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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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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5.01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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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6.15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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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쪽

191 (2부)

DUMMY

Prologue.





“가시는 겁니까?”


리카드 디안 클로디아노, 이 베르다드의 학원장인 그가 몹시도 진중하게 묻는다.


그러나 대답은 변함없다.


여기에―― 이 나라에 더는 내가 남아 있으면 안 된다.


분명한 답변을 했음에도 리카드는 납득할 수 없나 보다. 그답지 않게 목소리를 높였다.



“리아 양이 떠나는 것만이 답은 아닐 터. 반격을 위한 모든 준비는 끝마친 상태입니다! 여차하면――”

“――거기까지예요.”


그의 말을 자른 리아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리카드 씨도 사실은 알고 계시잖아요. 제가 여길 떠나지 않는다면 어찌 되는지.”

“······.”


차마 아니라고 하지 못하고 리카드는 안면을 감싸 쥐고는 고개를 떨궜다.



“전 말이죠, 벨루디스도, 이곳에 다니는 학생들도 전부 좋아해요. 조금 짓궂게 구는 사람도 있지만요. 하지만 그런 분들도 포함해서 저는 이 나라와 베르다드를 좋아해요.”

“후우······. 정말 어쩌다가 이런 일이······.”

“······그러게요.”


실로 기묘하다. 무언가의 억지력이 정말 작용하는 기분마저 들 정도로······.


‘아들 녀석이 봤던 만화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지. 줄거리가 바뀌지 않게 세계가 개입한다고.’


허튼 상상이라는 건 안다. 그렇지만 지금의 흐름은 뭘 어떻게 보더라도 기묘했다.


그만큼 입지는 튼튼했다. 괜스레 적으로 두기보다는, 싫더라도 웃는 얼굴로 화평을 맺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좋지 않은 자신의 머리로도 그런 생각에 도달한다. 그런데도 상황은 급변했다. 미처 막을 새도 없이. 하물며 에르마저도 그러했다. 작금의 사태는 무엇을 원인으로 기이한 건지, 어째서 이렇게 된 건지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이러나저러나 모두 늦었지만······.”

“죄송합니다, 리아 양.”

“아뇨. 리카드 씨의 잘못이 아니잖아요.”


위로를 건네봤으나 리카드의 얼굴은 펴질 기미가 없었다. 되려 본인의 잘못이라는 양 더더욱 죄책감이 깃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확실하게 그의 근심을 덜어주고 싶다.


그렇지만 더는 시간이 없다. 단호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대화를 마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퍼스트랑 다른 넘버즈들에게도 말했던 건데, 리카드 씨도 딱히 억하심정을 품지 마세요. 그게 저를 도와주는 것이기도 해요. 알겠죠?”


리카드는 순간 욱한 감정을 드러냈으나, 이내 알겠다며 수긍해줬다.


마지못해 따른다는 느낌이지만, 그거면 충분하다. 괜스레 나서서 리카드나 다른 이들이 위험해질 바에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리아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또 뵙도록 해요.”


――그렇게 리아는 반역죄의 오명을 뒤집어쓴 채, 이 나라, 벨루디스를 벗어났다.










알렌나시안 후작은 고민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머리에서 열이 나고, 김마저 피어오르는 게 아닐까 싶은 걱정마저 할 만큼 계속해서 고민했다.


하지만 뾰족한 대책은커녕 어째서 이렇게 된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몰려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특히 안 좋은 건 파벌 쪽이었다. 도대체 뭘 잘못 먹었는지, 레오노반의 행동이 이상해진 것이다.


급격한 변화······라 하기에는 뭐했다. 대화를 나눠보니 분명 허례허식이 가득한, 오만하기 짝이 없는 왕자임에는 변함이 없었으니.


다만 더는 세상 물정 모르는 머저리가 아니게 됐달까······.


이는 실로 안 좋은 일이다.


레오노반은 그저 이전처럼 알랑방귀에 놀아나기만 하면 됐다. 생각하는 건 자신에게 맡기고, 그는 왕자답게 파벌의 얼굴로서만 존재하는 게 이상적이었다.


하지만 레오노반은 뜻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그 자식······.”


알렌나시안 후작은 저도 모르게 쓴 신음을 흘렸다.


상황은 그만큼 좋지 않은 흐름이었다.


파벌이 한데 모일 수 있는 구실점은 바로 레오노반이다. 명분에 불과한, 파벌을 대표하는 얼굴뿐이라도 그렇다. 그는 제1 왕자―― 왕세자에 가장 가까운 왕자라는 권위를 대체할 수 있는 건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제대로 목줄을 채워놨어야 했어······.”


여자를 쓰든 돈으로 매수하든, 레오노반을 확실히 묶어둘 수 있는 안전장치를 달아뒀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실로 어수룩했다. 기반이 너무 견고한 나머지, 반석이나 다름없는 파벌의 위세였기에 멍청할 정도로 낙관적이었다.


이것에 대한 대가는 컸다.


당최 무슨 바람이 분 건지, 레오노반은 파벌에서 이탈하게 된 것이다.


제1 왕자인 그가 빠지는 건 타격이 크다. 그건 분명하다. 그래도 파벌 자체가 와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용사라는 대체품을 준비해 뒀으니까.



“하지만 그건 최후의 최후에서나 쓸 수 있는 카드.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으로서는 없느니만 못한 패다. 게다가······. 크윽!”


재차 떠오르는 생각에 알렌나시안 후작은 집무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렇다. 가장 큰 문제는 레오노반이 파벌에서 나간 게 아니다. 오히려 그가 나가며 벌인 짓이야말로 알렌나시안 후작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놈! 쳐 나가려거든 혼자 갈 것이지!”


분한 마음에 외쳐봤으나 달라지는 건 없다. 소리 지른다고 바뀔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만약 그런다면 얼마든 목청 높여 외쳐댔을 것이다.


