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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초 님의 서재입니다.

전상에의 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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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살초
작품등록일 :
2013.02.26 17:49
최근연재일 :
2013.08.28 22:4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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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449

작성
13.02.26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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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빙의

DUMMY


꼬르륵, 배를 곯는 소리가 처량하게도 들렸다. 그리 않아도 얇은 허리가 뱃가죽과 등가죽이 서로 안녕하세요, 하려는 걸 보아하니 이놈의 몸뚱이라는 며칠은 족히 굶은 모양이다.

아인은 더는 참지 못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방문을 두드렸다. 적응이고 자시고 우선 주린 배를 채우는 게 시급했기에. 그녀는 사정없이 방문을 두드렸고 그 덕에 얼마 지나지 않아 환생하고 두 번째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안녕… 하세요?"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기대했던 집사라던가 하인이 아닌, 군인으로 추정되는 사내였다. 머리에 쓴 무겁고 둔해 보이는 모자며 허리춤에 찬 묵직해 보이는 쇠뭉치며, 배와 등을 가리는 목재 옷. 세상에 어느 누가 목재 옷을 입을까 생각하면 역시 답은 하나였다.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건 참으로 기쁜 일이지만, 하필 군인이라니. 무서운 것도 문제지만 심지어 말도 안 통하는 건지 그는 놀란 눈으로 자신을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머리를 긁적이며 손바닥을 들어 보이는 제스처를 포함해 다시 한 번 인사했다.

"헤헤, 안녕하세요?"

이런, 너무 고상하게 인사했나.

"아! 깨어나셨군요. 너무 놀라서 그만 실례를 했습니다. 조르셰 양. 사층의 경비를 맡은 타오입니다. 몸은 좀 어떠신지요."

그나마 다행인 건 말이 통한다는 점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통한다기 보단 그녀의 몸이 그녀가 살아온 십 수 년간의 생활로 문장과 문맥의 의미를 기억하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말하고 싶은 단어를 떠올리기까지는 한참이 걸리는 게 문제긴 했지만 이 정도면 금세 적응할 수 있으리라.

그녀는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떠오르는 단어들을 정리하며 대답을 기다리는 그에게 답사를 해주었다.

"네. 아주 좋은데요. 머릿속이 텅텅 비어있다는 것만 제외하면요."

의미가 제대로 전달이 되었으려나. 그녀는 그의 눈치를 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타오라는 남자의 표정은 속내를 짐작하기 힘든 표정으로 변했다.

"예?"

저런, 하나도 못 알아들은 건가.

"머릿속이 텅 비었다고요. 혹시, 제 이름이 조르셰인가요?"

"기억이 나지 않으신다고요?"

"알아들으셨네. 네.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아요."

동네 삼촌같이 친절해 보였던 그의 인상은 점점 요상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쩌겠어, 정말 하나도 모르는 걸.

"충격으로 기억을 잃으셨나 보군요. 예, 뮤즈카 조르셰. 그게 조르셰양의 성명이 맞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혹시- 전 뭐 하는 사람이었나요?"

"정말 하나도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몇 번을 말하게 하는 겁니까. 안 난대도요.

"네. 아- 무것도."

"딱하게도! 하긴. 이해합니다. 충격이 여간 적지 않으셨을 테니……."

타오의 표정에 안쓰러움, 연민, 동정 비슷한 것들이 잔뜩 떠올랐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은 그녀의 지옥처럼 기분 나빴던 예감을 여실히 증명해주는 충격적인 말이었다. 아니, 오히려 걱정했던 것보다 더. 최악이었다.

"아버지와 가족들을 잃고 적국의 포로가 되셨으니 충격을 받으실 만도 합니다. 그나마 조르셰양은 커멘더님의 배려 덕분에 지하에서 사 층으로 옮기셔서 처우가 양호한 편입니다. 지하에 있는 포로들은. 끔찍하죠."

아인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참혹한 현실에 좌절하고 또 좌절했다. 한 번 죽은 것도 모자라 낯선 세계에 뿅, 하고 떨어졌더니 기껏 얻은 두 번째 삶에는 가족들을 잃고 적국의 포로가 되었다니. 전쟁이란 걸 겪어본 적 없는 그녀인지라 포로라는 게 어떤 직업인지는 잘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앞으로 그녀의 삶이 결코 순탄치는 못할 것 같다는 촉이었다.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그래서 저는 앞으로 어떻게 되나요?"

