈출에 성공하나 싶더니만 얼마 가지도 못하고 이런 꼴이라니. 무기력한 스스로의 모습에 한숨이 절로 새어나왔다. 정말, 이렇게 몸으로 때우는 건 전공이 아닌데. 사실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만. 전생에도 그랬다. 팔뚝과 숨겨둔 아랫배를 제외하면 항상 전체적으로 마른 체구였고 운동신경은 엉망진창이었다. 늘 운동할 때면 눈과 손발이 따로 노는 바람에 개망신을 당하거나,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래도. 잘 빠져 나왔잖아."

이 수밖에 없다. 긍정. 긍정. 지독히 현실감 없는 이 가혹한 현실에서 그나마 버텨내려면 끊임없이 자기 암시를 해야 했다. 잘 될 거야. 귀족이, 공녀가, 황녀가 아니면 아무렴 어때. 사지 멀쩡하게 붙어서 잘 살기만 하면 되지. 스마트 폰도, 조아라도, 조니댑도 없는 곳이지만. 살다보면 살만 할 거라고.

아인은 추스르고 일어났다. 낮에 스쳐가며 눈여겨 두었던 몇 민가들이 있는 방향을 지레짐작으로 확인한 다음 발을 절며 천천히 걸었다. 물론, 방향이 맞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몇 걸음을 애써 걸었지만 결국 욱신거리는 다리 때문에 중도에 포기했다. 노곤함에 잠이 몰려온다. 어딘가 편안한 자리를 찾아 눕고 싶지만 주변에는 무성한 풀들 뿐이어서 날씨도 춥지 않겠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머리를 뉘이자 반짝거리는 잔별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예쁘네."

이런 눈물겨운 상황에서 별들은 왜 이다지도 예쁘게 느껴지는 걸까.

"이런데서 자면 다음날 뼈만 발라져 있을걸?"

말소리와 함께 웬 머리통 하나가 불쑥 들이밀어지자 아인은 깜짝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켰고, 사내의 머리에 이마를 부딪쳤다.

"악! 누, 누구?"

"기억력 되게 나쁘네. 조금 전에 봤잖아? 그나저나 고작 여기 오려고 그렇게 도망친 거야? 이런 데서 자면 야생동물 밥이 되기 아주 좋을 텐데. 원하는 게 그거?"

그녀는 '그럴 리가 있냐. 멍청아.' 라고 말해주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억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 사내는 그녀를 웨건에서 꺼내 주었던 기사였다. 붉은 윗머리만 뾰족하게 세운 꽤나 세련된 머리모양새를 하고 있는 그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가 그리 웃긴지는 모르겠다만, 결국 탈출도 글러버린 모양이다.

"왜 말이 없어? 아까 보니까 말 잘하던데."

"탈출도 실패한 마당에 무슨 말을. 전 즉결인가요?"

아인의 말에 사내가, 아니 아직은 어린 티가 나는 청년이 푸앗,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의 웃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아미를 찡그렸다.

"슈아죌이라면 모르겠지만 난 아냐. 그래도 당신을 데리고 나온 책임이 나에게 있긴 하니까, 같이 가주긴 해야겠어. 별일 없을 거야? 아직 당신 도망친 건 아무도 모르니까. 일어날 수 있겠어?"

"아. 어느 정도는요."

청년이 손을 내밀어 그녀가 일어나는 걸 도와주었다. 그녀는 엉거주춤 일어나 엉덩이를 탁탁 털었다.

"왜 도망쳤어? 길을 아는 것 같지도 않고, 더군다나 이쪽으로 가면 백년을 가도 초원밖에 안 나온다고."

"그래요? 잡혀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겠네요. 이런 데서 아사할 뻔 했으니. 그나저나 정말 되는 게 하나도 없네, 기억엔 분명 이쪽이었는데."

그녀의 말에 청년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별것 아닌 말에도 빵빵 터지는 걸 보니 어리긴 어리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방향감각이 엉망이네. 그런데 보통 포로가 되면 얌전히 기다렸다가 풀려나길 기다리는데. 대부분 왕국끼리 협상해서 환송되니까. 굳이 도망칠 필요 있었어?"

