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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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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5.01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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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4.20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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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쪽

190

DUMMY

이스피리아가 성국에 오는 경우는 다양했다. 어떨 땐 성녀로 추앙되거나, 어떨 땐 성녀를 사칭한 범죄자로 연행되고, 또 어떨 땐 디바오러의 성명을 계승한 자로써 이 성국에 발을 디뎠다.


참으로 특이했다. 보통 이렇게까지 다양하게―― 배경 자체가 달라지는 경우는 없거늘. 오직 이 여자만이 매번 다를 뿐이었다.


물론 관심 따윈 없었다.


······아니. 조금은 있긴 했다. 이래저래 그 여자는 여기저기 눈길을 끌어대니 말이다. 마치 관심을 받고 싶다는 듯이.


이른바, 어쩔 수 없이다. 그렇지만 그게 전부다. 나는 나. 이스피리아 따위 여신님을 섬기는 것에 있어 하등 쓸모가 없기에―― 오히려 기도드리는 데에 방해만 돼서 관심 따윈 가지지 않았다.


사도의 성명을 계승했을 때도 그러했다. “추잡한 짓 좀 하지 마라.”며, 이쪽의 능력을 단숨에 파악한 이스피리아가 모욕하여 결투를 벌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시야에 두려 하지 않았다.


물론 솔직히 말해 조금은 경외심을 품기도 했다. 그녀는 그럴 만한 사람이었으니.


그렇기에 성자의 성명을 계승한 것도, 능력―― 슬쩍 마력을 주입하려던 것을 발각당한 것도, 여신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예를 누릴 수 있는 것도 모두 수긍했었다.



“미안한데, 적과 청의 세계에 도달하지도 못한 너로는 평생 무리야. 성녀님이나 어떻게든 막으면서 얌전히 기다려.”


또한 토벌대에 참가하기 위해 온 자신에게 저런 소릴 했더라도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겨우 반백 년밖에 살지 않았음에도 그리 막강하거니와, 그 겸허함······. 상대가 누구든 모두 공평하게 대하며 사랑하는 자세는 그야말로 위인. 용왕을 물리쳤을 만큼의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유혹에 빠지지 않는 그 올곧은 자태는 존경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예하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은 경외를 품은 건 분명하였다.


그래. 무엇 하나 문제없었다. 이 당시의 이스피리아에겐 정말 별다른 감정을 품을 일도 없었으며, 특별한 관심조차도 가지지 않았다. 주변에서 미인이라고 떠들어대도 시큰둥하기만 했다. 나름 존경은 했어도 그게 끝이었다.


하지만 성녀 사칭죄로 잡혀 왔을 때는 달랐다.


베르다드 학생 차림에 몰골이 허름한 이스피리아. 성기사에게 결박당하여 끌려오는 그 여자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짙은 갈색과 불타는 듯한 붉은색으로, 아직 초월자―― 생물의 한계를 넘지 못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특별한 관심은 없었다. 그러나 용케도 성녀를 사칭했다는 생각에 독자적으로 뒷조사를 해보았다. 성국의 위광을 더럽히는―― 루시아스의 격분을 사는 짓은 보통 하지 않을 테니까. 그 부분이 조금 의아스러웠다.


결과, 이스피리아는 딱히 성녀를 사칭하지 않았다. 그러긴커녕 [정화]를 쓸 수 있거니와 그 마음씨마저 올발랐다. 애당초 성녀 사칭범이라 끌려온 계기 자체가 기숙사의 룸메이트를 [정화]로 치료한 것이 원인이었으니.


그래. 모든 부분이 성녀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분명 무언가가 잘못되었다.


그러한 판단에 이스피리아가 구금되어 있는 감옥으로 찾아갔다.



“어머나? 별일이네요. 당신이 여기까지 오다니. 어쩐 일이 신가요?”


처음으로 오는 감옥에서 포용의 주교―― 아베라 자르 디비치온을 만났다. 그녀는 미소를 띠며 말을 걸었는데, 그녀의 뺨과 손, 옷가지 곳곳에는 적지만 피가 묻어있었다.


아마 평소대로 어긋나버린 이들을 심문하고 왔으리라.


솔직히 이해되지 않았다. 고해를 시킨다는 것까지는 알겠다. 그렇지만 거기서 왜 본인의 즐거움을 찾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사상자도 나오고.