머리로는 이러한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무의미한 일에 힘을 빼기보다는 어서 다음 수를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하지만 참을 수 없었다. 아니, 참기는커녕, 생각하면 할수록 열불이 터져 오르기만 했다.


분명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파벌의 반을 뺏긴 자신의 처지가 되어본다면 분명히.


어떻게 여기까지 키운 세력이었는데. 그걸 홀라당, 한순간에 빼앗긴 거다. 이 어찌 침착하니 있을 수 있겠는가.



“그 자식들도 문제야. 이리도 냉큼 꼬리를 흔들다니! 멍청한 놈들! 세력이 이렇게나 커졌건만 아직도 누가 위인지 구분하지도 못한단 말인가?!”


북받쳐 오르는 분노에 주먹을 내려쳤다.


다시금 진동이 울리자 테이블 끝자락에 간신히 걸쳐있었던 와인잔이 떨어졌다. 카펫이 깔려있어 깨지진 않았지만, 안에 남아 있던 내용물이 쏟아졌다.


코끝으로 시큼한 포도주의 향기가 느껴진다.


좋은 향이다. 누구라도, 평생 마시지 못할 서민이라도 단박에 알아챌 만큼 진한 풍미다. 괜히 1등급의 특주가 아니다.


그리고, 이제는 알렌나시안 후작도 쉽게 얻지 못할 것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저건 흰 날개를 통해 들어온 것이기 때문에······. 갑작스럽게 그들과 연줄이 끊긴 지금으로는 남은 물량이 떨어지면 더는 맛보기 어려운 물건이다.


후작의 권위?


흰 날개엔 그딴 건 통하지 않는다. 압박하면 할수록 여의찮아지는 건 도리어 이쪽이다.


벨루디스 전체 물류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그들에겐 그만한 힘이 있었다. 어설픈 견제 따윈 씨알도 먹히지 않을 힘이······.


괜히 물류사업에 뒤늦게 뛰어들었음에도 크게 번창할 수 있었던 게 아니다. 자체만으로 조합의 역할마저 소화할 수 있는 흰 날개가 뒷배가 되어준 덕분이었다. 그들이 무보수로 본인들의 거래를 넘겨주었기에 후발주자로 출발했음에도 앞선 상회들을 모두 제칠 수 있었던 거다.


이제 막 생겨난 상회를 대상회로 만들 정도다. 그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한지는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절대 좋은 꼴을 보진 못한다.


그런 흰 날개에게 돌연 일방적으로 결별의 통지를 받았을 때는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른다. 너무 믿기 힘든 나머지 몇 차례 정독한 것도 모자라, 어떤 세력의 술수인가 싶어 마법으로 감정까지 해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눈으로 본 그대로였다. 짤막하게 결별이 적힌 편지에는 어떠한 마법도 걸려있지 않았다. 필적 또한 진짜였었다.


어떠한 꾸밈이나 조작 따윈 전무했다. 흰 날개는 진짜로 이쪽과의 연을 끊은 것이었다.


도대체 어째서?!


의문만이 들었다. 무슨 연유로 흰 날개가 기껏 쌓아놓은 연줄을 버린 것인지 납득되지 않았다.


물론 커진 덩치가 있으니 갑자기 무너지진 않는다. 그렇지만 힘들어지는 건 피할 수 없는 수순이다. 기껏 해봐야 덩치가 작아지지 않게 현상 유지나 가까스로 하는 실정이었다.


파벌은 반토막이 나고, 어렵사리 키운 상회는 얇은 명줄을 어떻게든 길게 끌고 나가야 하는 처지······.


확실히 말해, 대위기였다.


귀족 사회의 권력은 지위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에 따르는 돈이 있어야지만 확실한 힘으로서 성립된다. 그래서 영지가 있는 귀족들은 세금을 걷는다. 아슬아슬, 영지민들이 죽어 나가기 직전까지. 노련한 자들은 이 줄타기를 특히 더 잘한다.


알렌나시안 후작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후작이라는 지위만으로는 세력을 통솔할 순 없다. 돈은 필수 불가결이었다. 아니, 처음부터가 압도적인 재력을 바탕으로 끌어모은 파벌이다. 그 콩고물을 바라온 자들은 적지 않았고, 만약 현상이 유지되지 않는다면 어찌 될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답을 찾기 위해 무수히 고뇌에 빠지자니 문이 두드려졌다.


찾아온 자는 파벌의 오른팔인 나이젤 백작으로, 그는 안내해준 집사를 지나쳐 빠르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참지 못하겠는지, 문이 닫히자마자 작게―― 하지만 잔뜩 흥분하여 외쳤다.



“후작님, 아, 알아냈습니다!”

“뭣?! 벌써 말인가?!”


그에게 명한 건 조사로, 당연히 흰 날개가 변심한 원인을 찾는 것이었다. 자체적으로도 사람을 보냈지만, 혹시 몰라 백작에게도 알아보라 하였거늘, 설마 하루 만에 결과를 가져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칭찬의 말에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알아낼 수 있었을 겁니다. 아마 후작님께서 보내신 자들도 급히 보고하러 올 것입니다.”

“그 흰 날개가 그리도 허술하게 정보를 흘린단 말인가? 사안이 사안인데?”

“맹점이었던 겁니다. 아무리 흰 날개라지만 결국은 한낱 상회. 저희의 관심 밖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제까짓 것들이 암만 커봐야 우리 귀족에겐 저 밑바닥의 하층민과 다름없으니.”

“말씀대로입니다. 그렇기에 알아차리는 게 늦었습니다.”

“그게 무슨―― 앗?!”


나이젤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하셨듯이 백성들 사이에선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습니다. 그것도 무려 보름 전부터.”

“자세히 말해주게.”


알렌나시안 후작은 진지한 눈을 했고, 나이젤 백작도 신중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뗐다.



“후작님도 들어보셨을 겁니다. 새로운 조합의 창설 허가가 떨어진 것을.”

