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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자의 노래

수호자의 노래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정상호
작품등록일 :
2020.05.04 01:40
최근연재일 :
2022.03.19 23:50
연재수 :
8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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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1
추천수 :
125
글자수 :
397,167

작성
20.05.04 20:33
조회
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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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1쪽

제1부 빛바랜 기사 프롤로그

DUMMY

“다른 길을 찾는 게 낫겠어.” 라우가 끊어진 다리를 보며 말했다.


엄중한 절벽은 울창한 숲을 사정없이 끊어 놓았다. 덕분에 절벽 위에는 하늘이 펼쳐졌다. 지긋지긋한 나뭇잎이 아니라. 여섯 밤 만에 만난 이른 봄의 하늘은 여전히 파랬다. 무수히 산산조각이 난 구름 조각들이 햇빛을 가리려 애썼다. 하지만 그날은 유난히도 햇빛이 강렬했다. 어쩌면 오랜만에 만났기에 더욱 그리 느껴졌을지도 몰랐다.


“다시 숲으로 돌아가는 건 질색이야.” 훈은 인상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주름이 많은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단도 같은 생각을 했다. 복잡한 ‘칸데이룬 숲’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지난 여섯 밤 동안, 좋은 기억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산맥 너머’의 차림을 한 노기사와 시종을 만난 것 외에는 나쁜 추억뿐이었다.


단의 아버지, 훈은 절벽으로 다가갔다. 단도 아버지를 따라 절벽으로 향했다. 절벽은 라우가 말했던 그대로였다. 그 자리를 지키던 오래된 흔들다리는 더는 보이지 않았다. 단은 아버지와 그의 동료를 따라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두컴컴하네요. 신기하게도. 햇빛이 이리도 내리쬐고 있는데.” 단이 말했다. 단은 도굴꾼인 아버지를 따르며, ‘산맥 아래’의 수많은 곳을 보았다. 그중에서도 단은 산등성이를 따라 무수한 시간에 걸쳐 탄생한 테사이가 떠올랐다. 아득한 절벽은 마치 테사이의 풍경처럼 보였다.


“생각보다 그리 깊지는 않아 보여.” 아버지가 말했다. 훈은 뒷짐을 지며 절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옆에는 여전히 라우가 쪼그리고 앉은 채였다. 아버지는 뒷짐을 풀고 손가락으로 절벽 아래를 가리켰다. “적당한 곳을 찾아서, 내려가도 괜찮을 거 같아.” 훈은 동료에게 설명하듯 말했다.


단은 절벽에서 눈을 뗐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뒤편을 바라보았다. 단이 바라본 곳에는 산맥 너머의 차림을 한 이질적인 이들이 있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낸 처량한 나무에 기대어 팔짱을 낀 사내는 온몸을 강철로 덮어 놓았다. 그들 말로는 판금 갑옷이라 부르는 것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산맥 너머의 기사와 비슷했다.


단은 뒷짐을 지며 산맥 너머의 기사에게 다가갔다. “뭐하고 계세요, 기사님?” 단이 물었다. 다행히도 노기사는 산맥 아래의 말을 할 줄 알았기에, 단에게는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노기사는 여전히 나무에 등을 기댄 채였다. 옆에는 노기사의 시종이 수풀 위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저, 태양을 피하고 있을 뿐이외다.” 노기사는 다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산맥 아래의 말에 아직 서툴렀기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성격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군요···. 하긴 날이 좀 덥긴 하네요. 벌써 이 정도 날씨면, 올여름은 예상이 안 되네요.” 단은 자신 나름의 상상을 곁들이며 이해했다. 수풀에 편히 앉아있던 시종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 소년은 단과 비슷한 또래였다. 불행히도 시종은 산맥 아래의 말을 거의 할 줄 몰랐다. 단에게는 또래의 친구는커녕 또래와 이야기를 할 기회도 거의 없었다. 또래와 얘기해본 것은 여관의 아이들 정도였다. 그래서 너무 아쉬웠다. “산맥 너머도 이 정도로 덥나요?” 단은 다시 노기사에게 질문했다.


