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재연再演
“전하, 급한 기별이옵니다. 정鄭 상서上書가 괴한들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 하옵니다.”
이황야의 집무실 문을 다급히 열고 들어오며 장張 시랑侍郞이 급히 소리쳤다.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감찰부에서 괴한들의 정체를 수색 중에 있다 하나 아직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놈들의 수작이 틀림없습니다.”
이황야의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다시 장시랑이 자신의 생각을 이어 말했다.
장시랑의 다급한 보고에도 이황야는 미간을 잠깐 찌푸린 것 외에 다른 반응이 없었다.
“전하···”
장시랑이 다시 한번 이황야를 불렀다.
이황야는 이십여 년 전을 생각하고 있다.
그때도 지금과 같은 습격이 있었다. 뜻을 같이 하는 충신들이 죽어갔다. 자신의 왕위보단 충신들의 목숨이 중하다 생각했다. 물론 형兄인 현 황제가 보위를 이었으니 비록 선친의 뜻이 어디 있었던지 간에 골육상잔을 벌이기도 마뜩잖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음이 그때와 다르다. 이제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이다. 저들은 스스로 물러서는 사람을 더 밀어내고, 피하는 사람을 더 몰아세우며, 허리를 굽히는 사람을 더 핍박한다. 소인배의 전형이다. 싸워 응징할 것이다. 이미 그런 각오를 했기에 묵진휘와 공녀를 정주로 보낸 것이기도 했다.
“침착하라. 더 이상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곧 모종의 조치가 취해질 것이다. 그때까지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모두 신변보호에 만전을 기하라 일러라.”
“여기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마차 안에서 관지선이 옆에 앉은 장년인에게 물었다.
“반갑다는 얘기는 아닌 것 같군.”
장년인이 피식 웃으며 답한다.
“그게 아니라, 여간 해선 맹을 떠나지 않으시는 분이 갑자기 정주에 나타나셨으니 드리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전서구를 보냈지 않았나? 허허”
관지선의 얘기에 장년인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무림맹 총군사 제갈청이 정주에 온 것이다.
그들은 지금 공녀를 예방하러 가는 길이었다.
“자네가 보기에도 묵대협이라는 젊은이가 대단한 고수던가?”
제갈청은 이미 묵진휘에 대해 듣고 온 것이지만 특수조나 삼조의 보고서만으로는 믿을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말도 마세요. 저도 아버님과 아버님 친구분들의 무공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보는 눈은 적잖이 고수반열에 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제 눈으로 묵대협 같은 신위는 본적이 없습니다.”
“자네 아버님이나 아버님 친구분들이라면 대단한 고수들이시지. 그 친구가 정말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그런 친구가 지금까지 어찌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지?”
“총군사님께서 제게 말씀하지시 않으셨습니까? 강호에 기인이사가 장강長江의 모래알처럼 많다구요?”
“그랬지. 하지만 나도 그 많다는 장강의 모래알을 직접 본적이 거의 없어서 말일세. 껄껄”
제갈청의 말에 관지선까지 피식 웃고 말았다. 제갈청의 장점이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점이.
“남궁이현과 친구라고?”
“그렇습니다. 절친한 사이입니다.”
“남궁이현과 친구처럼 지내는 젊은 고수가 또 있지 않았었나?”
“주대협이라고 있습니다. 그도 대단한 고수였습니다.”
“갑자기 어디서 이런 젊은 고수들이 나왔을까?”
“장강의 모래알···”
“알았네. 대단한 고수들이 장강의 모래알처럼 많지.”
“그나저나 남궁가는 절친한 젊은 고수들을 많이 가졌군.”
“부러우세요?”
“솔직히 나도 제갈가家 사람 아닌가? 일을 함에 중립을 어길 생각은 없네만 본가本家를 생각하는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지. 허허”
제갈청이 솔직한 심정을 말한다. 사실 제갈세가가 오랜 세월 오대세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나 남궁세가만큼 확고부동한 위치를 가진 것은 아니다. 남궁세가에 비해 가전家傳 무공이 한치 모자랐고, 무림에 이름을 알린 고수들이 적었던 탓이다. 물론 머리는 남궁세가보다 좋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래도 무림에선 고수가 중요한 것이다.
“사위로 삼으세요. 제갈세가에도 재색을 겸비한 여식들이 많잖아요? 묵대협이나 주대협을 사위로 삼으면 되실 것 아니에요? 아무렴 친구관계보다는 사위가 가깝겠지요?”
관지선이 제갈청을 놀리듯 비꼰다. 물론 악의惡意는 없다. 제갈청도 안다.
관지선의 집안도 명문名門이라고 할 수 있으나 오대세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선 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은 제갈세가지만 그들 또한 남궁세가를 부러워한다. 욕심에는 끝이 없는 것이다.
한편, 사위로 삼으라는 얘기에는 관지선의 마음 한 켠에 있는 걱정이 표현된 것이다. 자신이 사귀는 항백은 평민 출신이다. 자신의 아버지에게 항백을 사위감으로 소개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할 수 없었다. 심지어 자신도 집안에서 쫓겨날 지 몰랐다. 물론 무림에선 명문을 뛰어 넘는 요건이 하나 있었다. 고수高手. 고수라면 평민 아니라 천민 출신이라도 명문가 자제 대접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항백은 그런 고수가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선택한 길을 갈 것이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군. 참고함세. 허허”
관지선의 놀림을 제갈청이 여유롭게 받았고, 그러는 사이 공녀일행이 머물고 있는 객잔에 마차가 당도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무림맹 총군사님을 이렇게 뵈니 저도 영광입니다.”
