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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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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5.01 00:47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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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7,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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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0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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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쪽

Epilogue

DUMMY

대성당에서 에쿠릴은 미친 듯이 달렸다. 신성한 장소에서, 그것도 주교가 보일 행동이 절대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멈출 수 없었다. 최근 뒷수습으로 눈코 뜰 새 없어 수척하고 눈가에 기미까지 꼈지만, 전력을 다해 내달렸다.


마음 같아서는 [비행]으로 날아가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진 못하고, 에쿠릴은 달리고 달린 끝에 도착한 방의 문을 벌컥 열었다.



“예, 예하!”

“응? 어쩐 일인가? 이리 다급히.”


무례한 방문이었음에도 교황은 차분히 에쿠릴을 반겨줬다. 그것도 모자라 눈매가 날카로워진 주변의 신관과 성기사들에게 괜찮다며 손짓하는 여유까지 있었다. 문 앞을 지키던 성기사들도 문을 닫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에쿠릴은 빠르게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실례했습니다.”

“아니. 괜찮네. 마음 쓰지 말게. 그보다 무슨 일인가?”

“그것이······.”

“음. 다들 잠시 숨 좀 돌리고 오게나.”


교황의 명에 집무실에 있던 인원들은 모두 밖으로 나갔다.



“감사합니다.”

“됐네. 본론을 말하게.”


에쿠릴은 마른침을 삼키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제1 위상, 가이란 케아코찰이 죽었습니다.”

“확실한가?”

“예. 레이드안 발론드 니벨롱 주교에게서 직접 연락이 왔습니다.”


질서의 주교인 레이드안은 성기사단의 관리와 더불어 한 가지 더 하는 일이 있었다. 그건 바로 심판관들의 관리로, 레이드안은 심판관 전원과 [예속의 서약]을 맺었다.


물론 행동을 강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예속의 서약]에 딸린 부가효과―― 상대방의 위치를 알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심판관들은 하나 같이 모두 강대하다. 인류에는 더할 나위 없는 귀중한 인적 재산이다. 다양한 상황에 모두 대처할 수 있는 그 활용도를 생각하면 대체재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그런 인재가 죽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괜히 심판관들에게 각자의 판단으로 재량권을 행사하도록 허가한 게 아니다. 몬스터 따위에게 당할 일도, 타국에 사로잡힐 일도 없으니 주어진 것이다. 단독행동 또한 같은 이유다.


다만 그렇기에 그들은 제 죽음을 성국에 알릴 도리가 없다.


그건 큰 문제다. 무력의 최고봉이라 자부할 수 있는 그들이 죽은 것이니. 그 말은 곧 그곳에 심판관보다 강한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였다.


정보는 생명이다. 위협이 바로 코앞에 있는지도 모르고, 연락이 끊긴 심판관을 수색하려다가 자칫 차례차례 조사하러 간 사람들이 죽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슷한 전과도 실제로 있었기에 심판관에게는 예외 없이 모두 [예속의 서약]을 맺는다. 덕분에 보다 빠르게 위치를 특정하고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게 됐다.


에쿠릴이 교황을 찾아온 것도 그러한 연유였다. 레이드안이 자신과 연결된 [예속의 서약]이 끊긴 걸 감지한 것이었다.



“위치는?”

“벨루디스의 아네픽시르, 그곳에 있는 베르다드 학원 내라 추정된다고 합니다.”

“결국 그녀의 손에 보내지게 되었나······.”


에쿠릴은 아직 범인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반박하려 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교황의 말엔 확신이 가득하였기 때문에.



“이리되실 줄 아셨습니까?”

“어느 정도는. 그는 결정적인 부분에서 착각하고 있었으니 말일세.”

“그렇다면 말리셨어야 하는 게······.”

“나 또한 그러고 싶었네. 하지만 그는 내 통제에서 벗어났네. 나의 말은 더 이상 그에게 닿지 않게 되었어. 아주 오래전부터 말일세.”

“······하지만 뻔히 죽는다는 걸 아셨다면 억지로라도 붙잡았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를 잃는 것보단 나았을 테니 말이죠.”

“음. 자네의 말이 백번 옳아. 나도 똑같이 생각한다네.”

