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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연꽃의 시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Minato
작품등록일 :
2014.10.20 18:32
최근연재일 :
2017.05.17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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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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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20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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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프롤로그

DUMMY

비가 온다.


잿빛 하늘엔 구름이 가득 끼어서, 낮인지 밤인지조차 구분되질 않았다. 어제부터 추적추적 내린 비는 온 세상을 칙칙한 색으로 적셨다. 처마 아래에 선 여자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멀거니 응시했다. 그녀는 이미 흠뻑 젖은 상태였기 때문에, 비를 피하는 행동은 꽤나 새삼스럽게 보였다. 잔뜩 젖어 달라붙은 갈색 머리칼은 어디에서 뒹굴었는지 진흙투성이였다. 물기가 맺힌 두 뺨도 더럽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나뒹군 것 같은 행색만큼이나 너절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몸을 감싼 것은 옷이라기 보단 마감이 덜 된 천 조각에 가까웠다.


비를 잔뜩 맞아서일까? 그녀의 다문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때때로 간헐적인 떨림도 보였다. 앙상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그녀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들썩이는 가슴께엔 빛바랜 숫자가 적혀 있었다. 다만 거의 다 지워져 본래 숫자를 알아보긴 어려웠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은 없었다. 이 동네 자체가 마치 죽은 것만 같았다. 대부분의 건물은 무너져 있었고, 행여 형체를 유지한 건물이 있더라도 제 기능은 하지 못할 것 같았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 사이로 검은 그을음이 남아 있었다. 젖은 재는 날리지도 못하고 축축한 땅 위에 스몄다. 생기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은 공간이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무의미한 잔해들을 돌아보던 여자가 시선을 들었다. 처마 끝에 아슬아슬하게 맺혀서 최후의 순간까지 버티다가 추락하는 물방울이 보였다. 그 잔상을 눈 속에 담으며 그녀는 눈을 감았다. 빗소리는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질퍽거리는 땅에 떨어지는 그 순간의 소리. 물방울이 부서지는 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온 전치를 진동하는 것 같았다. 물방울이 땅에 부딪치면, 팬 땅에선 젖은 흙냄새가 올라왔다. 그 냄새 속에는 짙은 녹색의 풀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축축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착각일까? 빗줄기 사이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누군가의 젖은 장화가 내딛는 발소리일지도 몰랐다. 여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착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주변엔 그녀 외에 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아까보다 조금 더 거세진 빗줄기 정도였다. 세상은 아까보다 조금 더 회색빛으로 변해 있었고, 아까보다 조금 더 앞을 내다보기 어려워졌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잠시간 젖어들었던 상념을 털었다. 여유를 부릴 시간이 끝났다는 것을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자는 그대로 걸음을 내딛으려다가, 문득 다시 멈춰 섰다. 몸에 엉겨 붙은 축축한 상의를 멀거니 내려다보던 그녀는 두 손으로 옷을 잡고 위로 올려 벗었다. 당초에 너덜너덜해 입으나마나했던 거적때기는, 벗고 나니 그 형체와 용도를 더욱 알아볼 수 없었다. 거적때기를 벗으니, 가슴만 겨우 동여맨 더러운 붕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상체를 겨우 가려주는 마지막 쪼가리였다. 붕대에 가려지지 않은 부분은 아물지 않은 상처와 거무스름한 흉터로 가득했다. 드러난 어깨와 쇄골, 갈비뼈는 모양이 보일 정도로 앙상해 움직이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뼈에 가죽만 겨우 붙은 모양새였기에, 형형한 눈빛이 아니었다면 누구라도 시체로 착각할 모습이었다.


여자는 벗은 상의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는 빗속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무섭게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그녀는 금세 모습을 감추었다.