제갈청의 인사에 공녀가 화답했다.
“자~ 인사는 그만하시고 이리 앉읍시다. 껄껄”
일어서서 인사를 하는 공녀와 제갈청을 의자에 앉도록 권하는 사람은 늙은 거지 노인, 무진신개였다.
“편히 오셨습니까?”
제갈청이 무진신개에게도 인사를 한다.
“거지가 편한걸 찾으면 안되지. 껄껄”
두 사람은 무한에서 직접 보곤 따로 떨어져 정주로 온 것이다.
탁자에 다섯 사람이 앉았다. 무진신개를 중심으로 제갈청과 관지선이 앉고 맞은편에 공녀와 묵진휘가 앉았다. 서홍과 냉보모는 스스로 참석을 사양했다.
“아버님께서 큰 부탁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공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큰 부탁이라니요. 당연히 할 일입니다.”
제갈청이 공손히 답한다.
“전례前例가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결례缺禮가 되는 것도 아니니 너무 염려 마시오. 원래 정치와 무림은 서로 상관하지 않는다는 무언無言의 약속이 있지만, 저쪽에서 계속 결탁하고 있으니 이쪽도 함께 맞설 수 밖에 없질 않겠소? 그걸 원칙을 어기는 것이라 한다면 너무 고리타분한 거지. 껄껄껄.”
무진신개가 제갈청의 입장도 세워주고 공녀의 부담도 해소시켜주려 했다. 그리고 그것은 무진신개 스스로의 분명한 생각이기도 했다.
이황야는 현 황제 측에서 다시 충신들에 대한 습격을 해올 것이라 예상했다. 자신들이 동창의 비밀장부를 입수하였고, 이를 가지고 충신들을 규합하고 있었으니 어찌 저들이 가만있겠는가? 물론 이황야는 구체적으로 누가 누구를 습격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동창이 함부로 나서지는 못할 것이다. 이미 비밀장부가 노출되어 동창의 행각이 드러난 마당에 다시 지난날과 똑 같은 행각을 하다 적발이라도 된다면 발뺌할 곳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황야는 무림인들이 동창의 사주를 받아 충신들을 습격할 것이라 예상했고, 이에 대한 방비도 무림세력을 통해 하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이황야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힘이었다. 명분은 오래 전부터 이황야에게 있었지만 힘이 부족했다. 정치의 힘은 궁극적으로 병력兵力이다. 사실 이황야가 마음만 먹는다면 어지간한 장군들은 이황야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황야는 북쪽의 오랑캐를 막는데 사용하는 병력을 정치에 끌어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 보니 힘이 부족한 것이다.
이황야 측에서는 소노가 무림인과의 대화통로 역할을 했었다. 무진신개와 제갈청이 그 대화통로의 대상이었다.
이황야는 소노가 죽은 후 사람을 통해 무진신개를 찾았고 무림맹과의 소통을 담당해 줄 것을 부탁했다. 상황을 전해들은 무진신개는 이황야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길로 무한을 찾아가 제갈청에게 이황야의 뜻을 전했다. 마침 제갈청도 정주에서의 일을 전해 들은 후 흉수가 충신들을 습격하는 자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무림맹의 일과 불가분의 관계임을 느껴 이황야의 제안을 수용한 것이다.
“그래, 조치는 취했는가?”
무진신개가 제갈청에게 물었다.
“이황야께서 호위를 요청한 인물이 모두 십여 명입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한 인물당 현무당 특수조 세 명씩을 배정했으니 대규모 습격이 아닌 다음에야 웬만한 살수들은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두운 것을 좋아하는 놈들이 대규모로 습격을 하겠는가? 그만하면 충분할 걸세. 그나저나 자네가 고생을 했겠구먼. 고리타분한 것들을 설득하느라고. 허허”
제갈청의 얘기에 무진신개가 제갈청의 공로를 칭찬했다.
“모두들 상황을 이해해주셨습니다. 하하. 그나저나, 그렇다 보니 이곳 정주에까지 신경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청룡당이나 백호당같이 일반 무인들을 많이 파견해봐야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고, 고수들을 파견해야 하는데, 현무당 특수조를 제외하곤 무림맹에 고수급이라야 장로들 정도인데 장로들보고 직접 정주로 가라 할 수도 없으니. 쯧쯧”
제갈청이 답답한 심정에 혀를 찼다.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도 많은 일을 하셨습니다. 이곳 정주일은 미약하나마 제가 알아서 해보겠습니다.”
묵진휘가 제갈청에게 감사했다.
“우리도 도울 테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게.”
무진신개도 제갈청의 걱정을 덜어 주었다.
“그럼 두 분만 믿고 저는 북경으로 떠나겠습니다. 현무당 특수조 대부분이 북경으로 갔기에 저도 가서 둘러보려는 참입니다.”
호위인물 대부분이 북경에 있기 때문이었다.
공녀가 눈으로 제갈청에게 감사인사를 했고 제갈청이 답례를 한 후 자리에서 일어서 나가는 것으로 다섯 사람의 짧지만 깊은 회동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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