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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자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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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정상호
작품등록일 :
2020.05.04 01:40
최근연재일 :
2022.03.19 23:50
연재수 :
80 회
조회수 :
3,536
추천수 :
125
글자수 :
397,167

작성
20.05.04 20:37
조회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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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2쪽

의혹의 숲 (3) 프리아

DUMMY

“그럼 다녀오리다.” 하인츠가 나헨 다이아르에게 살짝 입 맞췄다.


프레이의 달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마이아르 저택의 관리자는 멜리시아의 공물을 구하기 위해 직접 사냥에 나서야 했다. 얼마 전 성년세례를 받은 프리아는 굉장히 못마땅했다. ‘나도 사냥 가고 싶은데.’ 하지만 사냥은 온전히 기사들의 몫이었다. 프리아는 기사를 동경했다. 아름다운 갑옷을 입고 날렵하고 수려한 말에 올라타 강력하고 날카로운 랜스를 들고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프리아의 아버지 뒤편에는 그녀의 배다른 남매인 에리크 다이아르가 있었다. 에리크는 마이아르 저택에서, 아니 프리아에게 사생아라고 불렸다. 붉은 머리를 가진 그는 프리아보다 한 살 많았다.


프리아는 에리크에게 다가가 뾰로통하게 말했다. “네가 뭘 제대로 잡을 수 있겠어? 개구리나 잡아 와!”


“사슴으로 잡아 오지요, 아가씨!” 사생아가 능청맞게 답했다.


사생아 에리크는 무척이나 훤칠한 청년이었다. 프리아보다 머리가 두 뼘은 위에 있었으며, 프레이인 특유의 안개빛 피부를 가졌다. 눈매는 금방 다듬은 화살촉처럼 날카로웠고 눈동자는 녹색으로 번뜩였다. 붉은 곱슬머리 아래에 짙은 눈썹이 자리했고 콧날은 매부리 같았다. 저택의 시녀인 벨리카는 사생아에게 흠뻑 빠져있었는데 프리아는 그런 벨리카를 언제든 쥐어박을 준비가 돼 있었다.


에리크 옆에는 집사 카를 아우스타르 경의 차남, 필론트 아우스타르가 있었다. 필은 삐쩍 마른 체격과 달리 꽤 힘을 쓰는 사내였다. 항상 가을이 되면 저택의 땔감은 그의 몫이었다. 필이 뒷마당에서 소일거리를 할 때면 프리아는 조용히 다가가 그를 구경하곤 했다. 삐쩍 마른 필은 언제나 프리아에게 친절했다.


필은 건너편에서 신발을 고쳐 매곤 사생아에게 말했다.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도련님?” 사생아는 프리아의 눈치를 보며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프리아는 말없이 자리를 떴다. ‘도련님은 무슨!’ 그녀는 다시 그녀의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선 윈그리아 수녀가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멜리시아의 가호가 있기를.” 윈그리아 수녀가 먼저 외웠다.


이어서 하인츠 경이 대답했다. “그대의 축복에 감사드립니다, 수녀.” 하인츠 경은 사뿐히 말에 올라탔다. 허리춤에 엮인 강철 장검이 찰랑거렸다. 영주는 가볍게 고삐를 당겨 천천히 성문으로 향했다. 뒤를 이어 사생아 에리크가 영주의 뒤를 쫓았고, 필론트 아우스타르가 그 뒤를 이었다.


프리아는 그들이 성문 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어머니, 나헨 다이아르는 평소와 같이 검은색과 금색 실크로 수 놓인 흰색 벨벳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금발 위에는 연한 진은색 관이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이 저택의 진짜 도련님인 토윈이 어머니의 손을 힘껏 붙잡고 있었다. “들어가자꾸나.” 그들의 어머니가 속삭였다. 프리아는 푸른 바다를 담은 어머니의 눈동자에서 아무런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작은 아이의 손을 잡아끌며 저택으로 들어갔다.


프리아는 화장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짓누르던 관을 내려놓았다. 벨리카가 다가와 프리아의 헝클어진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프리아는 벨리카가 떠온 더운물로 얼굴을 씻어냈다. 어찌나 난폭했는지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머리를 정리하던 벨리카에게까지 프리아의 심술이 전해졌다.


벨리카가 물었다. “아가씨, 왜 이렇게 짜증이 나셨대요?”


“시끄러워! 나 짜증 내는 거 처음 봐?” 프리아는 마저 얼굴을 씻으며 소리쳤다.


그녀의 시녀가 말했다. “아뇨, 익숙하죠. 근데 오늘은 평소보다 더 심하시네요, 아가씨.”