물론 여신님을 위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상관없다. 그러나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베라는 여전히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자였기에. 처음 봤을 때의 다정다감한 미소도 변치 않았었다.


대신 한 가지 의문을 물었다.



“성녀 사칭범, 이스피리아는 정말로 사칭범이었습니까?”

“예. 발칙하게도.”

“[정화]를 사용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확실히 그러한 말도 나돌았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그 말씀은······.”

“교정이 쉽지만은 않았는데 노력하니 어떻게든 되더군요. 현재는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게 됐습니다.”

“저 또한 주제넘은 말이 되겠는데, 성녀로서 극진히 모셔야 했던 게 아닐까요?”

“그런 거를요?”


놀란 눈을 했던 아베라는 참기 힘들었는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살굿빛의 머리결이 흔들리는 그 모습은 푸근하고 자애로워 보이는 용모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웃던 아베라는 돌연 웃음을 뚝 멈추고는 진지한 분위기를 띠었다.



“성녀는 한 명으로 족합니다. 숫자가 늘어봤자 가치만이 떨어질 뿐이죠. 그렇지만 그냥 버리기 아까운 것도 사실. [정화]의 원리를 파악하기 위해 잘 활용하기로 한 거지요. 그런 범죄자에게는 과분하고도 과분한 처사지만. 물론 불경한 계집답게 협조적이지 않았지요. 하지만 지금은 신상심이 가득해져선 아주 적극적으로 조사에 응해준답니다?”


무척이나 뿌듯했는지 아베라는 만면 가득 미소를 짓고는 기도를 드렸다.



“예하께서도 알고 계십니까?”

“응? 당연하죠. 누가 감히 예하의 허락도 없이 이런 일을 하겠나요?”

“성녀님은······.”

“그분께 이 더러운 걸 어찌 보여드리겠어요? 듣는 것만으로도 귀가 오염될 거랍니다?”

“그렇군요······. 말씀 감사합니다.”

“뭘요. 당신도 볼일 잘 보세요. 아! 근데 비명이 거슬릴 거예요. 면목이 없게도 그 부분은 아직 교육이 부족하거든요.”


상상하는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거지만 기왕 마음 써 준거 성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유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시길.”


미소 짓는 아베라를 배웅하고 가이란도 감옥으로 들어갔다.


쇠창살이 넓게 펼쳐진 그곳에는 여러 범죄자와 함께 이스피리아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예전 교황이 말했던 해부학의 지식을 어디서 쌓았는지 알게 됐다.


마력을 봉하는 사슬에 묶여 팔이 위로 들린 이스피리아는 알몸이었는데, 생기가 전혀 없는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철퍽 주저앉아 있었다. 그리고 산발 너머 드러난 복부에는 길게 가로로 봉합―― 저 멀리 [치유]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민간에서 한다는 시술이 대충 되어 있는 게 보인다.


그런 거다. 해부학의 지식은 범죄자들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뭐, 딱히 뭐가 어떻다는 건 아니다. 율법을 저버린 이들이 이런 식으로라도 세상에――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은 없으니. 인체실험에 조금의 충격도 받지 않았다.


심판관이 된 이후 듣게 된 인간의 현 처지는 그리 녹녹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강대해질 정보를 얻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해야 했다. 이 또한 그 일환이라 여기면 받아들이기 편하다.


하지만 이스피리아 만큼은 좀 달랐다. 그 처우에 대해 꽤 애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납득하지 못하겠다. 명실상부 성녀의 자격이 있는 자에게 이렇게까지 하냐는 의문이 들었다.


아베라가 말했던 성녀의 가치는 충분히 이해하긴 했다. 성국의 위광을 높이는 장치로서는 이만한 것도 없으니 말이다. 포교의 역할로서도 성녀는 최고이고.


그러니 이 이스피리아의 처우에 대해선 아무래도 납득하기 힘들었다.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도, 2명의 성녀가 탄생한다면 되려 당대는 여신님께 크나큰 축복을 받은 해라며 더욱 가치가 올라가지 않냐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불신론자거나, 그릇이 깨진 자라면 또 모르지만······.”


중얼거리면서 가이란은 감옥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봤다.


