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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초 님의 서재입니다.

전상에의 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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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살초
작품등록일 :
2013.02.26 17:49
최근연재일 :
2013.08.28 22:45
연재수 :
104 회
조회수 :
103,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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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1
글자수 :
65,449

작성
13.02.26 19:14
조회
3,328
추천
22
글자
10쪽

빙의

DUMMY


날씨 한 번 더럽게 좋군.

기사들에게 다음 행동강령을 전할 요량으로 영주성을 나온 슈아죌은 필요 이상으로 화창한 날씨에 인상을 찡그렸다. 뇌우라도 한바탕 쏟아져 영주성에 벼락을 꽂아버리면 참으로 통쾌하련만. 실없는 생각이군. 조소가 흘러나왔다.

"커멘더 슈아죌, 범법자들입니다."

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대로에 미하일이 포함된 무리의 기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앞에는 허리 뒤로 양손이 포박된 채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세 병사와 목이 잘려 널브러져 있는 시신 한 구가 있었다.

"마침 너희를 찾으러 가던 참이었는데. 무슨 일인가?"

"명령을 어긴 병사들을 잡아왔습니다. 셋 모두 이 편대에 속해있던 자들이고 죄명은 민가 파괴와 강포 및 폭행입니다. 더불어 저 시신은 이들의 백부장이었던 자로, 죄명은 전시 강간입니다."

미하일은 말 한 번 더듬는 일 없이 또박또박 설명했다.

"저 자를 죽인 건 누구지?"

"접니다. 그 자리에서 군법에 따라 즉결했습니다."

미하일은 마치 극본을 읽듯 무감정히 보고했다. 어투로만 봐서는 옆집 개가 감기에 걸렸다고 말하는 투였다.

"좋아. 그럼 나머지 셋 또한 너의 의지대로 처벌하도록."

"예."

그의 판단은 슈아죌이 원했던 대로였다. 보면 볼수록 그는 일개 귀족의 기사로 있을 만 한 자가 아니었다.

"아, 그리고 나이트 미하일."

"말씀하십시오."

"혹시 날 따라 중앙 기사단으로 올 생각은?"

슈아죌은 그를 수도로 데려가 왕실의 기사단에 추천할 생각이었다. 그 정도의 인재라면 기사단에서도 인정하리라. 하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미하일은 놀라거나 망설이는 기색 없이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미 모시는 주군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쉽군."

슈아죌은 쉽사리 단념했다. 예상했던 일이다.

"기사들은 이제 각자 소속된 주군에게로 돌아가서 다음 전투 때까지 쉬도록. 미하일, 기회가 된다면 또 만나지."

"훌륭한 리더의 밑에서 잠시나마 일한 것을 영광으로 삼겠습니다."

"징그러운 소리는 집어 치우지. 이제 그대들의 상관도 아닌데."

슈아죌과 미하일은 피식 웃었다. 소속은 다르지만 언젠간 그와는 다시 한 번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쓰레기 같은 귀족들 밑에서도 저런 기사가 나온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웠다. 하긴, 연꽃은 흙탕 속에서도 찬란하게 꽃피운다 했었나.




영주성으로 되돌아온 슈아죌은 잠시 잊고 있었던 이리스의 기사 뮈리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리 위에 놓은 포로들의 명단에서 죠르셰라는 성을 가진 여인이 있는지 확인했고, 어렵지 않게 뮤즈카 죠르셰라는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뮤즈카 죠르셰. 십구 세. 세레디에 로즈타운거주. 이 여자인가."

그는 면식도 없는 여자를 찾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깝깝했지만 명예까지 걸고 한 약속을 무를 순 없는 법이니 인상을 구기며 지하로 내려갔다. 그리고 지하로 내려와 독방에 눕혀진 그녀를 본 순간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경비, 이건 무슨 상황이지?"

눈이 찡그러질 정도로 새파란, 아니 시퍼런 머리칼과 핏기 없이 창백한 안색의 여인은 정신을 잃고 눕혀져 있었다. 얼핏 보니 손목에 흰 붕대가 감겨있는 걸 보아 전후 사정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지역 기사의 영애인데, 저택에 병사들이 들이닥친 순간 자결을 시도했답니다. 포로를 한 명이라도 더 늘려야 한다는 제너럴님의 명에 따라 응급처치를 하긴 했으나-"

아직까지도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다, 이 말이군.

"자진이라……."

그 아비에 그 딸인 걸까. 성이 함락되고 패배를 깨닫자마자 자결을 시도한 여인. 그녀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우습게도 '명예를 아는 여자군'이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명예롭게 죽을 기회도 헤랄드 백작의 탐욕에 의해 산산 조각나 버렸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물론 목숨을 지켜주고 예우를 부탁받은 그에게는 약속을 지킬 수 있어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녀를 사 층으로 옮겨라. 포로지만 귀족으로서의 예우를 해주고 불편함이 없도록 시녀를 붙여. 그리고 깨어나면 곧바로 내게 이르도록."

"예? 예."

저 깐깐한 커멘더가 여자와는 말은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는 것은 대부분의 병사들이 알 정도로 유명한 사실이었기에 경비병은 그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슈아죌은 그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생각이 없는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틀은 금방 지나갔다.

