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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자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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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정상호
작품등록일 :
2020.05.04 01:40
최근연재일 :
2022.03.19 23:50
연재수 :
80 회
조회수 :
3,543
추천수 :
125
글자수 :
397,167

작성
20.05.04 20:36
조회
94
추천
2
글자
21쪽

의혹의 숲 (2) 아라기

DUMMY

막 여명이 내리려 할 때였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스타르니올드 부두는 벌써 분주했다.


오랫동안 항해를 한 듯 보이는 케르다 마을의 어부들이 저마다 물고기가 가득 담긴 통을 내리고 있었다. 갈색 머리의 코덴인 선원은 일찍이 도착한 정기선에 다가가 정박을 도왔다. 이윽고 정박한 정기선에서 여러 이들이 내렸다. 그중에서도 형형색색의 카민 사막 풍의 옷을 껴입은 사내가 돋보였다. 아홉 대륙 전역을 순례하는 대부호임이 틀림없었다.


멀리 별의 등대 오른쪽에 또 다른 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삼단으로 노가 쌓인 갤리 무역선이었다. 돛은 붉은 바탕이었고 녹색 뱀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오랫동안 해풍에 고생하여 부식되고 이끼가 잔뜩 낀 그리판디오르 감시탑 위에서 스타르니올드 부둣가를 내려다보던 아라기 하에브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라기는 손에 쥐고 있던 종이 한 조각을 바라보았다.


‘라넥사르의 달. 셋째 주의 넷째 날 아침. 붉은 바탕에 녹색 뱀 문양의 돛.’


‘역시 이번에도 나타나는군.’ 아라기는 한 손으로 종이를 꾸기곤 성벽 너머로 집어 던졌다. 그리곤 옆에서 다른 쪽을 쳐다보던 키아렌에게 소리쳤다. “이봐, 키아렌! 어딜 보고 있나! 저길 보라고!”


키아렌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예, 경! 그렇게 소리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잘 들린다고요. 음, 드디어 나타난 건가요?”


“그래, 붉은 바탕에 녹색 뱀! 틀림없어.” 아라기 경은 딱 잘라 말했다. ‘놀랍게도 말이지!’ “계획대로 해! 키아렌. 제대로 병사들을 준비시키라고!” 아라기는 감시탑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법무관의 허리춤에 두 자루의 검이 흔들렸다.


녹색 뱀이 그려진 무역선 갑판에는 족히 열 명이 되어 보이는 이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대부분은 평범한 선원으로 보였지만 그중 몇 명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갑옷으로 무장한 상태였다. ‘바다사슬단? 설마, 그럴 리 없지.’ 감시탑 아래로 내려온 아라기 하에브는 해안성벽을 따라 계속 걸어갔고 어느덧 부둣가에 도착했다.


부둣가의 비린내가 아라기 하에브의 코를 찔렀다. 아라기 하에브 경이 히슬렌트 기사단의 법무관이 되어 프레이루엘을 떠나 스타르니올드에 온 게 벌써 십오 년 전 이야기였다. 하지만 법무관은 전혀 이 도시에 익숙해질 수 없었다. 그는 이 도시가 맘에 들지 않았다.


아라기 하에브가 부둣가에 정박한 녹색 뱀의 무역선에 도착할 때쯤에는, 무역선의 선원들은 분주히 짐을 내리던 참이었다. 선원들은 꽤 묵직해 보이는 술통을 옮기고 있었다. 벌써 몇 개는 부둣가에 내려와 있었다. 검은색 갑옷을 입은 이들이 배 위에서, 몇몇은 부둣가에서 술통을 지키고 있었다. 누더기를 뒤집어쓴 아라기는 양손을 누더기 사이에 찔러 넣고 서서히 그들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아라기는 천천히 분주한 이들을 바라보는 이에게 다가갔다. 코덴인 특유의 갈색 곱슬머리를 가진 그는 오랫동안 태양에 그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소매 없는 왼팔에는 날렵한 뱀 문신이 있었다.


얼마 못 가서 검은 사슬을 입은 사내가 법무관을 막아 세웠다. “여긴 네 앞마당이 아니야, 루테네르 친구. 썩 꺼져!”