-




비라도 내리지 않았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여자는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렸다. 이렇게 크게 입을 벌리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양쪽 입가는 갑작스러운 행동 때문에 결국 찢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찢어진 부분에 물이 닿으면서 느껴지는 쓰린 그 통증마저 좋았다. 십여 년 동안 그녀는 물 한 모금도 제 마음대로 마실 수 없었으므로, 이렇게 마음껏 목을 축일 수 있다는 건 제법 감격스럽기까지 한 일이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히고 망연하게 서 있던 그녀가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끌다시피 옮기는 다리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러나 이런 곳에 쓰러졌다간 숨을 부지할 수 없을 터다. 질척이는 바닥을 질질 끌며 옮기는 걸음엔, 삶에 대한 의지가 묻어났다. 넘어질 듯 넘어지지 않으며 위태롭게 걷던 그녀가 문득 시선을 들었다. 아주 멀리, 어스름한 빛이 보였다. 속눈썹에 맺히는 무거운 빗방울 때문에 눈을 크게 뜨기 어려웠지만, 비좁은 시야에 들어온 것은 틀림없는 빛이었다. 꺼질 듯 흔들리던 시선에 약간의 생기가 돌았다. 차갑게 식은 볼을 손으로 훔친 그녀가 다리에 힘을 주었다. 내딛는 자리에 자그만 발자국이 꾹꾹 찍혔다.


내딛는 걸음은 아까보다 훨씬 수월했다. 목적지가 있는 까닭이었다. 이 빗속을 벗어날 공간만 있어도 족했다. 굵은 빗줄기는 세상으로부터 여자를 숨겨주었지만, 그녀의 생기를 빼앗아가고 있었다. 이미 물에 불어 쭈글쭈글해진 손끝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보나마나 입술도 파랗게 질렸을 것이다. 온 몸이 얼어붙은 것만 같았다. 그녀는 걸음을 내딛는 데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생각보다 집은 가까웠다. 아니, 집이라기 보단 일종의 여관에 가까웠다. 황량한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온전히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건물이었다. 여자는 집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현관문을 바로 두드리는 대신, 그녀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창가에 다가섰다. 창문은 찌든 때로 얼룩져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살피니, 어른거리는 빛을 지나 움직이는 형체가 보였다. 보이는 형체는 한 명이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피딱지가 엉겨 붙어 있던 입술에 빨간 물이 점점이 솟아났다. 얼굴을 때리는 빗방울 때문에 순식간에 씻겨나갔지만, 금방 또 입술을 빨갛게 적셨다. 상처가 터진 모양이었다.


창문가에서 한참이나 주저하던 여자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찰나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현관문을 돌아보았다. 부서진 나무판자를 우산삼아 머리 위를 가린 중년 남성 하나가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경계심이 어렸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 그 기색을 눈치 챈 중년 남성이 얼른 말을 건넸다.



“들어오시오!”



여자의 어깨가 움찔했다. 등을 돌린 상태로 멈춰선 그녀는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이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남성은 여전히 고개를 내밀고 서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남성 또한 그녀를 경계심 어린 눈으로 보고 있긴 매한가지였다. 다만 빗속에 방치된 그녀의 몰골을 보고, 경계심보다는 연민을 더 크게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남성의 표정에 엿보이는 동정심을 눈치 챘지만, 그녀는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이 기이한 대치를 깬 것은, 집안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아빠, 무슨 일이세요?”



남성의 뒤로 자그만 머리통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제 열댓 살 정도 되었을까? 주근깨 가득한 얼굴을 내민 소녀가 여자를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중년 남성이 재차 말을 건넸다.



“들어오시오.”



소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녀가 남성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느리게 몸을 돌려 남성을 마주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에서 맺혀있던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




집안에 들어서고, 물기를 닦아내니 헐벗은 차림도 또렷하게 드러났다. 소녀는 부산스럽게 옷을 찾았다. 남성이 여자에게 작은 쪽방을 일러주는 동안, 소녀가 옷을 찾아들었다. 소녀가 입기엔 조금 품이 큰 옷이었다. 여자가 미심쩍은 눈으로 그것을 보고 있으려니, 소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어머니의 옷’이라고 설명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차마 옷을 버리거나 태울 수 없었어요.”



말을 이을수록 소녀는 울 것만 같았다. 고민하던 여자가 옷을 받아드니 소녀의 안색도 조금 환해졌다. 여자는 그런 소녀의 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소녀는 따뜻한 음식이라도 있는지 찾아봐야겠다며 몸을 돌렸다. 그러는 사이 여자는 소녀에게 받아든 옷을 펼쳤다. 어디서나 볼 법한 흔한 옷이었다. 허름하고 낡았지만, 여자가 지금 입고 있는 천 조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녀는 찬찬히 옷을 살폈다. 바짝 마른 손길이 옷감을 쓸어내렸다.



