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도시 - [2]
자신의 개입 없이, 제멋대로 벌어진 일로 인해 길동무가 생겼다. 그게 샤는 당황스러웠다.
“그러니까요, 저기 타슨까지만 데려다줘요. 그때까지 제가 밥도 차려주고 노숙할 때 잠자리도 준비해주고... 아무튼 잘 할게요. 네?”
봐라네가 종알종알 옆에서 말했다. 샤는 침묵했다. 그걸 봐라네는 무언의 긍정으로 받아들이곤,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가는 와중에 그녀가 물었다.
“그런데 식량은 어디 있어요?”
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봐라네는 무시당했나싶어 머쓱했다가, 곧 샤가 완전히 빈손이라는 관찰이 끝나서 기겁했다.
“설마 아무것도 없으신 거예요?”
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봐라네는 입을 쩍 벌렸다.
“여기서부터 타슨이 얼마나 먼지는 아는 거고요?”
몰랐다. 타슨이 대체 뭐하는 곳인지조차도. 샤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자 봐라네는 한숨 쉬었다.
“그럼 어째요. 나도 식량 없는데. 거기까지는 걸어서 이틀 걸린단 말이에요. 물은 있겠죠? 음, 수통은 있으시네.”
이어진 그녀의 말대로라면 타슨은 여기서 가장 가까운 마을이며, 가는 도중 굶기 싫으면 당장 관문도시로 돌아가 식량을 넉넉히 쟁여야했다. 샤는 그 말을 알아들었고 조언에도 감사했다. 물론 그 전에 혹은 떼야할 터였다.
샤는 손등을 굽혔다 펴길 반복했다.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손동작이었다.
“꺼지라고? 아, 아니 죄송해요. 저리 가라고요?”
역시나 봐라네는 잘 알아들었다. 바보가 아니니까. 그래서 그녀는 절대 꺼지면 안 된다는 것도 잘 알았다.
“그럼 저 죽어요. 언제 그놈들이 저 잡으러올지도 모르고, 그 먼 길을 혼자서 어떻게 가겠어요? 예? 제발요!”
봐라네는 용맹하게도 샤의 로브자락을 움켜쥐고 징징댔다. 그 귀찮은 짓거리에 대고 샤는 한번 걷어찬다는 편리한 방법을 쓸 수 없었다. 봐라네의 키는 샤의 허리에 겨우 머리가 닿을 정도였다.
‘여자나 어린애를 무조건 보호하는 서구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일까.’
봤던 영화들의 내용은 전혀 기억이 안 나지만, 어쨌건 샤로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싸구려인지 고급인지도 스스로 분간 안 되는 페미니즘이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사실 귀엽기도 하기 때문에 샤는 일행 하나의 존재를 인정하기로 했다. 적극적으로 쫓아내기 껄끄러워서이기도 했다.
샤가 쫓아내려는 시도를 그만두자 봐라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고마워요, 흑마법사님. 봐라네라고 해요. 흡혈귀입니다."
"흡혈귀?"
"열 살 때인가 그렇게 됐죠. 그 뒤로 저 가문에서 종살이했어요. 지금은 스무 살이에요."
특징이 뚜렷하다 못해 노골적이기까지 한 캐릭터다. 그래서 샤는 당황했다.
워록사가는 NPC가 보이는 족족 죽여도 게임플레이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자유도를 자랑했다. 때문에 잔인하게 죽이기 곤란한 어린애 NPC 따위는 아예 넣지도 않았는 데다 원래가 귀엽고 아기자기한 설정과는 거리가 먼 게임이었다.
어린애 흡혈귀 캐릭터라니, 워록사가에는 절대 없어야 정상이다.
워록사가에서 유일하게 있었던 어린애라면 용골탑(龍骨塔)의 '데드라 레이디(Deadra laidy)'뿐이었는데, 그녀는 살해되는 순간 게임 자체를 다운시키는 버그로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유저들이 항의해도 개발사는 묵묵부답이었으며 버그 수정도 해줄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유저들은 결국 알아서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개발자 입장에서는 어린애를 잔인하게 죽일 수 있는 게임이라는 악명을 얻느니 차라리 그런 식인 게 편했으리라고 유저들은 추측했다. 그런 게임이었다.
'그렇다면 얘는 워록사가 게임 자체에는 없었을 녀석이라는 뜻인데.... 그런 것 치고는 너무 픽션 캐릭터스럽지 않나.'
샤가 여러모로 고심하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자, 그게 못마땅했는지 봐라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는 어떻게 불러드릴까요? 흑마법사라는 호칭을 싫어하는 분도 있고 좋아하는 분도 있던데요."
샤는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
"아수라고 불러라. 흑마법사라 부르지 말고."
"아, 예. 아수님."
"그런데 흑마법사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구분하는 건가?"