불행히도 아라기의 의문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 사내는 명백하게 바다사슬단의 일원이었다. 촘촘히 엮은 흑진주빛 사슬은 그들의 자랑이었다. ‘정말 바다사슬단께서 납시었군!’ 아라기는 그 점을 이용하려 했다. 눌러쓴 후드를 벗으며 법무관이 말했다. “나는 이 도시의 법무관일세.”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느껴졌고, 법무관의 어깻죽지에는 히슬렌트 기사단의 태양빛 독수리의 상징이 빛났다.


사슬의 사내는 잠깐 당황하더니 곧장 법무관에게 말했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나리, 제가 바다 건너 사람이라 바다 안의 높으신 분들께서는 누더기를 입고 다니신다는 걸 깜빡 잊었습니다요.”


아라기는 살짝 미소 지었다. “괜찮네, 바다 너머의 태양 이야기는 나도 잘 알고 있지. 끊이지 않는 라넥사르의 은총 덕에 갑옷까지 검게 타버릴 정도니까 말이야. 그 얼마나 대단한지, 자네 머릿속까지 다 타버릴 정도니 말이야!” 아라기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사내는 잠시 생각하더니 표정이 굳었다.


바다사슬단 사내는 재빨리 곡도를 뽑아 아라기에게 휘둘렀다. 아라기는 사내의 행동을 예측이라도 한 듯 고개를 숙이며 가볍게 피했다. 그리곤 재빠르게 사내의 다리를 걸었다. 사내는 균형을 잃으며 곤두박질쳤고, 어느새 사내의 칼은 아라기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아라기는 칼을 잃고 자빠진 사내의 얼굴을 힘껏 짓밟았다.


이내 부두에 나와 있던 다른 바다사슬단 사내 셋이 저마다 곡도를 뽑으며 아라기에게 다가왔다. 술통을 옮기던 선원들도 사내들과 함께 아라기를 덮치려 했다. 선장처럼 보이는 사내만이 헐레벌떡 배로 돌아가기 위해 부둣가에 연결된 널빤지를 향해 뛰어갔다. 법무관은 춤추듯 검은 사슬 사내의 공격을 막아냈고 이어서 그 사내의 목을 베어냈다. 몇몇 기죽은 선원들은 뒤로 물러섰지만, 바다사슬단 사내들은 계속 덤벼들었다. 아라기는 뒤쪽에서 찔러오는 사내의 공격을 가볍게 피했고 앞에 있는 사내의 공격을 받아 쳐냈다. 이후 반격을 하려 할 때, 법무관은 그만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제기랄!’ 아라기의 몸은 앞으로 쏠렸고, 바다사슬단 사내의 날카로운 반월도가 아라기의 목을 덮쳤다.


아라기는 아차 싶었지만, 아라기의 목은 여전히 붙어있었다. 때마침 키아렌이 나타나 반월도를 든 사내를 걷어찼다. 법무관은 재빨리 균형을 잡고 다시 칼을 겨누었다. “죽기 싫으면 항복해, 이 새끼야!” 그러자 사내는 반월도로 옆에 있던 동료를 가차 없이 베었다.


아라기가 놀라 소리쳤다. “뭐 하는 짓···!” 법무관의 놀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순식간에 사내는 피로 물든 곡도로 자신의 목을 수차례 찔렀다.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사내는 비명 한번 지르지 않고 담담하게 쓰러졌다.


“후···.” 법무관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이놈들이 싫다니까.’ 법무관은 피범벅이 된 누더기를 벗어 조금 전까지 사람이었던 고기 조각들 위로 내팽개쳤다. 허리춤에 꽂힌 검 두 자루는 여전히 쓰이지 않았다. 그리고 부둣가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떨고 있는 선원들을 바라보았다.


“저들은 제가 맡아두죠.” 키아렌이 말했다. 법무관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배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접혀있던 돛은 훤히 펼쳐져 있고, 계선줄도 오래전에 잘려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배는 바다를 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상은 바다 한가운데처럼 고요했고, 선장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법무관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배와 부둣가를 잇는 널빤지로 향했다.