“예···. 아마도.” 노기사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노기사의 낡은 철제투구는 지나간 시간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투구의 면갑에는 커다란 상처가 있었다. 노기사는 빛바랜 가죽 갑옷을 걸쳤고, 허리춤에는 검이 두 자루나 있었다. 그중에서 한 자루는 매우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 칼집에는 보라색과 초록색 빛을 내는 보석이 박혀있었다. 그늘에서는 더욱 빛을 냈다.


그 모습은 정녕 산맥 너머의 기사와 비슷할까. 단에게는 알 방법이 없었다. 단은 산맥 너머로 가본 적이 없었다. 산맥 너머의 이야기를 그저, 아버지께 들었을 뿐이었다. 바위보다 단단한 강철로 몸을 두른 산맥 너머의 기사들은 누구보다 먼저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이들이라고 들었다. 아름답고 날카로운 장창과 재빠른 기마들이 그들의 전우였다.


누군가가 단의 어깨를 툭 하고 건드렸다. “내려가기 적당한 곳을 찾았어.” 아버지였다. 훈은 여전히 단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노기사에게 말했다. “절벽 아래를 통해 절벽을 건너야 할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그제야 노기사는 나무에서 등을 뗐다. “상관없습니다.” 노기사는 여전히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시종을 향해 이야기했다. 단은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산맥 너머의 말이라고 여겼다.


절벽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무척 위태로웠기에 노기사의 매서운 야생마도 도굴꾼들의 노새도 갈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하는 수 없이 말들을 두고 가야만 했다. 그들은 아슬아슬한 비탈길을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오렌지색 햇빛은 절벽 아래까지 닿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다시 횃불을 밝혀야 했다. 절벽 한쪽에 손을 의지하며 그들은 조심스럽게 험한 벼랑길을 나아갔다.


다행히 횃불이 알맞게 타올랐기에 단은 울퉁불퉁한 벼랑길을 유심히 볼 수 있었다. 단은 튀어나온 돌을 밟지 않으려고 애쓰며 앞서가는 훈의 발자취를 좇았다. 혹여나 절벽 위에서 무엇인가 떨어지지는 않을까, 매서운 바람이 그들을 몰아세우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런 걱정은 금세 사라졌다. 조금씩 벼랑길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그들은 절벽 아래까지 내려왔다.


더는 물이 흐르지 않는 계곡 바닥은 짐승의 뼈와 배설물로 가득했다. 이름 모를 나무들이 머리를 높이고 있었고, 모든 나뭇잎 사이에는 거미줄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바위에는 이끼가 가득했고, 바닥에는 지네와 전갈이 기어 다녔다. 온갖 악취로 뒤섞인 바닥에서 훈이 말했다. “제기랄, 생각보다 더 심하잖아!” 단의 아버지는 두꺼운 가죽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 라우도 뒤따라 마스크를 꺼냈지만, 단은 아직 참을만했다.


노기사는 횃불로 이리저리 거미줄을 없애고 있었다. 그의 종자도 노기사를 따라 길을 만들고 있었다. 노기사가 만들어낸 길을 쫓으며 단이 물었다. “어디로 가야 길이 있을까요?”


“몰라, 가다 보면 나오겠지.” 라우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가죽 마스크 때문에 이해하기 힘들었다.


노기사가 추측했다. “내려오는 길이 있었으니, 올라가는 길도 있을 거요.”


단이 지네를 세 마리쯤 밟고 전갈 하나에 새끼발가락 하나를 쪼였을 때, 그들은 드디어 길을 찾아냈다. 인적이 드문 길은 무척이나 미끄러웠고, 거칠었다. 단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을 때 라우가 단의 팔을 잡아챘다. “칠칠치 못하긴!” 단은 라우를 보며 살짝 웃었다.


