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또라이.
조선엔 중국어와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들은 꽤 많이 있었다. 함경도로 가면 러시아어를 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영어는 꽝이었다.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신문물을 직접 받아들이려면 영어는 필수였다. 그리고 이 영어의 힘은 곧 외교의 힘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영어교육은 근대화의 필수 중 하나였다.
뭐 이건 미래에서도 비슷하긴 했지만...
봉준도 이 동문학에서 기초영어와 역사를 가르칠 예정이었다.
교련병대 임무와 교린사 업무 등이 바쁘긴 했지만 동문학이 빠르게 자리를 잡으려면 초반에 희생은 감수해야만 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역사는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교육 해야만 했다.
그런데 첫 수업이 있는 날, 이곳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조선의 문제적 남자 김옥균이었다.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조선 개화파의 선두주자. 그의 일생은 박영효가 지은 비문을 통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비상한 시대를 만났지만, 비상한 공적도 없이, 비상한 죽음만 얻었도다.”
김옥균은 이처럼 19세기 조선에선 볼 수 없었던 비상한 인물이었다. 이 사람이 지금 동문학에 입학 신청을 하러 왔다.
사실 김옥균은 같은 개화당이라 족보가 같았다. 하지만 봉준은 그동안 공사가 다망해서 민영익 말고는 개화당 사람들과 제대로 인사를 나눈 적이 없었다.
오늘에서야 드디어 개화당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것도 제일 쎈 사람으로...
“니가 봉준이야? 니 얘기 엄청 많이 들었다. 아주 난 놈이라면서?”
김옥균이 보자마자 반말을 까고 나왔다. 사실 그는 51년생으로 55년생인 봉준보다 4살이나 많았다.
게다가 개화당 짬으로도 한참 선배이니 말을 까는 게 이상하지 않았지만 초면이라 그런지 살짝 기분은 나빴다.
“왜? 초면에 말을 노니까 기분 나빠? 그럼 너도 말 놔.”
“네? 뭐라고요?”
“난 전배(前輩)라고 해서 위세 부릴 생각 없다. 뭐 미리견이나 영길리에선 전배건 후배건 다 말 놓고 똑같이 지낸다면서? 우리도 그네들을 따라 잡으려면 이런 것부터 배워야 한다고.”
생각보다 김옥균이 개방적이었다. 아니 살짝 또라이에 가깝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19세기에 조선에서 선후배 나이에 상관없이 친구하자는 마인드가 왠지 신선했다.
사실 그러고 보니까 김옥균은 실제 역사에서도 9살이나 어린 민영익과 허물없이 지냈다.
뭐 이 당시 허물없이 지내는 건 나이에 상관없이 서로 존대를 하는 거였는데 지금 김옥균의 행동을 보아하니 그 반대인거 같았다.
하지만 봉준은 이런 김옥균의 행동이 살짝 어색했다. 오랜 세월 상명하복에 익숙한 군대에 있다 보니 선배한테 말 놓는게 좀 불편했다.
하지만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고... 김옥균같은 스타일한테 괜히 존대를 했다간 관계만 어색해진다. 원하는 대로 해 주기로 하였다.
“그래. 옥균아. 반갑다. 내가 진작에 너를 한 번 만나고 싶었는데 보다시피 내가 공사가 다망해서...”
“괜찮아. 지금이라도 봤으면 됐지 뭐. 야 근데 여기 동문학에 나도 입학 할 수 있는 거지?”
지금 김옥균의 나이는 31살, 동문학에 입학하기엔 나이가 많았다. 주로 20세 전후의 청년들을 뽑을 생각이었는데 여기에 김옥균이 들어오면 완전 복학생 느낌이었다.
그것도 학사경고 몇 번 먹고 휴학에, 제적도 한번 당했다 다시 복적된 아주 버라이어티한 복학생...
게다가 지금 김옥균은 홍문관에서 교리직일을 하고 있는 엄연한 직장인이었다.