무역선에 들어서자 여러 술통 한가운데에는 앞서 도망쳤던 선장이 결박된 채 누워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데니스가 있었다. “재미 볼 건 다 봤나?” 데니스가 물었다. 아침 바람이 바닷물에 젖은 그의 머리카락을 두드렸다.


‘재미는 무슨.’ 아라기는 혀를 찼다. “···고생했네, 데니스.” 데니스를 짧게 치하하고 법무관은 무역선을 둘러보았다. 배에는 족히 열 개는 넘는 술통이 있었다. 나무통 하나마다 오랜 항해를 이겨내기 위해 거센 포장이 되어있었다. 술통 하나가 족히 소년 한 명 무게 정도였고, 옮길 때면 거친 소리를 냈다. 법무관이 물었다. “이게 다인가?”


데니스가 답했다. “그래. 선장실부터, 조타실까지 빠짐없이 뒤졌어. 왜? 나머지 찾은 것도 읊어 줄까? 식칼 다섯 점에 작살 아홉···.”


“아니, 아니. 괜찮아.” 아라기는 손사래 쳤다. 아라기는 한쪽에 놓인 술통에 다가갔다. 술통 위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데니스, 혹시 술통 안은 확인해 봤나?”


데니스는 술통 위에 앉아 발뒤꿈치로 술통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니, 아직. 아라기, 네가 오면 같이 확인해보려 했지. 뭐, 별로 궁금하진 않아.” 낡은 가죽 부츠가 술통과 부딪치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법무관은 바닥에 놓인 식칼을 주워들었다. “그럼 지금 확인해보지.” 아라기가 식칼로 술통 뚜껑을 뜯어냈다. 통 안에는 불그스름한 가루들이 가득했다. 아라기는 손을 집어넣어 가루를 만져보았다. 가루는 겉보기와 다르게 까칠까칠했다.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고, 밖에서는 더욱 붉은색을 띠었다.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라기는 가루를 한 움큼 집어 들어 데니스에게 가져갔다. “자네는 이게 뭔지 알겠나?”


“전혀.” 데니스는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네 부관에게 물어보는 건 어때?”


아라기가 대답했다. “···그래. 그게 낫겠군.” 키아렌은 스타르니올드의 저명한 대장장이 가문 출신이었고, 그는 기사단에 들어오기 전까지 대장간에서 일했다. 아라기는 부둣가로 향하려 했다.


“잠깐. 내가 불러다 줄게. 어차피 이 녀석이랑 저 술통들도 옮겨야 하니까 말이야.” 데니스는 엄지손가락으로 결박된 선장을 가리켰다. 곧 데니스가 코덴인 선장과 통 하나를 양팔에 끼고 부둣가로 내려갔다.


아라기는 난간에 팔을 괸 채 부둣가를 내려다보았다. 부둣가는 뒤처리를 위해 수많은 병사로 붐볐다. 술통들을 옮기기 위해 병사들이 무역선으로 하나둘씩 올라왔다. 데니스는 한쪽 구석에 골칫거리를 내려놓더니 키아렌에게 다가갔다. 키아렌이 있던 곳에는 선원들이 포박되어 있었다. 때마침 스타르니아스 해안성벽 너머로 아침을 알리는 예르아드 종탑의 종소리가 들렸다. 키아렌은 데니스와 이야기를 몇 마디 주고받더니 이내 무역선 쪽으로 다가왔다.


“어서 오게, 키아렌.” 자세를 고친 아라기는 키아렌에게 손에 쥐고 있던 가루를 내밀었다. “이게 뭔지 알겠나?”


부관은 법무관의 손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아뇨, 잘 모르겠습니다.” 키아렌은 당황하며 대답했다. 별수 없이 아라기는 다시 손바닥을 오므렸다.