단의 아버지인 훈과 라우는 서로에게 좋은 동료였기에, 단은 어려서부터 종종 라우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라우는 단에게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다. 라우는 산맥 아래의 저명한 도굴꾼이었다. 그의 명성은 산맥 너머에도 알려진 듯해서, 종종 아홉 대륙의 황제가 그의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오래전 북방감시대의 조사를 위해 산맥 너머에서 학자가 내려온 적이 있었다. 라우는 그 조사에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어느 날 술기운이 가득하던 라우가 말했다. “우리는 성벽 바깥에 막사를 치고 이튿날 조사를 시작했지! 부서진 성벽 안에는 온갖 검과 갑옷 파편이 널브러져 있었고 사방에는 피가 가득했지!” 라우는 남은 막걸리를 비웠다. “하지만 시체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어! 단 하나도···.” 갑자기 라우는 굳게 입을 다물었고 더는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때를 제외하곤 라우는 항상 단의 좋은 친구였다. 단이 아버지를 따라 도굴꾼을 시작했을 때 라우는 단에게 많은 조언을 주었다.


드센 오르막길을 거의 다 오르자 하늘의 태양은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달이 이미 하늘 한가운데에서 태양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새벽바람이 불어왔다. 절벽 위에서 맞는 바람은 고된 땀을 식혀주기에 충분했고, 그들은 조금이나마 휴식을 취했다.


짧은 안식을 마치고 그들은 다시 나아갔다. 계곡 너머의 길은 또다시 나무들이 펼쳐져 있었다. 갈수록 나무들은 마르고 얇아졌기에 단은 다시 맑은 달빛과 만날 수 있었다. 달빛은 그들의 여정 위를 비춰주었다. 노기사의 상처 깊은 철제투구에도 달빛이 스며들었다. 단은 달빛에 스며든 노기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면갑에 난 커다란 상처 때문에 단은 노기사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지나간 시간이 새겨진 수많은 흉터가 얼굴에 수놓아져 있었다. 석양보다 붉은 머리카락과 빛바랜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노기사의 표정이 보였다. 달을 바라보는 노기사의 표정이 보였다. 하지만, 단은 그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오늘은 여기서 묵는 편이 좋겠어.” 라우가 나무에 손을 기대며 말했다. 그러자 훈은 노기사를 바라보았고, 노기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에서 단은 노기사의 종자와 함께 마른 나뭇가지를 모았다. 그들은 함께 모닥불을 피웠다. 그 사이 라우는 달빛 사이로 작은 토끼 두 마리를 잡아 왔다. 훈과 노기사는 적당한 나무 열매들을 구해왔다. 토끼 구이를 끝마친 뒤 단은 장작 타는 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앙상한 나뭇가지들 사이로 산의 밤하늘이 보였다. 토룬이 한 입 베어 문 달과 무수한 별들이 보였다. 잠자리는 편치 않았지만, 단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단은 우레와 같은 소리에 눈을 떴다. 피워둔 모닥불은 여전히 붉게 타올랐고, 달빛은 그를 비추고 있었다. 노기사의 종자는 어느새 검을 뽑아 고요한 숲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어디 계시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단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숲 너머에서 모닥불보다도, 달빛보다도 환한 빛이 밝았다. 그리고 우레와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단은 황급히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뛰어가려 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소리쳤다. “안 돼, 가지 마!” 단은 무시하고 불빛으로 달려갔다.


거대한 불빛은 수많은 ‘그림자들’과 싸우고 있었다. 노기사는 불빛을 휘두르며 그림자들을 하나둘씩 베어냈다. 그림자들은 베어질 때마다 사방으로, 악한 기운을 내뿜었다. 단은 그림자들 가운데 쓰러져있는 사내를 보았다. “아버지!” 훈은 그림자들에게 잠식되고 있었다.


단이 훈에게 다가서려 하자, 노기사가 만류했다. “그 이상 다가오지 마라! 여긴 위험해!” 하지만 단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단은 계속해서 달려갔다.


단은 쓰러진 훈을 끌어안았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아버지!” 훈은 답을 하지 않았다.


그림자들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림자들은 무척이나 차가웠다.


가장 먼저 칼날과 같이 싸늘한 감촉이 팔을 감쌌다. 그다음은 목을 둘러쌌고 허리와 다리를 안았다.


얼음장같이 차가웠지만, 한편으로는 따듯했다. 공허했지만 가득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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