“아아. 기억하고 있네. 웬일로 그딴 귀찮은 일을 통과시켰나 싶어서 조금 의아했었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유?”

“예. 그 허가를 요청한 자가 이스피리아였기 때문입니다.”

“그년이?!”


별로 관심이 없어 대충 흘려들었건만, 설마 그 가증스러운 년이 연루되어 있었을 줄이야.



“하지만 제아무리 그년이라지만 그리 간단히······?”


신생 조합의 설립은 앞서 언급했듯 귀찮다. 회계에 부정을 저지르진 않았는지, 그로 인해 납부할 세금을 줄였는지 등등, 심사할 사안이 많았다. 뭐, 최근에는 설렁설렁 대강하는 데다, 이 점을 이용하여 사소한 부정을 저지르지만······.


하지만 부정을 저지르는 것도 생각보다 머리를 써야 하는 일이다. 너무 어설프게 했다가는 단박에 발각되니 말이다. 차라리 정직하게 구는 게 더 편한 일일 것이다.


이래저래 무사히 넘어가려면 그만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고, 관련 부처 사람과의 연계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거기다 도시에 사는 백성들의 세금까지 징수해야 한다. 바쁠 거라는 건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한 상황에 새로운 조합이 생겨난다?


여태까지 잘 유지되고 운영되어왔던 현 상황이 무너지는 것이니 일감은 배로 늘어나는 건 기본이다. 예상하기로 이쪽 부처 사람들은 몇 달간 일에 치여 살아야 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새롭게 생긴 조합이 부실하여 망하기라도 하는 날엔 헛수고로 돌아간다. 앞서 바꿨던 체계를 다시 원상복구 시키는 건 물론이거니와, 망한 조합에서 체결한 계약의 처리 등으로 대혼란이다.


이건 나라의 입장으로서는 최악이다. 유통에 차질이 생기는 것이니 말이다.


유통에 문제가 생기면 모든 게 비싸진다. 소비심리는 위축되고 경제는 나빠진다. 이 파장으로 당연히 세입 또한 급격히 줄어든다.


이때를 대비하여 각 지역의 영주들은 식량과 돈을 비축한다. 왕가도 나라 차원에서 상당량을 비축해둔다. 그러나 버티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빠르게 해결하지 못하면 최악의 경우 나라가 휘청인다.


역사상으로도 그렇다. 한 나라가 멸망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것은 전쟁도, 기근도 아니다. 단연 유통이다.


오히려 전쟁과 기근으로 멸망한 나라도 근원적인 이유를 따지고 들어가면 유통이 관련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멀지 않은 곳엔 발에 차일 정도로 널린 식량이 물류가 움직이지 않아 기근이 벌어지고, 살기 위해 전쟁을 벌이기도 하는 것이다. 의외로 영토확장의 야심으로 전쟁을 벌인 건 적은 편이었다.


무수히 많은 나라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위험성을 알기에 괜히 조합끼리 견제하다 유통이 무너지는 것을 경계했고, 어지간해서는 허가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허가했다. 위험성을 알고도―― 관리를 위해 들여야 할 귀찮음을 알면서도 신생 조합의 문을 열어줬다.


무엇 때문에······.


이러한 의문을 담아 나이젤 백작을 쳐다봤고, 그는 자신이 조사해온 것을 말해주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알렌나시안 후작은 작게 신음을 흘렸다.



“조합장이 멍청한 놈이란 소린 들었다만······. 혹시 그년이 보기 좋게 이용한 건 아닌가? 조합을 세우기 위한 명목으로.”

“그럴지도 모르겠으나,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그래. 중요한 건 다음이지. 사르케아, 그 자식······. 겨우 그딴 년 때문에 이 몸을 배신해? 어이가 없군. 제법 영리한 놈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대국하나 읽지 못하다니. 하지만 현재 우리가 힘든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이젤 백작은 어떠한가? 혹여 이 상황을 타개할 비책이 있나?”

“공교롭게도 아직까진 마땅한 안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스윽.


나이젤 백작은 품에 손을 넣더니 한 장의 편지를 꺼냈다.



“왕가의 문장? ······하핫! 설마 멍청한 제1 왕자가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보낸 것인가?”

“아닙니다.”

“응? 그럼 누구인겐가?”

“직접 보시는 편이 빠를 겁니다.”


그 말과 함께 편지를 건네줬고, 알렌나시안 후작은 테이블에 놓여있던 페이퍼 나이프로 편지를 개봉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뜯고 싶었으나, 명색이 왕가의 문장이 새겨진 거라 참았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안에 든 내용물은 위기에 빠진 알렌나시안 후작과 파벌을 구해줄 동아줄이었기 때문에······.


알렌나시안 후작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고, 마찬가지로 진한 웃음을 지은 나이젤 백작이 물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벨루디스는 물론, 공국과 제국, 세인트리안에도 손길이 미치는 초거대 상회, 흰 날개.


여느 상회와 마찬가지로 첫 시작은 초라했던 흰 날개를 굴지의 대상회로 키운 건 당연히 선조들의 노력과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상회 명처럼 날개를 단 사람은 현재의 상회주였다. 그전까지는 그냥저냥 벨루디스의 흔한 상회로, 지금과 같이 전국 각지에 손을 넓힌 건 오로지 그의 수완 덕분이었다.


그러한, 상인 중의 상인인 그는 VIP룸에 마련된 중후한 소파에 앉아 자신의 앞에 놓인 계약서에 서명했다.


계약서의 내용은 보잘것없는 물류의 운송―― 식료품의 조달이었다.


그 양은 매우 적었다. 매달 50인분 정도로, 흰 날개로서는 절대 큰 건수가 아닐뿐더러, 상회주가 직접 나와 사인할 건수는 더더욱 아니었다. 고급품이라도 끼어있었다면 또 모를까, 그것도 아니다. 운송품 항목에는 그러한 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는 이 자리에 직접 왔다. 그리고 선뜻 계약서에 자신의 이름과 지장을 찍었다. 웃는 얼굴로······.