"아마 수도까지 환송되고. 패전국인 이리스가 로미니와의 협상에 응하고 배상금을 지불한다면,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협상이 안 되면요?"

"일반적으로 처형-"

타오는 반사적으로 대답하다 순간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그리고 황급히 말을 바꿨다.

"아, 아마 노예로 신분이 격감되실 겁니다……. 하지만 걱정 말아요. 패전국이 본국의 귀족들을 버리고 협상을 거부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요."

하지만 그의 바뀐 대답도 그리 유쾌한 것도 아니었다. 맙소사. 어쩌면 이리도 운도 지지리도 없는 걸까. 고아에 포로. 그 이후에 사망, 혹은 노예 루트라니. 울고 싶어졌다.

"어쩌다가 이런 이상한 처지의 몸에 환생해서는."

"예?"

순간 아인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던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실수를 한 것 같아 그의 되물음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사실대로 얘기하는 것은 어떨까. 어차피 얻어먹을 것도 없어 보이는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느니 이계에서 환생했다고, 다른 세계의 지식을 이용해 이 나라에 도움을 줄 테니 살려달라고 하는 거지. 그것도 좋겠네. 그녀는 결심을 굳혔고 타오를 향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사실은 타오씨. 제가 기억을 잃은 게 아니에요. 사실은 저요. 다른 세계에서 왔어요. 지구라는 곳인데, 사고를 당해 눈을 뜨니까 이곳이더라고요. 그러니까 전 뮤즈카라는 그 사람이랑 다른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그 장군님한테 얘기 좀 해 줄래요?"

"……."

쉽게는 믿지 않을 거라 각오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 대놓고 미친 여자 보듯 할 줄은.

"정말이에요. 제가 있던 곳에선 사람이 고철을 타고 막 날아다니고. 전쟁도 저런 칼 들고 하지 않아요. 순식간에 사람을 죽이는-"

아인은 비행기나, 총 등의 단어를 설명하지 못해 진땀을 빼다가 더 이상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입을 앙다물었다. 타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깨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셀레나에게 밥을 가져오라고 해 줄게요. 저는 커멘더님께 보고를 드려야 해서."

미안한 표정으로 일어나는 타오를 붙잡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홱 나가버렸고, 아인은 갑자기 답답하게 느껴지는 텅 빈 감옥에 덩그러니 남겨져 버렸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꼼짝 없이 갇혀 있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녀를 '스마트폰이라도 있었으면 좋을 텐데' 와 같은 실없는 생각에 빠트렸다. 그나마 셀레나라는 이름의 시녀가 가져다주는 식사가 포로에 대한 대우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알찼으니 먹는 재미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먹는 순간만큼은 그녀 스스로의 처지마저 잊을 정도였으니. 하루 동안 틈틈이 들어와 보살펴준 타오와도 상당히 친해져 그로부터 이것저것 많은 정보와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계에서 왔다는 걸 그에게 설명하는 건 결국 포기했다. 어차피 믿지 않을 테니.

타오가 해준 왕국이니, 전쟁이니 하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당최 알아듣기 힘든 것들이었지만 그 중 그나마 희망적이고 흥미를 가질 만 했던 것은, 타오가 얘기할 때마다 선망과 존경 가득한 얼굴로 침을 튀기며 설명했던 슈아죌이란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비단 그가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호남형의 신랑감이라는 부가설명 때문은 아니었다.

라고 한다면 거짓말이고, 물론 그 사실도 혹할 정도로 흥미로웠지만 더 중요한 건 그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점. 그것도 다른 포로들에게는 하지 않는 특별대우를. 그리고 포로들 전체를 관할하는 커멘더라는 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어디에 댈 곳 하나 없는 그녀로서는 어쩌면 마지막 남은 희망의 밧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슈아죌은 그녀의 기대가 무색할 정도로 그녀의 거처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정말 단 한 번도.

"왜요? 왜 안 온다는 건데요?"

"그게. 커멘더님은 여성기피증으로 유명해요. 여자들과는 얼굴 맞대는 것도 싫어하시죠."

"게이?"

"하하, 항간에는 동성애자라는 소문도 있지만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알려진 바로는 몇 번 스캔들이 난 적도 있다던데, 그 때 큰 상처라도 가지신 게 아닐까. 뭐 겉보기엔 전혀 안 그래 보이시지만요."

"말도 안 돼. 기사라면서요?"