“그런데 어째서······.”

“그것이 그의 뜻이기 때문이라네. 가이란, 그가 스스로 바란 최초의 소망이건만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속이 답답했는지 교황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밖을 보며 나직하니 말하였다.



“그거 알고 있는가? 900여 년을 살아오며 만나온 이들 중 가장 신앙심이 두터웠던 이가 가이란이었네. 그보다 더 깊이 루시아스 님을 마음에 담은 자는 없었지. 나 같은 것보다도 훨씬 교황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네.”


에쿠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분명 가이란 케아코찰은 진정으로 신실한 신관이었습니다.”

“그래. 성인이라 불리기에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그런 자였지. 그러하기에 더욱 제대로 벌을 내렸어야 했어······. 사실은 부모를 제 손으로 보내준 그때 가이란은 한계였었던 게야. 하지만 난 그걸 알아보지 못하였지. 아니, 어쩌면 알아보았음에도 그를 좋은 장기 말로 여겼을 뿐인지도 모르겠어.”

“······.”

“후우. 가이란도 그저 피해자였을 뿐이야. 모든 잘못은 내가 저지른 것이라네.”

“그래서 그의 소망을 막지 않으신 겁니까?”

“자신의 감정조차 모를 정도로 서툴고 순수한 그를 망가지게 내버려 둔 건 나일세. 비록 추악한 욕망일지라도――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외도일지라도 나에겐 그걸 부정할 자격 따윈 없네.”


푸념을 늘어놓은 교황은 어깨를 떨구었다.


한 명의 노인처럼 힘없는 그 모습은 에쿠릴도 처음 보는 교황의 연약함이었다.


그렇다. 교황도 결국에는 인간. 너무나도 오랜 세월 살아오며 강대한 힘을 지녔기에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창피했다. 도대체 교황 한 명에게 우리들은 얼마큼의 짐을 떠넘긴 것이란 말인가.


머리를 들 수 없는 지경이었던 에쿠릴은 침통하게 자신을 질책했다.



“나의 고해를 들어줘서 고맙네. 노인네의 주책이 듣기 힘들었을 텐데 말이야.”

“아닙니다. 예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후후. 그건 좀 과하지 않은가.”


작게 웃음을 터뜨린 교황. 그러나 애써 밝게 분위기를 띄워보려고 해도 침울해지는 걸 막을 순 없었다.



“······미안하네만 뒤처리를 맡아줄 수 있겠나? 잠시 혼자 있고 싶다네.”

“예. 숨 돌리러 간 자들도 오늘은 돌아가라 일러 놓겠습니다.”

“부탁하네.”


정중히 예를 표하고 에쿠릴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리고 곧장 앞을 지키고 있던 성기사들에게 자리를 비우라 말하였다.


아무리 주교라 할지라도 교황의 경비를 멋대로 치우거나 해선 안 됐다. 그렇지만 문틈으로 들려오는 기도문에 아무 반발 없이 정십자를 그리고는 따라주었다.


에쿠릴도 마음이 아파 잠시 집무실을 돌아봤지만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곧장 다 잡고는 서둘러 긴급 소집을 열기 위해 [전언]을 썼다.


그렇게 제1 위상, 가이란을 아는 자들에게 그의 죽음이 전해졌다.


이스피리아―― 자인 디바오러라 칭한 변절자의 손에 처단당했다는 소식이······.












데구르르.


탁구공 크기의 검은 구슬이 바닥을 구르며 소음을 만들어냈다.


리아는 자신의 발밑으로 굴러온 그것을 몸을 숙여 엄지와 검지로 집었다.



“자요, 리카드 씨.”


건네는 구슬을 받지 않고 리카드는 멍하니 쳐다봤다.


마음은 충분히 이해된다.


――이 검은 구슬은 조금 전까지 사람이었던 것이니 말이다.


이 께름칙한 걸 자진해서 가져갈 사람이란 흔치 않겠지.


물론 리아는 아무렇지 않았다. 이 구슬에게선 아무 느낌도 없거니와 어떠한 감흥조차 들지 않는다.


그래도 그 심정이 공감은 됐기에 리아는 잠자코 기다리기로 했다.


