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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초 님의 서재입니다.

전상에의 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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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살초
작품등록일 :
2013.02.26 17:49
최근연재일 :
2013.08.28 22:45
연재수 :
10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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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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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1
글자수 :
65,449

작성
13.02.2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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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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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글자
18쪽

빙의

DUMMY


"뮤즈카 조르셰! 호송일이오. 삼 분 안으로 채비하시오."

아인이 스스로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기도 전인 꼭두새벽에, 타오와는 사뭇 다르게 거친 분위기를 풍기는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녀는 정신이 없어지도록 보채는 사내들 때문에 혼란에 빠져 허둥지둥댔다. 그들의 태도는 그녀의 준비 여부를 고사하고 자신들이 내뱉은 시간이 지나버리면 곧바로 그녀를 끌고 갈 듯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채비하라고? 무엇을 챙겨야 하는가. 옷도 이것 한 벌 뿐이고 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신분을 증명할 만한 물건을 포함해서 개인적인 유품 같은 것도 아무것도. 그녀가 가진 거라곤 단지 타오가 구해준 작고 흐릿한 거울 하나뿐이었다. 달랑 거울 하나 들고 끌려 나가야 하는 건가, 아니면 이 곳에 있는 물건들이라도 몰래 집어 들고 갈까?

결국 그녀가 고민 끝에 챙긴 건 거울과 주머니에 들어갈 만한 뻣뻣한 빗이 전부였다. 딱히 더 챙길 것도 없었다. 삼 분 가량이 지나자 인근에 있던 병사 둘이 지체 없이 그녀의 양 팔을 붙들고 질질 끌다시피 데려갔다. 신발은 바닥에 끌려 뜨거워졌고 팔은 끊어질 정도로 욱신거렸다.

"제 발로 걸어갈게요, 아파요!"

그녀는 혼란 속에서도 제정신을 차리기 위해 악을 쓰며 병사들에게 고통을 호소했으나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그녀를 성 밖까지 끌고 내려왔다. 그들이 팔을 풀어주어도 마비가 되었는지 욱신거리며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눈물마저 핑 돌았다.

병사들은 영주성 앞, 일렬로 늘어선 포로들의 행렬 맨 끝자락에 그녀를 던져놓고 제 볼일을 보러 가버렸다. 그리고 그 줄 주변은 수백 명은 족히 되 보이는 무장병사들이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래서는 두 손발이 자유롭대도 도망칠 엄두도 나지 않았다. 하긴, 도망쳐 봐야 어디 갈 곳도 없으니. 포로들의 열 끝에는 그들의 무언가를 검사하는 통과의례를 거친 다음 마치 조선시대에서나 보았을 법한 웨건(죄수 호송 마차. 4륜의 정육면체이며 목재 창살이 처진 감옥형.)에 태워졌다.

"이름은?"

안경을 한 번 올려 쓴 사내는 아인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물어왔다.

"아인. 아니, 뮤즈카. 뮤즈카 조르셰에요."

그는 아인의 버벅거림에도 별 내색하지 않고 깃펜으로 무언가를 슥슥 적어내려갔다. 그가 만약 다른 질문을 했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그로서는 굉장히 곤욕스러웠겠지만 다행히도 그는 더 이상의 질문 없이 그녀의 차례를 넘겼다. 이후 아인은 손에 차꼬(굵은 나무줄기로 만든 족쇄의 일종.)를 찬 뒤, 웨건에 태워졌다. 수레 안에는 그녀 외에도 아홉 명의 여인들이 더 태워졌고, 그녀들의 표정은 정말 하나같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의 그것이나 다름없었다. 점점 사태의 심각성이 피부에 와 닿으면서 그녀 또한 극도의 불안감이 전신을 휘감고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이런 건, 소설에서도 읽어본 적 없다고. 정말 이대로 끌려가서 죽고 마는 건가. 살아난 지 얼마나 돼었다고 또 다시 죽음을? 더군다나 저도 모르게 급작스럽게 사고를 당했던 그 때와는 달리, 지금은 죽음을 기다리며 공포와 불안감을 견뎌야 한다. 떨림이 잦지 않고 점점 아득해진다.

