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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자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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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정상호
작품등록일 :
2020.05.04 01:40
최근연재일 :
2022.03.19 23:50
연재수 :
80 회
조회수 :
3,542
추천수 :
125
글자수 :
397,167

작성
20.05.04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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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의혹의 숲 (8) 하인츠

DUMMY

“정말 괜찮으신가요, 영주님?” 하란이 물었다.


하인츠는 나무 지팡이를 강하게 내리찍었다. 대리석 바닥을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울려 퍼졌다. “글쎄, 괜찮대도!” 그는 어린 시종에게 소리쳤다. 이어 하인츠는 어린 소년에게서 제등을 빼앗았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테니, 이만 가거라.” 하인츠는 지팡이를 든 손을 내저었다.


하인츠는 지팡이를 짚으며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숨을 헐떡일 무렵에야 그는 저택 옥상에 도착하였다. 마이아르 숲 위에 외로이 뜬 태양은 하늘을 오렌지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바다 너머에는 어느새 달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황제의 수호기사이자, 하인츠의 친우인 나이트는 석재난간에 팔을 올린 채 바다를 보고 있었다.


하인츠는 살며시 나이트의 옆에 자리했다. “오랜만일세, 나이트.” 대영주가 말했다. 그는 마이아르 저택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멀리서 몰아치는 너울은 바위에 부딪혀 물거품을 만들어냈다. 해안절벽 아래로 세 개의 첨탑이 보였다. 첨탑을 두드리는 파도들은 사라질 때마다 그 자리에 무지개를 만들어냈다.


“오랜만이야, 하인츠.” 나이트는 손을 내밀었다. 하인츠는 지팡이를 울타리에 기대어 놓고, 나이트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나이트는 하인츠의 모습을 보고 꽤 놀란 듯 보였다. 나이트가 물었다. “뭐야, 그 꼴은? 뭔 일 있었던 거야?”


하인츠는 고개를 숙여 붕대 감긴 몸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그다지. 별일 없었다네.” 대영주가 말했다.


“별일 없었다는데 그 모양이야?” 나이트가 말했다.


하인츠가 말했다. “그리 묻는 이가 이런 곳까지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건가?”


“···응. 그것도 그렇네.” 나이트가 말했다. 그는 머리 전체를 가리는 회백색 후드를 쓰고 있었다. 오렌지색 태양은 후드 사이로 나이트의 얼굴을 비추었다. 거친 구릿빛 피부에는 온갖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 하인츠는 빛바랜 흉터 사이로 나이트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오랜만에 여기서 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 그래서 어쩔 수 없었어.”


‘오랜만에···?’ 하인츠는 제등에서 촛불을 꺼내 횃불을 밝혔다. “마이아르 저택에 온 적 있나 보네. ···언젠지 물어봐도 괜찮을까, 나이트?” 대영주가 물었다.


나이트는 조용히 턱을 쓰다듬었다. “···언젠가 이 저택에 올 일이 있었어. 그건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었지. 그때 처음으로 그대의 아버지, 프란츠 공을 뵀고, 또 폐하를 처음 만났었지.” 나이트는 조용히 말했다.


“이곳에서, 그랬었단 말인가? 대체 언제?” 하인츠가 물었다.


나이트는 석재난간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 말을 하려면 꽤 과거 얘기가 필요해. 그대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할지도 모르고.” 나이트가 말했다. 수호기사의 말을 들은 하인츠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나이트는 그런 하인츠를 바라보았다. “그래, 자네가 자네 아버지 이야기를 별로 하고 싶어 하지 않듯, 나도 내 옛날이야기는 딱히 하고 싶지 않아. 그저, 내가 이 장소를 많이 그리워했다는 것. 그것만 알아줘, 하인츠.” 나이트가 방긋 웃었다.


“···그래.” 하인츠가 답했다.


나이트는 품에서 궐련을 꺼냈다. 그는 궐련을 횃불에 가져다 댔다. 불이 붙자 연기와 함께 고약한 냄새가 났다. 수호기사는 궐련을 힘껏 들이켰다. 나이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나저나, 그 녀석 많이 컸더군.”


“그 녀석?” 하인츠가 물었다. ‘그 아이를 말하는 건가?’