오래 기다리진 않았다. 이윽고 진지하게 눈을 빛낸 리카드는 망설이지 않고 구슬을 받아 안쪽에 술식이 잔뜩 그려진 주머니에 넣었다.



“철저하게 연구하세요. 다시는 마법사 죽이기―― 그와 유사한 피해자조차 생겨나지 않도록.”

“예. 제 학생들의 원통함을 풀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리카드의 다짐을 들은 리아는 잠시 그를 보다가 천천히 머리를 숙였다.



“미안해요. 풀 원한이 있었을 텐데······.”

“저보다는, 리아 양이야말로 괜찮으십니까?”

“네. 멀쩡해요. 진짜예요.”


애써 방긋 웃어보았으나······ 미소가 일그러지는 걸 막을 순 없었다. 리카드의 눈을 속일 기미도 없이 걱정하는 시선이 떨어지질 않는다. 세리오도 말없이 염려스러운 듯 본다.


‘그만큼 보기 한심한 얼굴을 하고 있겠지.’


리아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지금도 여차하면 표정이 일그러질 것 같은데 어떻게 모르겠는가. 그렇지만 알면서도 바꾸지 못할 정도로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조금만 긴장을 푼다면······ 뚜껑으로 꾹꾹 덮어놓은 감정들이 폭발하고 말리라.


그나마 이 둘의······ 리카드와 세리오의 얼굴들을 보니 조금이나마 마음이 가벼워졌다.



“고마워요.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아 주셔서.”

“장담컨대, 제가 리아 양에게 그런 시선을 보내는 일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없습니다.”

“저도요! 평생 없을 거예요. 리아 양에게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데요. 그러니······ 마음 놓으셔요.”

“감사해요. 세리오 씨도, 정말 고마워요.”


드디어 마음이 가벼워진 리아는 살짝 얼굴을 펴게 되었다.


그때였다. 이 따스한 분위기를 깨는 히스테릭한 목소리가 학원장실에 울렸다.



“어찌 너희는 웃고 떠들 수 있는 거냐?!”


리시타였다. 한동안 멍했었던 그가 현 상황을 뒤늦게 받아들이고는 소리친 것이었다. 에르가 마법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한 반동도 꽤 있었나, 상당히 화가 난 듯했다. 눈에 핏발을 세우고는 증오심을 가득 담아 노려봤다.


좀 놀랐었던 리아는 바로 정신을 차렸는데, 순간 너무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나온 말도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줄곧 듣고 있었으면서 뭘 그리 성을 내나요?”

“암만 위협했다지만 어찌 그리도 쉽게 가이란을―― 사람을 죽였나?!”


이 말에 리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럼, 반대로 물을게요. 당신들은 무슨 생각으로 저와 학생분들을 죽이려고 했나요? 결과적으로는 아무도 죽지 않았지만, 만약 거기에 제가 없었더라면 수백에 가까운 사람이 죽었어요. 살의는 없었다는 개소리는 하지 마세요. 세스타스에게 걸린 [예속의 서약]의 명령은 저와 벨루디스의 제2 왕자, 레온하트의 살해라고 똑똑히 명시되어 있었으니까.”

“······.”

“왜 입을 다물죠? 어서 말해보시라고요. 당신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길래 그딴 짓을 저질렀나요.”

“우린······ 인간을 위해······.”

“또 또, 그놈의 인간을 위한다는 궤변. ······이봐요. 질리지도 않아요? 까놓고 말해서 인간을 위한다는 거랑 내 목숨이 무슨 상관이 있나요? 레온하트 왕자님과 학생들은 또 어떤 연관이 있고요.”


대답이 없는 리시타를 보며 리아는 까득, 이에 힘을 줬다.



“제가 당신들에게 무엇을 하든 불평을 들을 이유는 없어요. 당장 전원 죽이지 않은 걸 감사히 여기진 못할망정. 낯짝도 참 두꺼워요. 뻔뻔하게. 허 참. 면전에서 당당하게 나와 내 주변 모두를 죽인다고 시비를 걸어놓고 왜 죽였냐고? 물론 다른 사람들이 똑같이 말했으면 넘어갔을 거예요. 그런데 당신들은 정말로 죽이려고 습격한 전적이 있잖아?”

