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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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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5.01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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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30 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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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쪽

188

DUMMY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갑자기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한순간에 의식을 전투태세로 전환한 리시타는 몸을 짓누르던 압박감을 뚫고 든 방패를 꽉 쥐었다. 그리고 가볍게 소파를 넘어 바닥에 떨어진 검을 잡았다.



“――그거 뽑으면 죽어요.”


리시타는 검을 쥔 자세 그대로 멈춰 섰다.


협박 따위에 굴복한 게 아니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감촉에 몸이 먼저 반응한 것이었다.


‘어느새······.’


아무리 못해도 5급은 될 법한 마법. 제3 위상, 웨이 쥬라스의 [천격의 벌]과도 견줄 그러한 것이었다. 그것들이 등 뒤, 절대 피할 수 없는 0거리에서 준비되어 있었다.


물론 무시하고 달려들어도 됐다. 성기사 단장인 리시타는 그 직급에 맞게 착용하고 있는 장비들은 최상급. 마법에 대한 저항력도 상당하여 6급의 대마법이라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마법대저항]의 투기술을 둘러 데미지를 경감시키면 전투 불능으로 치닫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행에 옮길 순 없었다.


너무 많은 것이다.


그렇다. 이스피리아가 준비한 마법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어림잡아도 20개가 넘는다. 세세하게 느낄 여유가 없어 대충 살폈음에도 그렇다. 감각마저 혼란해지는 것을 보면 40~50개의 마법이 준비되어 있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이건 무리다. 장비를 믿고 달려든다면 바로 벌집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이걸 버틸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할지나 모르겠다······.


낌새를 알아차리기는커녕 이 이상은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제압됐다.


압도적인 실력차.


알고는 있었지만 실로 절망적이다. 강자의 기척조차도 읽을 수 없다는 점이 이 차이를 절실히 실감 나게 하였다.


굳이 이런 상황이 아니더라도 저항은 무의미. 목덜미를 싸하게 식히는 죽음의 향기에 식은땀을 흘리며 얌전히 힘을 뺐다.


대신 물었다.



“어째서······.”

“당연한 걸 물으시네.”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듯 이스피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기습은 당연하고도 효율적인 전법. 야밤의 습격 등, 전쟁학에선 감초처럼 빠지지 않고 등장하잖아요? 저도 수개월 전에 ‘어떤’ 분들에게 당해보기도 했고.”


그렇게 이야기한 이스피리아는 고개를 저으면서 과하게, 연극이라도 하는 모양새로 너스레를 떨었다.



“이야~ 갑자기 ‘사룡’이 덮쳐들 줄 ‘누가’ 알았겠나요? 지금 떠올려봐도 간담이 서늘하네요. 덕분에 공부가 좀 되긴 했지만.”


의식한 건 아니겠지만 이스피리아가 학원장실 한켠,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유리관으로 고이 보관된 백은의 훈장을 흘끔 쳐다봤다. 살펴보니 유리관 밑엔 사룡의 침공을 이겨낸 189명의 학생을 칭송한다는 명패가 고풍스럽게 적혀있었다.


저게 어떤 사건을 기념하는 훈장인지는······ 너무나도 명백하다. 리시타 또한 이를 결정하는 자리에 있었으니.


씨익――


훈장을 본 것을 안 이스피리아가 도발하듯 입꼬리를 올렸다.



“이러하듯 흔하디흔한 일에 불과한데······, 혹시 단장님께서는 성기사답게 마음에 안 드시는지요?”

“······.”


먼저 싸움을 건 것은 자신들이다. 여기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이스피리아는 작게 콧방귀를 끼고는 피가 방울진 검지를 쳐다봤다.


그러자 피가 사라졌다.


증발한 것과는 달랐다. 표현 그대로 사라진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을 리시타는 본 적이 있었다. 다름 아닌 성국에서······.



“[정화]?!”

“역시나 세인트리안의 중추에 계시는 분답네요.”


애매모호한 대답이다. 분명 긍정을 한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리시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분명 [정화]―― 성스러운 자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기적의 힘임을.


다만 한 가지 이상한 게 있었다. 그건 바로 가이란이다. 그는 이스피리아가 [정화]를 쓰는 것을 분명 봤을 텐데도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예하도 그렇고, 분명 뭔가를 알고 있어······.’


의혹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스피리아를 알고 있는지는 여전히 미궁이지만.



“그나저나 생각했던 것보단 염치가 있나 보네요. 학원에 오자마자 개짓거리를 했던 거에 비해선 말이죠.”

“우리가 뭔 짓을 했다는 거냐. 그저 클로디아노 경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 뿐이다!”


저도 모르게 욱해서 반발했는데, 이 말을 들은 이스피리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더니 이내 납득했다는 시선을 가이란에게로 보냈다.



“과연. 본인도 떳떳이 밝힐 거리는 아니라고 여기나 봐요? 동료에게도 밝히지 않은 걸 보면.”


가이란은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만이 더욱 진해질 뿐이었다.


그러나 그와 오랫동안 연이 있었던 리시타는 알아봤다. 이스피리아의 말대로 가이란, 그가 무언가를 했다는 것을.


리시타는 한순간에 지금의 상황이 전부 이해됐다.


그랬다. 이스피리아는 다짜고짜 공격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경고라고 하지 않았는가. 달리 다른 이유가 있을 리가 없다. 분명 이스피리아는 가이란이 한 무언가를 느끼고 지금 이 자리에 온 것이다.


‘하지만 당최 무얼 했길래 눈알을 뽑으려 한 거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다만 그건 둘째로 치더라도, 그렇게나 문제를 저지르지 말라고 했는데, 그 다짐을 어긴 것에 분노를 느낀다.


가이란을 향해 여러 감정을 품고 있자니 몸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미안하네요. 당신은 아무 연관도 없었는데 대응이 조금 과했네요.”


이스피리아가 꾸벅, 조금이지만 머리를 숙였다. 다만 이건 리시타에게만이었다. 가이란은 아예 시선을 주지도 않았으며, 압박감조차 거둬들이지 않았다.


