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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NA'S

낙서


[낙서] 연습) 테러범의 소행으로 5분 후, 폭발할 위기에 놓인 지하철 안에서.

#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건다.



조용하지만 각자 분주한 지하철 안의 풍경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마냥 유쾌하다. 

그 속에 무리없이 섞여있는 나의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상쾌하다.

조금 짧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며 실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흘렸다.

‘전역, 드디어 자유다.’

전역.

단 두 음절에 해당하는 이 단어가 현실로 이루어지기를 얼마나 고대했던지, 이젠 웃음이 나오다 못해 눈물까지 날 지경이다.

[ 이번 역은 합정, 합정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

지하철 역 안내음 누나의 목소리가 마치 은쟁반의 옥구슬 같다. 이제 4정거장만 더 가면, 나의 사랑스러운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길었던 1년 8개월, 나보다는 그녀에게 더 길었을지도 모른다. 어서 그녀를 보고 싶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하다. 그녀와 주고받은 별 내용 없는 문자를 보며 실실 웃고 있을 때, 코를 찌르는 불쾌한 냄새에 고개를 들었다.

내 앞으로 모자를 푹 눌러쓴 허름한 차림의 아저씨가 지나가고 있었다. 무언가를 가슴에 꼭 안은 채, 이리저리 두리번 거리는 모양새가 딱 노숙자 같았다. 간혹 가다가 있지 저런 사람들. 좀 안쓰러워져서 한 번 슥 보고 다시 휴대전화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먼저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고 다시 웃음이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피식피식 흘러나왔다.

‘곧.도.착.해’

답장을 보내고 나서 지갑을 꺼내 주민등록증 위에 끼어 둔 그녀의 사진을 감상했다.

그런데, 그 때 멀리서 ‘펑’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지하철이 급정거했다.

“뭐,뭐야?!”

손에서 놓칠 뻔한 지갑을 품 속에 다시 넣고 주위를 살폈다. 나와 같은 칸에 있는 승객들도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 때 다른 칸으로 이어진 통로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 여자가 뛰어들어왔다.

“나,남자! 남자 분들 좀 도와주세요! 이상한 사람이 칼을 막 휘둘러요!”

여자는 구두 한 짝은 어디에 갖다버렸는지, 오른쪽 발은 맨발인 채 우왕좌왕 뛰어다니며 보이는 젊은 남자들을 붙잡고 소리쳤다. 여자의 말을 들은 승객들 중 몇몇이 재빨리 일어나 여자가 들어왔던 통로로 향했다. 그 중엔 나도 있었다.

이런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괴한이 나타나다니.

열차의 칸을 하나씩 지나 칠 때마다 매캐한 냄새와 연기의 농도가 짙어졌다. 그리고 3번째 문을 열자, 장정 여럿이 발광하고 있는 한 남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다같이 죽자! 다같이 죽으면 되는거야!”

“너나 죽어 새끼야!”

덩치가 좋은 아저씨가 그 괴한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 위에 올라탔다.

하지만 괴한의 몸부림이 어찌나 심한 지 곧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아니, 그냥 굴러 떨어진게 아니라 괴학이 들고 있는 식칼에 허벅지까 찔렸던 것이다.

나는 다시 일어나려는 괴한에게 재빨리 다가가 칼을 쥔 손을 발로 찼다. 식칼이 멀리 날아갔고, 괴한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 때 또 한 번의 폭발음이 들렸다.

“도망 칠 수 없어.. 모두 여기서 죽는거야! 곧 다 같이 죽는거라고!”

“뭐 이 새끼가?!”

괴한의 도발에 안경을 쓴 대학생이 덤벼들려고 했지만 나는 말렸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폭발음이 벌써 두 번째였다. 괴한의 말에 따르면, 아직 더 폭발할 여지가 충분히 있을 거 같았다. 일단은 이 칸을 벗어나야만 할 것 같은 예감에 허벅지가 찔려 피를 흘리고 있는 아저씨를 부축해 옆 칸으로 이동했다. 사람들도 나와 같은 불길함을 느꼈는지 괴한을 그 칸에 버려두고 모두 옆 칸으로 옮겨왔다. 

괴한이 사람들을 따라 붙으려고 했지만, 남자 몇이 괴한의 복부나 어깨를 발로 차 버린 후, 통로의 문을 막아섰다. 

한시라도 빨리 또 다음 칸으로 이동을 하려고 움직이려는데, 반대편에서도 사람들이 꾸역꾸역 몰려들고 있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드는데, 아까 남자들을 찾아 돌아다니던 그 여자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중얼거렸다.

“뒤 쪽에서도 폭발이 있었어요... 우린, 여기서 다 죽나봐요.”

“네?”

“...도망칠 곳이 없어요...”

몇 사람이 비상 레버를 잡아당기려고 노력하고 있었지만, 망가진 것인지 여의치 않아 보였고. 사람들은 아비규환의 상태에 빠졌다. 죽음.. 죽음이라.

“하...하”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슨 삼류 영화 속 조연이 된 기분이었다. 

[우웅- 우웅-]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휴대전화를 부셔져라 잡았다. 액정에 떠있는 하트가, 갑자기, 너무, 그냥...

울컥했다.

“...여보세요”

[왜 안와! 어디야?]

“...자기야”

[응?]

“나 너를 닮은 딸이 가지고 싶었어”

[뭔 갑자기 헛소리야. 빨리 오기나 해~]

“너를 닮아서, 야무지고, 애교도 많고, 사랑스럽겠지?”

[... 왜 그래? 무슨 일 생겼어?]

“자기야. 정말 미안해. 나를, 나를, 내가 사랑한 너가,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야, 아까부터 무슨 헛소리야. 어디야? 어? 말해봐!]

“잊으면 안 돼. 잊지 말아줘. 알았지?”

[야!! 김성철!!!]

매캐한 연기. 사람들의 울음 섞인 비명소리. 마지막 한숨. 

그리고, 나를 부르는 목소리... 안녕.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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