“그래도 그는······ 가이란은 결코 이런 식으로 죽어선 안 되는 훌륭한 신관이었다.”

“누군가에겐 그럴 수도 있겠죠. 극악무도한 범죄자라도 끝까지 따랐다는 이야기도 근근이 있으니. 하지만 저에게는 아니에요. 면식도 없는데 살의를 품은 정신이상자에 불과했어요. 당신도 아니라곤 말하지 못하겠죠? 그 분노와 쾌락으로 얼룩진 면상을 봤으면.”


리아는 다시금 떠올려봤다. 안네의 이야기를 할 때의 가이란을. 그때 신나서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전혀 숨기지 않은 희열이 담겨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치미는 데, 죽인다고 했을 때 그 얼굴. 마치 악귀와도 같이 일그러진 면상은 섬뜩함을 넘어 절대 살려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그 외에도 백의 세계를 언급했을 때 질투로 점철된, 성직자가 보일 얼굴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같이 그걸 보았던 리시타다. 할 말이 있을 리가 없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그래도 정식적으로 재판을 통해······.”


하지만 리시타는 예상을 벗어났다.


몰지각한 발언에 리아는 마침내 욱했다. 그대로 한마디 해줄 셈이었다.


그러나 목소리를 내기 직전에 멈췄다.


리시타에겐 아무런 의식이 없는 것이었다. 마음이 완전히 다른 곳으로 간 상태로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머리 끝까지 차올랐던 열이 단숨에 식었다.


여전히 마음에 들진 않았다. 그렇지만 성기사 단장, 리시타―― 그는 그 직책에 걸맞는 성실하고 올바른 성품을 지녔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웅얼거리는 저 반론이 이를 증명했다. 무의식임에도 동료를 변호하는 저 모습이 그의 심성이 절대 나쁘지 않다는 것을 강하게 드러냈다.


작게 한숨을 쉰 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이상 제가 남아있어 봤자겠네요.”

“예. 뒷일은 제가 처리해두겠습니다.”

“괜찮나요? 혹시 난동을 부리거나 하면······.”

“문제없습니다. 이곳이라면 큰 피해 없이 제압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


리카드는 곁눈질로 넋이 나간 듯 고개를 떨구고 중얼거리는 리시타를 가리켰다.


확실히 저 상태라면 제압하기엔 어렵지 않아 보인다. 세리오도 있고 하니.



“그래도 만일이라는 게 있으니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염화]로 연락하세요.”

“알겠습니다.”


재차 당부한 것을 끝으로 리아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리시타를 지나쳐 화려한 문 앞에 선 리아는 뒤를 돌아봤다.



“듣고 계실지 모르지만, 한마디만 할게요. 상대를 단정 짓지 말아요. 당신은 신이 아니에요. 아무리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도 당신이 모르는 면이 반드시 존재해요. 제가 그를 죽인 게 도저히 납득이 안 되거든, 그의 행적을―― 세인트리안의 행적을 처음부터 되짚어봐요. 그러고도 제가 밉다면 찾아오세요. 전력으로 응해 드릴게요.”


할 말을 다 한 리아는 조용히 에르가 열어준 문밖으로 나갔다.


리아는 묵묵히 걸었다. 평소라면 말을 걸어왔을 선생님이나 학생들은 되려 복도 끝으로 멀찌감치 떨어졌다. 만면에 미소를 달고 다가오던 사람들도 리아가 풍기는 분위기에 위축되어 예를 보이고는 길을 비켜섰다.


그만큼 리아는 무척이나 언짢고 화난 기색을 대놓고 드러냈다.


기숙사 방까지 어떠한 방해도 없이 도착한 리아는 다시금 문을 열어주는 에르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리아는 그대로 거실까지 나아갔다.


아이리스들은 아직 수업이 끝나지 않아 실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꾹꾹 눌러두었던 감정이 마침내 폭발했다.



“에르!!”


그렇다. 리아의 기분이 나빠진 배경은 다름 아니라 남편, 에르의 탓이었다. 가이란을 죽인 것과는 아무 상관 없었다.