살짝은 불쌍했지만 자업자득이다. 버티지 못할 정도도 아니었으니 무시하기로 했다.



“아주 자신만만하군. 이래 봬도 난―― 우리는 성국의 사자로서 온 것인데 말이야.”


조롱이 담긴 어조로 가이란이 비꼬았다.


실제 목적이 어떻든 가이란의 말 대로기는 했다. 명목상 리시타는 성국의 사자. 이러한 처사는 분명 결례를 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스피리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숙였던 머리를 든 그 얼굴에는 더욱 진한―― 저 나이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미소를 그렸다.


분명 단순한 미소에 불과했다.


근데 왜 이리도 그리움을 느끼게 하는지, 리시타는 자신의 속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공교롭게도 최고 국빈이라서요. 아무리 당신네라도 이 정도의 무례로는 따져봤자 가볍게 무시당하겠죠. 아니, 애당초 당신들의 주장은 믿지도 않을걸요? 이래 보여도 평소에 처신을 잘했던지라. 괜한 시비를 거는 걸로 여겨지는 게 전부겠죠.”

“꽤 뻔뻔하군. 그걸 당당하게 말하다니. 거기에 그건 벨루디스에서의 입장에 지나지 않는다.”

“세인트리안의 대응은 다를 거다? 뭐 그런 소리인가요?”

“그렇다.”

“흐음. 확실히 그건 그러네요. 나라마다 입장이라는 게 있으니. 근데······ 그럴 여유가 있나요? 지금의 세인트리안에게? 듣기로 다시금 재림했다는 사도께 성전을 선포했다가 꽤나 곤란하다던데······. 뒤처리라든가 바쁠 텐데, 용케 저 하나에게 할애할 틈이 있나요?”


이스피리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성국은 성전 사태로 내부가 몹시 혼란한 상황이었다. 현재도 채 수습되지 않아 이따금 여정 중에도 귀에 들어올 정도였다. 차마 물어보진 않았으나 만나는 모두 어찌 된 일인지 듣고 싶은 눈치였었다.


‘신언’―― 신탁이 내려온 것이니 말이다.


무려 신의 말씀이다. 처음 들어본 사람조차도 본능으로 이를 이해했다. 그만큼 신언에 담긴 신성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사도의 재림이라는 말이 곧장 나왔던 것이다.


리시타들도 그러했다. 그렇게나 반박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짜라고 단언할 수 없었다. 성녀를 통해 몇 번 신언을 들었던 경험이 있던 터라, 되려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더욱 부정할 수 없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주교를 비롯, 성기사 단장과 일신성단이 베르다드에 올 상황이 전혀 아니었다. 그만큼 자인 디바오러―― 이스피리아가 성국에 남기고 간 것의 파장은 컸다.


성녀의 신언과는 달리 이번에는 무서운 기운―― 노했다는 기운이 담겨 있었기에 더더욱.


이런 성국의 상황을 가이란도 모르진 않았다. 그 또한 출발 직전까지 영문도 모른 채 바삐 도왔으니. 그럼에도 가이란은 도발하듯 옅은 웃음을 지었다.



“공교롭게도 인력의 질이 달라서 말이야. 성국을 얕보이게 하는 무리를 응징하는 것쯤은 쉽지.”

“헤에~ 그것 참 무섭네요.”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인다만?”

“부정하진 않을게요. 귀여워 보인다면 또 모를까, 무섭진 않네요.”

“굉장한 자신감이군.”

“그야――”


한순간 공기가 바뀌었다.



“――난 일찍이 이 대륙의 최강이었던 몸이야. 그런 내가 무서워해? 당신들을?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묻고 싶은데, 도대체 너흰 뭘 믿고, 지금 내 앞에서 나대는 거야?”

“······.”


눈가를 움찔하기만 할 뿐, 입을 열지 못하는 가이란을 보며 이스피리아는 그 고운 눈매를 가늘게 했다.



“만만해 보인다는 건 알겠어.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난 여린 소녀에 불과하니까. 근데 말이야······, 그게 약하다는 뜻은 분명 아니거든?”


정론이다. 뭐 하나 틀리지 않았다.


가까운 예시로는 리블리지가 있다. 그녀는 겉으로 볼 때 무척이나 연약하고 가냘픈 분위기를 풍긴다. 하물며 생김새조차도 청순하고 사랑스럽다고――길게 내린 앞머리 때문에 직접 본 적은 없지만―― 한다.


그러나 리블리지는 그 외형과는 달리 마력레벨이 400을 넘어가는 강자다. 변변찮은 마법 하나 제대로 쓰지 못해 다양한 상황에 대응하지 못한다는 약점이 있긴 했으나, 그조차도 유일한 특기인 [마력탄]을 뼈를 깎는 노력으로 갈고 닦아 상당 부분 극복해냈다. 전투에 있어서는 발군으로, 금익편성 내에서도 리블리지의 전투력은 상위권에 달했다. 특히 대인전에 있어서는 케트로조차도 능가했다.


이러하듯 외형과 그 전투력에 있어선 상관관계가 없다. 그렇기에 실력이 전부인 모험가들은―― 특히 고랭크의 모험가들은 상대를 외형으로 평가하기보단, 그 외적인 부분에서 상대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고 한다.


리시타와 가이란 또한 그러했다. 상대를 외형만으로 얕잡아보는 우책 따윈 저지르지 않는다. 우선 마력량을 읽어 상대를 가름하고, 여타 몸동작들에서 어느 정도의 수행을 쌓았는지 등의 정보를 수집했다.


그로부터 판단하면, 이스피리아는 모든 게 미지인 상대. 마력은커녕, 주 전법이 검술인지, 마법인지, 체술인지, 암살인지, 무엇하나 알아낼 수 없었다.


전투에 있어 상대의 전법을 모른다는 건 상당히 치명적이다. 신체 구조를 이용하는 그래플러의 경우, 그 특성을 모르고 맨손인 것에 방심했다간 한순간에 제압당하고 말리라. 이것처럼 상대를 아는 건 매우 중요하다.