나이트가 말했다. “···에리크 말이야. 그때 이후로 못 봤으니, 거의 십 오 년 만에 보는 거야.”


“음, 벌써 그렇게 됐나?” 하인츠가 말했다.


“응, 그래. 약속한 날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기억하고 있겠지?” 나이트가 물었다.


하인츠가 말했다. “물론, 기억하고 있다네. 설마 그 얘기를 하자고 이 멀리까지 온 건가?”


“물론, 아니지.” 나이트는 반쯤 남은 궐련을 입으로 가져다 댔다. 수호기사는 독한 연기를 내뿜었다. 곧 그는 생각을 정리한 듯 입을 열었다. “수호기사이자, 제국의 대장군인 모한 바르도나를 기억해?”


‘제국의 대장군.’ 하인츠는 나이트가 꺼낸 이름보다는 그것에 더 집중했다. 그것은 당연했다. 제국 ‘최초의 대장군’은 하인츠의 아버지, 프란토르 다이아르였다. 모든 이들은 하인츠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장군이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하인츠가 스스로 그 자리를 포기함으로써 ‘난쟁이 산맥의 왕’ 모한 바르도나가 제국의 대장군이 되었다.


곧 하인츠는 모한 바르도나를 떠올렸다. 언젠가 하인츠는 바르도나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난쟁이 산맥의 왕’이라 불렸던 사내는 하인츠보다 키가 다섯 뼘은 컸다. 바르도나는 거인과 같았다. 온몸에 수북한 흰털이 있었고, 눈동자는 호랑이와 같았다. 허리에는 황제에게 하사받은 검을 차고 있었다.


“기억한다네. 모한 바르도나. 폐하의 위대한 친우 중 한 명 아닌가.” 하인츠가 말했다. 폐하의 위대한 친우. 나이트도 거기에 포함되는 자였다.


“그래, 폐하의 위대한 친우. 정말 오랜만에 듣는 말이야.” 나이트가 말했다. 그는 타다남은 궐련 조각을 털어냈다. “열흘 전, 모한 바르도나가 알현실에 쳐들어갔다더군.” 나이트의 목소리는 사뭇 진지해졌다.


“그가 갑자기 왜?”


나이트는 냉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궁전을 지키고 있던 수호기사 체드리코가 똑똑히 현장을 목격했어. 대장군 모한 바르도나가 체드리코에게 말했대. ‘마지막으로 폐하를 뵙고 싶다.’라고. 체드리코는 폐하께 말씀드리겠다 하면서도 그게 안 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무슨 뜻이지?” 하인츠가 물었다.


“폐하께서는 오랫동안 모습을 비추시지 않으셨어. 내가 마지막으로 폐하를 본 게 벌써 사 년 전이야. 폐하에 가장 가까운 이인 체드리코는 물론, 모한 바르도나 역시 그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겠지. 그렇기에 체드리코가 폐하의 의견을 구하기 위해 문을 연 순간, 모한 바르도나는 궁전으로 침투한 거야. 체드리코에게 일격을 가하고 말이지.” 나이트가 말했다. “잠시 기절했던 체드리코는 곧바로 대장군을 쫓았지. 다행히도 체드리코는 바르도나의 발자국을 좇을 수 있었어. 폐하께서 계신 알현실에 다다르자, 체드리코는 옥좌에 계신 폐하와 그 뒤에서 소리치던 바르도나를 보았어. 바르도나는 이렇게 말했다더군. ‘나는 내가 살던 땅으로 돌아가리다. 그동안 고마웠소이다. 그리고 실망이오, 브렌.’ 대장군은 그 자리에 그 말과 검, 그리고 대장군의 증표를 두고 떠났지.”


하인츠가 말했다. “바르도나 그자가 그렇게 대장군 자리를 쉽게 내팽개칠 이는 아닌데.”


“그렇지. 하지만 그는 내팽개쳤어. 대장군 자리는 공석이 되었지.” 나이트가 말했다. 그는 회백색 상의 품속에서 종이를 꺼냈다. “그래서, 내가 여기에 온 거야. 하인츠, 너를 대장군 자리에 앉히려고 말이지.”


하인츠는 나이트가 건넨 종이를 펼쳐 읽어보았다.