아니. 그것 자체는 오히려 산뜻하기까지 했다.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마저 들었던 데다, 안네와 라프리트, 메이어 등―― 가이란에게 감정이 있는 이들이 뺨이라도 한 대 때리지 못한 게 내심 원통할 뿐이었다.


살인에 대한 죄책감 따윈 전혀 없었다.


당연했다. 안 했으니까. 살인 따윈 한 적이 없는데 어찌 죄책감이 생겨나겠는가.


물론 리아는 사람을 죽이고도 안 죽였다고 하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다. 그저 정말로 살인을 한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럼, 누가 가이란을 죽였는가?


답은 간단했다. 그 일을 빼앗긴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지금도 무표정으로 새침하게 있는 남편에게······.


가이란의 사인은 압사. 구슬처럼 동그랗게 압축되어 바로 즉사했다. 방법은 당연히 중력마법이다.


그런데 리아가 중력마법을 배운 건 겨우 몇 달밖에 되지 않았다. 정식으로 배운 것도 아니다. 세인트리안에서 심판관인 키르셀이란 여성이 쓰는 걸 보고 익힌 것이었다.


암만 리아가 습득 속도가 빠르다 하더라도 완전히 통달하는 데에는 시일이 걸린다. 물론 위력만이라면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부 조절은 어려워 자칫 리카드들이 휘말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한 위험성이 있는 이상 시도조차 하지 않거니와, 정확히 가이란만을 타겟으로 지정하여 그의 마력이 고스란히 담긴 구슬을 만들 재주 따윈 엄두도 못 낸다.


즉, 가이란의 살해에 리아는 조금도 관련이 없는 것이다. 하물며 영혼에조차도 어떠한 관여를 하지 못했다.


굳이 영혼까지 신경 썼던 건 이전 아네픽시르 외곽에 있는 교회에 방문한 일 때문으로, 그곳에 있던 노신관은 영혼뿐이었음에도 본인의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했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경계한 것이었다.


가이란의 특성상 육체를 잃어도 영혼을 타인에게 옮겨 기생할 수 있을지도 모르기에······.


단순한 가정일 뿐이지만 만약 육체라도 빼앗을 수 있는 날엔 큰일이다. 그래서 그의 영혼에게서 마력을 싹 뽑아낼 생각이었다. 육체를 잃은 영혼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건 마력 덕분이니. 마력을 잃은 영혼은 순식간에 흩어질 터였다.


――하지만 그조차도 에르가 했다. 끼어들 틈도 없이 한순간에.


너무나도 화가 났다. 하다못해 자신이 한 것처럼 꾸몄지만, 처음으로 에르에게 고함을 칠 정도로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건 에르가 할 일이 아니었어요! 내가······, 내가 해야만 할 일이었다고요!”

“알아.”

“안다면서 왜?!”


감정이 북받쳐 오른 리아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어째서. 어째서 뺏은 거예요?! 왜?! 그건 내가 짊어질 업이라고요······.”

“미안. 하지만 비슷한 상황 또 찾아온다면 난 그때도 리아의 역할을 뺏을 거야.”

“웃기지 마!! 용서하지 않을 거야.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미안.”


더는 참지 못하게 된 리아는 멀거니 서 있는 에르의 가슴팍을 마구 두드렸다.


에르는 그런 리아를 조용히 안아줬다.



“미안······.”


다정한 말에 더욱 울컥한 리아는 와락 눈물을 쏟아내며 그의 가슴을 힘없이 두드렸고, 에르는 계속해서 사과만을 하였다.



“왜······! 어째서······!”

















“이야~ 다들 오랜만이야. 잘들 지냈어?”


세인트리안 40구역의 한 성당에서 남자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런 남자의 인사를 받는 건 먼저 와 있던 십여 명의 남녀였다.



“늦었어!”

“미안! 애들이 꾸물거려서 말이야. 자자, 너희들도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설렁설렁 대충하는 사과에 십여 명의 남녀들의 눈매가 매섭게 치켜 올라갔는데, 남자의 손을 잡고 따라오던 여자아이 둘이 오종종 다가와 머리를 숙이니 언제 그랬냐는 양 세상 따듯한 미소를 그렸다.


그렇게 많이 컸냐는 둥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여자아이들은 곧장 십여 명의 남녀가 데리고 온 다른 아이와 함께 놀러 가기로 했다.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신관님께도 폐를 끼치면 안 된단다?!”