"저, 저기-"

누군가와 대화라도 나누면 괜찮을까 싶어 바로 옆에 앉은 여인을 툭, 불러 보았으나 그녀는 마치 경기를 일으키듯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수레 안은 이미 공포에 잠식돼 어떠한 교류가 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는 단념하고 무릎을 모았다. 차라리 잠에 들면, 그러면 조금이라도 나아질 거야.

하지만 그녀가 열심히 잠을 청해도 잠은 오지 않았고, 모든 수레가 다 채워졌음에도 행렬은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그저 누군가를 기다리듯 그 자리에 우두커니 정지해 있었다. 그녀는 그 답답함이 점점 제 목을 졸라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순간, 저도 모르게 목으로 손이 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많은 사람이 기다렸던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인은 한 눈에 그 사내가 타오에게 들었던 슈아죌이란 이름의 커멘더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누구라도 알 수 있었을 거다. 눈부시도록 반짝이는 청록색 갑주에 눈부시도록 화려한 회백색 말. 위풍당당하게 걸어올 때마다 병사들이 선망 가득한 눈빛으로 길을 열어 주었으니까.

그는 가장 바깥쪽의 수레부터 하나하나 살피며 걸어왔고, 그가 지척에 다가오자 아인은 목을 길게 빼 슈아죌의 인상을 구경했다. 확실히 그의 인상은 그의 배경이나 지위 같은걸 차치하고서라도 그녀를 위축되게 만들기 충분했다.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지?

그는 마치. 그래, 아무런 감정이 없는 목각인형이었다. 키도 큰 데다 외모가 조각 같았으며, 이목구비는 반듯했고, 콧날도 완벽할 정도로 곧았다. 짧게 자른 갈색 머리칼은 사방으로 흩날리도록 독특하게 손질되어 있었으며, 머리색보다 더 진한 눈동자에는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위압마저 감돌았다. 그녀는 그의 무심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숨이 헉 하고 막혀왔다.

그는 잠시 옆에 있던 병사와 말을 주고받더니 점차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온다. 온다. 온다.

맹세코 이 순간은 앞으로 살아가야 할 두 번째 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리라 확신했다. 이대로 끌려가 무자비한 취급을 당할 지, 아니면 짜잔 하고 부활해 파란만장한 생을 살아갈지가 바로 지금 달려 있을 테니까. 그녀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를 똑바로 직시했다.

이계에 끌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던데, 도대체 이 남자의 눈빛은 왜 이토록 정신을 놓게 만드는 거니. 맙소사. 정신 차리자. 보았던 대로, 기억나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되. 최대한 신비로우면서도, 예쁘고, 부드러우면서도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는 도시 여자 컨셉으로.

"그대가."

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결국 그녀는 그의 눈을 피해버렸고,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굵직한 음성도 놓치고 말았다.

"…인가?"

"네?"

아인은 순간적으로 반문하며 그의 갈색 빛 감도는 흑색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또 다시 머릿속에 정리해두었던 멘트들을 모조리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사내는 아무런 감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으며 다시 또박또박 읊조렸다.

"그대가 뮈리엘 조르셰의 영애, 뮤즈카 조르셰인가?"

"네? 아 저- 아, 네. 맞아요. 슈아죌 커멘더님이시죠? 그러니까, 음. 고맙습니다. 덕분에 편하게 쉬었어요."

이렇게 말 걸기가 어려운 사람이라니. 그녀는 또 한 번 좌절했다. 최대한 예쁘게 보이고자 눈웃음까지 치며 웃었건만, 그의 인상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일생, 아니 이생동안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말 거는데 있어서 주저해본 적이 없었고. 이번이라고 해서 다를 것도 없었다. 어쨌든 이 사람도 사람이니까.

"내 덕분이 아니다. 그대의 아비에 대한 예우일 뿐. 하지만 혹 오해하고 있다면 미리 언질 하지만 난 그대에게 일말의 특혜도 줄 수 없으니 기대는 말도록."

"아하하. 그러시군요. 굉장히 차가운 분이시네요. 그럼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소녀의 아버님과는 어떤 관계였는지 말해주실 수 있나요? 적국의 커멘더께서 어떤 일로 돌아가신 아버님의 예우를 해 주시는 건지-"

"그대에게 말해줄 의무가 없다."