‘초대 제국 대장군 프란토르 다이아르의 아들이자, 마이아르 저택의 관리자 하인델 다이아르를 제국 대장군에 임명한다. 섭정 황후 에이샤 마이아르.’


“도대체 이게 뭔가?” 하인츠는 당황해하며 물었다.


나이트가 말했다. “말 그대로 자네를 대장군에 임명한다는 글이지. 바르도나가 떠난 다음 날 황후마마께서 직접 나를 부르셨고, 이 종이를 주면서 자네에게 직접 전해달라고 부탁하셨지. 바르도나에 관한 이야기도 그때 들었어.”


“내가 대장군이라니···. 자네도 알지 않나? 내가 얼마나 그 자리에 안 어울리는지.” 하인츠가 말했다.


“글쎄, 그 자리에 앉아보지 않는 이상 모르는 일 아닌가? 나는 자네가 적임자라고 생각하는데. 자네는 무엇보다도 ‘다이아르’ 이잖아.” 나이트가 말했다.


‘망할 다이아르.’ 하인츠가 말했다. “자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그렇게 따지고 싶다면, 황후마마께 직접 이야기해. 최대한 이른 시일 안으로 프레이루엘로 향해. 여기까지가 황후마마의 전언이야.” 나이트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하인츠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 방에는 그의 아내가 있었다. 저택의 안주인 나헨 다이아르는 팔짱을 낀 채 나무 의자에 앉아있었다. 하인츠가 방문을 열자마자, 나헨이 말을 건넸다.


“나이트가 왔다고 들었어요.”


하인츠가 답했다. “안 그래도 그 녀석과 이야기를 하고 오는 길이야.”


“에리크 때문에 온 건가요? 그 아이가 성인이 되면 나이트, 그 사람의 종자로 보내겠다고 했었잖아요.” 나헨이 물었다.


“아니, 물론 그 일에 관한 것도 얘기했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나이트는 내게 황후마마의 전언을 전해주었어. ···내게 공석이 된 대장군 자리를 제안했어.” 하인츠가 말했다.


“대장군이요?” 나헨이 물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빛났다. “설마···. 수락하실 생각은 아니시죠?”


하인츠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들어 맸다. “모르겠어.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미안, 나헨. 혼자 있게 해줘.”


나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저녁 식사가 준비될 거에요. 끝나면 사람을 부를게요, 하인츠.” 곧 그녀는 자리를 떴다.


하인츠는 섭정 황후의 말이 얼마나 무거운지 그 무게를 알고 있었다. 섭정의 말은 곧 황제의 말이었다. 좋든 싫든 명령을 따라야 했다. ‘어차피 프레이루엘로 가려고 했어. 시기가 당겨졌을 뿐이지만.’ 하인츠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맘이 편했다.


날이 저물자, 로나트 아우스타르가 하인츠를 맞이하러 왔다. 하인츠는 로나트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는 이미 여러 이들이 있었다. 나이트와 에리크는 식탁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영주의 자리 옆에는 안주인 나헨이 저택의 후계자 토윈과 함께 앉아있었다. 하인츠는 로나트의 부축을 받아 대영주의 옥좌에 앉았다.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자 요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 하인츠 앞에는 다양한 음식들이 있었지만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포도주 한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러자 카를이 다가왔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영주님?” 집사가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입맛이 없어서요. 지금은 그저 조금 쉬고 싶군요.” 하인츠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에서 잡일을 하던 하란이 다가왔다. “괜찮네. 손님을 더 도와주게. 나는 혼자 돌아갈 테니.”


하인츠는 홀로 방으로 돌아갔다. 날은 저물었고, 하인츠는 잡념과 함께 잠들었다.


다음날 일찍 나이트는 돌아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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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의혹의 숲 (5) 글라드 20.05.04 40 1 10쪽
5 의혹의 숲 (4) 하인츠 20.05.04 46 1 14쪽
4 의혹의 숲 (3) 프리아 20.05.04 44 1 12쪽
3 의혹의 숲 (2) 아라기 +1 20.05.04 94 2 21쪽
2 의혹의 숲 (1) 로이 +1 20.05.04 205 2 17쪽
1 제1부 빛바랜 기사 프롤로그 +1 20.05.04 463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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