“네에~!”


제대로 듣긴 한 건지······.


아이들의 기운찬 목소리를 들은 남자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기운도 넘치네.”

“그게 아이잖아. 귀여우니 보기 좋네. 형님의 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라고?”

“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여신님께서 요정을 내려다 주신 게 아닌가 싶더라니까.”

“에휴. 오빠도 딸 바보가 다 됐네. 뭐, 진짜 예쁘긴 하지만. 나중에 크면 미인이 되겠어.”

“당연하지!”

“그래그래. 아주 남자들에게 둘러싸이겠어.”

“그건 안 돼!”


휙휙 바뀌는 남자의 반응에 십여 명의 남녀들은 박장대소하였다.


서로 친근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들은 호칭에서도 그렇지만 다들 가족이었다. 물론 피가 이어진 가족은 아니었다. 하지만 같은 고아원 출신으로 어지간한 가족보다도 더욱 끈끈한 유대를 가진 진짜 가족이라고 이들은 단언했다.


오늘 이 모임도 그 일환 중 하나로, 일 년에 한 번 전원이 모여 회포를 푸는 것이었다. 아이가 있는 사람은 가족들까지도 총출동하여 온다. 남자처럼 간혹 아내가 바쁜 경우 빠지기도 하나, 고아원 출신의 이들이 빠지는 때는 한 번도 없었다. 매년 어떻게든 다들 시간을 내 이곳 성당으로 찾아온다.


그것도 벌써 50년이 다 되어간다. 하지만 끝은 없다. 만약 이 모임의 끝이 생긴다면 그건 모두가 여신님의 곁으로 갔을 때일 것이다.



“내가 제일 먼저 불참하게 되려나?”

“어? 뭐가?”

“그런 게 있어. 원래 장남은 고민이 많잖냐.”

“뭔 소리래.”


능청스럽게 말한 남자는 저기 왁자지껄 떠드는 아이들을 보았다. 데리고 온 자식들이 아닌, 이곳에서 지내는 고아원의 아이들이었다. 옛 생각도 나고, 어쩐지 그늘지지 않는 저 얼굴이 보고 싶었다.


웬 청승이냐며 뒷담을 늘여놓던 남자의 동생들도 피식 웃고는 미소로 아이들을 보았다.



“어렸을 땐 이렇게 느긋이 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신기해.”

“그러게······.”


감회가 새롭다는 듯 모두는 다들 깊은 여운을 흘렸다.


그렇다. 마치 꿈 같은 이 현실은 상상조차 못 했다. 그 악몽의 나날들을 보내던 시기에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랬던 게 어느 신관에 의해 달라졌다.



“가이 아저씨······.”


문득 중얼거린 남자의 말에 모두의 눈에 아련함이 맺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의 동생 중 한 명이 헛기침을 하고는 딴지를 걸었다.



“언제까지 아저씨라고 부르게. 이젠 제대로 가이 신관님이라고 불러야지.”

“언제까지는 개뿔 언제까지야. 평생 가이 아저씨지. 안 그래?”

“음음. 너야 신관이라 조심스럽겠지만 우린 아니니 상관없잖아? 그리고 너도 저번에 사실 아저씨 소리가 입에 달라붙는다며.”

“아, 아니, 잠깐. 그 얘길 왜 지금 해?!”


신관 복장의 동생은 혹여 누가 들을까 봐 허둥대며 주위를 살폈다. 그 모습에 다들 즐겁게 웃었다.



“너무 당황하는 거 아냐? 가이 아저씨가 그렇게 높은 분이었어?”

“당연하지! 무려 1급이야. 1급! 주교님들 바로 다음이라고. 소문으로는 차기 주교로 이미 내정됐다는 소리도 있어.”

“헤에. 가이 아저씨 대단하네. 아, 하긴. 우리가 처음 봤을 때도 3급이셨던가?”

“응. 무려 30대에 3급이셨지. 보통은 60대인데. 근데 그것도 3급까지 된 경우야. 대부분은 평생 거기까지 가지도 못해.”

“너는?”

“난 7급······.”