‘골칫거리가 하나 더 늘었군.’ 아라기는 생각을 속으로 삼켰다. 손에 꽉 쥔 골칫거리를 따로 챙겨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봐! 잠시 실례하네, 아라기." 데니스가 말을 걸었다. 아라기는 부둣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둣가에는 데니스와 금발의 소년이 있었다. 아라기는 그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라기는 소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짧은 금발의 소년은 은색 새틴 더블릿을 걸치고 있었다. 더블릿에는 황금 실로 오렌지색 태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아라기는 한눈에 그 문장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안판모르···.' 아라기는 그 문장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모르니아드 대평원은 루테네르에서 가장 혹독한 곳이었다. 예전부터 그 땅은 동쪽과 서쪽의 기사들의 전장으로 쓰였다. 북쪽으로는 항상 강을 타고 내려온 야만인들의 습격을 받았고, 남쪽으로는 테르훈트족의 약탈에 시달렸다. 언젠가 막대한 황금을 업은 안판모르 가문이 모르니아드의 주인이 되었고, 이후 그 땅은 줄곧 오렌지색 태양 문양의 보호를 받으며 번영했다. 모르니아드는 지난 전쟁에서 피해를 보지 않고 고스란히 남은 유일한 곳이었다. 비록 지금의 안판모르 대공인 툴게윈이 여러 고초를 겪긴 했지만 말이다.

데니스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자, 그럼 무슨 일인지 말해보게." 데니스가 소년에게 말했다.


"네, 집행관님." 안판모르 소년이 말했다. "저는 그랜트 학자님의 전언을 가져왔습니다, 법무관님." 소년에게서는 은은한 오렌지향이 났다.


아라기는 왜소하고 늙은 프레이인을 떠올렸다. “그랜트 학자···. 그래, 이야기해보게.”

소년이 말했다. “부기사단장께서 긴급회의를 소집하셨다고, 그랜트 학자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부기사단장···. 대체 무슨 일이지?’ 아라기가 말했다. “뒤처리를 부탁하네, 데니스.”


부관이 그리판디오르 감시탑 아래 묶어두었던 말을 데려왔다. 아라기는 키아렌을 치하하고, 곧장 라넥사르 언덕으로 향했다. 라넥사르 언덕은 스타르니올드의 최정상이자, 한때 루테네르의 수도였던 곳이기도 했다. 지금은 히슬렌트 기사단의 처소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었다. 아라기와 그의 부관은 스타르니아스 해안성벽을 지나, 카에니오르 성문을 지났다. 스타르니아스 해안성벽에는 오랜 세월 겪은 바닷바람과 야만인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반면 카에니오르 성문은 카에니오르 7세 시대에 새롭게 지어진 것이었다. 성문 앞에는 카에니오르 7세의 동상이 있었다.


아라기는 허름한 골목길 사이로 말을 몰았다. 아직 건물의 잔해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골목길 너머에서 들려왔다. 누더기를 걸친 노인이 널찍한 대리석 잔해에 걸터앉아 있었다. 삐쩍 마른 루테네르 청년은 손바닥만 한 녹슨 칼을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법무관은 재빨리 말을 몰았다. 포장되지 않은 골목길은 투박한 소리를 냈다. 멀리 예르아드 종탑이 보였고, 황금 성문 너머로는 스타르니올드 대성당의 첨탑이 보였다.


아라기는 케르니올드 성문을 지나 무너진 성루에 도착했다. 무너진 성루는 스타르니올드가 함락되기 전까지 루테네르의 궁전이었다. 수십 년 전 스타르니올드가 함락되면서 오랜 역사를 자랑한 루테네르의 궁전도 함께 무너져버렸다. 결국, 지금은 일부만 남았고, 그 남은 일부마저도 히슬렌트 기사단에 의해 사용되고 있었다.


성루의 쌍둥이 성탑 사이에는 거대한 관문이 있었고, 관문 너머에는 커다란 복도가 이어졌다. 커다란 복도의 끝에는 전당이 하나 있었다. 그 전당은 또다시 수많은 복도를 이어주는 통로 역할을 했다. 그 전당 한가운데에는 커다랗고 오래된 석상이 있었다. 그 석상은 태양의 신이자, 스타르니올드의 수호신 라넥사르였다. 그 석상 앞에 누군가가 엄숙히 기도하고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색 장발을 가진 사내는 검은색 벨벳에 오렌지색으로 무늬를 낸 벨벳을 걸치고 있었다. “···래, 혹은 가까운 내일에···.”