슈아죌은 지난 몇 년 동안 그래왔듯 오늘도 어둠이 가시지 않은 꼭두새벽부터 기침해 몸을 풀기 위해 연무장으로 나왔다. 가장 깨끗한 기운을 몸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대를 놓치지 않으려는 그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아직 해조차 뜨지 않은 시간이니 당연히 연무장은 휑하니 비어있었다. 그는 가볍게 얼마간 달린 후 검을 뽑아들었다. 스르릉, 맑은 소리를 내며 뽑힌 검은 오랜 전투를 치뤘음에도 새것처럼 반짝였다. 값이 비싸거나 대단한 장인이 만든 명검이라서가 아니라, 단순한 보급품이지만 워낙 평소에 관리를 잘 해둔 덕이다.

그는 천천히 검을 횡으로 한 번 그었다. 이어서 종으로 한 번, 찌르기까지. 검 끝에서 미세한 흔들림도 찾을 수 없는 정교하고 절제된 동작이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단순한 베기와 찌르기를 반복하던 그는 점차 검을 변칙적으로 움직였다. 베다가 찌르기도 하고, 찌르다가 급격히 베기도 했다. 그리고 어지러울 정도로 변칙적인 움직임은 점차 빨라져 종전에는 육안으로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속도를 보였다. 그의 몸은 완전히 검광에 가려 어느새 떠오른 태양의 반사광만이 연무장 중앙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그 뒤로도 한참동안.

"후우-"

움직인 순간부터, 단 한시도 멈추지 않았던 그의 검이 마침내 멈췄다. 슈아죌은 이마에서 땀방울을 훔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새벽 훈련이 끝난 그는 곧바로 몸을 씻었다. 땀을 흘린 후의 샤워는 언제나처럼 상쾌했고 그는 시동이 아침식사로 가져온 바를로 소스를 곁들인 송아지 스테이크의 육질에 만족하며 접시를 말끔히 비워냈다.

전장으로 파견된 이후 오랜만에 누리는 한가함이었다. 비록 기사단 동료들은 한 명도 없이 똑 떨어져 외롭기는 했으나, 어차피 곧 되돌아갈 테니까 그건 견딜 만 했다. 옆에서 떠드는 이 없는 조용함을 실컷 즐기다 갈 요량이다.

아, 할 일이 있었지.

기사단 동료들을 생각하다보니 편지를 쓸 곳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거 또 큰일을 낼 뻔했군. 슈아죌은 깃펜을 잉크에 찍어 두 통의 편지를 휙휙 써 내려갔다. 하나는 폐하께 올릴 보고서로, 전쟁의 과정, 결과 등과 더불어 차후 세레디에 성의 사용에 대한 전략적 조언까지 상세히 적었다. 주제넘은 참견일지도 모르지만, 혓바닥만 긴 귀족들보단 기사들을 더 신뢰하는 편인 폐하의 성격상 이 조언을 달갑게 받아들이시리라.

또 한통의 편지는 인근 영지에서 보급부대 보호 임무를 맡은 기사단 동료 웰치에게로 보내는 것이었다. 편지엔 내일 수도로 출발하니 만나서 갈 수 있게 나흘 후 출발할 채비를 하라는 내용이었다. 싸우고 싶어 안달 난 녀석이 보급부대에 남겨져 입이 닷발은 나와 있을게 자명하니 이렇게라도 챙겨 줘야 한다. 번거롭지만.

똑똑, 끊김 없이 휙휙 움직이던 깃펜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멈칫했다. 방문할 만한 이는 없을 텐데. 슈아죌이 고개를 갸웃하며 방문자를 들여보냈다.

"커멘더님, 조르셰양이 깨어났습니다."

편지쓰기를 방해한 것은 낯익은 병사였다. 그런데 누가 깨어났다고? 조르셰? 뭐하는 여자인지 몰라도 그게 어쨌다는 건가.

"그게 왜?"

"…예?"

"그걸 왜 나에게 보고하느냐고."

병사가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저 병사. 어디서 봤더라.

"기사님께서 죠르셰양이 깨어나면 언질하라고-"

"……."

슈아죌은 이마를 짚으며 곰곰이 기억을 되새겼다. 이런, 잘 생각해보니 잊고 있었던 아이리스의 기사와 그 딸의 일이 기억났다. 또 고질적인 건망증이.

"아. 아. 그래. 그녀의 상태는?"

"그것이, 신체상으로는 별 다른 이상이 없습니다. 헌데, 언행이 조금 이상합니다."

"무엇이?"

"예. 듣자니 깨어나자마자 몸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다시 기절했답니다. 두 번째로 정신을 차렸을 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 사람처럼 이것저것 물어보더랍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 같기도 한데, 자기 말로는-"

병사는 스스로도 황망한 듯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이계에서 왔답니다."

"뭐?"

"다른 세계에서 왔더랍니다. 차원이동이나 환생을 한 것 같다고 스스로 주장을-"

"……."

잠시 침묵이 흐르고 한참 후에 슈아죌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실성했군. 딱하게도 정신을 놓아버렸어."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기사다운 아비 밑에서 자란 명예를 아는 여인이었거늘. 그는 여인의 안타까운 운명에 애도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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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Personacon 유은선
    작성일
    13.07.02 20:17
    No. 1

    어라?
    그냥 하얀로냐프 강 비슷한 건줄 알았는데
    여기서 갑자기 튀어 나오는 이계 차원 이동 설정에 급반전 ㅋㅋㅋ
    재밋겠다 +_+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오올
    작성일
    13.08.11 16:31
    No. 2

    올~~~~~~~~~~~

    찬성: 0 | 반대: 0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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