“이제 곧 60대면서 7급이라······. 동경하는 가이 아저씨는 절대 못 따라잡겠네.”


유감이라는 듯 고개를 젓는 남자를 시작으로 다들 웃음이 터졌다.


신관 복장의 동생은 부들거렸으나 곧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는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아. 가이 아저씨의 등은 멀고도 멀구나.”

“뭐, 한 덩치 하시니까.”

“맞아. 난 처음 봤을 때 완전 쫄았다니까.”

“나도. 신관이라고 하셨을 때 ‘저거 무조건 뻥이야’라고 생각했었어.”

“음음. 신관이신 게 아까울 정도로 몸이 좋으셨지. 근육도 울긋불긋하고.”

“응. 복근이 빨래판.”

“어이······. 거기 여자들. 신관님께 괜한 평판을 하는 게 아니야.”

“근데 가이 아저씨 진짜 몸 끝내줬다니까? 내 평생 그런 완벽한 육체는 본 적이 없어.”

“아아아. 언니, 오빠들 잠시만! 즐거운 건 알겠는데, 그래서 그 가이 아저씨는 어딨어?”


손뼉을 쳐 집중시킨 막내 여동생의 말에 다들 주위를 둘러봤다.



“없지?”

“이 시간까지 안 오신 걸 보면 올해도 글렀나 본데?”

“큰오빠보다도 더한 지각쟁이야.”

“뭐어······. 1급 신관이시니 바쁘신 거겠지.”


사실 이 모임의 구성원 중 유일하게 결석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게 바로 가이 아저씨였다. 드물지도 않았다. 이젠 그냥 일상이다.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빠지는 것이다. 솔직히 맥이 빠진다.


그렇지만 크게 마음에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가이 아저씨는 일일이 미안하다며 모두의 집에 들르기 때문이다.


본인 말로는 순례길을 돌며 생각난 김에 들른 것이라는데, 귀찮게 매년 반드시 방문한다는 게 가당찮겠는가. 그것도 아이들 몫의 선물까지 바리바리 싸서.


분명 일부러 들러주는 것이겠지. 정말 생긴 대로 솔직하지 못하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섭섭하진 않았다. 꼭 만나러 올 것임을 알기에.


다들 그런 줄 알았는데······, 막내만은 좀 삐졌나 보다. 입술을 삐쭉 내밀고는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아무리 그래도 5년이나 지각이라니! 너무한 거 아냐?!”

“음. 너무하지. 그래서 이번에는 뭘 부탁하게?”

“쇼핑! 온종일 내 짐꾼으로 부릴 거야!”

“그래그래. 적당히 해라. 가이 아저씨도 제법 나이를 먹었어.”

“난 진심이야!”

“네네. 그보다 슬슬 신관님들을 도와주러 가자.”

“아니. 잠깐만 나 진심이라니까?”

“아이고. 어련하시겠어요. 부디 가이 아저씨의 허리나 멀쩡하게 해주시옵소서.”


막내의 투정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다들 고아원을 돕기 위해 움직였다. 이것 또한 이 모임의 주된 활동이었다.


그런 모두는 즐겁게 웃는다. 앞으로 찾아올 가이 아저씨를, 우리들의 영웅을 그리며――.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라스티아 입니다.

오우 쬐에끔 마무리가 오래 걸려 늦고야 말았네요.

하지만 무사히 1부 에필로그까지 오게 됐습니다.

와~~ 어쨌든 축하축하. 아, 물론 끝이 아닙니다?

근데 한 가지 안타까운 소식을 알려드리자면, 2부의 연재는 당분간 힘들달까...

이번 공모전에 참가하기 때문에 공모전이 끝나는 7월 19일까진 만렙 히로인은 잠시 휴재 기간에 돌입할 거 같습니다.


그치만 곧장 돌아 올테니 너무 걱정 마시길!

진짜에요. 저 약속 잘 지킵니다. (가아끔 늦긴 하지만.)

ㅎㅎ 어쨌든 여러분들 다음에 또 뵈요!

정말 또 뵈면 좋겠습니다! 잊지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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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 191 (2부) +2 23.06.15 63 0 41쪽
» Epilogue +2 23.04.20 102 0 25쪽
223 190 23.04.20 80 0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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