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님 불떨어지셨다
“첸 씨!”
“우주씨. 오랜만입니다. 대회 이후로는 처음 만나뵙는 것 같습니다.”
절제된 목소리로 서우주를 맞이하는 첸을 확인하고 서우주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아직 용사가 알아챈 기색은 없다. 뭐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지.
“이곳에는 무슨 일로······.”
“스승님의 문하로 들어가고 싶어 바삐 걸음했습니다. 혹시 스승님께서 지금 댁에 계시지 않습니까?”
“있어요. 있긴 한데.”
“그러면 스승님께 먼저 문안인사를 올리는 게 순서겠군요.”
고개를 숙여보이고 집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 첸의 앞을 서우주가 막아섰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드릴 말씀이 있어요.”
“말씀이라 하심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우주를 바라보는 첸을 향해 서우주가 명함을 내밀었다.
“이 건에 대해서는 비밀을 지켜주셔야 합니다. 저는 재난관리대책본부 소속의 서우주 팀장이에요.”
“재난관리대책본부?”
“세계 각국에게서 막강한 권한을 위임받아서 닥쳐올 재난에 대비하는 단체죠. 믿기 힘드시겠지만, 중국 정부도 이 일에 협력하고 있어요.”
명함을 받아든 첸이 눈매를 좁혔다.
“무슨 재난을 대비한다는 말씀이신지 알 수 있겠습니까.”
“앞으로 몇 년 뒤에 이계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마족의 대침공이 우리 현대에 벌어질 예정이에요. 정확히 몇 년인지는 모르겠지만 민중의 큰 피해가 예상되죠. 저희는 그것을 혼란 없이 대비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중이고요.”
“그렇군요. 그러면 제게도 그 때 도움을 달라, 그런 말씀이십니까?”
“아뇨. 물론 그렇게 되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첸 씨는 지금 용사님을 자극하지 않는 것으로도 충분해요.”
묘한 서우주의 뉘앙스에 첸이 눈매를 좁혔다.
“스승님을 자극하지 말라?”
“예. 가령 제자로 들여보내달라면서 거금을 쾌척한다거나, 그런 행동이요. 만약 그렇게 되면 거금을 손에 쥔 용사님은 주튜브 활동을 멈출 테니까요.”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스승님이 주튜브 활동을 멈추는 것과 재난을 대비하는 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첸의 태도에 서우주가 입술을 깨물었다. 명백히 부정적인 모습. 이러면 진실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용사님께 진실을 알릴 수 없기 때문이에요.”
“어째서 그렇습니까?”
“제국측에서 용사님께 진실을 알리는 것을 막고 있어요. 용사님께 진실을 알리는 순간, 저희에게 전면전을 선포하겠다고 말하더군요. 저희 현대측에 벌어지는 재난은 과거 제국에서 일어났던 것보다 현격하게 그 수준이 높아요. 아마 용사님의 피해를 걱정한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저희는 이렇게 간접적으로 용사님의 행동을 유도해서 마족을 상대하기 위한 노하우나 기술을 빼내는 수밖에 없는 거구요.”
“한 마디로, 스승님을 이용하고 있다는 말이군요.”
“세계의 존립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에요.”
서우주가 거기까지 발언하는 순간.
바람이 일었다.
“닥치십시오.”
어느 새 목젖까지 닿아있는 거대한 창의 날을 바라보면서 첸이 경멸어린 눈을 서우주에게 쏘아 보냈다.
“당신이 말하는 것은 역겨움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자신이 피해자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계속해서 스승님을 이용하는 것에 대해 변명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렇게 보입니다.”
“······.”
“현대의 멸망을 막는 것은 우리의 과제입니다. 그 부담을 스승님께 지워주려 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일을 남에게 미루는 사람 치고 제대로 된 사람은 없습니다.”
첸의 서슬 퍼런 살기에 서우주가 이를 악물었다.
“이게 현실이에요. 저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구요.”
“그게 정말 당신의 의견이라면 저는 당신과 향후 상종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게 과연 올바른 일인지.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종말을 피해낼 수 있을지.”
첸이 창을 걷자마자 다리가 풀린 서우주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방금 들은 이야기를 용사님께 말씀드리진 않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처음부터 들고 왔던 제안은 그대로 드릴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어디까지나 선택은 용사님의 몫입니다.”
*
갑작스럽게 찾아온 첸과 그 지인을 맞이해 차를 내놓았다.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시니 대접할 게 없네요.”
“괜찮습니다. 전 첸 아가씨의 집사인 위 언이라고 합니다.”
“언 씨였군요. 저는 전직 용사인······.”
“위명은 익히 알고 있으니 소개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예.
“그나저나 현대에 집사라니, 꽤나 격조 높은 집안인가 봅니다.”
여기서는 남작 이상의 작위만 받아도 집사를 대동하고 산다지만, 저쪽은 집사를 지니려면 보통 재력으로는 안 된다. 대신 비서라는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는 모양이긴 하더만.