아라기는 그 사내를 방해하지 않으려 조용히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발걸음 소리가 그를 방해했는지, 기도를 올리던 사내는 조용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라기는 그 사내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챘다. “에드가, 에드가 아닌가!”


“···오랜만일세, 아라기.” 에드가는 아라기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태양 바다가 얼어붙었을 때 떠났으니, 대충 반년만일세.”


아라기는 에드가가 건넨 손을 가볍게 잡았다. “그래, 이렇게 보니 참으로 반갑군! 언제 돌아왔나?”


“이제 막 도착했다네. 라넥사르께 무사한 귀환을 감사드리고 있었지!” 에드가가 말했다.

법무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 대공께서는 태평하시던가?”


“그래, 물론이지.” 에드가는 살짝 뜸을 들였다. “우리 아버지, 아니. 툴게윈 대공께서는 늘 정정하시지. 황금빛 독수리와 같다고. 아라기, 네 안부는 잘 전해드렸어. 대공께서 고맙다고 하시더군. 시간이 허락된다면 다시 우리가 모르니아드의 오렌지 나무 아래를 걷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셨지.”


‘시간이 된다면 말이지.’ 아라기는 쓴웃음을 지었다.


에드가는 히슬렌트 기사단의 재무관이자, 툴게윈 안판모르 대공의 후계자였다. 비록 그는 장남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예전, 아주 오래전 아라기는 툴게윈 대공의 종자였다. 그 무렵의 아라기는 모르니아드의 안판모르 궁전에서 머물렀고, 그곳에서 에드가와 처음 만났다. 이후 아라기가 아홉 대륙의 전쟁 영웅으로, 한 서사시의 주인공으로 발자취를 옮길 적에, 에드가는 가문을 위해 가정을 꾸렸고, 그와 닮은 아들을 키워냈다. 그들이 다시 만난 건 히슬렌트 기사단에서였다.


아라기가 말했다. “그래, 그나저나 아까 네 아들을 보았어. 분명히 이름이···.”


“피게르!”


“그래, 그래. 피게르!” 아라기는 곧장 덧붙였다. “그랜트 학자의 말을 전해주더군.”


“그 노인네는 오자마자 부려먹는군.” 에드가는 혀를 찼다. “누구도 아니고, 안판모르이거늘! 언제 한번 얘기해봐야겠어.”


“그나저나 오랜만의 모르니아드는 어땠나?” 아라기는 에드가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아라기의 물음에 에드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아라기는 에드가의 얼굴에서 여러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침묵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고향은 길지 않았고, 그래서 느낄 것도 없었지.” 에드가가 말했다.


“그런가? 유감일세.”


짧은 대화는 계속 이어졌고, 기나긴 회랑의 끝이 보였다. 어느덧 그들은 히슬렌트 기사단의 회의장에 도착했다. 그곳은 과거에 루테네르 궁재가 사용했던 방이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거대한 문에는 그에 걸맞게 독수리, 사자, 말과 같은 수많은 것들이 그려져 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금으로 칠해져 있었고, 짐승들의 눈에는 각기 다른 보석이 박혀있었다. 아라기는 사자머리 모양의 문고리를 가볍게 돌려 문을 열었다.


세 개의 촛대로 은은히 밝혀진 회의장에는 이미 수많은 기사가 자리해 있었다. 정면의 거대한 벽에는 오래된 태피스트리가 걸려있었다. 라넥사르 언덕에서 스타르니오르 대제가 그의 명검을 들고 야만인들을 몰아내는···. 태피스트리 정면에는 히슬렌트 기사단의 문장이 그려진 보로 덮인 대리석 원탁이 있었다. 대리석 원탁에는 히슬렌트 기사단의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태피스트리 정면의 상석, 기사단장석은 비어있었다. 상석의 오른편에는 부기사단장 지안 포라티스가, 왼편에는 멜비드 하윈 경이 있었다. 아라기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자신의 자리인 멜비드 경의 옆자리로 향했다. 법무관은 왼편에 앉은 서기관 니르와 인사를 나누고, 그는 앞에 놓인 쇼트브레드를 집어 입에 넣었다. 에드가는 그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에드가의 옆에는 일등지휘관 티메스가 앉아있었다.


