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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자의 노래

수호자의 노래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정상호
작품등록일 :
2020.05.04 01:40
최근연재일 :
2022.03.19 23:50
연재수 :
80 회
조회수 :
3,539
추천수 :
125
글자수 :
397,167

작성
20.05.04 20:40
조회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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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0쪽

의혹의 숲 (5) 글라드

DUMMY

순간 낯선 얼굴이 다가왔다.


아니, 그것은 너무나도 익숙했다. 그 희미한 얼굴은 어둠에 잠식되어 있었다. 처음, 그 얼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얼굴에 익숙해지자 조금씩 희미하게 눈의 윤곽이 떠올랐다. 그것은 이윽고 코, 귀 그리고 입을 피워냈다. 소년은 조금씩 그와 가까워짐을 느꼈다. 마침내 희미한 얼굴은 익숙한 얼굴이 되었다. 불과 며칠 전 소년이 숲에서 만났던 소녀의 얼굴이었다.


‘이번에도··· 지키지 못했어.’


갓 밝은 아침 하늘처럼 맑았던 소녀의 얼굴이 피로 물들었다. 짙은 밤···, 어쩌면 새벽의 숲 사이로 그림자들이 찾아왔다. 망할 그림자들. 놈들은 소녀의 팔을 뜯어냈다. 숲속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소년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뒤이어 그림자들은 소년에게 다가왔다. 소년은 그림자들을 응시했다. 숲을 외로이 밝히는 모닥불이 그림자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림자들은 아무 얼굴이 없었다. 윤곽도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들은 소년에게 가까워졌다. 아무런 얼굴이 없던 그림자들은 조금씩 색을 띠기 시작했다. 소년은 조금씩 그 색이 보였다. 그림자들의 얼굴이 보였다. 예전에 신세를 졌던 여관주인의 얼굴에서, 소녀의 얼굴로, 또다시 수많은 얼굴로 바뀌었다. 그러다 마지막엔 어머니의 얼굴로 바뀌었다. 모두 소년이 구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쉴 새 없이 바뀌는 얼굴은 소년의 귓가에 다가왔다. 그림자들은 저마다 소년의 팔다리 하나씩에 자리했다. 소년은 발버둥 치려 했다. 하지만 그림자들은 소년을 가만두지 않았다. 서로 다른 얼굴들이 소년의 몸을 삼키려고 했다.


‘쾅’하고 거대한 파열음이 났다. 글라드는 끔찍한 잠에서 깨어났다. 소년은 뺨까지 흘러내린 식은땀을 닦아냈다. 그리곤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빛바랜 철제투구를 쓴 기사, 칼렌이 그곳에 있었다.


칼렌이 말했다. “아, 내가 그만 깨운 모양이구나. 미안하다.”


“아뇨, 괜찮아요. 칼렌. 악몽을 꾸고 있었거든요.”


기사는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또 그 꿈 말이니?”


“네, 매번 잊을만하면 꾸는 그 꿈이에요. 게다가 이번에는 새로운 얼굴이 나왔어요.” 글라드가 말했다. 그는 칼렌을, 상처 나고 빛바랜 투구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숲에서 만났던 그 사람들이었지요. 또다시 잊어야 할 얼굴들이 늘어났어요.” 글라드는 짙게 한숨을 내뱉었다.


칼렌이 나지막이 말했다. “글라드, 너도 알고 있듯이, 한번 상처가 된 기억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단다. 다른 기억에 덮어 씌워질 뿐, 영원히 우리 머릿속에 남아 평생을 괴롭히지. 그러니, 애써 잊으려 하지 말려무나. 더 힘들어질 뿐이란다. 그저 그 기억을, 그 과오를, 품으며 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한단다.”


“네, 칼렌. ···그래요. 지난 기억들은 어쩌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을지 몰라요. 아니 사라지지 않겠죠, 영원히.” 글라드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저는 잊고 싶어요. 저들을 기억하는 것이 저희의 의무라 할지라도··· 말이죠.” 과거의 끔찍한 기억은 언제나 불현듯 그를 찾아왔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얼굴들은 소년이 깨어있든, 깨어있지 않든 그를 괴롭혔다. 소년은 언제나 그를 괴롭히는 그 끔찍한 기억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야.” 칼렌이 말했다. 그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크흠, 분위기가 조금 무거워졌구나. 아무튼, 나가자꾸나.”