“확인해 보시지요.”


완전히 똑같은 내용의 계약서 두 장 중에서 한 장을 테이블 맞은편으로 밀어 건네줬다.



“으음. 이상 없네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은발의 소녀.


이 소녀가 바로 계약자로, 요즘에는 엉덩이가 무거웠던 흰 날개의 사르케아를 움직이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나, 레우니 사르케아를 말이지.’



“헤헤. 갑작스러운 요청이었을 텐데 고마워요, 사르케아 씨.”

“레우니로 괜찮습니다, 이스피리아 님.”

“아, 네.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레우니 씨. 번거로울 텐데 직접 오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에 손을 얹고 살며시 머리를 숙인 소녀―― 이스피리아는 순진무구한 미소를 짓고는 방긋 웃었다.


참으로 묘한 사람이다. 최고 국빈이면서 단순한 상인 나부랭이에게 머리를 숙인 것도 그렇지만, 굳이 이곳―― 새롭게 열린 공정 상인 조합을 언급한 것이 특히나 그러했다.


사실 이스피리아는 본인이 직접 흰 날개로 찾아오겠다는 뜻을 딸로 하여금 전했었다.


계약은 그곳에서 하겠다고······.


믿기 힘들었다. 오죽했으면 말을 꺼내는 딸, 비비안조차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혼란스러워했다. 다 차려진 밥상을 뒤엎는 느낌이랄까, 어린 딸까지도 단박에 눈치챈 이 계약의 이점을 모른다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아닐 것이다. 여기까지 판을 만든 건 그녀니까. ‘흰 날개가 발걸음을 옮긴다’는 이 뜻을 절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이스피리아는 끝끝내 이쪽이 오라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체면을 차리기에, 염치가 있기에 사양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기일이 다가옴에도 전혀, 혹시 몰라 비비안에게 넌지시 여쭤보게 했는데도 변함없었다.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이 약속 당일, 이스피리아 본인이 오겠다는 소릴 들었다고 했다.


솔직히 까무러치게 놀랐다. 만약―― 혹여나 만에 하나 흰 날개에서 계약하더라도 대리인을 보낼 것으로 생각했었기 때문에.


――그게 보통이니까.


하급 귀족이라도 그렇다. 다른 나라라면 모르지만, 벨루디스는 한낱 상인과의 계약에 귀족이 직접 나오는 일은 여간해선 없다. 정말 어지간히도 다급하지 않고서는.


귀족은 본디 그러한 생물이다. 서민들과는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며, 자신은 고귀하다는 특권의식이 가득하다. 더욱이 질 나쁘게도, 그들은 거역하면 한순간에 터전을 없앨 힘마저 있었다. 여러모로 사는 세계가 다른 것이다.


그런데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파격적인 것도 그러하지만, 애당초 흰 날개에 부탁한 연유는 조합의 신뢰성을 높이려 했던 게 아니었나? 그렇기에 딸이라는, 사적인 루트를 통해 접촉한 게 아닌가?


의문은 계속해서 생겨났고,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기다리기로 했다. 아슬아슬한 직전까지.


사람이란 예상대로 풀리지 않으면 그 본성이 나타난다. 몰리면 몰릴수록 더욱.


그랬는데······ 정말 상상도 못 한 소식을 듣게 됐다. 이스피리아가 출발했다는 게 아닌가. 흰 날개의 본점을 향해.


그것도 무려 비젠탈을 타고······.


처음 이 소리를 들었을 때는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기분이었다.


그야 그렇지 않나? 아무에게도 등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전설의 대마수를 탔다는데, 어찌 곧이곧대로 믿을 수나 있겠는가.


하지만 마도구 너머 다급하게 외치는 부하 직원의 말에선 연신 똑같은 소리만이 전해졌다.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스피리아는 진심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모든 이득을 버리고 흰 날개로 행선지를 정한 것이었다.


다급히 마도구를 향해 외쳤다. 공정 상인 조합으로 가시게 하라고. 시험은 해보고 싶었지만 일을 그르칠 순 없다.


다행히도 비젠탈은 천천히 걷고 있었기에 무사히 전할 수 있었다.


그 소식을 전해 듣기 무섭게 곧장 출발했다. 무수히 피어나는 의문은 집어삼켰다. 뭐가 중요한지 착각하면 안 된다. 멍청한 조합장과 같은 꼴이 되지 않으려면.


최대한 서둘러 도착해 마차에서 내리니 반겨주는 건 많은 인파. 정식으로 문을 여는 건 내일이건만, 기다림을 참지 못한 상인들이 몰려온 것인가 싶었다. 그러나 아니었고, 사람들이 몰래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던 건 위풍당당한 위용의 거대한 군마였다.


보자마자 한눈에 알았다. 저 군마가 비젠탈이라고. 그 외는 있을 수 없었다.


이스피리아는 보고 받은 대로 진짜로 타고 온 것이었다. 실제로 비젠탈의 등에는 최근에 만들어진 듯한 안장이 있었다. 정탐했던 부하 직원의 말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깨닫게 됐다. 이스피리아의 이해되지 않았던 기행이.


실은 이스피리아에겐 누가 발걸음을 옮기는지 따위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닌 거다.


진짜 목적은 과시.


전설의 대마수를 이끌며 본인의 입지가 어디까지인지, 아직 의심하는 이들의 불안을 불식시키는 것이었다.


그리 생각하면 흰 날개를 찾아오려는 것도 납득이 된다. 공정 상인 조합보다는 흰 날개 본점이 더 머니까. 선전 효과를 기대하기엔 아무래도 많은 대중에게 내보이는 게 효과가 크다.


그렇다. 수를 잘못 파악한 건 레우니 자신.


이스피리아는 처음부터 흰 날개의 도움은 필요로 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힘만으로 확고한 신뢰를 잡으려 한 것이다. 비젠탈이라는 카드를 꺼내서.


