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도시 - [4]
님프가 노예로 매매되었던 것은 백 년 전이다. 포유류보다는 양서류에 가까울 정도로 피부에 습기가 유지되어야 해서 자연에서는 호수나 연못을 벗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늙지 않으며, 아름답기까지 한 이 종족을 알몸원숭이들이 가만 내버려뒀을 리는 없다. 그러나 백 년 전, 녹룡 판키드라가 님프들에 대한 개인적인 사랑과 소유욕을 깨우친 뒤 범인류적인 사업을 통해 노예로 뿔뿔이 팔려간 님프들을 자기 숲에 구출해온 이후, 님프들은 드디어 노예종족이 아니게 되었다.
그렇게 알려져있는데 여전히 음지에서는 팔리고들 있는 모양이다.
"님프라니, 적어도 제가 있을 때는 없었어요. 님프가 이런 작은 데서 팔리는 건 이상한데요.... 풍왕룡(風王龍) 판키드라는 님프를 매매하는 이들에게 온갖 보복을 다하잖아요. 이런 작은 지하실에 가둬놓기엔...."
판키드라는 용이지만 과거 님프들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인간사회의 생리를 잘 알게 되었다. 그는 지금도 녹룡사라는 유명한 회사도 하나 운영하고 있으며, 가진 바 재산도 많아 용병대를 있는 대로 고용해서 도시 전체를 포위한 뒤 느긋하게 님프들을 잡아간 악한들을 고문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이런 작은 사업장에서 다루기에는 너무 위험한 생물인 것이다.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샤는 자기가 생각한 바를 말했다.
"방금 보았다시피 구성원들은 흡혈귀 여섯과 인간 셋. 흡혈귀 부족에 소속되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렇다면 흡혈귀 부족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직접 매매하다가는 풍왕룡의 분노에 맞서야할 게 두려우니, 이런 작은 사업장을 택한 모양인데."
"그건 아닌 거 같은데요, 그러면 님프들을 가지고 조직원들이 튈 수도 있잖아요. 그보다는 아예 팔 마음이 없었던 게 아닌가 하는데요."
"팔 마음이 없었다고?"
"예를 들어 암흑마도성의 주문을 받았다든가.... 왜 리치들은 님프에 환장한다잖아요. 님프들의 영생하는 육체가 리치의 생명 연장에 최고이리라 믿고서요."
샤가 듣기로서도 봐라네의 추측이 더욱 그럴 듯했다.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하고서 샤는 세 흡혈귀, 그리고 님프를 마차에 태웠다. 잠시 시장에 들려 님프가 입을 만한 옷을 산 뒤 그 옷에 물을 뿌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곤 바로 탈론시를 탈출했다.
이동하면서 봐라네가 말해주기를, '애완 흡혈귀'는 흡혈귀 부족들의 좋은 수입원이라고 했다.
"예쁜 애들을 잡아다가 흡혈귀가 물어요. 그렇게 어린애를 흡혈귀로 만들면 평생 안 늙는 자동인형이 탄생하는 거죠. 그게 애완 흡혈귀예요. 특이한 취향의 부잣집에 비싸게 팔 수 있다나요."
"너도 그렇게?"
"저도 흡혈귀가 납치한 거냐고요? 아뇨."
자세한 사정은 말하기 싫은 것 같아 샤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구출한 세 흡혈귀는 말이 없었다. 녀석들은 이 상황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저 있는 장소가 지하실에서 마차로 바뀌어 오히려 더 좁아졌다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것일지도 몰랐다. 실은 스무 살인 봐라네와 달리 녀석들은 나이마저 정말 어려서 각기 열 살, 열한 살, 아홉 살이라고 했다.
님프는 하루종일 자기만 했다. 가끔씩 일어나 물 한 컵을 주면 마시고 다시 드러누웠다. 병에 걸린 게 아닐까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원래 활동적인 종족은 아니라니까.
결국 인원이 세 배로 늘었지만 여행 자체는 별 달라질 게 없었다. 흡혈귀 아이들과 님프를 돌봐주느라 봐라네가 조금 수고스러워졌지만, 봐라네로서는 이게 더 마음에 들었다. 원래는 할 일이 전혀 없어서 몸은 편한데 마음이 불편한 전형적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잡일이라도 생기는 쪽이 나았다.
"그런데 어쩌실 거예요?"
"일단 님프를 판키드라에게 되돌려준다. 그러면 보상금으로 한 밑천 챙길 수 있겠지. 흡혈귀들은 차근차근 부모를 찾거나.... 데리고 다녀야할 것이다."
부모를 찾아준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아마 데리고 다녀야할 게 분명했다. 봐라네는 이미 하나 있는 짐덩이가 셋이나 늘면 힘드실 거 같은데요, 하는 말을 꾹 삼켰다.
"보상금이요?"
"판키드라는 님프의 수호자다. 회사를 소유하고 있고, 그것은 전적으로 님프들을 위함이다. 그 용은 님프를 위해서는 지출을 아끼지 않는다. 노예로 팔리려던 님프를 구출한 데 대한 보상을 소홀히 할 리가 없다. 사실 그 때문에 님프를 거래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발각됐다가는 풍왕룡의 잔혹한 복수에 맞서야할 것인데 판키드라에게 님프를 보내주기만 하면 확실하게 거금을 획득하리라는 점에서 굳이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게 된다."
"어, 그럼 이 님프는 역시 암흑마도성의 지시였을까요?"
"네 추측이 옳다면."
봐라네는 히죽 웃고는 물었다.
"그런데 흡혈귀를 넷이나 데리고 다니시려고요?"