물론 이스피리아도 가이란의 전법을 모르니 서로 마찬가지라고 할 수는 있었다. 그렇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건 바로 화력이다.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는 전법 따윈 무의미하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지난번에 떨어진 운석을 다시금 가이란이나 리시타의 머리 위에 떨어뜨린다면 그걸로 끝. 전투는 무슨. 운석을 떨어뜨리자마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뛰어야 할 것이다.


그러고도 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신의 보살핌이 있어야지만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지 않을까······.


믿기 어려울 만큼의 과한 화력을 지닌 이스피리아다. 그 능력은 이미 성국에서 선보였다. 그렇기에 무엇하나―― 몸의 중심이 나무처럼 굳건히 잘 잡혀있다는 것 외에는 어떠한 것도 알아낼 수 없었어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현장에 있진 않았다지만 그 거대한 운석을 본 가이란이다. 그도 이 사실을 알 것이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었다.


공기를 바꾼 건 다름이 아니라, 이스피리아가 내뿜는 기척――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강자의 기척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엇보다도 명확히 말하고 있었다. 이스피리아는 절대 약하지 않다고.


그런데······ 어째서 이토록 적의를 드러낸단 말인가. 그답지 않게······.


물론 강자에게 굴복하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적개심을 품고 있는 게 의아할 따름이었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이랑은 거리가 먼 가이란이기에 더욱.


‘굳이 싸움을 걸어봐야 얻을 이득도 없건만.’


이 이상은 안 된다. 리시타는 진정하라고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보았음에도 무시하고―― 아니, 무언가 확인할 게 있다는 양 살짝 눈을 깜빡였다.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결국엔 개인이다. 성국 전체에 싸움을 걸고 무사할 수는 없을 텐데?”

“흐음. 자인 디바오러라는 사도께선 홀몸으로 싸움을 걸었다고 들었는데······. 무참히 깨지고도 벌써 잊었나? 아니면 네가 있으면 무언가가 달랐다는 뜻?”

“그건 모르지. 절대란 없으니. 한 가지 확실한 건······ 저번과는 다를 거란 말이지. 지킬 게 있는 것만큼 힘은 분산될 테니까.”

“호오호오. 과연과연. 음. 그야말로 정론이군. 내 몸은 한 개에 불과하니.”

“그렇지? 네가 아무리 잘랐다고 하더라도 모두를 지키는 게 쉬울 리는 없지.”

“그러네.”


순순히 인정하는 이스피리아를 보며 가이란은 진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곧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방 안 가득 채우는 발랄한 목소리로 인해.



“응. 역시 넌 여기서 죽여둬야겠다.”











가이란 케아코찰.


케아코찰이라는 성이 있는 것처럼 가이란은 사제 직급의 치유사인 아버지를 둔 집안에서 태어났다.


치유사라고는 하나, 치유사가 널리고 널린 성국의 특성상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집안이었다. 하지만 그건 다른 나라에 있는 치유사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일반적인 성국의 신도들에 비하면 상당히 부유했다. 적어도 길거리로 내몰려 굶을 일은 결단코 없다.


지방은 더욱 그러하다.


아무리 치유사가 많다고 한들 지방 모두를 커버할 순 없다. 애당초 사람 자체가 적고.


누구나가 그러하듯 이곳 성국도 마찬가지였던 거다. 육각형의 벌집 모양으로 구획을 나눈 성국은 총 126개의 구역이 존재하였는데, 대성당 주변―― 수도라 할 수 있는 63구역을 다들 선호했다. 각 관공서가 밀집해 있고 편의시설과 여가시설, 하물며 타 국가에서는 보기 힘든 문화시설마저 있으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먹고살기 바쁜, 다른 의미로는 여유가 없는 삶은 누구도 바라지 않는다. 그렇기에 성국의 40%에 달하는 인구는 63구역을 필두로, 50, 51, 62, 64, 75, 76구역에 포진해 있었다.


그나마 관문이 있는 25, 69, 123구역 정도만이 관광객과 행상인들이 오는지라 나름대로 사람이 있달까. 덧붙여 25구역은 루 몬테르 공국 방면의 관문이고, 69는 벨루디스, 123구역은 제국 방면이다.


다른 지방은 한산했다. 특히 아무 관문도 없는 북쪽은 그 경향이 다른 곳보다 조금 더 심했다.


가이란의 집인 케아코찰 가는 바로 그 북쪽, 2번 구역에 있었다.


지방이라 부를 수 있는 만큼 2번 구역은 정말 무척이나 조용한 동네였다. 그리고 거의 언제나 봄 날씨를 유지하는 성국답게 초목들도 적당히 우거져 사람이 살기에는 최적의 땅이었다.


가이란은 그 평화로운 시골 동네에 딱 하나 있는 교회에서 부모님들과 살았다.


교회와 성당과의 차이는 사제가 있냐 신관이 있냐, 정도밖에 없었다. 물론 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차이가 더 존재하였으나――세례는 신관만이 가능하므로――, 어린 가이란이 보기에는 거기서 거기였다.


아니, 실제로는 권한의 차이가 상당했다. 성직자 집안에서 태어난 가이란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같은 신을 섬긴다면 거기엔 우열은 없지 않겠냐며, 아버지를 존경했던 가이란은 끝까지 제 생각을 관철했다.


그만큼 아버지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가이란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객관적으로도 그러했다. 가이란의 아버지는 지금 시대에서는 보기 드문 교리를 지키는 사제였으니 말이다. 어려운 자를 대가 없이 돕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교리를 실천하는 아버지는 가이란에겐 본받아야 할 어른이었다.


후에 사제들 사이에서 환영받지 못할 행보였음을 알게 돼도 변함없었다. 오히려 교리를 지키기 위해 지방―― 교황청의 눈이 잘 닿지 않는 곳으로 이사 온 것을 알고서는 더더욱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


남들은 쉬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한 것이다. 가이란에겐 아버지가 영웅이었으며 진정한 사제였다.