이곳에 온 건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모두가 찬성했다지만 무작정 옳다고 긍정하지 않는다. 예하의 충고를 잊지 않았다. 맹목적으로 믿지 않고 자신의 눈과 귀로 직접 이스피리아를 보고 판단하고 싶었다.


그리고 만약 이 처우가 틀린 것이었다면 단호히 예하에게 항고할 예정이다.


그것이야말로 옳다고 믿고 있으니······.


오늘, 이 발걸음은 누가 뭐라 해도 바꾸지 않을 가이란의 삶의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보게. 들리나?”

“합니다······.”

“응?”


다 기어가는 목소리였다. 범상치 않은 청력을 지닌 가이란에게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피골이 상접한―― 이전 구해준 아이들을 연상케 하는 몰골을 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뭐라고 했나?”


바로 앞까지 다가가 귀를 기울이니 드디어 들린다.



“죄송합니다······.”

“사과할 건 아니네. 아직 무얼 잘못했다는 확정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


가이란은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더는 들을 것도 없다. 이스피리아는 대화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아무 의미도 없이 사과만을 반복하는 기계나 다름없었다.



“완전히 망가졌군.”


살짝이지만 화가 났다.


처벌은 좋다. 그렇지만 그건 죄의 여부는 확실히 한 다음에 행해야 하지 않는가. 되려 조사한 정황은 무죄일 가능성이 한참이나 높건만······.


딱히 어떠한 물증도 없건만 작금의 행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수히 많은 이들을 여신님의 곁으로 보내줬으나, 그건 모두 정당한 사유를 완벽히 하고 나서였다. 그게 가이란의 신념이었고, 이건 그것에 반하였다.



“하다못해······ 편히 보내주겠네.”


정신적인 문제는 제아무리 성녀라 하더라도 고칠 수 없다. 만병을 치유한다는 [정화]로서도 무리였다.


만약 가능했더라면 바로 수갑을 풀고 데려갔을 터. 그 누가 반발하더라도······.


이렇게 된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



“최소한의 속죄로 더 이상의 고통은 주지 않도록 해야겠지. ······내가 그대라는 사람이 있었음을, 우리의 죄업을 평생 짊어지겠네.”


정중히 기도를 올린 가이란은 이스피리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눈을 부릅떴다.


마력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놀라움에 몇 번을 시도해봐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무언가의 막이라도 펼쳐진 듯 이스피리아에겐 전혀 마력이 들어가지 않았다.



“과연······. 이러하기에 예하께서 이와 같은 만용을 허락하신 건가?”


새삼 모든 걸 꿰뚫어 보는 예하의 선구안이 놀랍기 그지없다.


허튼 상상은 아니니라. 오랜 세월 단련을 거듭하며 점점 더 상세히 느껴지는 예하의 강함은 몸이 찌르르 떨릴 정도다. 그런 세상에 둘도 없을 예하이니 이스피리아의 이 묘한 특성에 대해서 바로 눈치챘을 것이다.


물론 의아한 점이 떨어진 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처사는 섣부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에.



“아니······. 어쩌면 예하께선 두려워하신 건가?”


문득 든 생각이었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답이 나오지 않는다. 어딜 어떻게 봐도 이스피리아에 대한 처분을 서두른 기색이니 말이다.


좀 흥미롭다. 도대체 무엇을 숨기고 있길래······.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네. 미안하군. 면목이 없네. 대신 말을 번복하는 만큼 내 확실히―― 그대의 협조가 헛되지 않게 철저히 밝혀낼 것을 약속하지.”


이때부터 가이란은 틈틈이 시간을 내어 아베라의 조사―― 놀이에 매번 얼굴을 내밀었다.


비명과 선혈이 솟구치는 광경은 솔직히 좀 거슬렸다. 세련되지 못했달까, 그저 고통만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면 더 효율적인 방법들이 무궁무진하게 널렸건만. 보는 내내 계속 신경이 쓰였었다.


물론 다른 죄수였다면 아무 느낌도 안 들었을 것이다. 근데 이스피리아는 율법을 어긴 죄인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마음이 편치 않은 건 당연했다.


오히려 더욱 나은 세상을 위해 자신의 한 몸을 바치는 모습은 성녀와 다를 바 없었다.


적어도 가이란은 그렇게 생각하고 여겼다.


그렇기에 조사가 끝난 뒤엔 언제나 정중히 예를 표하고, 상처도 최선을 다해 정성스레 흉터하나 남기지 않고 치료해줬다.


