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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초 님의 서재입니다.

전상에의 아리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완결

살초
작품등록일 :
2013.02.26 17:49
최근연재일 :
2013.08.28 22:45
연재수 :
10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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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8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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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1
글자수 :
65,449

작성
13.02.26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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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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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글자
7쪽

빙의

DUMMY



슈아죌은 비릿하게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벌판에서 한 걸음 내딛었다. 그의 짧은 갈색머리는 후끈 달아오른 전장의 열기 속에서도 윤기가 흘렀고 선 짙은 얼굴의 중앙을 점거한 콧대는 드높았으며 날카롭게 정면을 응시하는 눈동자는 이리스 왕국의 바론 기사단 전부를 압도했다.

"끝이다. 바론 기사단. 무기를 내려라."

슈아죌의 입에서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겨우 열댓 명 남은 바론 기사단은 그의 기세에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투지를 불태웠다. 슈아죌은 새삼 놀랐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는가. 아니, 그들은 아마도 죽음을 각오한 것이리라.

그때 기사단의 가장 선두에서 검게 콧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차분하게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섰다. 슈아죌의 인근에 있던 기사들이 그를 보고 달려들려 했으나 슈아죌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패배를 인정하오, 젊은 로미니의 기사여. 나는 바론 기사단의 캡틴 뮈리엘 죠르셰라고 하오. 마지막 명예를 지킬 기회를 받고 싶소."

"원하는 게 무엇인가."

"아레나."

뮈리엘의 정중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로미니의 기사들이 술렁거렸다. 이 상황에서 기사단 리더들끼리의 결투를 신청한다? 이미 이리스군은 완패해 뿔뿔이 흩어졌고 기사단은 고작 열댓 명 남았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군의 중요한 선봉장이 적장과 일대 일 대결을 받아줄 이유 따윈 없었다. 심지어 몇 기사들은 손가락질을 했고, 웃음을 터뜨린 기사들도 있었다.

"조용."

슈아죌이 나직하게 명령했다. 그의 목소리에 일순 좌중이 조용해졌다.

"다시 한 번 전장에서 이를 드러내고 웃는 자가 있다면 폐하께 직접 고해 기사자격을 영원히 박탈하겠다."

슈아죌의 한 마디에 모든 기사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심하군. 액시디움 기사단 소속 기사가 이런 모습을 보였다면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아들었을 텐데. 기사들 간의 아레나를 이런 취급하는 자들이라니.

그들은 전장에 나온 귀족들의 사유 기사들의 집합이었고, 슈아죌은 왕의 명령으로 중앙 기사단에서 파견된 일시적인 기사들의 리더일 뿐이었기에 그들을 즉결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꾹 눌러 담았다. 그는 기사단 동료들과 같이 파견되지 못한 걸 한탄하며 말의 옆구리를 탁, 찼다.

"부하들의 무례를 사과하지. 풋내기 들이라."

"훗, 로미니의 기사들이 모두 저럴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겠소."

"물론. 난 액시디움 기사단의 슈아죌 폰 실러. 액시디움의 캡틴은 아니지만 참아주길, 당신의 마지막에 부족하지 않게 최선을 다할테니."

슈아죌의 말에 뮈리엘이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액시디움이라면 차고도 넘치지. 게다가 '폰' 이라는 작위를 받은 기사라면 더더욱.

"충분하고말고. 우리를 이 지경까지 몰아넣은 것도 당신의 작품이겠지?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어서 감사하오. 그럼, 먼저. 하!"

뮈리엘이 기합과 함께 말을 몰았다. 슈아죌도 천천히 말을 움직이자 둘의 거리는 금세 가까워졌다. 슈아죌은 마상전보다는 지상전이 더 익숙했기에 평범한 롱소드를 들고 있었고, 그에 반해 뮈리엘은 마상전 전용 랜시아를 들고 우드실드까지 옆구리에 차고 있었다.

둘이 맞부딪히자 보다 길이가 긴 뮈리엘의 랜시아가 먼저 슈아죌을 찌르고 들어갔다. 그러나 슈아죌은 한 뼘 정도 차이로 그의 공격을 피해냈다. 자신의 공격이 무산되자마자 뮈리엘은 재빨리 말의 방향을 틀었고, 덕분에 그의 옆구리를 찔러가던 슈아죌의 검이 우드쉴드에 막혀버렸다.