"그야 로브에 두건이죠. 요즘 와서 달리 누가 그리 입겠어요."
봐라네는 너무 당연한 듯이 대답했고, 샤는 그동안 했던 병신 짓거리들을 후회했다. 게임에서는 사제들도 그리 입고 다녔다. 그런데 네크로팰리스에 감금돼있던 동안 문화적인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샤는 얼른 로브를 벗었다. 검은 무복이 일상복으로 어떤 평가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설마 흑마법사라고 알리고 다니는 것보다야 못하겠는가. 그리고 두건과 후드도 벗었다. 드러난 그 잘난 얼굴을 본 봐라네는 기겁했다. 지나치게 잘생겼던 것이다. 대하기 껄끄러울 정도로.
그와는 반대로, 맨 얼굴을 드러내면 봐라네가 감탄이라도 해주리라고 속으로 기대하고 있던 샤는 머쓱해졌다. 그는 벗어놓은 로브를 봐라네에게 넘겨주었다.
“저 입으라고요?”
"버려도 좋다. 설마 어린애가 입고 다니는 것까지 포함해서 흑마법사 취급하지는 않겠지."
봐라네는 냉큼 입었다. 로브의 크기가 너무 커서 바닥에 질질 흘러내린다.
"두건도 원하나? 흡혈귀라고 했던가. 눈이 빨갛고 피부색이 희어서 사람들 눈에 잘 띌 거 같은데,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 않나?"
"아, 예. 주시면 고맙게 쓸게요."
봐라네는 오히려 로브로 꽁꽁 싸매고 다니는 게 되려 사람들 눈길을 끌어모으기 좋다고 생각했지만, 직접 입 밖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그녀도 흑마법사들이 대개 정신병자 혹은 그에 준하는 성격파탄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괜히 호의를 표출하는 상황에서 거절했다가는 악감을 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결국 두건까지 받아서 쓴 후에 물었다.
"이제 관문도시로 돌아가서 식량 좀 사오실 거죠?"
샤는 대답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봐라네는 다시 말했다.
"아까 말씀드렸지만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곳이 타슨이에요. 거기까지는 걸어서 이틀이고요. 식량을 사와야해요."
샤는 또 침묵했다. 봐라네는 답답해졌지만 차마 화를 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왜냐하면 어제 관문도시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다시 돌아가기가 껄끄럽다는 것을 설명하려면 결국 어제 소동의 원인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밝혀야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말을 최대한 적게 하는 것이 덜 병신 같아보이리라는 판단도 있었고.
결국 샤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돌아갈 수는 없다."
"왜요?"
역시 되돌아온 질문에 샤는 침묵했다. 덕분에 봐라네는 흑마법사들은 다들 정신병자라는 소문의 신빙성을 실감했다.
"그러면... 돈은 있으시고요? 마차라도 잡으면 반나절 만에 갈 텐데요."
마차라, 샤는 품을 뒤적거려 은전 몇 개를 꺼냈다.
"이거면 충분한가?"
"한 닢이면 돼요. 그럼 마차들 지나가는 길목까지만 잠시 걸어보죠."
그리하여 둘은 걷게 되었는데 그 모양새가 매우 이상했다. 봐라네로서는 앞서서 걷는 게 흑마법사에게의 예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일부러 뒤에서 걸으면,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르는 샤는 더 뒤로 가버렸다. 그걸 눈치챈 봐라네가 나란히 걸을라치면, 여자와 붙어서 걷기 불편해서 샤는 또 뒤로 가버렸다. 결국 봐라네는 선두에서 걸어야했다.
그리 한 시간을 걷자 큰길 두 개가 교차하는 장소가 등장했다. 교차로 길목 사이사이에는 작은 가게들이 있어 음식 따위를 팔고 있었다. 마굿간을 낀 여관도 있었다.
"여관에서의 식사는 얼마나 하나?"
"좀 비싸요. 먹을 만한 건 동전 서른 닢? 유동인구가 별로 없으니까 가격대가 높게 책정되지요."
"살 테니까 같이... 먹지."
중간에 말이 흐려진 것은 음식을 사준다는 게 성적 호감의 표출로 여겨질까봐서였다. 여성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거나, 일부러 친한 척을 한다는 것이 샤로서는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그 여드름돼지의 얼굴로는 여성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가 명예훼손죄로 유죄판정을 받을 만했으니까, 그냥 관심을 끊는 게 마음이 편했다.
물론 지금 이 얼굴이라면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으리라. 게임 캐릭터 샤의 아름다운 외모라면 경멸이 동경으로, 무시가 호감으로 변할 것이다. 샤도 그걸 알았지만 당장 여성에게 친한 척하는 자기 모습이 상상이 가질 않았기에, 당장에는 거리를 둘 생각이었다.
- 작가의말
토끼와 거북이가 싸웠는데 토끼가 졌습니다.
왤까요?
토끼가 토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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