“그럼 전 뭔가 먹을 만한 게 있는지 확인해볼게요. 옷 갈아입으세요! 문은 닫고 갈게요!”



소녀의 말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가려던 소녀는, 우두커니 자신을 돌아보는 여자의 시선에 멈춰 섰다. 소녀의 얼굴이 의아하게 변했다. 여자는 옷을 내려놓고 성큼성큼 소녀에게 다가섰다. 다가오는 그녀의 시선이 조금 무서워서, 소녀는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가 곧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왜 그러세요?”



여자는 문고리를 잡고 있던 소녀의 팔을 잡아채었다. 갑작스럽게 당기는 그 힘은 꽤나 강했다. 그 힘을 따라 소녀의 몸이 완전히 방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소녀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여자를 보았다. 팔을 잡은 손아귀 힘이 너무 세서, 소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막 항의를 하려는 찰나, 소녀의 귓가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니는.”



그것은 생각보다 가느다랬다. 어쩌면 나약해보이기도 했다. 목구멍을 그그극 긁어내듯 갈라지며 나왔는데, 힘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기력이 떨어져서 목소리마저 저런 쇳소리로 겨우 내는 모양이었다. 짤막한 말 한마디를 내뱉은 여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부르튼 입술 사이로 이어지는 목소리는 방금 전보다는 조금 더 또렷했다.



“언제 돌아가셨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소녀는 잔뜩 놀란 표정이었다.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뻐끔거리던 소녀가, 가까스로 대답했다.



“오……오래 전에…….”



여자는 소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이 무서웠는지, 소녀는 눈을 굴려 그 시선을 피했다. 잡힌 팔을 빼려했지만, 손아귀는 마치 돌덩이처럼 단단하게 엉겨 붙어 있었다. 소녀가 울상을 지으며 여자를 보았다. 그녀가 딱히 위협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형형한 눈빛은 소녀가 겁을 집어먹기 충분했다.



“며, 몇 년 됐어요. 그건 왜요?”



여자는 소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서 있는 쪽방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쪽방은 달리 어떤 용도로 쓰이지는 않는 것 같았다. 다만 구석에 정체불명의 박스가 몇 개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일종의 창고 노릇을 하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오두막이었고 들어와서 본 것들 중 무엇 하나 잘 갖춰진 게 없었다. 누가 봐도 가난한 부녀의 집이었다. 그런데도 무엇을 찾으려는 건지, 여자는 쪽방의 내부를 차근차근 뜯어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너무도 사람 같지 않아서, 소녀는 잔뜩 겁먹은 얼굴로 뒤를 힐끗거렸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소리를 지르면 그녀의 아버지가 올 터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달려오는 시간 동안 여자가 자신을 어쩔까 싶은 생각에 선뜻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있었다.


방을 둘러보던 여자의 시선이 다시 소녀에게로 향했다. 잔뜩 겁에 질린 소녀의 얼굴을 확인한 여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내내 무표정하던 얼굴이라서, 약간의 감정변화만으로도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지레 겁을 먹고 있던 소녀는 돌변한 분위기에 눈을 크게 떴다. 방금 전까지 무서워하던 제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여자는 가녀려보였다. 여자가 천천히 손을 놓았지만, 소녀는 당장 도망가려던 것도 잊고 우두커니 서서 여자를 응시했다. 그녀는 조금 서글픈 눈으로 소녀를 보았다. 어째서일까. 소녀는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시선에서 불쾌감을 느꼈다.



“갈아입으세요.”



소녀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여자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선 몸을 돌렸다. 옷을 집어 드는 그녀의 등을 물끄러미 보던 소녀가 문득 여자의 뒤로 다가섰다. 소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등으로 손을 뻗었다. 소녀의 손끝이 여자의 등에 닿았다. 정확히는 축축하고 더러운 붕대에 닿았다. 소녀가 홀린 듯 붕대를 끌어내렸다. 흉터투성이의 맨살이었다. 그런 와중에, 붕대로 가려진 부분에 무언가 얼핏 엿보였다. 다른 상처들에 비해 비교적 최근 것인지, 불그스름한 기가 가시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은, 숫자였다.


