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실 - [2]
청년이 있는 이 건물은 어두침침하기 그지없다. 건물의 이름은 '네크로팰리스'다.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 음침하기 짝이 없는 곳이므로, 이 성의 모든 구성물이 검은색 일통인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 하겠다. 검고 칙칙한 주제에 곰팡이는 전혀 슬지 않은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곳은 설정상 샤의 영혼으로 유지되는 것이니까.
샤는 식당으로 내려가며 그 망할 설정들을 되새겼다.
우선 샤는 흑마법사였다. 삼(3)차원법의 마법사이자 언데드 로드의 계약자인, 세계최강의 흑마법사. 죽인 사람의 수가 부지기수인 것은 물론이요 용 역시 한 마리나마 살해했다....
‘미치겠군.’
우월감 중에는 남들에게 공포감을 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있는데, 청년이 워록 사가를 하면서 느끼고자 했던 우월감 역시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청년은 데이터에 불과한 NPC 혹은 사이버괴수들을 수두룩하게 학살했고, 그들이 무력하게 도망가거나 비명을 지르는 행동패턴을 보며 즐거워했다. 자극적이었다. 심지어 만족감까지 느낄 수 있었는데, 자기가 위협적이고 남을 해할 수 있다는 영향력의 충족을 게임 속에서라도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음침한 심리상태를 굳이 이해하고 싶지 않을 테니, 결론을 말하자면 이렇다.
‘샤’는 이 게임 세상에서 사람을 천문학적으로 죽여 댄 악마인데 악마답게 초월적이므로 어찌 손을 쓸 수가 없는, 한 마디로 마왕인 존재였다. 청년은 그런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 된 것이다. 뭘 어떻게 행동해야할지는 감도 잡히지 않는다.
비하감에 짓눌려 허리가 늘어질 즈음, 청년은 식당에 도착했다. 식당이라고 해봤자 그냥 검고 칙칙한데 커다란 탁자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청년은 아무 자리에나 적당히 걸터앉고 턱을 괴었다.
잠시 후 아수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시장하십니까? 적당히 거북수프를 만들어왔습니다.”
절로 귀가 움직인다. 거북수프라니, TV에서나 볼 법한 고급음식 아닌가. 갈색 살점이 둥둥 떠 있는 수프가 그 앞에 놓였다. 청년은 얼른 수저를 들어 한 입 떠먹었다.
“어떠십니까?”
“맛좋군. 아주.”
“흠.”
청년은 게걸스럽지 않게 보이려 노력하면서 게걸스럽게 수프를 처먹었다. 고기도 쫀득하고, 단맛이 나는 걸 보니 열대과일을 섞은 모양이었다. 계속 그리 처먹다가 고개를 들어 이 요리를 내온 아수의 얼굴을 보았다. 청년은 흠칫했다.
아수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좋지 않습니다. 평소와는 너무 다르십니다. 평상시라면 주께선 이런 기름진 음식을 아침부터 내오지 말라며 핀잔하셨을 겁니다.”
“그런가?”
“그렇습니다.”
‘빌어먹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그가 게임폐인이었다고 해도 이 캐릭터는 새벽 여섯 시에 기상해서 가벼운 야채죽을 먹네, 어쩌네 하는 세세한 설정까지 알 방법은 없지 않은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청년은 계속 수프를 떠먹었다. 우물우물 마지막 고기를 삼키곤 물었다.
“만약에. 내가 그 마법실험 중에 벌어진 사고에 의해, 우연히 빙의된 영혼이거나 한다면, 어쩔 건가?”
“당장 주의 몸에서 그 영혼을 끄집어내 인칸타템에 처넣어야지요.”
아수는 잠시도 고민 않고 즉답했다. 청년은 얼떨떨하게 말했다.
“살벌하군.”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충성심의 표출이라 생각한다면 모를까.”
하긴 그럴 터였다. 강대하고 잘생긴 흑마법사의 몸속에 웬 등신 하나가 비집고 들어갔다면, 누가 봐도 그 등신이 개자식일 것이다. 설령 그 등신이 의도해서 빙의한 게 아니라 하더라도. 청년은 질문했다.
“그렇다면 묻겠는데, 내가 뭘 어째야 좋겠나?”
“글쎄요. 일단 안정을 취하라는 것 말곤 달리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 수프 다 드셨습니까?”
아수는 빈 그릇을 보고 물었다. 청년은 더 달라고 요청하고 싶은 걸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수는 웬 시커먼 액체가 담긴 병을 들이밀었다.