"협상에 실패하면 죽는다면서요. 이대로 끌려가서 남의 손에 제 목숨을 맡기긴 싫었어요. 옥살 안이 너무 답답하기도 했고."

사실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큰 이유였다. 그대로 며칠만 더 갇혀 있었다면 없던 정신병마저 생길 지경이었으니.

"생각이 참 독특하네."

"그거야."

그녀는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의 기억을 가졌다는 사실을 말할까 하다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믿지 않고 바보 취급할 게 분명하니 구태여. 하지만 그녀가 입을 닫자 궁금증이 돌았는지 그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그거야 뭐? 뭔데? 말해 봐."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해줘, 빨리!"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말해주라."

"아 정말, 집요한 사람이네."

"뭐? 큭,푸하하하하!-"

그의 웃음보가 또 다시 터졌다. 뭐가 그리 재밌는 거지. 하나도 재미없는데.

"나. 그런 소리 처음 들어봐. 너처럼 이상한 말투 쓰는 여자도 처음 보고. 포로로 잡혔으면 귀족이었다는 건데. 너희 가문에서는 예법 같은 거 안 가르쳐?"

"많이 배웠지요. 밤늦게 돌아다니지 마라. 다리 꼬지 마라. 밥 먹을 때 밥그릇 들고 먹지 마라. 그런 거?"

"그건 무슨 예법이지. 아무튼 재밌어. 좋아. 우리 정식으로 소개 할까? 난 웰치 폰 바우어. 엑시디움 기사단 소속이고, 나이는 스물 셋. 너랑 비슷하지?"

"예. 그러네요."

"별로 안 놀라네."

"놀라야 하는 거예요?"

"응. 보통은 엑시디움 기사단이라 하면 눈을 휘둥그레 뜨거나 손뼉을 친다거나 탄성을 내뱉는 다거나."

웰치의 말에 아인은 눈을 휘둥그레 뜬 다음, 손뼉을 한 번 치고, 탄성을 내뱉어주었고 웰치는 다시 배꼽을 잡고 발을 동동 구르며 숨이 넘어갈 듯 웃었다.

"너 정말 이상하다. 마치 딴 세계 사람 같아."

"어? 어떻게 알았어요? 전 사실 다른 세계에서 살다가 눈을 떠보니 이 몸에 들어와 있었는데. 뭐, 믿지 않아도 크게 상관없지만요."

"진짜로?"

"네."

"정말?"

"그렇다니까. 일어나 보니 딴 세계인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포로니 사형이니 어쩌니 하니 억울하죠. 그래서 도망쳤어요."

그녀의 설명에 웰치가 '그렇겠네.' 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저 심각한 표정. 믿는 건 아니지?

"지금 제 말 믿는 거예요?"

"응. 왜, 거짓말이었어?"

이걸 곧이곧대로 믿는단 말이야?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네.

"거짓말은 아닌데. 믿어주는 사람이 있긴 하네요. 나 같아도 못 믿겠는데- 왁!"

갑자기 얼굴을 확 들이민 웰치 때문에 그녀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는 웃음기 띤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깜짝아. 기사양반. 남자에 굶주린 여대생에게 그런 예쁘장한 얼굴을 들이밀면 곤란하다고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네.

"거짓말 하는 얼굴이 아닌 걸. 그리고 방금 건 거짓말보다 진짜인 쪽이 재밌을 것 같거든."

"고작 그런 이유로?"

"고작이라니. 중요한 거야, 그건."

웰치는 뒤로 돌아 걷기 시작했고 아인이 절름거리며 뒤따랐다.

"그래서. 당신이 살던 곳은 어떤 곳이었는데?"

"제가 살던 곳이라. 설명하기 복잡하네요. 음… 제 기준에서 설명하면요. 사람들은 태어나 글을 아는 나이가 되면 약 이십년 가까이 책상머리 앞에 앉아서 공부를 하다고요, 스무 살이 되면 일, 이년 정도 바싹 놀고 나서 각자 벌어먹기 위해서 하루에 여덟 시간 가까이 일을 하며 살아가죠."

"윽. 뭐야 그게. 하나도 재미없어. 안 좋네. 너희네 고향."