붕대는 단단하게 매여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의외로 쉽게 흘러내렸다. 여자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소녀는 쉽게 그 붕대를 끌어내리고 숫자를 볼 수 있었다.



“4…627.”



그 와중에 아물어가던 상처가 터졌는지, ‘2’에선 약간의 피가 맺혀 있었다. 소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소녀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사형수?”



그 순간, 여자가 팔을 크게 휘두르며 돌아섰다. 그녀의 팔이 소녀를 강하게 때렸다. 비명도 나지 않을 만큼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소녀가 헛숨을 들이키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어른거리는 시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몇 번 입을 뻐끔거리던 소녀가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




머리가 띵했다. 소녀는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떴다. 몸은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제일 처음 본 것은, 쓰러진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소녀가 눈을 크게 떴다. 불안정한 시선을 돌리니, 우두커니 선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발치엔 옷가지가 널려 있었다. 소녀는 불안하게 그 모습을 보았다. 숨죽여 상황을 살피고 있는데, 여자가 소녀를 돌아보았다. 소녀가 헛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소녀가 제일 처음 주었던 옷을 들고 있었다.



“왜, 왜 이러시는 거예요! 으,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유분수지!”



소녀는 도망치려는 듯 몸을 꿈틀거렸지만 부질없는 몸부림으로 그쳤다. 어찌나 단단하게 묶었는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묶인 부분이 쓰라렸다. 원망스럽다는 듯 자신을 노려보는 소녀의 모습에, 여자는 침묵했다. 그러다가 자신이 들고 있는 옷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너무나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옷.



“피가 묻어 있어.”



여자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소녀가 못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몸부림을 멈춘 소녀가 흔들리는 시선으로 여자를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서글픈 눈이었다.



“이 옷. 피가 묻은 지 얼마 안 됐어.”



소녀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소녀를 물끄러미 보던 여자가 다른 옷들을 둘러보았다. 옷은 각양각색이었다. 하나같이 허름하고 낡았지만, 수량은 꽤 되었다. 가난한 가정집에서 가지고 있기엔 조금 많아 보일 정도였다. 소녀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몸을 수그려 옷들을 조심스럽게 한쪽으로 미뤄둔 여자가 쓰러져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여자의 표정이 굳었다고 생각되는 순간, 매서운 발길질이 남자에게 쏟아졌다. 쓰러져 있던 남자가 쿨럭, 하고 피를 쏟았다. 그러나 그녀의 발길질엔 자비가 없었다. 잔혹한 발길질을 정면으로 보며 벌벌 떨던 소녀가 고개를 수그렸다. 그런 소녀의 귓가로, 지나치게 덤덤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몇 명이나 팔았지?”



울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였다. 소녀를 지켜줄 아버지는 이미 저 바닥에 널브러져 생사를 알 수 없었다. 도망가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아버지조차 잃은 소녀는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자신의 몸을 지키기엔 참으로 형편없는 몸짓이었다.



“사람장사는 할 만하던가?”


“사, 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요!”



소녀가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여전히 입술은 덜덜 떨렸지만, 소녀의 눈에는 아까 전엔 보이지 않았던 독기가 엿보였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살기 위해 뭘 할 수 있겠어요? 이런 세상에서!”


“사람장사를 돕고, 창부 짓을 하는 게 네가 선택한 생존방식이야?”



소녀가 허를 찔린 듯 입을 다물었다. 제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한 여자가 쓸쓸하게 시선을 내렸다. 쓰러진 남자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시선에 증오가 스쳤으나, 그것은 잠깐이었다.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허허벌판에 덩그러니 있는 집. 겉으로나 안으로나 허름하기 짝이 없는 집인데, 이렇다 할 장사를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부녀라는 두 사람은 꽤나 살이 붙은 꼴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빌어먹고 사는 걸까? 갈아입으라며 건네받은 옷을 보니 그 방법을 알 수 있었다. 오래 전에 병들어 죽었다는 어머니의 옷을 남겨 둘 수 있을 정도로, 이 집이 넉넉해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그 와중에 옷에 피까지 묻어있으니, 누가 보아도 뻔했다. 그녀처럼 거리를 헤매던 부랑자들을 한줄기 빛으로 꾀어냈겠지. 이곳에서 달리 팔 것은 없었다.