그런 영웅의 아들인 자신 또한 성직자의 길로 들어서는 건 당연한 수순. 어머니마저도 존경받을 인격자인 축복받은 환경에서 가이란은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순조롭게 신앙심을 쌓아갔다.


마을의 주민들 또한 아무도 오지 않으려 하는 시골에 와준 가이란의 가족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니 더는 불만이 없는 생활이었다.


한가한 시골 마을답게 사소한 문제조차도 거의 발생하지도 않은 평온한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다 바야흐로 만물이 소생하는 완연한 봄이――시기상으로―― 됐다. 마을은 한 해에 한 번만 있는 행사로 활기가 가득해졌다.


그 행사란 바로 사도, 디바오러를 기리는 축제였다.


이 시기에 성국은 전역에서 그 축제의 물결로 넘실거린다. 종교 국가다 보니 요란한 무언가를 하는 건 아니지만,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와 사도를 기리기 위해 타국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매년 이 시기에 방문하고는 했다.


그리고 교황청에서 교황과 함께 자그마한 행단이 꾸려진다.


활기찬 거리와 사람들과는 반대로 엄숙함을 유지하는 교황의 행단의 목적은 바로 순방. 사도, 디바오러가 생명의 신, 루시아스의 신탁에 따라 성도를 순방한 길을 따르는 순례였다.


타국에서 온 사람 중에서는 이 엄숙한 종교 행사에 참가하기 위한 자들도 상당하였다. 그렇게 자그마한 행단은 끝이 보이지 않는 무수히 긴 행렬로 변한다. 그 외에도 행단이 지나가는 장관을 구경하는 사람들도 있어 인산인해를 이룬다.


하지만 많은 인원이 움직임에도 행단이 들르는 구역에는 한 점의 소란도 없다. 하물며 작은 쓰레기조차 남기지 않는다. 식량마저도 본인들이 지참하니 지나치는 구역에선 어떠한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구경하러 온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사도를 기리는 엄숙한 순례길을 감히, 루시아스께서 지켜보시는 가운데 어지럽힐 불경한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1달간의 순례길을 순방하는 여정이 펼쳐진다.


당연히 성국 전체를 도는 건 아니다. 성국은 꽤 넓다. 도저히 한 달 만에 모두 돌아보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거리다. 그렇기에 순례길은 4개로 나뉘어져 있으며, 매해 차례로 순례길을 돈다.


이번 연도는 2번 구역이 포함된 순례길. 그런데도 가이란을 비롯하여 마을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교황의 행렬은 마을에 오지 않기에―― 아니, 정확히는 가이란이 사는 마을에 오지 않기 때문이다. 교황의 행렬은 2번 구역의 가운데를 지나가는데, 남쪽에 있는 가이란의 마을에서는 저 멀리 어렴풋하게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는 게 전부였다.


안 그래도 여태 행렬이 온 적이 없다. 그런데 어찌 신경 쓰겠는가. 그저 ‘아~ 지금 지나가고 있구나.’라며, 평화로운 마을에 드문 자극을 준 것만으로 만족할 뿐이지.


마을 전체가 그러했다. 그래서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가이란은 가족과 함께 마을만의 축제를 즐겼다. 단순히 광장에 모여 먹고 마시며 놀뿐이었지만 가이란도 미소로 모두를 둘러봤다.


――그리고 저녁 무렵 교황의 행렬이 마을에 당도했다.


무슨 변덕이 분 것인지······.


단 한 번도 없었던 교황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마을은 그야말로 혼비백산. 급하게 자리를 정리――하려고 했으나, 디바오러를 기리는 날에 너무 잠잠한 것도 이상하다는 의견에 적당히 정돈하기로 했다.


좌우로 길을 터 고개를 조아린 주민들 사이에 껴서, 가이란도 성직자 집안답게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다.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해왔던 기도다. 처음에는 상황이 어색해 긴장하였으나 이내 천천히 몰입하였다.


그런데 너무 집중했다.


깊게 빠지다 못해, 현재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잊고 열중하던 가이란이 부르는 말에 눈을 떴을 때는······ 앞에 교황이 있었다. 다른 곳을 보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교황은 정확히 가이란을 내려다봤다.


아마 계속 기도 드리는 광경이 신기해 오지 않았을까······.


믿기지 않는 현실에 가이란은 자신을 거칠게 흔들며 깨웠던 아버지를 보았다.


꿈은······ 아니었다. 넋이 나간 것을 넘어, 영혼마저 탈출한 듯한 아버지의 얼굴이 모든 걸 대변해주었다.


눈앞에 있는 교황은 진짜라고······.



“바오로 클레멘스라고 한단다. 만나서 반갑구나.”

“가이란 케아코찰이라고 합니다. 저 또한 예하를 만나 뵐 수 있음에 루시아스께 감사드립니다.”


차분하게 대답하기는 했으나 원체 기질이 침착했을 뿐, 당황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래도 갑작스러운 대처치고는 합격점을 줄 만했다. 자화자찬도 아니었던지라 주변에서 다그치는 사람은 없었다.


교황의 눈에도 그리 비쳤는지 잠시 조용히 쳐다봤다.



“음. 고개를 들려무나.”


무척이나 송구한 주문이다. 하지만 듣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보게 된 교황의 첫인상은······ ‘굉장하다’였다.


전혀 백발이 성성한 초로의 노인 같지 않았다. 그 눈에 담긴 힘찬 맥동은 되레 젊은 자신마저 뛰어넘을 듯하다. 정정하다는 것과는 달랐다. 호수처럼 잔잔한 교황에겐 가이란은 이해조차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놀랍다. 동시에 모시는 신이 경이로웠다.



“뭣 때문에 기도하느냐?”


어느새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신께 올리는 기도를 누가 뭐라 하겠는가.


가이란은 기도 드리는 자세 그대로 대답하였다.