확실히 말해 레우니가 한 것은 방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번 계약에서 흰 날개에 바라는 역할은 평범한 일개 상회로, 지목된 이유는 그저 이전 상인 조합에 휘둘리지 않을 세력이기 때문이었다.


놀라우면서도 유쾌했다. 이 흰 날개를―― 사르케아를 이런 식으로 대우하는 자가 있을 줄이야.


곧 있을 만남이 기대됐다. 더불어 궁금했다. 과연 그녀는 자신의 계획을 망가뜨린 작자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것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그렇게 만나게 된 이스피리아는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것도 못 알아먹냐는 비꼼은 없었다. 원망도 없었다. 갑자기 장소를 바꾼 것에 대한 책망도 없었다. 정탐에 대해서도 한마디 언급조차 없었다.


달리 말하면 그뿐이지만, 레우니는 가슴 깊이 탄복했다.


이토록 책략에 능한 사람이다. 계획에 사소한, 자그마한 어그러짐이라도 견딜 수 없을 터. 그런데도 전혀 언짢음이 없다. 한낱 상인 나부랭이를 상대함에도.


지금도 그렇다. 순수하게 계약에 응해준 것에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단언컨대 연기하는 게 아니다. 저 해맑은 미소를 보고도 그딴 생각이 든다면 그거야말로 타인의 감정을 모르는 정신병자일 거다.


‘책략은 책략, 나는 별개라는 건가? 거참, 대단하구먼.’


만약 계약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도 이스피리아는 전혀 나무라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물론 아쉬워는 할지 모른다. 그러나 헛걸음하게 했다며 눈살을 찌푸리는 일은 결단코 없으리라.


분명 새로운 상회를 찾는 것으로 끝내겠지.


이후도 다르진 않을 것이다. 거래할 일이 생긴다면 다시금 찾을 터. 이번 사건 따윈 안중에도 없이.



“몸소 행차하는 것도 개의치 않고 말이지······.”

“네?”

“아뇨, 안중에도 없는 상대의 의중을 떠보려 했던 어리석은 자가 떠올라서 그만.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그, 그런가요? 아! 조합장도 확인을 마치셨대요.”


애쉬 그레이의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땋은 여성―― 세컨드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우니는 슬쩍 눈가를 가늘게 했다.


이 여성은 정말 조금도 생각지 못한 인선이었다. 이곳에서는 특이한 마법사 복장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너무 젊다. 언뜻 보기에도 많아 봐야 20대로, 이 신생 조합을 이끌 조합장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지 않을까 싶다.


더군다나 듣기로는 테츠가 이곳으로 이직했다고 알고 있다. 상인이라면 누구라도 실질적으로 전 상인 조합을 이끌었던 그의 능력을 인정할 터였다.


레우니도 다르지 않았다. 그 뛰어난 수완이 실로 탁월하여 몇 번이나 그를 흰 날개로 빼내려고도 했었다. 유통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테츠였기에 번번이 퇴짜맞았지만.


‘덕분에 더더욱 탐이 났었지.’


그랬던 그가 드디어 썩어버린 둥지를 버리고 새 터전에 자리 잡았다.


이건 지금껏 전 상인 조합이 맡고 있었던 유통을 완벽히 대체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 필시 자신이 있었을 것이고, 이번에야말로 조합명처럼 공정하고 투명한 운영을 할 것이라 다짐했을 거다.


테츠, 그의 사후까지는 책임지지 못하더라도, 분명 그가 있는 동안만큼은 그리 흘러갔을 것이다. 그에게는 그걸 실현할만한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조합장이 아니었다. 조합장인 세컨드의 뒤에서 한 걸음 물러나 떠받히는 보좌―― 부조합장이었다.


어제였다면 틀림없이 실패한 인선이라고 했을 것이다. 누가 봐도 테츠가 실무 경험과 이에 따르는 노련함이 우위라고 느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스피리아를 보고, 저 둘을 실제로 만나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일단 테츠에겐 일말의 불만도 있지 않았다. 그 스스로 현재 본인의 위치를 수긍하고 있다. 그 말인즉슨, 세컨드는 그가 우려하던―― 그의 바람인 도시의 안녕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테츠가 인정한 것이다.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복장은 둘째로 치더라도, 어디서 저런 사람을 데려왔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탁!


세컨드가 지팡이의 끝을 살짝 내려찍자 그녀의 앞에 있던 계약서가 각자의 곁으로 날아왔다.



“확인을 마쳤습니다. 부정이 없는 공정한 계약임을 조합에서 보증합니다.”


레우니는 계약서를 들었다.


계약서 밑에는 새롭게 공정 상인 조합의 직인이 찍혀있었는데, 이게 또 신기했다.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보는 방향에 따라 알록달록 색이 바뀌는 신기한 직인이었다.


‘과연. 허투루 신생 조합을 설립했던 건 아니로군.’


이 직인은 위조 방지를 위한 것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만약 계약이 잘못된 거라면 조합 측에서 책임을 지겠다는 뜻도 담겨있는 것이었다.


이전 조합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곳에서는 실수는 모두 본인의 잘못. 조합은 그저 증인의 역할만을 했다. 그렇기에 상인들은 제자에게 계약서를 철저히 읽도록 몇 번이나 강조하고는 한다.


‘이거야 원. 세대교체는 문제없겠네. 오기를 잘했어.’


적어도 욕심만 많은 마르티즈 후작을 버리고 택한 만큼의 가치는 있었다.


계약서를 같이 온 직원에게 넘긴 레우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바로 딱! 소리가 나더니 강제로 일으켜 세워졌다.



“제가 그런 격식은 별로 안 좋아해서요. 게다가 저희는 서로 계약하는 관계잖아요? 갑과 을은 없으니 이렇게 하기로 해요.”


이스피리아는 손을 내밀었다.