"보상금을 받고나면 정착을 해야겠지."
봐라네로서는 반가운 소리였다. 이렇게 옮겨다니는 것은 여러모로 수고스러우니까 말이다. 다만 어린애 흡혈귀를 넷이나 거느리면 온갖 저질스러운 소문이 뒤따르리라는 게 걱정될 뿐이었다.
"정착하실 거면 집도 살 거예요?"
"청소하기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만 큰 걸로."
봐라네는 헤 웃었다.
날이 저물었다. 하룻밤 묵기 위한 근처 읍에 들리자 여관이 없었다. 결국 웃돈을 주고 남아도는 통나무집 한 채를 통째로 빌리고는 음식을 해달라고 돈을 또 지불했다. 조금 줬다가는 풀만 나올 게 뻔했기에 가축을 잡아오라고 과하다싶을 만큼 주니, 효과는 있었다.
봐라네는 닭다리를 씹으면서 중얼거렸다.
"여관음식보다 맛있네요?"
샤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머지 흡혈귀 셋을 바라보았다.
그들끼리 친구 같은 관계는 형성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란히 앉은 그들은 무심결에 서로의 몸이 닿을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움찔거렸다. 어쨌거나 음식은 괜찮게들 먹고 있었다.
봐라네가 물었다.
"맛있지?"
왼쪽 남자애에게서 대답이 나왔다.
"응...."
"어, 말했네. 이제 기분이 좀 나?"
"응...."
"그래, 집은 어디야?"
그 질문에는 대답이 없었다. 봐라네는 이런 데 익숙해져있었으므로 당황하거나 짜증내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녀석의 얼굴을 살폈다. 그 입술이 열릴락말락 꿈틀거리고 있는 게 보였다.
뭔가 대답은 해야겠는데, 뭐라 대답해야할지 모르겠는 듯했다. 아니면 대답하기 꺼려지거나. 아마 둘 다일 터였다. 봐라네는 그걸 짐작하곤 더 묻지 않았다.
옆에서 듣고 있던 샤도 슬슬 눈치챘다. 그때 봐라네가 다가와 속삭였다.
"부모가 아이들을 판 거 같아요. 그걸 흡혈당에서 구입하여 흡혈귀로 만든 후 파는 모양이에요."
샤가 대답했다.
"내 생각은 다르다."
"예?"
"암흑마도성 출신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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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으로 쓸모없는 대표적인 동물이 둘 있는데 바로 코끼리와 인간이다. 코끼리는 번식을 유도하기가 힘든 데다가 새끼일 때 납치해와 키우더라도 그 사료비가 코끼리의 몸값을 능가하여, 전쟁용 혹은 과시용 이외 용도의 사육이 불가능하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물론 인간의 번식은 쉽게 유도할 수 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키울 경우 노동력으로서 가치가 생길 때, 즉 청소년기까지의 사료비가 가뜩이나 개체수가 많은 성체의 가격을 능가하기에 인간은 가축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암흑마도성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암흑마도성에는 사람의 뇌수, 피, 골수 따위가 많이 필요한 리치들이 득실거린다. 때문에 암흑마도성에서 인간은 노동력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인간을 직접 번식시키고, 새끼를 받아 키울 이유가 생긴다. 그 사육과정에서 유독 예쁜 새끼들이 출산되는데 그것은 리치에게 희생시키기에는 아깝다는 이유로, 중간에 빼돌려져 노예상에 매매된다. 이것은 암흑마도성의 사업이 아니라 암흑마도성의 인간사육사들 몇몇의 비리에 불과하다. 암흑마도성에는 굳이 자기네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황금을 벌어야할 이유가 없다.
이것을 샤가 상세히 아는 까닭은 간단했다. 비슷한 내용의 퀘스트가 워록사가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예 어린애가 게임 내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았지. 그저 그 유해만 발견되고, 노예로 팔리가던 어린애들은 도중에 도적떼를 만나 죽었다는 결과로 퀘스트는 끝났던가.'
샤는 아이들을 흘긋 쳐다보았다. 흡혈귀들답게 다들 박제인형처럼 생기가 없었다. 어쩐지 저 녀석들도 금방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 예감은 불길하기는커녕 어쩐지 안도에 가까웠다.
샤는 흠칫했다.
마차는 계속 달려서 그럭저럭 괜찮은 식사를 할 수 있는 역에서 하루 머물렀다. 흡혈귀 아이들 때문에 최대한 큰 방을 잡아서 돈이 만만찮게 깨졌지만 샤는 개의치 않았다. 벌어둔 게 꽤 많았으니까. 샤는 심지어 케이크까지 하나 주문했다. 아까 흡혈귀들이 죽으리라는 생각에 안도했던 것을 속죄라도 하듯이.
기운이 없었던 녀석들이 비싼 달걀을 섞어 만든 생크림 케이크의 단맛에 홀딱 빠져 정신없이 먹어치우는 사이에 샤는 고찰했다.
대체 왜 안도했던 걸까. 자신은 애들을 꽤 좋아하지 않았나? 하물며 저런 예쁜 애들의 경우에야 말할 것도 없어야했다. 그런데 대체 왜 녀석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편안하게 느껴졌단 말인가.
- 작가의말
제가 일 년 동안 플롯이니 설정이니 죄다 바꿨습니다.
원래는 흑마력이라는 게 있어서 흑마법사와 보통 마법사를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지만, 보시다시피 지금은 흑마력 같은 건 없지요.
마찬가지로 샤의 부모가 님프 혼혈이라든가 뭐 그런 설정도 죄다 엎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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