글라드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는 한편에 놓인 가벼운 흉갑을 입었다. 그리곤 그 위에 새하얀 타바드를 걸쳤다. 허리춤에는 소가죽으로 만든 낡은 허리띠를 했고, 그 허리띠에는 장검과 단검 하나씩 있었다. 장검과 단검, 그 어느 것에도 호화로운 장식은 되어있지 않았다. 평범한 대장간의 대장장이라면 누구나 만들어낼 법한 그런 것이었다.


그들은 밖을 나섰다. 때마침 칸데이룬의 열일곱 봉우리 아래로 햇빛이 드리우고 있었다. 전날 밤, 그들은 봉우리 사이에 잠든 산안개를 뚫고 겨우 칸데이룬에 도착했다. 그들은 열일곱 봉우리 중 넷째 봉우리에 수없이 걸린 돌계단을 내려갔다. 글라드는 계단을 내려가며, 수많은 끔찍한 기억에 사무쳐 미처 하지 못했던 감상에 빠졌다. 마치 속이 깊은 그릇 마냥, 칸데이룬은 수많은 봉우리에 둘러싸인 도시였다. 글라드가 칸데이룬에 도착했을 때, 아니 어쩌면 처음 칸데이룬을 향할 때부터 언젠가 그는 엘 디헤스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엘 디헤스는 카민 사막에서 가장 번성한 자유도시 중 하나였다. 아홉 대륙에는 오래된 도서관이 여럿 있었는데, 엘 디헤스에도 하나 존재했다. 그 도서관은 역사가 깊었고, 그 깊이만큼 수많은 책이 있었다. 글라드가 칼렌과 함께 여정을 시작한 지 몇 해 되지 않았을 무렵, 그들은 엘 디헤스에 다다랐다.


그들은 꽤 긴 시간을 엘 디헤스에서 머물렀다. 그 무렵의 글라드는 주로 혼자였기에, 그는 엘 디헤스에서의 시간 대부분을 도서관에서 보냈다. 운 좋게도 카민 사막의 글들은 글라드에게 어렵지 않았다. 글라드가 카민 사막을 떠날 무렵에야 그는 비로소 책 한 권을 온전히 읽어낼 수 있었다. 그가 읽었던 책은 카민 연맹 성립 시기, 아홉 대륙을 여행하였던 탐험가의 일지였다. 그 책에는 그리판디오르 대제 시기의 스타르니올드, 태화제 시기의 메이룬, 효건제 시기의 칸데이룬 등 수많은 지역이 상세하게 쓰여있었다.


칸데이룬은 험준한 산맥 한가운데에 있었다. 칸데이룬 주위로는 험준한 열일곱 개의 봉우리가 자연성벽이 되어 주었다. 수많은 이들이 전쟁을 피해 자연이 만든 요새, 칸데이룬으로 향했고, 지난 수백 년 동안 칸데이룬은 훌륭한 발전을 이루어냈다. 사람들은 산과 산 사이의 돌과 바위를 깎아 계단을 내고, 집을 만들고, 역사를 일궈냈다.


길고 긴 계단 주위로 바위산을 깎아 만든 네모난 계단식 건물들이 보였다. 계단식 건물은 끝없이 보였다. 그들은 조금 더 계단을 내려갔다. 마침내 드넓은 광장이 나왔다. 수많은 길이 광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단순하고 투박한 회색빛의 건축물이 아니라, 다양한 색의 건축물이 존재했다. 글라드의 시선은 그들의 앞에 보이는 거대한 신전으로 향했다.


광장은 그 신전에 속하는 모양이었다. 신전으로 향하는 계단은 광활한 너비를 가지고 있었다. 족히 이 층 높이의 계단 위에는 거대한 대리석 기둥 두 개가 보였다. 거대한 기둥은 무거운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 신전에는 입구가 없었고, 그저 뻥 뚫려있었다. 글라드는 위화감을 느꼈다.