대등한 입장이라는 것을 보일 생각으로 이러는 거겠지.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이스피리아의 직급상 절대 대등하게 될 수 없다. 단순히 보여주기일 뿐, 그 내면에는 명백한 상하관계가 존재한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맑은 눈으로 올려다보는 이스피리아를 보고 있자니 왠지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기세로 허리를 쭉 펴고, 당당히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좋은 거래를 했습니다. 앞으로도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 연락하시길. 본사는 이스피리아 님의 방문을 언제든 환영합니다.”

“네.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싶어요. 잘 부탁해요.”










“다녀왔습니다~!”


리아는 기숙사로 돌아오자마자 소파로 몸을 날렸다. 근처에 먼저 늘어지게 누워있던 페리가 흘끔 째려보기도 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열심히 일한 자는 푹 쉬어도 되는 법이잖아?’



“으흐. 좋다. 맨날 페리가 괜히 늘어지는 게 아니네요.”


생각보다 긴장했는지 편안함에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가 나왔다.


과연 비싼 값을 한다. 푹신함이 다르다.



“근데 내가 가도 괜찮았던 걸까?”


괜스레 불안해졌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이번 계약은 앞으로 자주 마주칠 엔가나가 가는 편이 좋지 않았나 싶다. 첫 계약만큼은 리아가 가야 한다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기에 가긴 했다만 정말 괜찮은 건지 의심만 든다.



“정식적인 첫 계약인데 말이야. 분명 엔가나 씨가 훨씬 깔끔한 인상이었을 텐데······.”


다시 떠올리니 속이 쓰린 기분이 든다.


물론 계약은 여러 번 해봤다. 필므와 이클립스 등등. 그러나 그건 동급생과 어린아이라는 특수성이 있었다. 조합을 설립해도 된다는 왕가와의 계약도 그저 서면에 사인만 했을 뿐이었고.


여러모로 어른과 얼굴을 대면하고 한 계약과는 다르단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나마 비젠탈과 함께 가서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레우니와 마주했을 때 안색이 거무죽죽했을 것이다.



“응! 고맙다는 이야기를 꼭 해야겠어. ――아니, 지금 할까?”

《아까부터 뭘 혼자 궁시렁거리는 거냐?》


페리가 뭐하고 하지만 무시. 신경 끄고 바로 [염화]를 사용했다.


[염화]는 즉시 연결됐고, 놀란 기색이 가득한 리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아 양? 어쩐 일이십니까, 혹시 예기치 못한 사태라도?!』

『아뇨. 덕분에 잘 다녀왔다는 인사를 하려고요. 혼자 갔으면 긴장해서 제대로 말도 못 했을 거예요.』


그렇다. 비젠탈과 함께 가게 된 건 사실 리카드의 조언으로, 잔뜩 긴장하여 그에게 상담하니 그럼 믿음직한 누군가와 함께 가는 게 어떠냐는 조언을 해준 것이었다.


이때 비젠탈이 떠올랐다. 언제나 관리장에만 있는 그가 밖을 돌아다니며 숨 좀 돌렸으면 싶었고, 제국에서도 이래저래 방치하는 등 마음에 걸렸었다. 과묵하고 든든한 그와 함께라면 긴장을 풀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이 이야기를 하자 마침 잘 됐다며 리카드가 안장을 건네줬다. 설명해주기로는 릴 공방에 개인적으로 의뢰하여 준비해뒀다나 뭐라나.


하지만 비젠탈이 싫을지도 모를 일. 영 내키지 않았는데, 이게 웬걸? 비젠탈은 선뜻 괜찮다며 안장을 착용해줬다.


확실히 안장이 있으니 그냥 탈 때보다도 안정감이 있었고, 제법 편하게 갈 수 있었다. 더군다나 비젠탈이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주어 무척이나 안심됐었다.


계약이 끝난 뒤로는 바로 돌아오는 것이 뭐해, 비젠탈에게 예전 모습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등을 들으며 아네픽시르 곳곳을 다녔다.


재밌었지, 라며 회상을 하고 있자니 의아하다는 듯한 리카드의 심경이 전해졌다.



『응? 벌써 다녀오신 겁니까?』

『어, 네. 비젠탈 씨랑 산책 좀 하다가 돌아왔어요.』

『그렇습니까······.』


왠지 즐거워한달까, 뭔가 납득했다는 음색이다.


도대체 뭣 때문에 그러는 걸까······.


왠지 요즘은 이런 일들이 제법 많은 느낌이다. 이쪽만 빼고 서로 다 아는 듯한 그거 말이다.



『그러고 보니, 리아 양. 안장은 어떠셨습니까? 불편한 점은 없으셨나요?』

『딱딱하다는 것 말고는······ 글쎄요? 나름 편했던 거 같은데······. 일단 발을 얹을 곳이 있어서, 그냥 탔을 때와는 달리 안정성이 있긴 했어요.』

『나중에라도 수정할 곳이 있으면 말씀하시지요. 릴 공방의 나룬 씨가 언제든 고쳐준다더군요.』

『나룬 씨가! 헤헤······. 감사도 전할 겸 나중에 한 번 들러야겠네요.』


기분이 좋았던 리아는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눈 다음에 [염화]를 종료했다.



“음음. 태평한 게 최고야~ 걱정했던 인디아 씨 쪽도 잠잠하고.”

“수고했어.”

“아, 고마워요~”


자연스럽게 건네주는 컵을 받은 리아는 음료를 쭉쭉 들이켰다.


‘조용하고 맛있고, 극락이야 극락―― 아앗?!’


번쩍 정신을 차린 리아는 빨대를 놓고,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잔상이 남을 정도의 속도였다.



“에르······.”


은은한 미소로 내려다보는 에르.


평소와 다름없는 남편의 모습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다. 어색하다고 해야 하나, 뭘 어쩌면 좋을지를 모르겠다.


그런 기분을 읽었는지 에르는 별말 없이 부엌으로 향했다.