“예. 위 가는 예전 중국의 왕조부터 이어진 정통적인 가문으로 현대에 와서는······.”
“벼락부자.”
“의 위상을······ 아니, 아가씨!”
“맞는 말이잖아.”
그렇군. 벼락부자였군.
“흠흠. 그럭저럭 괜찮은 가문이었습니다. 단지 조금 힘들게 살았을 뿐이지요. 그걸 첸 아가씨의 부친인 센 어르신께서 한꺼번에 확 살리셨습니다.”
“그러니까 첸 씨는 현대판 귀족정도 되는 거네요. 그런 분이 갑자기 왜?”
현대가 막 무력이 필요하고 그런 거라면 모르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고. 기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스승님. 제자로 받아주세요.”
“제자요? 첸 씨도 아시다시피 제가 그렇게 시간이 많지 않은데요. 주튜브 영상도 찍어야 하고, 이것저것 만들어야 하고.”
“바쁘신 건 알고 있습니다. 대가는 지불할 예정이에요.”
대가라고?
갑작스러운 말에 내 머리가 맹렬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무슨 이야긴지는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첸 씨가 제게 뭘 배우고 싶다는 이야기겠죠? 가령 창술이라던가, 검술 같은 무학적인 부분.”
“네. 배움에 대한 대가는 충분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지금 챙겨온 것은 2천만 달러 정도 됩니다.”
뭐라고?
2천만 달러. 얼마지? 한화로 환산하면 대충 1달러당 1200원. 2천만 달러면······.
240억!
“용사님께서 아가씨를 받아주신다면 이 금액을 전부.”
“주시는 겁니까?”
받는다. 당장 받는다. 무조건 받고 평생 놀고먹는다.
······음.
“아니지.”
생각해보면 240억 받아도 딱히 쓸 데가 없다.
지금 1억 있는 것도 다 못써서 아침점심저녁으로 스테이크를 썰까 생각중인데, 240억 받아봤자 뭘 하겠는가? 드래곤 스테이크를 썰 것도 아니고.
거기다가, 나름 이 생활이 재밌기도 하다.
전 스승은 항상 내게 말했었지. 남자건 여자건 일단 유명해지라고. 유명해지면 노상방뇨를 해도 이슈가 될 거라고.
생각해보니까 술에 취해 내뱉은 개소리 같지만, 상당히 관심을 좋아하는 내게는 맞는 말이기도 하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스승님은 검소한 생활을 하시니까요.”
“아닌데요? 저 요즘 매일 고기 먹습니다. 아침 돼지고기 점심 소고기 저녁 닭고기. 사치부리면 사슴고기랑 오리고기도 먹거든요?”
“그렇게 검소함을 자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스승님. 그렇다면 이건 어떠십니까? 2천만 달러면 어지간한 건 다 할 수 있습니다. 스승님이 평소에 하고 싶었던 거 하나를 큰 규모로 벌려보는 것은 어떠실까요?”
첸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내가 평소에 하고 싶었던 거라.
그런게 있나?
-난 애들이 좋더라. 히히.
-그렇게 애들이 좋냐?
-그래. 나중에 전쟁이 끝나면 작은 고아원이나 하나 지을 거다?
“아.”
하나 생각났다.
“고아원이나 하나 지어볼까요?”
“2천만달러로 고아원을 말입니까? 도대체 얼마만한 규모로 지으시려고······.”
질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위 언을 향해 볼을 긁적였다. 아니, 2천만 달러 전부는 좀 애매하고.
“반반 나눠서 고아원이랑 학교 따로따로 짓죠. 좀 모자라도 될 거예요. 남은 건 라 교단에서 내줄 테니까.”
“라 교단에서 말입니까?”
“예. 이건 어찌 보면 그쪽 요청을 내가 대신 이뤄주는 거라서.”
죽은 자기 딸의 소망을 이뤄주는 일이다. 라, 그 개차반도 거절하진 못하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위 언이 뒤로 물러서고 나서 첸이 깊게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스승님.”
“저야말로 잘 부탁해요.”
주튜브 스태프가 한 명 늘겠는데?
*
결국 첸은 이 집에서 살기로 했다.
“집을 한 번 증축해야겠다.”
원래도 작은 집은 아니었지만 식객으로 성녀가 머무르고 있고, 권왕과 첸도 올 예정이니 좀 넓히는 게 낫겠지.
“일단 성녀님과 함께 방 써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스승님.”
“그럼 그렇게 할까? 나이도 내가 위니까.”
“예. 저도 그게 편합니다.”
그럼 증축하기 전에 시간 좀 때울까?
뭐, 증축은 금방 하니까. 그보다 중요한 건 이거다.
“방송 켜야지. 흐흐.”
착한 일을 했으면 일단 알려야지. 사람들이 모르게 선행을 한다? 그건 용사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다.
용사시험에도 나오지. 자신의 업적을 널리 퍼트려라. 시험지 제작자는 내 스승이다.