순간 빠직, 하고 아인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말을 하면 끝까지 듣긴 해야 할 거 아냐. 왜 남의 말을 냅다 끊는 건데? 원래부터 쉬운 여자로 보이지는 않을 각오를 했지만 이건 굳이 다짐이 아니더라도 부아가 치밀어서 그냥 넘어가기가. 뭐가 이렇게 고자세냐고.

"아 예, 그러시군요. 제길."

"……."

이런. 말이 헛 나왔다. 얼굴은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너무 뻣뻣하게 구니까 순간 옛 버릇이 자연스레. 이거,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하는데ㅡ

"지금 그대의 앞에 있는 것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 정돈 잘 알고 있지요. 커멘더님 이시잖아요. 그것도 아주 능력 있고 멋지신. 혹시 방금 전 헛나온 말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난 그대를 즉결할 수도 있다."

또. 또. 말을 끊어버리다니. 잘나신 분이면 이렇게 사람 말을 막 끊고 제 할 말만 해도 되는 거야? 아인은 기가 막혀서 두통이 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전생에서 친구들과 나누던 걸쭉한 대화들이 나오지 않도록 신경쓰면서 조목조목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절 협박하시는 건가요? 제가 지금 이렇게 갇혀 있다고 그렇게 무게 잡으면서 한 마디 하면 깨갱 할 줄 아셨나본데. 전 그렇지 않아요. 게다가 전 커멘더님과 대화를 하고 싶었지 싸우고 싶었던 게 아니라고요. 사람이 왜 그렇게 말을 삐딱하게 하시나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아인은 여전히 다부진 표정으로 슈아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비록 그녀의 눈동자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지만. 그리고 슈아죌은 속내를 짐작 할 수 없는 안색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수 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고요가 흐르고, 마침내 슈아죌이 입을 열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군."

"네?"

"좀 더 예법을 중히 여기는 여자라 생각했는데. 하긴. 포로 웨건에서 예법을 기대한 것 자체가 무리였나."

"레이디의 말을 끊어버리는 무례도 예법인가요? 그게 아니라면 커멘더님께서도 예법을 조금은 중히 여기셔야 할 것 같아요."

아인은 얼음장 같이 차가운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려 애썼다. 여기서 물러나면 끝이다. 어차피 설설 기어봐야 이렇게 높으신 눈에는 차지도 않을 테고. 어떻게든 깜짝 놀래켜줘야 '나에게 이렇게 대한 건 네가 처음이야' 하면서 관심이라도 보일 테니까. 당당하고, 도도하게 나가야 한다. 그녀의 바람대로 슈아죌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너 같은 경우 없는 여자는 처음 본다.' 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어쨌든. 절반은 성공인가.

"비록 지금은 이렇게 포로의 처지이지만 저도 귀족이었던 여인입니다. 레이디에게 기사로서의 기본적 예의는 지켜주세요."

이 정도면 어필은 되었겠지. 아인은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또박또박 잘도 말해준 자신의 입술과 혀를 칭찬하며 슈아죌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바람대로의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화만 돋구었을 뿐.

"한동안 실성을 했다가 정신이 되돌아왔다고 들었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군. 여전히 실성한 채인가."

하. 실성? 지금 멀쩡한 사람을 미친 여자로 만들려는 건가. 일등 신랑감이라더니. 완전 거만하고 제 잘난 맛에 살 뿐만 아니라 재수도 없잖아?

"뭐라고요?"

"귀도 잘 안 들리는 모양이고."

더 이상은 못 참아.

"이봐요, 기사양반. 전 멀쩡하다고요. 도대체 제가 어딜 봐서 실성한 사람으로 보여요? 실성한 사람 눈에는 모든 사람이 실성한 사람으로 보인다는 것. 못 들어봤어요? 정말 아까부터 사람 기분 나쁘게!"