리아는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그의 등을 바라봤다.


이대로는 좋지 않다는 건 안다. 전생을 포함해 근 100여 년에 달하는 삶을 살았다. 알고 있는 게 당연하다. 경직된 분위기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더더욱 화해하기 어렵다는 것도 말이다.


근데······ 모르겠다. 어찌 말을 꺼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렇게 적막한 시간만이 흐르고, 아이리스와 델리안이 돌아왔다.



“저, 어머니······?”

“응. 왜 그러니?”


잠시 안색을 살피는 듯했던 아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별 건 아니고, 제 친구들이요. 다들 저번 왕자님들과의 일로 어머니께 제대로 인사드리고 싶다 해서요. 그래서 온 김에 같이 공부 좀 할까 하는데······.”

“여기서?”

“네. 괜찮을까요?”

“물론이지. 나도 비비안과의 약속이 있었으니 마침 잘됐네. 맘 편히 오라고 해.”

“아하~ 마법을 알려주신다고 했던가요?”

“그런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이야기를 나누는 거야. 이번 일도 도와줬으니 감사도 할 겸, 겸사겸사.”

“그런가요.”


허락을 받은 아이리스는 고맙다고 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과제나 하면서 쉰다면서.


다만, 왜인지 분위기가 묘하게 어색했다. 일부러 자리를 비워주는 것처럼.



“이상하네······.”

“뭐어, 이런 일도 있는 거겠지.”


어색하게 웃은 델리안이 옆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리아야.”

“어, 네.”

“흠. 찬크에르 말이다. 그와는 어떠한가?”


움찔――


괜히 찔렸던 리아는 몸을 떨었다.


과연, 이랄까. 당연하게도 천 단위로 살아온 델리안에겐 들킨 모양이다. 남편과의 관계가 어떠한지······. 뜸을 들이는 모습으로 보자면 진작에 알아차린 듯하다.


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게······, 뭐랄까······, 좀 어색해서.”

“자네도 알고는 있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 힘든 법이야. 아니면 이젠 그가 싫어진 겐가?”

“그럴 리가요!”


크게 소리치며 리아는 벌떡 일어났다.


저도 모르게 나온 행동으로, 머쓱해진 리아는 도로 소파에 앉았다.



“에르를 싫어한다니 있을 수 없잖아요.”

“하긴. 그랬으면 여태까지처럼 같이 자지도 않았을 테지.”

“으윽······. 그, 그보다 하실 말씀이 뭐예요?”

“얼른 화해하라는 것 말고 뭐가 더 있겠나. 얼추 무슨 상황인지는 아네. 분명 자네도 쑥스럽겠지. 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는 더 힘들 거라는 걸 명심하게. 아이리스도 그렇지만, 나도 이래저래 신경 쓰여서 불편하고.”

“며, 면목이 없습니다······.”


말을 흐리며 리아는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그 모습을 본 델리안은 거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꾸물거릴 땐가? 그의 성격상 자네가 먼저 말하지 않으면 계속 이대로일 텐데?”

“하, 하지만 마음의 준비라든가······.”

“으음. 확실히. 무작정 달려들었다간 화해할 것도 못 할 테니.”

“역시 그렇죠?!”


델리안은 곤란하다는 듯 예쁜 눈썹을 찡그렸다.


타인을 위해 이렇게나 진지하게 고민해주다니. 다시 한번 얼굴만큼이나 마음씨가 곱다는 걸 느끼게 한다.


‘그야말로 천사!’


라프리트에 이은 또 다른 천사의 등장에 크게 감동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고 시간이 있을 거란 생각은 버리게. 질질 끌수록 서로만 힘들어지네.”


하지만 이어지는 천사의 쓴소리에 크게 낙담했다.



“하아······. 진지한 이야기를 거북해하는 건 안다만, 좀 진지하게 듣게.”

“윽. 미, 미안해요.”

“후우. 자네는 정말 변함이 없구먼.”

“옛날에도 이랬나요?”

“그래. 예전에도――”


문득 말을 멈춘 델리안은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다 이내 작게 미소 짓고는 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네는 예전부터 항상 밝고 긍정적이었네. 주변에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지. 암만 힘든 상황이었어도······. 나 또한 마찬가지였네. 겨우 10년······. 나의 인생에서 10년은 찰나에 불과하지만, 자네와 만난 그 인연에서 정말 많은 것들을 배웠었다네.”

“델리안이······ 제게요? 그런 게 존재하긴 해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묻자 델리안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번쩍, 리아를 들어 올려 무릎 위에 앉혔다.



“당시의 나는 부끄럼쟁이였거든. 쓸데없이 나이만 많이 먹은 탓에 체면이니 뭐니, 그런 하찮은 것만 신경 썼었지······.”

“으음. 잘 모르겠지만, 저는 좋은 자극이 되었다는 건가요?”

“후후. 그렇지. 나에겐 자넨 실로 눈부셨어. 까마득히도 어린 인간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지. 때때로 달관한 듯한 모습을 보일 때는 실은 나이를 속였나 싶기도 했네. 물론 지나치게 천진난만한 건 좀 그 나이대 같았지만.”

“하하······.”

“그래도 할 땐 하는, 존경할 수 있는 친구였네, 자네는. 나와는 달리······.”

“아, 아뇨! 델리안은 충분히 멋지고 멋진, 존경하는 제 친구예요!”

“고맙구나, 리아야. 하지만 사실이란다? 나는 무지하게도 한심했어. 모처럼 해준 친구의 충고를 듣지 않은 끝에,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고 나서야 그러지 말 걸 후회하며 죽었거든.”


죽었다? 델리안이?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에 순간 리아는 멍해졌다. 농담은 절대 아니다. 델리안의 말에는 짙고 깊은 무게가 담겼었다.


분명―― 다른 미래에선 델리안은 죽었던 것이다.


리아는 반사적으로 가슴에 손을 얹어봤다.