동문학엔 야간반도 없는데 어떻게 학교를 다니겠다는 건지... 아니다. 사실은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지금은 1882년 5월. 이때 김옥균은 신사유람단 자격으로 일본에 있어야 했는데 왜 조선에 있는 걸까.?
역사가 바뀌어 신사유람단이 안 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봉준이 진행했던 일들은 모두 신사유람단 방문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제대로 간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김옥균이 여기 있다는 건 조기 귀국인데... 그 이유를 안 물어 볼 수가 없었다.
“옥균아. 너 지금 일본에 있어야 하지 않니? 조선에 왜 벌써 들어온 거야?”
“왜 들어오긴... 돈이 없어서지. 야. 말도 마라. 일본 물가 장난 아니야. 개화를 해서 그런지 뭐가 다 비싸. 라면 사먹을 돈도 없는데 어떻게 계속 있냐?"
"뭐 라면?"
"그래. 일본 사람들이 많이 먹는 거 있어. 일본말로 라멘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냥 라면이라고 불러. 그게 편해서..."
이번에도 허를 찌르는 대답. 역시 또라이...
실제 역사에서 김옥균이 조선에 돌아온 이유는 임오군란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군란으로 여흥 민씨 세력이 몰락하고 대원군이 집권을 하면 자칫 개화당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귀국을 했는데 지금 그의 태도를 보니 그때도 혹시 돈이 없어서 들어온 게 아닐까 싶었다.
왠지 그 당시 임오군란은 핑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개화당과 대원군은 물밑에서 어느정도 접촉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설령 대원군이 집권한다고 한들 개화당이 사라질 가능성은 적었다.
그리고 실제 김옥균은 신사유람단을 결성해서 갈 때 정부 지원 없이 사비를 털어서 갔다.
뭐 당시로선 거금인 2만엔을 모았다는 말도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수십 명이 6개월 이상 체류하려면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초짜들이 해외여행에서 겪는 눈탱이를 피할 수도 없었을텐데... 주머니가 넉넉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 뭐가 진실이건, 이번 역사에선 돈이 없어 귀국한게 맞았고 영어를 배우기 위해 동문학에 온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이상한 건 김옥균이 영어를 배우려는 이유였다.
그는 일본에 갔을 때 일본 개화사상의 시조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매력에 푹 빠져 그의 문하에 몇 달을 머물면서 근대사상을 공부하였다.
그러했기에 일본을 조선근대화의 모델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녀석이 갑자기 영어를 배우려는 이유가 뭔지 궁금했다.
“근데 옥균아. 미리견 말을 왜 배우려는 거야? 너 미리견보다 일본을 더 좋아했잖아?”
“야. 봉준아. 너는 오늘 나를 처음 봤으면서 어쩜 나를 그렇게 잘 아니? 내 뒷조사 했니?”
또 허를 찌르는 대답. 역시 또라이... 조선에 와서 이렇게 당황스럽기는 처음이었다.
“뒤...뒷조사는 무슨. 니가 워낙 시끄러운 인사다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거지.”
“뭐... 내가 좀 시끄럽긴 하지. 아무튼 말이야. 내가 미리견 말을 배우고 싶어 하는 이유는 간단해. 내가 아주 엄청난 걸 봤거든...”
김옥균의 영어완전정복 스토리가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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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도착한 옥균은 여정을 풀자마자 곧바로 일본 개화당의 본산인 게이오의숙을 찾았다.
이곳에서 일본 개화당 사람들과의 많은 대화를 통해 개화의 중요성을 새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스승인 후쿠자와 선생을 만나 '문명개화론'을 들었을 땐 그야말로 감동이었다.
-서양의 것은 무엇이든 배우고 익혀라. 하지만 물질만 익혀선 안된다. 서양의 정신문화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그 물질을 온전히 익힐 수 있다.