“용하! 구독자 여러분 오랜만입니다.”
-뭐임? 뭔 일 있어서 킴?
-뭐 컨텐츠 있나?
“아뇨. 오늘은 생색좀 내려고 켰습니다.”
흐흐거리면서 옆에 멀뚱멀뚱 서있던 첸을 화면에 비추었다.
“오늘 제 제자로 한 명 들였습니다. 익숙하신 분도 많을 텐데, 첸입니다!”
“스승님의 제자로 새로 들어오게 된 첸입니다.”
[첸쟝 사랑해님이 50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첸아······ 보고싶다······ 현대엔 언제 오니?
-머임 갑자기 50만원 후원은
-첸쟝 ㅎㅇㅎㅇㅎㅇ
-미모의 여제자 ㅗㅜㅑ
“스승님, 잠시 빌려도 되겠습니까?”
“응? 어. 응.”
채팅창을 확인하던 첸이 컴퓨터를 조작해 갑자기 첸쟝 사랑해를 강퇴했다.
[첸쟝 사랑해님을 차단했습니다.]
[사유:아버지]
-엌ㅋㅋㅋ 이제 보니 아부지였누
-중국거부설 설득력 얻어
“이제 진행하시면 됩니다.”
너무 냉정해서 아버님께 죄송할 따름인데.
“뭐, 어쨌든 첸이 이번에 제자로 들어오면서 제게 2천만달러를 제자비로 줬거든요?”
-2천원이요?
-바보야 2천만원이지 ㅋㅋ 그정도 낼만 하긴 하다/
“아뇨. 2천만달러요.”
내 발언에 채팅창이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 방금 2천만달러 제자비로 받는 상상함ㅋㅋ
-하지만 어림도 없지! 2천만원이었던 거임!
“정말이라니까 안 믿으시네. 영수증도 있습니다.”
슬쩍 입금내역을 보여주니 채팅창이 전부 ㄴㅇㄱ로 가득찼다. 놀랄 만 하긴 하지. 나도 순간 혹했으니까.
“근데 제가 또 누굽니까? 우리 구독자 여러분들을 친애하는 용사 아니겠습니까? 제가 먹고 살 건 제가 벌어야죠.”
-그래서 안 받을거임?
-그러기엔 너무나 많은 돈이었다
“그래서 일단 240억 전액 기부하기로 했습니다. 마침 여기 마족하고 전쟁 때문에 부모님을 잃은 애들이 많아서 고아원을 하나 설립하기로 했어요.”
-240억으로
-고아원을
-설립한다고?!
-와; 첸님 인성 ㅆㅅㅌㅊ
아니. 내가 기부하는데 왜 첸의 인성을 칭찬하는 거야?
“아니죠. 기부하는 건 저니까 저를 칭찬해야죠.”
-하지만 돈을 내는 건 첸이지
-많고많은~ 중국거부 중. 첸이 가장 잘 났 지
[無명검사님이 1달러를 후원하셨습니다!]
-꼬우면 님 돈도 쓰시던가ㅋ
아니.
그래. 내 돈이 안들어가서 이렇다 이거지?
“좋습니다. 제 월급에서 떼서 기부하겠습니다.”
이번달 정산금이 1억5천이랬지?
“야. 음향팀장!”
내가 부르자 얌체같이 혼자 스파게티 컵라면을 끓여먹고 있던 세이렌 1이 뽈뽈거리면서 기어왔다.
“왜요?”
“내 통장에서 1억정도 인출해서 기부금에 보태.”
“네? 갑자기요?”
“아, 얼른.”
5천만원이면 한달 생활비로는 차고 넘치지.
-아니 이렇게 통 크게 1억 기부한다고?
-우리나라 대기업보다 훨씬 낫누;;
-이정도면 기부천사 ㅇㅈ합니다
그래. 그래야지. 이게 정상적인 반응이다.
-그렇게 기부해서 먹고 살 수 있음?
심지어는 나를 걱정해주는 채팅창에 미소를 씩 날렸다.
“괜찮아요. 정산금 아직 5천만원 남아있습니다.”
“그, 용사님? 송금 완료는 했는데. 5천만원 안 남아있던데요?”
세이렌 1이 갑자기 명세서를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뭐라고?
“아까 보니까 그, 뭐 재산세인가 그런 걸로 빠져나갔던데요.”
“재산세? 그게 뭔 네가 회먹는 소리냐?”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뭐있다고.
말도 안 된다면서 손사래를 치다가 문득 떠오른 것에 얼굴을 굳혔다.
“서, 설마.”
진짜? 에이, 설마?
-응 드래곤 슬레이어 재산세~
-소득세 안 내는 황족도 재산세는 낸다 애송이
아니.
아니!
[다음 컨텐츠 각이 나오면 짖는 개님이 5,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왈왈왈! 왈왈! 크르르르릉! 왈왈왈!
큰일 났는데?
- 작가의말
8월 17일 7시 52분 수정 오나료
오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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