침착하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맥박은 일정했다. 경험이 쌓인 탓인지, 내심 무언가 징조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러한 것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자세한 건 몰라도 왠지 짐작된달까······.


‘아마 델리안을 죽인 존재는――’



“우왓?!”


갑작스럽게 몸이 당겨졌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좌우로 두 개의 불룩한 언덕이 있었다. 말랑말랑한 언덕이······.


‘이 익숙한 감각은?!’


확실하다. 자주 당하여 익숙하다고 느낄 정도이니 단언할 수 있다.


‘이건 델리안의 가슴골에 파묻힌 거야!’


말하지 못할 남자의 꿈과 로망이 다시금 실현된 것에 속으로 외치자니, 위에서 피식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말 여전하구나. 아니, 여기까지 잘도 참고 들어줬다 해야 할지도. 뭐, 이제 끝이니 좀 더 어울려주거라.”


쓴웃음을 지은 델리안은 멀리 천장 너머 어딘가를 보았다.



“현실은 현실이라는 건 안다. 그곳은 그곳이라는 것도. 그래도 나는 그때의 친구가 해준 충고에 따르기로 했다.”

“혹시 오늘의 이것도······.”

“이전의 나였다면 잠자코 있었겠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유 같은 것을 대고서. 하지만 이젠 그러지 않고 싶구나.”

“더는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요?”

“체면 따윈 진짜 중요한 것에 비하면 하찮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딴 경험은 한 번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자네도 쑥스럽다느니, 부끄럽다느니 따지지 말게. 돌이킬 수 없게 되고 나서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리아는 알겠다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시원찮은 대답이었지만 델리안은 그걸로 만족했는지, 한 번 쓰다듬고는 무릎 위에서 내려줬다.



“다녀오게.”







쭈뼛쭈뼛 부엌으로―― 남편, 찬크에르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리아의 등을 보면서 델리안은 남몰래 숨을 토해냈다.


리아와 찬크에르와의 불화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르는 게 더 힘들다. 장님도 아니고, 보는 쪽이 도리어 눈길을 돌릴 정도로 꿀이 떨어지던 부부가 찬 바람 쌩쌩 풍기는데 어찌 모르겠는가. 하물며 대화조차 하지 않거늘 몰라보는 쪽이 더 이상하다.


정말 이리도 불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이리스의 귀엽고도 귀여운 모습을 지켜보면서 충실히 일을 마쳤건만, 되돌아오는 게 가시방석이라니······. 참을 수 없다.


물론 델리안도 악귀는 아닌지라 며칠은 참았다.


그런데 보름이 넘도록 화해할 낌새가 없다.


찬크에르야 이해한다. 학원장실에 있던 마력이 하나 사라진 것을 보면 대충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상상이 갔으니까. 애처가 중에서도 최상위를 달릴 그가 어찌 행동할지야 너무나 뻔했다.


문제는 리아였다. 이 깜찍하고 발칙한 친구는 다음날에 이미 화가 풀린 상태로, 원체 성격이 유순해서인지 악감정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애초에 매일매일 사이좋게 잠자리에 들기도 했고.


‘반대로 찬크에르를 계속 싫어하는 모습이 더 상상이 안 가지?’


그러하건만 리아는 나설 듯, 말 듯하다가도 끝에 가서는 결국 등을 돌렸다.


델리안으로서는 찬크에르가 주저하는 아내를 붙잡았으면 했으나, 그건 무리. 저 꽉 막힌 용왕에게는 기대하는 것 자체가 사치다.


그러므로 대신 등을 밀었다.


불편한 가시방석은 더는 질색이다. 모처럼 [기억 편찬]을 가다듬어 반지에 부여하게 됐는데. 귀엽고 사랑스러운 리아와 아이리스의 모습을 보존하기도 바쁜 판국에, 우중충 흐린 얼굴로 지내는 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


너무 밀어붙인 감이 있긴 하다. 거기다 다른 미래의 이야기를 하게 될 줄도 몰랐고.


분위기에 휩쓸린 감이 없지 않다. 그래도 망설이지 않은 것에 후회하진 않는다. 드디어 해냈다는 뿌듯함만이 존재했다.


‘아아. 오래 걸렸구나. 정말 긴 시간이 걸렸어.’


델리안은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일어나 자신에게 주어진 방으로 갔다.


둘의 걱정은 하지 않았다. 잘 풀릴 것임을 알기에.



“그야 내게 망설이지 말라 충고한 건 다름 아닌 저 아이이니.”


방의 침대에 앉은 델리안은 작게, 허둥대는 리아의 목소리를 들으며 밝게 미소를 그렸다.


작가의말

2부 시작입니다!


안녕하세요, 라스티아 입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반가워요, 정말!

후후. 공지에도 썼지만, 사실 이번 공모전 완전히 까먹고 있었음다.
뒤늦게 확인하고 부랴부랴 준비했지만......
영 마음에 안드네요.
이거저거 깨작대다가 어느 순간 ‘아, 이거 안 되겠구나.’란 생각이 들더군요ㅎㅎ

그래서 무척 아쉽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지만, 과감히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대신 만렙 히로인의 2부 스토리를 다듬기로 방향을 틀었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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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57 루이미너스
    작성일
    23.06.16 09:08
    No. 1

    어서오세요! 작가님! 기다렸어요!

    프롤로그 상단부는 2부의 중간부분 같은걸까요?!

    찬성: 1 | 반대: 0

  • 작성자
    Lv.25 Lastia
    작성일
    23.06.16 18:29
    No. 2

    반가워요~! 오랜만임다!

    프롤로그는 2부 중간 부분이 맞숨돠.
    따로 화를 나눠서 올리고 싶었지만, 그게 안 되는 관계로 같이 올렸네용ㅎㅎ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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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 173 22.11.09 134 0 38쪽
204 172 22.11.01 106 0 30쪽
203 171-2 22.11.01 90 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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