옥균은 일본이 근대화에서 성공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웃나라 청국은 일본보다 먼저 개항을 했고 근대화에 더 많은 비용을 투자했음에도 실패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서양의 껍데기만 배우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의 개화당 사람들은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고 다녔지만 청국의 개화당 사람들은 아직도 변발에 옛날 복장을 하고 다녔다.
이것만 봐도 누가 더 개화를 잘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옥균은 이렇게 일본에서 크게 감명을 받았기에 더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여비가 부족해 어쩔 수 없이 귀국길에 올라야만 했다.
예정보다 빠른 귀국길이라 그런지 일정이 조금 변했다. 원래는 시모노세키를 경유해야 했는데 바뀐 일정에서의 경유지는 나가사키였다.
크게 개의치 않았다. 뭐로 가도 조선만 가며 되니까...
그런데 이 나가사키항에 도착했을 때 깜짝 놀란 게 있었다. 바로 엄청나게 큰 군함들이었다.
크고 작은 수십 척의 군함들이 세상을 압도하듯 나가사키 외항에 정박해 있는 모습에 그야말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것이 바로 개화된 나라 일본의 힘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조선도 얼른 개화를 해서 일본처럼 저렇게 멋진 군함들을 갖고 싶습니다.
옥균은 자신의 속마음을, 안내를 맡은 일본 관원에게 가감 없이 들쳐 내보였다. 그런데 일본 관원의 대답이 옥균의 생각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스미마셍. 지금 김 상께서 보고 계신 군함들은 우리 일본 것이 아니라 미국의 군함입니다. 그 옆에 있는 건 영국이구요. 저 안쪽에 있는 것이 우리 일본의 군함입니다.
옥균은 앗차 실수했다는 생각에 서둘러 고개를 돌려 일본 군함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만 엄청난 실망을 하고 말았다.
미국과 영국 군함에 비해 일본 군함이 작았다.
-우리 일본 군함들은 기동성을 중시해서 1000톤급 군함을 주로 사용합니다. 작지만 아주 빠르고 위력적인 함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 관리가 군함이 작은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옥균은 이상하게도 이 설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의 거대한 군함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거대한 군함이 그의 생각을 완전히 바뀌어 놓고 말았다.
“봉준아. 나는 말이야. 일본이 세계 최곤 줄 알았어. 서구 열강들을 금방 다 따라 잡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서구 열강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강한 거 같아. 그들을 알고 싶어. 그게 내가 미리견말을 배우고 싶어 하는 이유야.”
역시 김옥균은 비상했다. 그저 눈으로 한 번 본 군함으로 세계 질서를 모두 다 이해해 버렸다. 역시 그는 남들과는 다른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 역사에서 김옥균의 일본 경유지는 시모노세키였다. 이곳은 나가사키처럼 외국 군함이 정박되어 있는 곳이 아니었다. 미국과 영국 군함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가 경유한 곳은 우연찮게도 나가사키였다. 역사가 살짝 바뀐 거 같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김옥균의 생각이 일본에서 서구열강으로 확장되었다는 건, 앞으로의 조선에도 긍정적인 신호였다. 봉준은 이참에 그의 세계관을 확실하게 더 넓혀주고 싶었다.
“옥균아. 그럼 진짜 내가 큰 세상을 한 번 보여 줄까?”
“뭔 소리야. 니가 어떻게 큰 세상을 보여 줘. 뭐 미리견이라도 한번 데려가 줄 거야?”
“원한다면.”
“뭐라고? 너 진짜야? 진짜 미리견을 가게 해 줄 수 있어?”
“당연하지. 너. 앞으로 내 말 잘 들으면 미리견 보내준다.”
“아이고~형님~! 앞으로 깍듯이 모시겠습니다!”
김옥균의 오버가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아무래 봐도 이 친구는 이 시대 조선 사람이랑은 결이 너무 달랐다. 혹시 미래에서 회귀한 건가...?
아무튼 옥균을 미국으로 보내 준다는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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