기사라면 마땅히 레이디들을 하늘같이 모시고, 막 손등에 키스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조금 특이하시긴 하죠. 귀족의 영애나 귀부인들을 특히 싫어하신다고 하더군요. 사실, 이런 것 모두 뜬소문들이라 정확하지도 않고, 게다가 전 이런 쪽으론 문외한이라 시녀들 사이에서 떠도는 것들 정도밖에 몰라요."

"그럼. 그럼 전 왜?"

여자를 싫어한다면서 자신에게는 왜 이런 호의를 베푼 것일까. 차라리 희망이라도 품지 않게 내버려 두던가. 아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푸른빛 감도는 흑색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그걸 저도 모르겠어요. 조르셰양이 알아야 할 텐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으신다니- 아무튼 너무 좌절하지는 말아요. 커멘더님이 이런 호의를 베푼 건 드문 일이니 앞으로도 좋은 일이 일어나겠죠."

타오의 위로는 그녀의 마음에 적잖은 위로를 주었다. 어쨌든 확실한 건 그 커멘더라는 사람이 자신에게 최소한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에게보단 많은 관심을 가져주고 있다는 것이니까.

쳇, 퍽이나 고맙네. 아니, 그런데 도대체 왜지? 전쟁 상대국의 귀족과 원래부터 알던 사이일리는 없을 테고. 자신에게, 그러니까 이 몸에 들어오기 전인 뮤즈카 조르셰라는 여인에게 잘해줄 만한 이유라. 관심이 있나? 알고 보니 여성기피증이 아니라 꽤나 눈이 높으신 남자였다거나.

그녀는 타오에게 부탁해서 받은 흐릿한 거울을 들어보았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울 안에는 처음 보았을 때 까무러칠 정도로 놀랐던, 상상하기도 힘든 미모의 여인네가 그 때와 같이 눈망울을 끔뻑이며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외모는 말아먹을 신님이 장난을 치실 때, 가정이고 지위고 다 뺏어간 대가로 '옜다 그래도 뭐 하나는 줘야지' 하고 던져준 거라고 생각될 정도의 외모였다.

푸른색 감도는 찰랑거리고 긴 머리칼과 반듯한 이마. 눈꼬리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가 조금만 실실거려도 눈웃음이 쳐지는 눈. 작지만 또렷한 코와 도톰한 입술이 오목조목하게 붙어 있었고 결정적으로 그 작은 것들이 들어간 걸로도 꽉 차버린 작은 얼굴. 그저 용미가 뛰어나다, 수려하다 정도로는 표현하기 힘들었다.

물론 모든 것은 그녀의 기준에서였지만. 조금만 더 침착하게 생각해보면 들락거렸던 셀레나의 외모나 바로 앞에 앉은 타오만 보아도 이 곳의 평균적인 외모나 미적 기준이 대한민국과는 많이 다를 수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지만, 서구적 외모라면 만세삼창을 서슴지 않았던 대한민국의 평범한 대학생 출신인 그녀로서는, 현재 그녀의 외모라면 커멘더는 물론이고 설혹 왕이 온다고 해도 마음을 훔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늦었군요. 오늘은 이만 나가 볼게요, 교대 시간이라."

타오는 어느 때처럼 한 시간 가량 그녀와 대화를 하다가 나갔고, 그녀는 웃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다. 그 덕에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어느 정도 추스를 수 있었다. 사실 아직도 현실감이 떨어져 멍한 상태이긴 하다. 여전히 꿈을 꾸는 것 마냥 현실이 와 닿지 않는다. 당장이라도 잠에서 깨어나 '이게 뭐야. 꿈이었네?' 하고 지각하지 않기 위해 캠퍼스로 가는 버스에 허겁지겁 오를 것만 같다.

또 모르지. 진짜 그리 될 지도. 아인은 수십 번을 꼬집어 화끈거리는 볼을 다시 한 번 꼬집으며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어차피, 할 수 있는 일도 그 밖에 없었으니. 이번엔. 이번엔 제발 현실에서 깨어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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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검의 간격을 보는자, 검을 느끼는 자 +1 13.02.28 1,445 10 1쪽
8 검의 간격을 보는자, 검을 느끼는 자 13.02.27 1,571 9 1쪽
7 빙의 +3 13.02.27 1,785 14 17쪽
6 빙의 +3 13.02.27 3,037 12 18쪽
» 빙의 +2 13.02.26 2,244 10 12쪽
4 빙의 +1 13.02.26 2,903 1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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