“당신을 선지해준 여신님께 감사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건성으로 보일 여지가 다분했음에도―― 무례하게 비치기엔 충분했음에도 교황은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기도를 마칠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주는 배포를 보여줬다.



“죄송했습니다.”

“아닐세. 이리도 신실한 자를 보긴 실로 오랜만이라 기분만 좋다네.”

“아닙니다. 예하께서 모르실 뿐, 신실한 자들은 어디에도 있을 겁니다.”


자신의 아버지처럼······.


성직자로서의 아버지를 진심으로 존경했던 가이란은 그렇게 단언하였다.



“하긴 기도 드리는 것만이 여신님을 섬기는 방법은 아니지.”


그리 말한 교황은 기분 좋게 웃었다.



“젊은 신도께서 깨우침을 주셨군. 답례하고 싶다만, 뭔가 바라는 게 있는가?”

“여신님을 섬기는 것에 대가 따윈 불필요합니다.”

“지극히도 당연한 말이로고. 하지만 그게 아닐세. 불경하지만 여신님과는 별개로, 가르침에 대한 값을 치르고 싶은 거라네.”

“교황이신 것을 떠나, 개인 대 개인으로서 말입니까?”

“그렇다네.”

“신도들의 헌금은 헛되이 쓰여선 안 됩니다.”


계속해서 말꼬리를 잡으며 사양하자 주변인들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어디서 감히, 라고 말할 듯하다. 특히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성기사들의 분노는 눈을 마주하지 않았음에도 전해질 정도였다.


마을 주민들도 이러한 분위기에 조마조마한 눈치가 되었다.


하지만 교황만은 달랐다. 아니, 교황을 수행하듯 뒤에 대기한 1급 신관들까지도 그러했다.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다. 유일한 여자 신관은 대견하다는 분위기마저 풍겼다.


나중에 아버지에게 듣기로 금색의 영대를 어깨에 두른 이 4명의 신관은 주교임을 알게 됐는데, 이런 사실을 들었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진정된 뒤에 생각해보니 당연했다. 교황이 순례길에 오르는 판국에 주교가 가만히 앉아 쉴 수는 없지 않은가.


여하튼, 이때의 교황은 전혀 불쾌해하지 않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토록 신실한 신도에게 재차 독촉하는 건 크나큰 결례이겠지.”


교황은 몸을 돌렸다.


그대로 가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교황은 주교에게 무언가를 받고는 다시금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가이란과 시선을 맞췄다.


흙바닥인 것은 마음에 두지도 않았다. 값비싸고 성스러워 보이는 의복이 더럽혀졌음에도 흔들림 없이 똑바로 가이란의 눈을 보았다.



“받게나.”


단호하기도 했고, 이토록 예를 보이는 교황에게 너무 사양하는 것도 무례하단 생각에 받았다.


교황이 건넨 건 루시아스의 심볼이 달린 은색의 로사리오였다.



“혹시 신관이 되고 싶거든 대성당으로 찾아오게. 아아. 신도들의 헌금은 걱정하지 말게. 소싯적 모아놓은 사비가 있다네.”

“예하께서 직접 후원하시겠다는 겁니까?”

“자네에게 그럴 마음이 있다면.”

“······.”

“강요는 아닐세. 편히 여기게나.”


이만 실례한다며, 좋은 만남을 가져다준 여신님께 감사의 예를 표한 교황은 묵묵히 걸어 마을을 빠져나갔다. 순례길을 횡단하는 건 고단한 여정이라더니 잘 쉬지도 않는 모양이다.


그렇게 우르르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지나쳐간 마을은 정적에 휩싸였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머리가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가 이내 정신이 든 주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크게 환호했다.


교황이 순례길 여정으로 방문한 거다. 큰 의미가 없었던 축제는 단숨에 사도를 기리는, 본래의 목적을 띄게 됐다. 앞으로의 축제 또한――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한동안은 유지되리라.


잔뜩 흥분한 주민들은 이번 일의 한 축인 가이란에게도 몰려들어 축하한다며 호들갑이었다.


자기 일처럼 좋아해 주니 싫은 건 아니다만······ 너무 요란하다는 기분이다.


그런 생각을 품은 채 가이란은 늦은 밤, 집인 교회에서 부모님들과 마주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거라.”


테이블 너머 아버지는 몹시 진지한 눈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머니 또한 굳센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그리 고민하지 않았다.


교황에게도 말했듯 여신님을 섬기는 데에 굳이 신관이 될 필요는 분명 없다. 단지 그 마음이 중요할 뿐이니. 그렇지만······ 신관이 되어 더욱 여신님을 잘 섬길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한 번 결단을 내리니 행동은 빨랐다.


가족들의 응원도 받은 가이란은 그날 밤에 짐을 싸,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곧장 집을 나섰다. 교황의 순례길 행렬에 참가하기 위해······.


사실은 짐을 싸고 곧바로 따라가려 했지만, 소꿉친구들이나 주민들에게 인사도 없이 떠나기엔 너무 정이 없다.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한켠에 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기뻐해 주는 얼굴들을 보니 나름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생전 처음 마을 밖으로 발을 디딘 가이란. 교황을 만난―― 그 뒤를 따라가기로 한 그의 운명은 크게 달라졌다. 적어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향의 사제가 되려 했던 그의 꿈과는 많이 달라졌음은 분명했다.


그것이 과연 좋은 일일지는 알 수 없었다.


가이란 본인은 잘한 선택이라 여겼다. 제법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도 그랬다. 그날의 선택은 옳았음이 틀림없다고.


――비록 자신의 손으로 부모님을 죽이게 됐을지라도 후회 따윈 조금도 없었다.


신파극조차도 아닌 흔하디흔한 이야기다. 성국에서 신관은 성공했다는 하나의 징표. 엘리트들의 반열에 오른 인생이기도 했다. 무언가가 달라지기엔 충분한 것이다.