"그런가. 그래도 좋은 점도 많아요. 제가 설명을 못해서 그렇지 거긴 귀족이니, 노예니 하는 신분도 없고, 피튀기는 전쟁도 거의 없고요. 편리한 기계들도 엄청 많아서 살기 좋다고요."

"전쟁이 없다고? 심심하겠구나."

"무슨 소리에요? 전쟁이 얼마나 나쁜 건데. 대부분의 인간은 평화를 원하고, 안전하고 오랫동안 사는 거야말로 인간에겐 가장 행복한 거죠."

"그런가."

그녀의 주장에 웰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표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당최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한참동안의 정적 후에 다시 그가 입을 열었다.

"당신은?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는데?"

"음. 저는 학생이긴 했는데. 아, 가수 지망생. 아니, 가수라고 해둘게요."

"가수?"

"노래 부르는 사람이요. 여기에 비유하면 음유시인이나 악사 정도 되려나."

"둘은 완전 다른데. 아무튼 좋아. 들려줘."

웰치가 걸음을 딱 멈추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갑작스런 행동에 아인이 당혹감에 인상을 찡그렸다.

"노래를 들려달라고요?"

"응. 증명."

아. 정말 막무가내인 사람이네. 게다가 저런 얼굴로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니 도저히 거절을 못 하겠잖아.

아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거절이 불가능해보이자 한숨을 내쉬며 목을 풀었다. 만날 부르던 게 이건데 막상 한 명 앞에서 부르려니 괜히 민망했다.

"뭐.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오랜만에 부르는 것이니 서양 가곡이나 오페라 곡보단 익숙한 가요가 좋겠지. 일 절만 짧게.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녀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끈기 있게 기다리던 웰치는 그녀의 입술이 열리자 마치 빨려 들어갈 기세로 침까지 삼키며 집중했고, 곧 맑게 울리는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천천히 울려 퍼졌다.




울다 지쳐 잠이 들면 갈 수 있을까요

길을 잃은 아이처럼 울고 싶은 밤에

길바닥에 주저앉아 어둠을 붙잡고서

허공에서 슬피 우는 그림자가 보여요

때론 창문 너머 어렴풋이 생각이 나겠지요

때론 슬픔에 잠겨 한없이 울겠지요

울다 지쳐 잠이 들면 갈 수 있을까요

그리운 내 그리운 곳에




임지훈씨의 명곡 <내 그리운 나라>란 노래였다. 아인은 노래를 부르면서 가슴 한구석이 아련히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오래된 곡이어도 많이 좋아했기에 수도 없이 불렀지만 오늘처럼 가사 하나 하나가 와 닿은 적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막상 노래가 끝나자 간단한 피아노 반주 하나 없는 썰렁한 무대의 여파에 민망함이 몰려와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환생하고 나선 처음 부르는 거라 걱정한 것 치곤 만족스러웠다. 새 몸이 예쁜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인은 곁눈으로 웰치의 눈치를 흘끔 보았다. 그는 멍하니 넋을 놓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어린아이처럼 박수를 치고 좋아했다.

"끝내준다! 대단해!"

그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지나친 환호에 쑥스러워진 그녀는 시선을 회피했다. 아무래도 저 불타는 듯한 눈동자는 오래 마주보기가 힘들었다.

"뮤즈카. 맞지? 노래 정말 잘한다. 반해버릴 것 같아. 자주 찾아갈 테니 또 불러줘. 응? 응? 힘든 것 있으면 내가 도와줄 테니까. 응?"

그녀는 씩 웃었다. 분명 연상인데 왜 이리 동생 같은 걸까. 아인은 마치 과자를 달라는 듯 보채는 웰치의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어느새 발이 욱신거리는 것도 잊고 한층 편안해진 얼굴로 밤바람을 느끼며 걸었다.

왠지 걱정했던 것처럼 안 좋은 일들만 일어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불안정한 환경 때문에 시시때때로 감정이 휙휙 변하기도 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스스로가 주인공인양 느껴졌으니까.

갑자기 아인이 웃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옆에서 걷던 웰치가 화들짝 놀랐다. 그리곤 왜 웃는 지나 알고 있는 건지, 호탕하게 따라 웃기 시작했다. 그녀보다 더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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