그딴 건 그냥 야만인답게 대충 꿰매놓으면 된다며, 아베라가 전혀 이해되지 않는 듯 의아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성녀로 대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로 접하였다.


하지만······ 노력에 비해 조사 결과는 그리 좋지 못했다.


여전히 무얼 하든 이스피리아에게 마력을 주입할 수 없었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는 될까 싶어, 아베라에게 엉망진창이 된 후에도 시도해봤지만 실패했다. 복부가 개복 되고, 피부를 뒤집어 까 엎은 채로도―― 조금의 저항조차 못 하는 상태로도 마력은 전혀 침투되지 않았다.


명백히 정신이나 신체와는 무관한 것이었다.


오랜 조사 끝에 나온 결론에 혼란스러웠다.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봐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다.


혼자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 여긴 가이란은 가장 지혜롭고 현명한 자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그 사람은 바로 교황이었다. 수백 년을 산 역사의 증인인 만큼 분명 이 알 수 없는 현상에 답을 내려주리라.


교황은 오래간만에 찾아온 가이란을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어서 오게. 어쩐 일로 왔는가?”

“다름이 아니라 이스피리아에 대해 여쭐 게 있어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아아······. 그러고 보니 줄곧 감옥으로 향한다고 했었지.”

“예. [정화]의 해명을 위해.”

“그런가. 그렇군 그래······.”


고개를 주억거리며 교황은 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하지만 가벼운 대답과는 달리 풍기는 기색은 무거웠다.



“왜 그러십니까?”

“······한 가지만 묻겠네. 자넨 어째서 이스피리아에게 관심을 가졌는가?”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가이란은 성실히 대답했다.



“이스피리아가 아니라 [정화]에 관심을 가진 겁니다. 진정한 신의 축복이라 불리는 [정화]를 해석한다면 무수히 많은 이웃을 도울 수 있지 않습니까? 처음 관심을 가진 건 제 마력을 튕겨내서였지만.”

“허면, [정화]의 원리를 가르쳐주면 자네가 감옥에 발 디딜 이유가 없는 것이로군.”

“예······? 루시아스 님의 축복을 이미 해석했다는 겁니까?!”


제법 놀라 외친 물음에 교황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여신님의 축복이 아닐세. [정화]의 정체는 그저 마법의 한 종류일 뿐이라네.”

“그게 무슨······.”

“사실이네. 우리의 주, 루시아스 님께 맹세하지.”


조용히 정십자를 그리고 기도를 올리는 교황. 그 모습은 너무나도 경건하여 앞선 말들은 일절 거짓이 섞이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의심 따윈 할 수 없다.


더불어······


촤악!


본인의 왼손을 향해 교황이 반대 손으로 슬쩍 휘젓자 깔끔하게 가로로 왼손의 살갗이 베였다. 그 틈으로 피가 솟구쳤다.



“예, 예하?!”


집무실 책상과 근처의 서류와 성경, 얼굴에 피가 튐에도 교황은 덤덤했다.


그칠 줄 모르고 솟구치던 피는 교황이 한순간에 치료하자 바로 멈췄다. 하지만 집무실에 온통 뿌려진 피는 그대로다.


당연했다. [치유]는 상처를 치료할 뿐이지 피를 없애는 마법이 아니다. 뒷정리는 따로 해야 한다.



“지금 당장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됐네.”


벌떡 일어나 문으로 향하던 가이란은 단호한 교황의 말에 멈칫했다.


그리고 보게 되었다.


――피가 사라진 것을.


서서히 사라지거나 하지 않았다. 돌아본 순간 눈앞에서 흩뿌려진 피는 자취를 감추었다. [청결]로 닦은 것도 아니었다. 만약 그랬으면 바닥에 고였어야 할 것이고, 흐르는 모습도 볼 수 있었을 터다. 그러나 그런 건 보지도 못했다. 서류에 얼룩 하나 남기지 않고 피는 정말 사라진 것이었다.


온갖 더러움을 말끔히 없애는 이 현상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정화]······.”

“그렇다네. 보다시피 나 또한 [정화]를 쓸 수 있지. 제약이 있어 나 이외의 사람에겐 불가능한 반쪽짜리지만 말일세.”


제약이란 필시 인간을 싫어한다고 했던 그 마음가짐 때문이겠지.