“입 다물어!” 프리아는 고개를 돌리며 벨리카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벨리카는 뾰로통하게 입을 내밀었다. “아가씨, 부인께서 아름다운 것을 많이 물려 주셨는데 어째서 가꾸지 않으시나요? 짜증은 사람을 나쁘게 만든답니다. 웃어요, 아가씨!” 벨리카는 빗으로 프리아의 금발을 강하게 당겼다.


‘웃으라고? 퍽이나.’ 오늘은 프리아가 웃기엔 적당한 날이 아니었다. “언제쯤 다 끝나? 너랑 있다간 나까지 바보가 될 거 같아.”


프리아는 멍청한 벨리카를 내버려 두려워했다. 그녀의 시녀가 “조금만 더요! 아가씨!”라고 소리쳤지만, 프리아는 들은 채 만 채였다. 방에서 나온 그녀는 곧장 서재로, 정확히는 서재 바로 앞에 있는 테오의 방으로 향했다. 마이아르 저택의 북쪽 맨 끝에는 서재가 있었고, 테오의 방은 서재 바로 옆에 붙어있었다.


프리아는 차가운 석재 복도를 지나 테오의 방에 도착했다. 그녀는 힘차게 문을 열고 방에 들어섰다. 사방에 흩어져 있는 책들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책마다 글자가 빼곡히 쓰여 있었다. 프리아는 곧바로 책에서 눈길을 뗐다. 그녀는 책같이 어지러운 것은 딱 질색이었다. 그녀는 굳게 닫힌 창문을 힘껏 밀어젖혔다. 푸른 나뭇잎들이 창문 너머에 펼쳐졌다. 숲의 경계 주위로 낮은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그 아래로 저택의 뒷마당이 있었다. 뒷마당에는 짚으로 만든 표적 몇 개가 놓여있었다. 언젠가 아버지가 훈련을 위해 가져다 놓으신 것이었다. 아우스타르의 삼남, 로나트가 가느다란 봉을 잡고 표적을 향해 이리저리 찔러대고 있었다.


프리아가 소리쳤다. “로나트! 너, 테오 못 봤니?”


로나트는 깜짝 놀라 그만 봉을 놓쳐버렸다. “어라···?” 그는 이리저리 두리번대며 주위를 살폈다.


“이쪽이야, 멍청아!” 프리아가 재차 소리쳤다.


소리를 확인한 로나트는 고개를 돌려 프리아를 바라보았다. “아가씨셨군요! 좋은 아침, 아니 좋은 낮입니다!” 로나트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좋은 낮이야.” 프리아가 말했다. “그래서, 테오 못 봤니?”


“테오, 테오요? 아뇨, 못 봤어요.” 로나트는 고개를 저었다.


‘괜히 시간만 버렸잖아.’ 프리아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럼 하던 일, 마저 해.”


프리아는 다시 창문을 굳게 닫았다. 그녀는 방 한편에 딸린 문을 열고 서재로 향했다. 매캐한 먼지향이 코를 적셨다. 마이아르 저택의 서재는 원기둥꼴 구조였고 둥근 벽 전체가 책장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책장 하나하나마다 책으로 차 있었다. 어느 한 편에는 다음 층으로 이어지는 사다리가 있었다. 프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서재는 천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사다리가 붙은 책장에는 여러 공간이 튀어나와 있었다. 사람 둘 정도 높이의 공간에 테오가 걸터앉아 있었다. 호수와 같이 푸른 머릿결을 가진 소년은 프리아의 기척도 모른 채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프리아는 테오에게 소리쳐 그를 부르려 했지만 이내 단념하고 조용히 사다리로 향했다.


어느덧 프리아는 테오에게 가까워졌다. 그에게 가까워질수록 매캐한 향이 강해졌다. 언제부터, 아마도 그녀보다도 저택에 오래 있었을 먼지들이 그녀의 코를 간질였다. 프리아는 제도 모르게 재채기를 내뱉었다. 조용히 책을 읽던 테오가 깜짝 놀라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자 그가 앉아있던 판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프리아가 소리쳤다. “안 돼! 여기! 손잡아!” 프리아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테오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책장에 몸을 지탱한 채 읽고 있던 책을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아놓았다. “왜 이리 소란이세요, 아가씨.” 테오는 방긋 웃었다.


그들은 먼지 아래 자리를 잡았다. 테오는 다시 여러 책을 꺼내왔는데, 하나같이 두꺼운 것들이었다. “아까 왜 그런데 앉아있었던 거야?” 프리아가 말했다.


“읽고 싶은 책이 있었거든요. 예전부터 계속 찾았었는데, 마침 거기에 있더군요. 내려오는 시간도 아까워서 그냥 그 자리에서 읽었지 뭐에요.” 테오가 쑥스럽다는 듯 말했다.


프리아가 물었다. “뭘 그리 찾고 있었는데?” 그녀의 호기심이 떠올랐다. 프리아는 궁금한 게 생기면 반드시 알아야 직성이 풀렸다.


