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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자의 노래

수호자의 노래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정상호
작품등록일 :
2020.05.04 01:40
최근연재일 :
2022.03.19 23:50
연재수 :
8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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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26
추천수 :
125
글자수 :
397,167

작성
20.10.24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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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0쪽

백야 (7) 글라드

DUMMY

금방이라도 비를 뱉을 것 같았던 하늘에서는 구름이 사라져갔다. 여명이 찾아오자, 글라드는 메이룬에서 피어오르는 불안한 연기를 목도할 수 있었다. 뿌연 연기 아래로, 메이룬의 까마득한 성벽이 보였다. 거대한 관문 앞에, 끝없는 줄이 펼쳐졌다.


“아침부터 사람이 많군요···.” 글라드가 보기 드문 광경을 보며 떠들었다.


칼렌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말을 성문으로 몰았다. 글라드도 노기사를 따라 말을 몰았다. 피곤함에 찌든 인파의 시선이 빛바랜 갑옷에 꽂혔다. 다행히도, 지난날의 상처에서 솟구친 핏자국은 엊그제 쏟아진 빗방울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노기사는 자신에게 꽂힌 시선을 가리려, 상처 입은 투구를 더욱 깊게 눌러썼다. 길게 늘어선 인파는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시 제 길을 향했다.


그들은 기나긴 행렬의 끝에 멈춰 섰다. 조금씩이지만, 행렬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칼렌은 조용히 말에서 내렸다. 노기사는 앞자리의 사내에게 말을 건넸다. 패랭이를 쓴 나그네는 초췌한 차림이었다. 그들은 산맥 아래의 말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글라드는 그들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조금의 지루한 기다림이 끝났다. 빛바랜 투구가 삐걱대며 다가왔다. “무슨 대화를 나누셨습니까?” 글라드가 물었다.


“왜 이렇게 행렬이 긴지 물어봤어.” 칼렌이 말했다. “저자의 말로는, 밤중에 메이룬에서 무슨 일이 생겼다는구나.”


글라드는 메이룬에서 피어오르던 불안한 연기를 떠올렸다. “어떤 일이라고 하던가요?”


“글쎄다. 저자도 자세한 내막은 모르던 눈치더구나. 금방 이곳에 온 나그네인 모양이니,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 칼렌은 아직 상처가 쓰라린 듯, 잠시 팔을 쓸어내렸다. 글라드는 상처 난 투구 너머로 칼렌의 얼굴을 읽으려 했지만, 글라드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붉은 머리카락뿐이었다.


해가 고개를 내밀 무렵에야 그들은 겨우 관문의 코앞까지 닿았다. 관문 앞에 걸린 도개교 너머로 두정갑을 차려입은 경비병들이 보였다. 그들은 아마도, 오보이 기사단의 복식을 차려입고 있었다. 그 경비병 중에서 유독 튀는 복장을 한 사내가 있었다. 온몸을 붉게 차려입은 사내는 다른 경비병들을 통솔하는 듯 보였다.


마침내 그들의 차례가 되었을 때, 경비병 하나가 칼렌에게 다가왔다. 역시, 이번에도 글라드는 경비병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칼렌과 경비병의 짧은 대화가 끝나자, 경비병이 동료들을 향해 손짓했다. 그들은 관문을 가로막던 방책을 천천히 치우기 시작했다.


칼렌이 천천히 걸어왔다. “지나가도 좋다는구나.” 칼렌이 작게 속삭이며, 말에 올라탔다.


글라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칼렌을 따랐다. “다른 말은 없던가요?” 글라드가 물었다.


“딱히 없더구나.” 칼렌이 고삐를 당겼다. 칼렌의 손길을 따라, 그들은 조금씩 메이룬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방책이 덮인 도개교를 지날 때, 경비병들의 시선이 꽂혔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글라드와 칼렌을 주목하고 있는 듯했다. 산맥 너머 기사의 복식이 그들의 이목을 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글라드는 그런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도개교를 지나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시지요.” 누군가가 그런 글라드를 멈춰 세웠다. 글라드도 똑똑히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글라드는 말고삐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앞서가던 칼렌은 조금 늦게 말을 멈춰 세웠다.


목소리의 주인은 붉은 갑옷을 입은 사내였다. 산맥 아래의 기사는 어울리는 갓을 쓰고 있었다. 갓 아래로,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수많은 전장을 겪은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칼렌과 비슷하거나, 조금 어려 보였다.


칼렌과 글라드는 말머리를 돌려, 천천히 목소리의 주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칼렌은 짐짓, 엄숙하게 대답했다.


“역시, 산맥 너머의 분들이군요.” 붉은 갑옷의 사내는 유창하게 프레이의 말을 했다. “이 먼 곳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어디를 다니든 제 자유지요.” 칼렌은 대답을 회피했다.


사내는 애초에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듯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소인은 오보이 기사단의 호안이라는 사람이외다, 산맥 너머의 기사여. 메이룬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을 조사 중이지요.”


칼렌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글라드는 그런 칼렌을 대신하여, 질문을 던졌다. “대체 메이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요?”


오보이 기사단의 사내는 글라드의 호기심이 싫지는 않은 듯했다. “딱히 기밀은 아니니 알려드리지요. 지난밤, 메이룬의 귀족 가문 중 하나가 습격을 받았습니다. 비 오는 밤이었지만, 저택은 완전히 전소되어버렸지요. 하여, 분주히 습격자들을 추적하고 있지요. 그러니, 산맥 너머의 기사를 의심하더라도 노하지 마시지요.” 글라드를 보며 시작했던 이야기는, 칼렌을 향하며 끝났다.