그들은 사암으로 쌓아 올린 계단을 올랐다. 거대한 신전 입구 너머로 신전 내부가 보였다. 아직 태양이 완전히 뜨지 않았음에도 신전 내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양쪽으로 신전을 받치는 기둥들이 쫙 깔려있었다. 정면에는 거대한 사암 석상이 있었다. 사람들은 사암 석상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글라드는 인파 사이로 사람들의 눈길이 향하는 곳을 찾았다.


사암 석상 아래 누군가가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청색 두정갑을 걸친 그 사내는 붉은 깃털이 달린 투구를 옆에 내려두고 경건히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진한 검은빛 머리의 사내는 상투를 하고 금색 동곳을 꽂고 있었다. 허리춤에는 자줏빛 보석이 박힌 칼집을 차고 있었다. 칼집 끝에는 진홍색 비단이 매달려있었다.


글라드는 기도를 올리는 석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넓고 두꺼운 토대 위로 거구의 사내 형상을 본뜬 석상이 있었다. 두꺼운 갑옷을 입은 사내는 한 손에는 거대한 월도를 들고 있었다. 사암으로 빚어낸 석상은 너무나 정교해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글라드가 석상에 넋이 나가 있을 때, 뒤에서 칼렌이 말을 걸었다. “구경 그만하고 이쪽으로 와, 글라드.”


글라드는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예, 바로 갈게요. 칼렌.” 글라드는 빛바랜 투구를 눌러쓴 칼렌에게 소리죽여 말했다.


그들은 신전의 지하로 향했다. 지하는 비교적 사람이 적었다. 그곳은 칸데이룬의 지난 영웅들을 모시고 있었다. 지나간 영웅들, 글라드는 별로 알지 못했다. 도이니아르는 타인의 영역이었다. 낯선 땅의 낯선 영웅들을 글라드가 알 리 만무했다. 지하에는 영웅들의 사당이 있었지만, 글라드가 아는 이름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칼렌이 이끄는 대로 영웅들 사이를 걸었다.


곧 그들은 인적이 드문 사당 앞에 멈춰 섰다. 그 사당은 평범했고, 주변의 다른 사당과 차이가 없었다. 칼렌은 그 사당 앞에 놓인 비석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글라드가 물었다. “뭔가 이 사당이 특별한 게 있나요?”


“그래, 특별하단다.” 칼렌이 말했다. “여기 와서 이 글자를 보렴.”


글라드는 칼렌 곁으로 가 비석에 적힌 글자를 보았다. 모두 읽을 수 없는 글자뿐이었다. “봐도 모르겠어요. 모두 처음 보는 글자인걸요.”


칼렌이 말했다. “그래, 그렇겠지. 그렇지만 자세히 보면 위화감이 느껴질 거야. 조금 더 집중해서 보렴.”


글라드는 글자들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네 줄짜리 글자들은 비석에 새겨져 있었다. 앞의 세 줄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한 줄은 유독 앞엣것들과는 차이가 느껴졌다. 마치 다른 문자처럼 느껴졌다.


“위화감···. 유독 마지막 줄에서 느껴져요.” 글라드가 말했다.


칼렌이 말했다. “그래, 당연하지. 앞에 문자는 도인 문자지만, 마지막 것은 옛 루테네르 문자니까 말이야.”


‘루테네르···?’ 글라드가 말했다. “어째서 루테네르의 글자가 여기에 있는 것인가요?”


“재촉하지 말아라, 글라드.” 칼렌이 말했다. “그건 글자를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지. 그 글자는 이런 뜻이란다. ‘아이케르의 오랜 친구, 류오. 이곳에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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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의혹의 숲 (6) 아라기 20.05.04 40 1 16쪽
» 의혹의 숲 (5) 글라드 20.05.04 40 1 10쪽
5 의혹의 숲 (4) 하인츠 20.05.04 46 1 14쪽
4 의혹의 숲 (3) 프리아 20.05.04 44 1 12쪽
3 의혹의 숲 (2) 아라기 +1 20.05.04 94 2 21쪽
2 의혹의 숲 (1) 로이 +1 20.05.04 205 2 17쪽
1 제1부 빛바랜 기사 프롤로그 +1 20.05.04 462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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