둔탁한 격돌음이 전장을 가득 울렸다. 고작 한 차례의 공방이었으나 둘의 기세와 속도는 지켜보는 양 쪽의 기사들을 매료하기 충분했다. 그들은 말문을 잃고 슈아죌과 뮈리엘의 결투에 몰입했다.

쩡, 하고 둘의 무기가 맞부딪혔다. 이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힘 싸움이 벌어졌고 놀란 것은 뮈리엘 쪽이었다. 마른 체형의 슈아죌에게 속도에서 뒤쳐지는 건 이해할 수 있었으나 이런 완력이라니? 완력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없다는 건 그로선 이해하기 힘들었다. 결국 한껏 버텨보던 뮈리엘은 먼저 랜시아를 회수했고 그 순간 슈아죌의 롱소드가 그의 배를 관통했다.

끝났군. 슈아죌은 그의 검이 상대의 배를 가르는 순간 완벽히 승리했다고 장담했고,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그 순간, 섬뜩한 예기가 목을 향해 날아온다.

위험하다.

슈아죌이 황급히 고개를 틀었다. 동시에, 랜시아가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슈아죌의 뺨에서 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뱃가죽을 관통당하고서도 무거운 랜시아를 찔러온 것이다.

"대단하군. 위험했어."

슈아죌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전장에 나온 이래 최초로 얻은 상처였다. 뮈리엘은 진정 강한 기사였고, 그의 실력과 긍지는 슈아죌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뺨에서 흘러내린 피가 턱을 타고 어깨와 목을 적셨다.

"큭, 스치는 것뿐인가… 자네가 캡틴이 아니라면, 로미니에는 자네와 같은 실력자가 널려 있다고? 그렇다면 왜 로미니가 서대륙을 통일할 수 없었-"

뮈리엘은 검붉은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그러나 그는 복부가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었음에도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버텼다.

"그렇지 않소. 본 로미니에서도 당신과 같은 기사는 찾아보기 힘들고. 나 또한 당신을 이긴 것을 운이 좋았다고 밖에 생각하지 않소. 그대가 아무 상처도 입지 않은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아레나의 결말은 바뀌었을지도."

"큭. 겸양은."

어느새 슈아죌의 말투는 하대에서 온대로 바뀌어 있었다. 강하고 기사다운 기사는 예우를 받을 만했고, 뮈리엘은 그런 기사였다. 입만 산 작자들은 백이면 백 꼬리를 말았을 그런 열세에서도 그는 제 몫을 다해냈고, 끝까지 그의 자리를 지켰다. 또한 지금도 저리 마상에서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있지 않는가. 비록 안색은 숨을 쉬기도 벅차 보였지만.

"편히 해주겠소."

"부탁이 있네."

"하시오."

"내 뒤에 기사들. 끝까지 싸울 테니. 부디 모욕은 주지 말게."

"당연히."

"그리고… 세레디에 성에 내 딸아이가 있네. 부디. 목숨을. 예우를-"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피를 또 한 번 토해냈다. 이제는 쉬게 해 줘야 하리라.

"내 능력이 닿는 곳까진 그리 하겠소.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편히 가시오, 캡틴 뮈리엘."

뮈리엘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슈아죌의 손이 번쩍, 움직이자 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그 자세 그대로 말과 함께 바닥으로 사그라졌다.

바론 기사단은 캡틴의 죽음을 겪고도 두려움에 젖거나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사기 백배해 열다섯의 기사로 스물셋을 베고서 마지막 한 명까지 검을 휘두르다 죽었다. 고개가 영광스런 핏물로 붉게 물들었다.

전투는 끝이 났다. 군사적 요충지인 세레디에 곡창지를 차지하기 위해 로미니와 이리스가 벌인 일 년간의 사투는 역사적인 전투를 남기고 결국, 로미니의 승리로 기록되었다.



작가의말

♬랜시아(lancea)는 일반적인 마상 돌격용 랜스(Lance)와 달리 마상에서 1:1 전투를 위한 얇고 긴 창을 뜻합니다. 무게는 4~5kg 정도이며 길이는 140cm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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