아인은 두두두 쏘아붙인 다음에 속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잠시 후. 순식간에 얼음물을 끼얹은 듯 싸해진 분위기에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방금 그녀가 막말을 내뱉은 상대가 누구며, 지금 자신의 상황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슈아죌은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느낀 건지, 아니면 그녀가 정말로 실성했다고 생각한 건지, 혹은 정말 열이 받은 건지 홱 몸을 돌려 다음 수레로 걸어가 버렸고 같은 웨건에 탄 여인네들을 그녀를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수레 주위를 지키던 수백의 병사들은 그녀를 불쌍해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녀는 그저 황망한 표정으로 나무 창살을 붙잡고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오 마이 갓. 이거 정말 굉장한 사고를 쳐버렸는데.






어떡하지. 어떡하지. 정말 어찌합니까. 어떻게 할까요.

그녀는 삽시간에 포로 주제에 기사에게. 그것도 부대의 리더인 커멘더에게 막말을 해 버린 정신 나간 여자가 되어 버렸다.

"하아. 내가 미쳤지."

스스로가 생각해도 그땐 정말이지. 이게 문제야. 막상 말 할 땐, 생각 없이 내뱉어 버리고 나중에 후회하는 것. 왜 그 때 좀더 신중하지 못했을까. 원인은 현실감이었다. 바로 방금 전 까지 멀쩡히 잘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런 상황에 떨어져 버리니 현실감이 없어 마치 소설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멋대로 떠든 것이다. 후회는 되지만 후회한다고 달라질 것도 아니고. 앞으로라도 좀 더 신중히, 조심히 행동하리라 다짐할 뿐이었다.

구토가 올라올 정도로 심하게 흔들리고, 투박하며, 좁기까지 한 공간에 오랫동안 앉아 있으려니 하반이 자꾸 욱신거렸다. 잠시 후, 정말 오래간만에 행군이 멈춘 틈을 타 그녀는 병사에게 화장실 볼일 핑계를 대고 수풀들 사이로 들어왔지만 불과 이, 삼 미터 떨어진 곳에 칼을 든 남정네가 떡하니 감시한다고 버티고 섰으니 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쪼그려 앉아 한숨만 내쉴 뿐. 양심적으로 이건 너무 가깝잖아. 진짜 볼일을 보려고 해도 못 하겠네.

결국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또다시 손에 차꼬가 채워지고, 지긋지긋한 웨건에 올랐다. 다행히 간만의 휴식이기 때문인지 행렬은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고 멀리서 여기저기를 점검하고 다니는 슈아죌의 모습이 보였다. 지치지도 않나. 그의 모습은 언제나처럼 단정하고 흐트러짐 없었다. 그 날의 사고를 수습해 보고자 무언가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는 그 일 이후로 그녀에게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항상 사고만 치고 다니더니 결국 여기서도 크게 한 건 하는구나. 퍽이나 장하다. 윤아인.

"응?"

그녀가 이렇게 스스로를 힐책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나무 창살 사이로 그녀의 등을 쿡, 찔렀다. 그녀가 뒤돌아 본 곳에는 반가울 얼굴이 있었다.

"아저씨? 타오 아저씨?"

이계에 떨어진 그녀에게 처음으로 호의란 것을 베푼 사내. 타오였다. 그녀는 반색하며 기뻐했고 타오도 히죽 웃었다.

"뮤즈카 양. 잘 지냈어요?"

"잘 지내긴요. 보다시피 죽지 못해 살고 있죠. 타오 아저씨는 여기에 어떻게 온 거에요?"

"우리 분대가 포로 호송부대로 뽑혔지 뭐에요. 뭐, 수도로 가서 가족들도 볼 수 있고. 기쁜 일이죠. 진작 찾아오려고 했는데 워낙 경황이 없어서. 그보다 괜찮은 거예요?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가 너털웃음을 터트리자 괜스레 민망해졌다. 자자하겠지. 하지만 이렇게 크게 터뜨리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하아. 괜찮을 리가. 그 커멘더님, 홧김에 즉결한다고 하지는 않을까 걱정되네요. 이승 뜨기 전에 미리 작별인사라도 할까요, 우리?"

"큭, 큭큭큭 뭐라고요? 역시 재밌는 아가씨네. 그런 걱정일랑 말아요. 커멘더님은 공과 사를 아주 똑 부러지게 구분하시는 분이니까요."