“드십시오. 약입니다. 식사 끝나고 드리려했습니다.”
청년은 받아들곤 단숨에 들이켰다. 무슨 맛인지도 모를 맛이었다.
“어떻습니까?”
“모르겠는데.”
떨떠름하게 대답하고 나니, 더 이상 이어나갈 말이 없었다. 침묵이 이어졌고, 청년은 속으로 신음했다.
‘나야 말주변과 사교성이 한꺼번에 결여된 얼간이니 그렇다 치고, 아수조차 입을 다물고 있는 건 어떻게 봐야하나. 내가 진짜 샤가 아니라고 의심하는 건가?’
이 축축한 분위기에서였다. 일순 타르 냄새가 물씬 풍겼다. 회색 연기가 등 뒤에서 피어올랐다. 그와 동시에 무거운 침묵을 깨고 난데없이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년의 등 뒤에서.
“식사 끝났지? 간식 있으면 좀 나눠주지 그래?”
청년은 뒤를 돌아보았다. 회색 옷을 입은 장신의 남자가 거기 서있었다. 그 몸에서 회색연기가 꾸역꾸역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수는 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회색연기의 회색남자는 아수와 잘 아는 사이인지 마주 인사했다.
“음, 그래. 자네도 안녕한가.”
“예, 덕분에요. 불사왕 폐하.”
불사왕? 청년은 놈의 얼굴이 제법 눈에 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년은 회색 남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물었다. 말투는 여전히 병신 같은 채로.
“그대는 누군가?”
회색 남자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불사자가 되기를 소망하는 이들의 최종 계약자. 인칸타템의 왕. 알면서 왜 묻나?”
그제야 청년은 회색남자의 정체를 깨달았다.
언데드 로드, 불사왕 세탄타. 불사의 군단을 이끌고 온갖 차원을 돌아다니며 세계를 멸망시키는 마신. 샤는 저 악마와 계약했다는 설정이었다.
“언데드 로드?”
청년이 중얼거리자 불사왕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이 친구 이거 제정신이 아니로세. 이 양반아, 내가 언데드라는 말 쓰지 말라고 네 자리 횟수 밑으로 말했던가? 몇 년 전부터 불사자라고 잘 불렀으면서 지금 왜 이래? 자네 나한테 뭐 불만 있어?”
그런 설정이 있었던가 싶으면서도 청년은 어리둥절했다. 대악마의 말투가 뭐 저리 경박한가? 그때 아수가 대신 변명했다.
“이해해주십시오, 폐하. 지금 주께서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십니다.”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면?”
아수는 이 상황을 자세하게, 그러나 짧게 간추려 설명했다. 다 듣고 난 불사왕은 씩 웃었다.
“그랬단 말이지. 재밌네.”
불사왕은 그 회색빛 눈동자를 청년에게 돌렸다. 청년은 그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리고 굳었다. 불사왕의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흐음.”
살기도 뭣도 없는 평범한 눈인데, 분명 그러한데 단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속이 위액에 녹아내리는 것 같은 혐오감, 혹은 공포일지도 모르는 불쾌감이 인다. 도저히 더 바라보고 있을 수 없어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언데드 로드는 눈을 잠시 감더니 수십 초 후에야 다시 눈을 뜨곤 입을 열었다.
“안심하게. 아수. 여기 멀거니 있는 친구는 분명한 자네 주인 양반이 맞아.”
“영혼을 보신 겁니까?”
“잘 아네. 아무튼 그래.”
“감사합니다. 안심이 되는군요.”
그리 말하면서도 아수는 의심쩍은 표정이었다. 정말 이놈이 자기 주인인가 하는 의문을 애써 숨기려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청년은 생각했다. 그 역시 자기가 ‘샤’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정말인가?”
청년의 질문에 불사왕은 또 웃었다.
“물론. 맹세하지.”
그리 말하고서 불사왕은 사탕을 한 줌 집더니 한 알 한 알 깨물어먹기 시작했다. 아수가 한 봉지 싸주고 나서야 그는 회색연기에 휩싸여 사라졌다.
잠시 후, 아수는 청년을 돌아보았다.
“방금까지 주께 행했던 제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아수가 허리를 꾸벅 숙여왔고, 청년은 마주 인사했다.
“물론 괜찮다. 이해하니.”
말을 내뱉은 그 즉시, 청년은 자신의 괴상한 말투를 저주했다.
*******
- 작가의말
웃을 쭉 늘이면 어떨지 알아요?
웃길 거예요
Comment '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