물론 가이란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것에 불과하였다. 여신님을 섬길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했으니. 그렇기에 [치유]를 능숙하게 쓸 수 있어――이후 원초마법임을 알게 됨―― 신관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아무런 감흥조차 없었다. 돈조차 필요 없어 받은 봉급들을 최저한만 남긴 채 모두 집으로 보내기까지 했다.


대단히도 금욕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욕심조차도 없어 보이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성직자. 교리에 따라 어려운 이웃을 기꺼이 돕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가이란은 모두의 존경을 받는 신관이 되었다.


――아니. 될 뻔했다.


이변의 시작은 정기적으로 보내오는 편지에서부터였다.


마을에서 온 그 묶음 편지는 언제나 평화로운 일상과 안부들로 가득해 특별할 게 없었다.


분명 그랬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편지의 숫자가 서서히 줄어들어 갔다. 어떤 주민의 경우, 뚝 떨어지다 못해 아예 보내지 않게 되었다.


딱히 이상한 건 아니었다. 본인의 일상이 있으니. 가족도 아닌 사람에게 인간은 쭉 신경 써 주기란 생각보다 힘들다. 바쁘다 보면 잊을 수 있는 것도 당연했다.


가이란은 그리 생각하여 별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랬는데······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됐다. 마을에서 편지는 계속해서 왔다. 근데 안에 적힌 내용물이 이상해진 것이다.


분명 잘 지냈니, 란 문구로 시작하는 편지는 언뜻 크게 달라진 점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일상적인 문구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무미건조한, 성의 없이 건성으로 적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의무적으로······.


서운하진 않았다. 애당초 보내지 않았어도 괜찮았으니. 여태까지 계속 보내줬던 것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석연찮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아예 안 보낸다면 모를까, 귀찮아하면서도 꿋꿋이 보낸다는 점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됐다.


어찌할까 고민했던 가이란은 고향 마을에 가보기로 했다. 평소 너무나도 근면했던 터라 갑작스러운 귀향 소식에도 누구 하나 나무라지 않았다. 되려 푹 쉬고 오라며 환영받기까지 했다.


그런 환대를 받고 가이란은 2구역에 있는 고향으로 갔다.


우려와 달리 고향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매년 순례길을 타고 한 번씩은 왔던 터라 가이란의 눈에는 여느 때와 똑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 생각은 집인 교회에 들어서는 순간 바뀌게 됐다.


발을 들이자마자 보이는 예배당에 생전 처음 보는 아이들이 있었던 거다. 나이는 대략 4~7살쯤일까. 10명이 넘는 남녀의 아이들이 갑자기 들어온 가이란을 동그랗게 뜬 눈으로 쳐다봤다.


순간 근처 이웃 마을의 아이들이 부모들과 함께 온 줄 알았다. 그러나 곧 아님을 알게 됐다.


아이들은 무척이나 꾀죄죄했던 것이다. 옷은 물론이거니와 신고 있는 신발마저도 밑창이 다 까져 발가락이 드러나 있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한 것인지 몸도 삐쩍 말랐다.


보호자가 있다면 저리될 리가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고아들이다. 아마 고아들을 거둬들였으리라.


그것 자체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 많은 교회와 성당에선 여러 사정으로 보호자를 잃은 아이들을 보호하기도 하니. 특히 성국은 타국과는 달리 이런 시설들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


이처럼 흔한 일이기에 가이란도 아버지가 대성당의 지원을 받고 고아원을 운영하는 줄로 알았다.


――근데 왜 저런 분위기를 풍겨대는 거란 말인가.



“시, 신관님이신가요?”


아이 중 나름 연장자로 보이는 소년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다른 아이들과 비슷한 또래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소년의 나이는 그보다 더 됐다.


단지······ 제대로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하여 작을 뿐이었다.


실로 믿을 수 없는 사실에 가이란은 눈을 부릅떴다.


성국은 풍요롭다. 먹을거린 지천으로 널려, 아무 풀숲을 들어가면 그날 하루의 먹거리 정도는 구할 수 있었다. 이곳이라면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오면서 보았던 푸르른 밭에서 따오기만 하면 됐다.


풍요롭기에 마음에 여유가 많아 아이를 돕는 사람 또한 이 성국에는 넘쳐났다. 그 정도로 크게 나무라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주의 정도만 주겠지.


분명 그럴 터였는데······.


몹시도 마른 아이들의 몰골은 그런 가이란의 인식을 뒤집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이 분위기. 웃는 얼굴로 필사적으로 감추려고 하지만 두려움이 짙게 밴 눈동자가 너무나 명확히 말해주고 있었다.



“저, 저기······.”

“미안하구나. 잠시 생각을 했단다.”


가이란은 아이들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눈높이를 맞췄다.



“나는 가이――라고 한단다. 알아맞힌 대로 3급 신관이지.”


본명을 밝히지 않았다. 아니, 밝힐 순 없었다. 예상한 것이 맞다면 분명 가이란 케아코찰이란 이름을 들어봤을 테니.


역시나 비슷한 이름에 아이들에게서 동요가 퍼진다.


확신은 아니다. 가이란은 모르는 척 웃는 얼굴로 고민하는 아이에게 물었다.



“너흰 여기에서 지내는 아이들이니?”

“네에······.”


대답에는 망설임이 가득했다.



“으흠. 그렇구나. 근데 밥은 먹고 지내는 거니? 꽤 말랐구나.”

“네네! 자, 잘 먹고 있어요!”


황급히 말한 아이의 눈엔 더더욱 깊은 두려움이 담겼다.


이젠 확정이다. 이 아이들은 이곳에서 학대당하는 것이다.


용케 루시아스께서 내려다보시는 이 성도에서 이딴 불미스러운 일이······


무수히 많은 생각이 오갔다. 그렇지만 함부로 단정 짓지 않았다. 차분히 정보를 모아야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좋게 힘든 일은 없는지 타일러보기도 했으나 이후에 있을 제재를 두려워한 것인지, 완전히 공포심에 잠겨 결단코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단다. 난 교황청에서 파견 나온 신관으로, 사실 이 교회의 실태를 파악하러 온 것이란다.”