일등지휘관 티메스는 열정이 넘치는 코덴인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강철 같은 피부를 가진 일등지휘관은 본래 바다사슬단의 용병이었다. 그는 즈오투 전쟁 당시 프란토르를 도와 펠기오트 정복을 도왔고, 이 공적으로 기사서임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어째서 이곳 스타르니올드의 일등지휘관이 됐는지 아라기는 전혀 알지 못했고, 또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윽고 그랜트 학자와 베오루스 대주교가 도착했다. 그들이 자리를 채우자, 부기사단장이 말했다. “자, 슬슬 회의를 시작합시다.”


그러자 일등지휘관 티메스가 말했다. “아직 기사단장께서 오지 않으셨소.” 아라기는 비어있는 기사단장석을 바라보았다. 기사단장 듀마르 엘 디나스는 그 자리에 없었다.


히슬렌트 기사단의 단장 듀마르 엘 디나스는 저 멀리 카민 사막에서 온 장군이었다. 그가 언제 이 땅으로 왔는지 아라기는 알지 못했다. 아라기가 듀마르와 처음 만난 것은 크레게올드에서 일어난 반란에서였다. 아라기는 안판모르의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기세 좋던 반란군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반란의 끝 무렵 아라기는 듀마르 엘 디나스 그리고 지안 포라티스와 조우했다. 크레게올드 반란 이후 아라기는 그들과 히슬렌트 기사단에서 다시 만났다. 그 사이 아라기 하에브는 늙고 수많은 일을 겪었지만, 그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기사단장께서는 먼저 프레이루엘로 떠나셨습니다. 어젯밤에 급히 말이지요.” 부기사단장은 쇼트브레드가 담긴 그릇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의 진홍색 소매는 힘없이 너울거렸다.


지안 포라티스는 기사들의 우두머리에 걸맞은 복장이 전혀 아니었다. 부기사단장은 학자들이나 입을법한 나풀나풀한 진홍색 리넨 로브를 걸쳤고, 검고 둥근 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그의 피부는 시체처럼 창백했고, 밤색 눈동자는 초점 없이 흔들렸다. 그의 몸 어디에서도 히슬렌트 기사단의 상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찌 그리 급히 떠나셨단 말입니까. 저희와는 일절 상의도 없이···.” 베오루스 대주교가 말했다.


“단장께서는 홀로···, 어딘가로 훌쩍 사라지는 것을 좋아하셨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부기사단장은 백포도주가 담긴 잔을 비웠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여하튼 이야기를 시작하죠.”


회의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회의 중 수차례의 관습적인 이야기가 오갔다. 루테네르의 근황이나, 스타르니올드의 복구 상황 같은. 부기사단장은 지난 회의에 이어 루테네르 전역에 출몰하고 있는 도적 떼 이야기를 꺼냈다. 전쟁 이후 스타르니올드는 언제나 인력난에 시달렸다. 에드가는 모르니아드로부터 좋은 소식을 가져왔는데, 인력에 관한 이야기였다.


“모르니아드의 안판모르 공은 스타르니올드에 대한 지원은 언제나 환영한다고 하셨습니다.”


부기사단장이 물었다. “그럼 정확히, 얼마나 지원받았습니까?”


“노련한 기수 스물에, 궁수 백오십, 전사 육백입니다. 안판모르의 기수인 루드베그 경이 그들을 이끌고 이리로 오고 있지요.” 에드가가 재빨리 말했다.


‘생각보다 많은 양이로군···.’ 아라기는 곰곰이 생각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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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 작성자
    Lv.3 마병철
    작성일
    21.01.16 05:18
    No. 1

    바다사슬단 용병이 일등지휘관이라니, 계층 이동이 자유로운 곳인가봐요! 오늘도 즐겁게 읽었습니당^_^

    찬성: 2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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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의혹의 숲 (3) 프리아 20.05.04 44 1 12쪽
» 의혹의 숲 (2) 아라기 +1 20.05.04 95 2 21쪽
2 의혹의 숲 (1) 로이 +1 20.05.04 205 2 17쪽
1 제1부 빛바랜 기사 프롤로그 +1 20.05.04 463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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