그래도 부녀라는 것은 믿고 싶었다. 딸을 키우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고 있는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깨어난 소녀를 보니 그마저도 거짓임을 알 수 있었다. 소녀는 제 아비를 걱정하는 대신 본인의 살 구멍을 고민했으니까. 자신을 지켜줄 방패가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사실에 불안해하는 모습이라니. 딸이라면 쓰러진 아비를 먼저 걱정했으리라. 적어도 여자가 아는 ‘자식’이란 그러했다. 제 부모에게 가지는 본능적인 애착. 그것을 소녀에게선 도통 찾아볼 수 없었다. 여자는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남아야 할 세상인가?”


“당, 당신이야말로 사형수면서 살기 위해서 탈옥했잖아요! 당신, 옥시비아 캐슬에서 온 거 맞죠?”



소녀가 발작을 하듯 외쳤다. 그러나 여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 몸을 떨며 고개를 돌렸다. 소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이 집을 지나서 쭉 직진하다보면, 절벽이 나왔다. 파도가 매섭게 몰아치는 해안가 절벽이었다. 그리고 그 절벽 끝에는 여자죄수들이 갇혀 있는 거대한 감옥이 있었다. 한번 들어가면 절대 나오지 못한다는 악명 높은 감옥이었다. 보통은 무기징역에서 그치지만, 그 중에서도 악질적인 이들은 죽어서도 지우지 못할 죄수번호를 몸에 새긴 사형수가 되었다. 여자의 등에 아무렇게나 찍힌 숫자는, 그녀가 옥시비아 캐슬의 사형수임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사형수를 알아본다는 건, 시체장사도 했다는 의미겠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 소릴 들었는지, 소녀의 어깨가 경직되었다. 이 황량한 벌판을 지나는 떠돌이는 많지 않았다. 살기 위해선 구덩이에서 시체라도 파헤쳐야 했다. 물론 옥시비아 캐슬은 바다를 바로 옆에 두고 있으므로, 시체의 처리 또한 간편했다. 다만 몇몇 관계자들의 주머니를 섭섭지 않게 챙겨주면 시체를 마치 바다에 던지는 양 그들에게 던져줄 뿐이었다.


썩지 않은 사형수들의 살과 뼈는 그럭저럭 좋은 값으로 넘어갔다. 그것으로 무엇을 하는지는,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었으므로. 침묵하는 소녀를 물끄러미 보던 여자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엉성하게 둘러진 붕대를 단단하게 조인 그녀가 입을만한 옷을 하나 집어 들었다. 보통 체격의 성인이 입으면 맞을 것 같은 옷이었지만, 그녀가 입으니 꽤 넉넉한 옷이 되었다. 워낙 깡마른 탓이었다.


제대로 된 옷을 입는 것이 어색해서,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하던 여자가 겨우 옷을 갖춰 입었다. 바지는 통이 너무 커서 아쉬운 대로 치마를 두를 수밖에 없었다. 비로소 제대로 된 사람 차림을 한 여자가 집안을 뒤졌다. 여자가 숨겨두었던 약간의 식량을 찾아낼 때마다 소녀는 악을 썼지만, 그것이 여자의 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옷 한 벌을 길게 찢어 필요한 것들을 넣고 몸에 동여맨 여자가 창밖을 살폈다. 공격적으로 쏟아지던 빗줄기가 꽤나 약해져 있었다.



“제발 풀어주고 가요! 이대로 가면 전 죽을 거예요!”



등 뒤로 소녀의 절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 소녀를 힐끗, 돌아본 여자가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소름끼칠 정도로 무덤덤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술을 타고 나왔다.



“죽는 게 편할지도.”



소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여자는 남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망토를 몸에 둘렀다. 새까맣고 낡은 망토는 여자의 작은 체구를 다 덮고도 남았다. 후드를 눌러쓴 여자가 빗속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그녀의 뺨을 적셨다. 잠시나마 온기가 돌았던 몸이 차갑게 식었다. 덩달아 그녀의 머리도 차갑게 식어갔다. 여자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잿빛 하늘은 먹구름으로 한 치의 틈도 없이 메워져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빗물이 스며들어 입안을 적셨다. 빗물을 마셔도,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두덩을 차게 때리는 빗물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10년 만에 돌아온 세상은, 여전히 끔찍했다.


작가의말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구요,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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