칼렌은 노골적으로 호안의 시선을 피했다. “그랬군요.” 칼렌의 손에는 여전히 고삐가 쥐어져 있었다. “저희는 그 습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저희는 이제 막 메이룬에 돌아온 참이니까요.” 칼렌은 사실을 말했다.


“그대로 가던 길 가셔도 좋습니다.” 호안이 말했다. “뭐, 관심이 있으시다면 연기를 따라가십시오. 메이룬 북쪽의 류 가문의 저택이 나올 겁니다.” 그리고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원래 있던 자리로 향했다. “···은까마귀 가면과는 관련 없겠지.” 동시에 작은 중얼거림을 흘려댔다.


글라드는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았다. ‘류 가문···? 은까마귀···?’ 관문 앞에서 악수했던 류 가문의 사내를 기억했다. 글라드는 빛이 내리쬐는 동굴에서 무수한 단검을 쏘아댔던, 은까마귀를 기억했다.


글라드는 돌아서는 호안을 막아 세우려 했다. “···그러지 말아라.” 그러나 그보다 칼렌이 먼저, 글라드를 막아 세웠다.


“하지만, 칼렌···.”


“가던 길이나 계속 가자꾸나.” 칼렌은 압박이 담긴 말을 건네고, 말의 고삐를 당겼다. 글라드는 어쩔 수 없이 칼렌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메이룬의 관문이 지나자, 이른 아침의 거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메이룬의 아름다운 건물 너머로 계속해서 불길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연기는 더욱 글라드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시원찮은 마음으로 칼렌을 따랐던 글라드였기에, 더욱 그랬다.


글라드는 메이룬의 거리를 가로지르다 잠시 멈췄다. 불길하게 피어오르는 연기에 시선을 집중했다. 은까마귀, 메이룬의 귀족···. 이상하게도 조금씩 글라드의 마음속에 불안함이 감돌았다.


“왜 그러느냐?” 앞서가던 칼렌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글라드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칼렌이 말을 건넨 것을 눈치채고는 마침내 대답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게나 신경이 쓰이느냐?” 칼렌이 물었다.


“아뇨, 아닙니다.” 글라드는 재빠르게 대답했다. 하지만, 글라드는 금방이라도 내뱉은 그 말을 되돌리고 싶었다. “네, 사실은··· 그러해요, 칼렌. 저는 저 연기가, 너무나도 신경 쓰여요.” 예전과 달리 글라드는 재빨리 말을 되돌렸다.


“···좋다, 글라드. 네가 정녕 원한다면야, 한번 못 가볼 것도 없지.” 칼렌은 빛바랜 투구 너머로 희미한 미소를 띠며 다시, 말고삐를 당겼다.


불길한 연기는 금방이라도 꺼질 듯 피어올랐지만, 아직도 끝없이 하늘을 감싸고 있었다. 덕분에, 그들은 쉽게 지난날 습격의 현장을 찾을 수 있었다. 구경꾼들이 거대한 폐허를 둘러싸고 있었다. 무너진 잔해를 수습하는 병사들의 모습도 보였다. 글라드와 칼렌은 어딘가에 말을 매어두고, 인파 사이로 향했다.


조금 더 가까이서 바라본 폐허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거대한 저택이 있었을 자리에는 완전히 불타 내려앉은 잿더미만이 가득했다. 글라드에게는 고향과도 같은 광경이었다. 글라드는 전소된 현장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잿더미 사이로 시신의 살덩이가 보였다.


갑자기 붉은 얼굴이 떠올랐다. 언제나 글라드를 괴롭히던 그 얼굴이었다.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글라드는 자리에 주저앉을뻔했다. 하지만 칼렌이 급하게 글라드의 팔을 잡아챘다.


“괜찮니?” 칼렌이 물었다.


“···예, ···괜, 괜찮아요.” 글라드는 다급하게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전혀 괜찮지 않구나. 뒤편에, 사람이 없는 곳에서 조금 쉬고 있으려무나. ···궁금한 건 내가 대신 알아 올 테니.” 칼렌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글라드는 거친 강철 투구 너머로 노기사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죄송해요, 칼렌.” 글라드는 그 말을 남기고 인파를 빠져나왔······.


‘······?’ 글라드의 시선은 인파 끝에 꽂혔다. 분명히 본 적 있는 차림이었다. 어디서였더라···? 글라드는 정확히 떠올릴 수 없었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유쾌하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글라드는 제대로 그 모습을 바라보기 위해 눈을 비볐다. 하지만, 다시 눈을 떴을 때, 그 모습은 그곳에 보이지 않았다. ‘···?’ 꿈과 같은 광경이었다. 글라드는 크게 한숨을 쉬고, 천천히 걸어갔다.


글라드는 기다란 돌의자에 걸터앉아, 조용히 칼렌을 기다렸다. 불길한 연기는 여전히 피어올랐다. 글라드는 조금의 긍정적인 이야기를 기다렸다. 지난날 만났던 소녀의 안위를 걱정했다. 잠깐 스쳐 간 인연이었지만, 글라드는 그녀를 걱정했다. 잠시 말을 섞은 사이라고 하더라도, 죽음은 슬프고 씁쓸한 것이었다.


하지만, 칼렌과 함께 돌아온 것은 불길한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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