“교, 교황청······이요?”

“그래. 교황 예하께서 계시는 곳이지.”


이 말이 결정타였다. 최고 권력자인 교황의 언급에 용기를 얻은 소년은 결심하더니 자신들이 처한 사태를 말해줬다. 멀찍이 떨어져 조마조마하게 보던 아이들도 빠르게 다가와 이야기를 보탰다. 개중에서는 북받쳤는지 엉엉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도 있었다.


몹시도 서럽게 우는 아이를 달래주며 가이란은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실로 지독한 처사였다. 암만 어린아이들이라지만 이러한 환경이라면 가이란이 한패이지 않을까, 의심할 법도 했는데, 그러지도 못할 정도로 몰려있었다.


하지만 기구한 삶에 안타깝다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가이란은 그저 순수하게 정보로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에게 의문은 품지 않았다.



“이젠 괜찮단다. 루시아스 님께 맹세코 내가 반드시 도와주마.”


단언하는 말에 아이들의 눈에 희망이 생겨났다.


가이란은 떠들썩해지는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자자. 진정들 하고 내 말을 들어보거라. 우선, 너희가 몸을 숨길 데가 있니?”


아이들은 서로 쳐다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대표로 아까의 소년이 대답했다.



“저흰 여기 예배당에서만 지내게 해서······.”

“그렇구나. ――아니다. 교회에는 사제와 가족들이 머무를 방이 마련되어 있단다. 그쪽으로 가자꾸나.”


아이들도 어딘지 아는 눈치였는데, 아마 들어가지 못하게 했으리라.


가이란은 모른 척 아이들에게 자신의 방―― 가족들이 지내는 집으로 안내받았다.


역시나 루시아스의 표식이 걸린 익숙한 문은 철컥철컥 소리를 내며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가이란은 곧장 마력으로 몸을 강화하여 억지로 문고리를 박살 내 열어버렸다.


보기 힘든 광경에 아이들이 “우와.”라며 감탄하고는 동경의 시선들을 보냈다.



“자자. 어서들 들어가거라.”


앞서 힘을 보여줬기 때문인지 주저하긴 했지만, 아이들은 근심 없는 얼굴로 차례차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가이란은 수색하는 척 집을 둘러보고는 아이들을 부모님의 방으로 모았다.



“너흰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누가 오더라도, 무슨 소리가 나더라도 절대 문을 열면 안 된다.”

“시, 신관님은요?”

“난 너희를 탈출시킬 길을 찾아보마. 들키면 안 되잖니? 걱정 말거라. 너희의 이야기는 하지 않을 테니.”


안심시킨 가이란은 몇 차례 더 문을 열지 말 것을 당부하고는 예배당으로 돌아왔다.


그때를 맞춰 교회의 정문이 열렸다. 들어오던 5명의 주민들은 예배당에 있는 가이란을 보고는 화들짝 놀랬다.



“도, 돌아왔었구나, 가이란.”


익숙한 얼굴의 남자―― 아버지의 절친으로 지내는 촌장이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빠르게 눈알을 굴려 예배당을 살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반년 만에 보는 가이란보다 예배당을 살피는 걸 우선시했다.


아마 아이들을 찾는 것이겠지······.



“예.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는지요?”

“이 평화로운 마을에 뭔 일이라도 있을까. 잘 지내다 못해 한가하기만 하지.”

“흠. 그렇군요.”

“그, 그보다 어쩐 일이냐. 순례의 날도 멀었는데 연락도 없이.”

“제가 저의 집에 돌아올 뿐이잖습니까. 여러분들을 좀 놀래켜 주고 싶기도 했고. 그래서 연락하지 않았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지요?”

“아, 아니. 갑작스러워서 말이야. 네 말대로 깜짝 놀랐지, 뭐냐.”

“하하. 이거 죄송하게. 그럴 의도가 아니었습니다만. 그런데······ 저희 부모님은 어디 계시는지 아십니까? 집엔 계시지 않네요. 혹시 밭에라도 나가셨습니까?”

“그게······.”


말을 끈 촌장은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느긋하고 인자했던 촌장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거친 행동이었다.



“아. 모르겠다. 야, 가이란. 너, 다 눈치깠지?”

“뭘 말입니까?”

“꼬맹이들 말이야! 걔들이 여기 있었을 거 아냐?!”

“설마 했습니다만 진짜였습니까······.”


아이들의 말이다. 아무리 행색이 허름하다지만 곧이곧대로 전부 믿기엔 판단의 근거가 부족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과장은 되지 않았는지 확인 절차를 거쳐야만 했었다.


촌장도 뒤늦게 깨닫고는 아차 싶은 표정 되었는데, 어차피 자백한 거, 그는 숨기지 않고 당당하게 굴었다. 되려 가이란을 회유하려고 했다.



“야야. 솔직하게 말해, 갈 곳 없는 고아들을 데려와서 일 좀 시킨 게 잘못이냐? 그냥 놔뒀으면 아무도 모르게 길가에서 죽었을 애들이라고.”


한가했다는 촌장의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굳은살이 잔뜩 배기고, 손톱에는 때와 흙이 낀 아이들에겐 그 노동의 흔적이 역력했다. 필시 마을의 온갖 일을 도맡아 했을 터였다. 그와 더불어 빠진 이와 곳곳에 남은 흉터, 부어오른 살들을 봤을 땐 자주 맞았음을 짐작게 했다.


그랬다. 마을은 부모 없는―― 보호자가 없는 아이들을 데려와 일손으로서 부린 것이었다. 본인들이 편해지려고 말이다.


다름 아닌 부모님의 주도하에······.


가이란은 이를 즉시 파악했다.


교회에 아이들이 있는 게 증거다. 아이들을 보관할 장소로 택해진 것 자체가 이 일에 가담했음을 무엇보다도 뚜렷하게 드러냈다. 이리하면 밖에서 볼 때는 고아원을 운영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마을에 머무는 게 아니라면 지나치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납득한 가이란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흐음. 과연. 말씀하시는 뜻은 알겠습니다. 다른 고아원들도 아이들을 지내게 해주는 대신 여러 노동을 강요하니 말이죠.”