“별로 재미없는 거예요, 아가씨.” 테오는 말끝을 흐렸다.


테오는 말하기 싫은 눈치였지만, 프리아는 끝까지 물었다. “괜찮아, 테오. 그냥 알려줘. 나 재미없는 거 좋아해. 아니면 혹시 말하기 이상한 거야?”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저.”


프리아가 말했다. “괜찮아, 테오. 비웃거나 그러지 않을게.”


“괴물··· 에 관한 책을 찾고 있었어요.” 테오가 말했다. 순간 그의 눈빛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에?’ 프리아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괴물···? 그런 건 그냥 옛날이야기에나 나오는 거잖아.”


테오는 대답하지 않고 사다리를 향해 뛰어갔다. 그는 순식간에 조금 전에 있던 자리에서 책 한 권을 꺼내왔다. “이 책이 조금 전까지 제가 읽고 있었던 책이에요, 아가씨.” 테오가 말했다.


프리아는 테오가 꺼내 온 책을 살펴보았다. 그 책은 언제 쓰였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겉은 오래되고 빛바래어 누더기와 같았다. “얼마나 읽었어, 테오?”


“이제 막 읽기 시작한 참이에요.” 테오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낡은 의자에 자리했다.


프리아의 호기심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만 돌아가기로 했다. 아까보다 프리아의 기분은 괜찮아졌고, 또 무엇보다 더는 테오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테오에게 서재는 중요한 공간일지 몰라도, 그녀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따분하고 지루한 곳이었다. 그녀는 책보다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테오에게 가볍게 작별인사를 한 프리아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서재를 나섰다.


마이아르 저택의 소연회장에서 소박한 식사를 마친 프리아는 그 어느 때 보다 일찍 잠자리로 향했다. 집사의 눈을 피해 성벽을 넘어 성마을의 친구들을 만나러 가거나, 여러 시종과 함께 저택을 거닐며 별을 바라볼 생각도 없었다. 그저 잠들고 싶었다. 그녀가 잠자리에 눕자 수많은 잡생각이 찾아왔다. 푹신한 양털 이불도, 빳빳한 베개도 그녀의 잠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고요한 밤은 깊어갔다.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프리아는 결국 이부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녀는 발코니 문을 열어젖혔고 익숙하다는 듯 난간을 올라타 아래로 내려갔다. 저택 벽면에 튀어나온 돌부리를 밟으며 프리아는 사뿐히 뒷마당에 착지했다. 뒷마당 한편에 마련된 작은 사격장은 그녀의 몫이었다. 프리아는 예전에 경비초소에서 슬쩍한 활과 화살을 손에 쥐었다. 소녀는 달빛에 의지하여 가벼이 활시위를 당겼고 과녁을 조준했다. 화살은 빠르게 날아가 과녁에 명중했다. ‘좋았어!’ 프리아는 바늘로 천에 구멍을 뚫을 때보다는 화살로 과녁에 구멍을 뚫을 때 훨씬 속이 시원했다. 몇 차례 짚더미에 화살을 꽂자 프리아의 마음은 조금 나아졌다. ‘사슴쯤이야! 나는 곰도 잡을 수 있다구!’


갑자기 주변이 환히 밝아졌다. 조금 전까지 조용하던 저택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뒷마당 근처에 자리한 경비초소에서 경비병들이 뛰쳐나왔다. 프리아는 황급히 수풀로 숨었다. ‘저택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프리아는 자기가 왜 숨었는지 알 수 없었다.


뛰어가는 경비병들 사이로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마구간지기 루드의 아들 뚱뚱한 비타스였다. 프리아는 수풀에서 나와 그의 뒤를 쫓았다. “비타스!” 소녀는 마구간지기의 아들을 불렀다.


투구를 잊어버린 뚱뚱한 경비병은 소녀의 얼굴을 보자 입을 크게 벌렸다. “아니, 아가씨! 왜, 여기 계십니까?” 비타스는 재빨리 프리아에게 뛰어왔다. 그의 덩치에 맞는 거대한 갑옷에 달린 사슬이 출렁거렸다.


“무슨 일이야, 비타스?” 프리아가 물었다. ‘용의 습격? 아니면 ···괴물?’ 새벽에 경비병들이 당황할 일들은 그것밖에 없으리라.


“저기, 저···. 죄송합니다. 아가씨. 영주님께서···.” 뚱뚱한 경비병은 공손히 양손을 모은 채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영주님께서 큰 상처를 입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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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의혹의 숲 (5) 글라드 20.05.04 39 1 10쪽
5 의혹의 숲 (4) 하인츠 20.05.04 45 1 14쪽
» 의혹의 숲 (3) 프리아 20.05.04 44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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