네. 어련히 그리 보이네요. 아인은 그렇게 대답하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도 한 번 죽기 전에는 항상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갔었는데. 요새 들어서 자꾸 부정적인 생각들이 고개를 자꾸만 내밀었다. 외로움도 점점 커져 오늘 타오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사무치게 서러웠었다. 여기에 타오가 있어서 정말 다행스러웠다.

"출!"

휴식의 종료를 알리는 외침이 들렸다. 여기저기서 분주하게 채비를 시작했고 타오도 간단히 아쉬움을 토로하고서 제 위치로 되돌아갔다.

행군은 무자비한 강도로 지속되었다. 아인은 자신이 수레에 태워져 이동해 망정이지, 혹여 두 발로 걸어가야 했다면 분명 하루도 못 가 쓰러졌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왜냐.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데도 죽을 것 같았으니까.

무리는 주로 평야를 경유해 이동했다. 나무 창살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서럽도록 아름다웠다. 마치 티브이에서나 보던 '동물의 왕국'의 오프닝 화면을 보는 것처럼 탁 트인 초원에, 뜸하게 노니는 야생동물들까지. 어쩌다 한 번씩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 사이로 붉은 석양이 질 때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샘솟기도 했다. 이 엿 먹을 몸에서 살아난 지 고작 일주일이 지났을 뿐이고, 감옥이나 다름없는. 아니지 실제로 감옥인 이 웨건 안에 갇힌 지는 고작 나흘도 지나지 않았는데 마치 서너 달은 족히 지난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답답함. 불안감. 고독. 외로움. 이것들이 좁은 창살 안에서 답답하도록 목을 죄어 온다. 벗어나고 싶다. 밖은 저렇게 넓은데도 이 좁은 수레에 아무 물음도 대답도 없는 열 명이 발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나흘을 꼬박 갇혀있는 건. 정말 고역이었다.

닷새째가 되니 한 개의 무리가 더 합류했다. 경황이 없어 제대로 볼 순 없었지만 이번엔 짐들이 가득한 수레 열 몇 개와 백 명 남짓 되는 병사들이었다. 그들이 합류하자 그래도 숨통은 트일 정도로 행군의 속도가 느려졌다. 아마 이들과 합류하기 위해 이리도 강행군을 해 온 것이리라.

"휴식!"

행렬이 멈췄다. 몇몇 여자들이 볼일을 보기 위해 수레 밖으로 나가자 한결 넓어졌다. 아인은 오랜만에 기지개를 펴고 발을 쭉 뻗었다. 찌뿌듯한 몸이 어느 정도 노곤해진다. 그리고 한동안 엄두가 안 나 꺼내지 못했던 거울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맙소사. 이미 각오를 했는데도 결과는 소스라칠 정도였다. 거울 안의 그녀는 마치 다른 사람이었다. 얼굴엔 그늘이 져 생기라곤 없었고, 감지 못해 푸석해진 머리와 먼지가 몸과 옷 여기저기에 쌓여 그녀 스스로도 감탄했던 외모가 빛을 바래고 있었다. 이런 꼴로는 정말이지.

차라리 도망쳐 볼까? 어차피 이대로 있으면 결말은 뻔히 보이는데. 끝이 훤히 보이는 레이스를 고집할 필요는 없잖아.

그녀는 무언가를 굳게 결심한 듯 주먹을 불끈 쥐고 입을 앙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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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

  • 작성자
    ㄴㄴㅇ
    작성일
    13.03.28 21:44
    No. 1

    전형적인 여주 소설에서 나오는 별거 아닌것 가지고 말꼬리잡고 ,서로 말씨름하기군요..현실에서도 저런걸 안좋아해서 그런지 ..여주소설에 저런 장면나올때마다 피곤하다는..근데 여자독자들은 저런걸 좋아하는듯..선호도가 있으니 넣겠죠.

    찬성: 0 | 반대: 0 삭제

  • 작성자
    Personacon 유은선
    작성일
    13.07.02 20:28
    No. 2

    여주는 호감인데 남주는 비호감.
    근데 여자들한텐 남주가 호감일듯!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작성일
    13.08.11 17:01
    No. 3

    다른 소설의 여주들은 의도적으로 틱틱대지않는데 이 여주는 일부러 그걸 노리군요 임팩트를 심어주기위한 맞나 ㅋㅋ

    찬성: 0 | 반대: 0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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