“그, 그렇지?”

“예. 확실히 그것만으로는 잘못이 아닙니다.”


이런 반응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촌장과 주민들에게 안도감이 번져갔다. 하지만 이어지는 가이란의 말에 곧장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다만, 처우가 상당히 나쁘군요. 분명 고아원은 노동을 강요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에겐 노동에 걸맞은 대우를 보장하죠. 즉, 편안하고 안락한 잠자리와 굶주리지 않을 정도의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지요. 한데······ 딱히 그러진 않은 듯합니다만?”

“애, 애들이 일해봐야 얼마나 된다고. 그저 푼돈이다! 너도 걸맞은 대우라며! 제값만큼 치렀을 뿐이다!”


확실히 신관이란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순간으로, 아무리 아는 사이일지라도 꼬투리를 잡힐 순 없었는지 필사적이다.


별로 의미는 없었지만······.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고아원은 교황청에서 발의하여, 운영하는 기관입니다. 이에 따라 모든 고아원엔 소소하지만 운영자금을 지원합니다.”

“뭐······?”

“응? 모르셨습니까?”

“그 녀석······ 생색은 다 내놓고는 전부 꿀꺽했구나. 우리에겐 꼬맹이나 감시하게 하고······.”


가이란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지 촌장은 격노하여 누군가를 욕했다. 함께 온 주민들도 좋을 대로 이용당했다며 분개했다.



“보아하니 여러분 또한 사건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아니, ‘피해자’였었나 보군요.”


구태여 강조한 ‘피해자’란 단어에 촌장과 주민들은 바로 달려들었다. 어차피 모든 전모가 밝혀진 거 자신들이라도 빠져나가려는 심보였다. 방금 발설한 감시라는가의 이야기는 아예 없는 셈 쳤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가이란이 신관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3급이란 고위의.


앞서 언급했듯 성국에서 신관은 엘리트다. 그 소속은 당연히 성국의 최고기관인 교황청. 그러한 사람을 거스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물며 살해라도 하는 날에는 성기사단이 직접 출동하여 반드시 범인을 색출해낸다는데 감히 대들 리가 없다.


항간에서는 그림자에서 암약한다는 비밀조직이 움직인다는 말까지 있다. 조심하는 거야 당연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가이란이 묻는 말에도 더는 저항 없이 순순히 답했다.



“저희 부모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그, 글쎄. 교황청이 있는 63번 구역이거나 아마 근방의 구역일 거야. 거기에 별장이라도 구해놓은 거 같더라. 여기엔 네가 올 때만 찾아와서 그 이상은 잘 몰라.”

“언제부터 그러셨는지요?”

“꽤 됐지? 네가 예하를 따라가고 몇 년 지나지 않았을 때니까?”


촌장이 눈으로 묻자 주민들도 그쯤 됐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가르쳐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 탓에 고생하시게 되어 죄송하게 됐습니다.”


사과하며 가이란은 모두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주며 노고를 위로해주었다.


――겉으로는.



“그럼, 여러분들은 여기서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저는 다른 주민들을 만나 뵙고 오겠습니다.”

“우리들도――”

“――아뇨. 여러분들의 혐의는 벗겨졌으나 아직 누가 부모님과 공범인지 모르지 않습니까? 만약 제가 이 사건을 눈치챘다는 걸 알면 공격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야 약간의 호신술도 배웠고, [치유]도 쓸 줄 아니 괜찮지만, 여러분들은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아아. 그, 그렇군.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우린 네 배려대로 이곳에 있기로 할게.”


기껏 빠져나왔는데 불똥이 튀는 건 사양인지 대번에 말을 듣는다.


조금은 뻔뻔하다는 생각과 함께 가이란은 교회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천천히 닫는 문 너머로 희열에 찬 촌장의 얼굴이 보였다.


쿵.


쌍여닫이 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동시에 문 너머 안쪽에서 아주아주 작게―― 지근거리에서나 겨우 들릴 폭발음이 울렸다. 그리고 풀썩,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여럿 났다.


가이란은 신경 쓰지 않고 마을을 돌아다녔다.


마주치는 주민들은 놀라면서 어색하게 환영해주었다. 한 명도 예외 없이······. 모두 이 일의 관련자인 것이다. 촌장이 곧장 찾아올 수 있었던 이유도 주민들 중 누군가가 급히 알렸기 때문이었다.


살짝 낙담했지만 가이란은 미소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악수하거나, 어깨를 두드려주며 친근하게 재회를 나누었다.


그렇게 마지막 한 사람을 만나고, 뒤돌아선 가이란은 마력을 해방했다.


풀썩.


교회를 나설 때도 들렸었던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가 마을 곳곳에서 울렸다. 가장 소리가 컸던 건 바로 등 뒤였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라스티아 입니다!

늦어서 면~목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유가 있었달까... 이번 화는 개인적으로 제법 공을 들이고 싶은 바람에 수차례나 정해놓은 플롯을 뒤집게 됐네요.

덕분에 좀 늦었고, 분량도 늘어나게 됐지만...

뭐 어찌하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쓰고 싶었는데! (뻔뻔)

...농담입니다.

어쨌든 다음 화는 되도록 빨리 땡겨 쓸 예정이니 너무 노여워하지 말아주시길... ㅎㅎ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ps. 187화에서 리시타가 리카드를 공이라고 불렀으나 경으로 수정했습니다. 서로의 직책상 맞지 않는 듯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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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 179 23.01.20 84 0 42쪽
210 178 23.01.12 85 0 39쪽
209 177 23.01.05 103 0 40쪽
208 176 +1 22.12.27 105 0 44쪽
207 175 22.12.20 95 0 50쪽
206 174 22.11.18 115 0 37쪽
205 173 22.11.09 134 0 38쪽
204 172 22.11.01 106 0 30쪽
203 171-2 22.11.01 90 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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