마법이란 상상의 세계. 상상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다. 교황에겐 타인을 고친다는 생각은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기적을 행해 보인 건 틀림없으니 예를 표했다.



“역시 예하십니다.”

“칭찬은 고맙네. 더불어 이러하기에 단언할 수도 있는 걸세. [정화]는 마법이라고.”

“······그럼 여쭙습니다만, 왜 여신님의 축복이라는 말이 나온 겁니까?”

“쉬운 이야기일세. 그만큼 [정화]는 어려운 마법이란 뜻이니. 정말 극소수의 특별한 재능―― 그야말로 신의 축복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 만큼의 재능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지. 성자, 성녀라 불렸던 이들이 바로 그런 경우였네. 오직 [정화]에만 특출난 재능을 갖고 태어난 것이지.”

“그 말씀은······.”


교황은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정화] 이외에는 별다른 재능이 없었다네. 내 앞선 예하께 듣기로는 생활마법조차도 쓰지 못하는 성녀도 있었다는군. ――그렇기에 그들은 타인의 보호를 받아야만 했네.”

“그것이······ 성자와 성녀란 직책이 탄생한 배경이란 것입니까?”

“아주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도 모르는 전통 같은 것이지.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정화]는 매우 귀중하니 말일세. 무능력한 그들을 지키기 위한 명분과 대중들이 이를 받아들일 만한 감투가 필요했지. 거기에 성자와 성녀는 딱 적절했다네. 이러나저러나 [정화]를 쓸 수 있다는 건, 마음속 깊이 진정으로 남을 위할 줄 아는 인격자이니 말이야.”


모든 게 처음 듣는 이야기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손에 셀 수 있다고 확신마저 든다. 지금 시대에는 기껏 해봐야 주교 정도이지 않을까······.


성기사 단장은―― 시설에서부터 알고 지냈던 리시타마저도 모를 것이었다. 성기사는 그들을 보호하는 존재들이니.


위기의 순간에 대신 목숨을 내놓는 그들에게 이러한 진실 따위 알려줄 리가 없다. 호위에 있어서 찰나의 망설임은 치명적이니 말이다. 반드시 지켜야 할 대상이라 굳게 믿고 있으니 죽는 것도 개의치 않고 몸을 내던질 수 있는 것이다.



“말씀은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이스피리아의 처우는 어째서? 예하의 이야기대로라면 성녀로 맞이하기엔 무엇 하나 빠짐이 없어 보입니다만······.”

“······.”


교황은 입을 다물었다.


내심 놀랐다. 당연히 아베라에게 들었었던 답이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기에. 그리고 더 놀라운 말이 나왔다. 다름 아닌 교황에게서.



“두려웠다네.”

“예? 지금······ 뭐라고 하신 겁니까?”


혹시 잘못들은 건가 싶어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변함이 없었다.



“제대로 들은 게 맞네. 난 이스피리아 라는, 이제 겨우 16년 살았다는 그 소녀가 너무나도―― 무섭고 두려웠네.”

“예하께서 말입니까?!”

“한심한 소리라는 건 주지하고 있네. ······결코 들여다보지 말았어야 했어.”

“도, 도대체 무엇을 보셨길래······?”

“심연이라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깊고 어두운, 끝조차 보이지 않는 절벽에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지. 덕분에 전혀, 어떠한 것도 볼 수 없었었네. 보이긴커녕 오히려 이대로 삼켜지는 게 아닐까 두렵기만 했다네.”


도중부터 마치 자신에게 들려주는 것처럼 이야기한 교황은 시선을 내려 떨리는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이것을 본 가이란은 믿기지 않았다.


피부로 느껴지는 교황의 강함은 가히 절대적. 임무로 인해 타국과 인간의 영토 밖까지, 무수히 많은 곳을 돌아다녀 봤지만 비등한 존재는 본 적도 없다. 동지인 심판관들도 매한가지. 차석의 미하엘마저 특유의 전투 센스를 제외한다면 전부 자신보다도 까마득하게 뒤떨어지기만 하였다.


유일하게 자신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교황뿐. 오랜 세월 존재해오며 단련된 그 정신력은 감히 쳐다볼 엄두조차 나지 않을 만큼의 격차가 있었다.


그런 교황이건만······.



“조사라지만 혼까지 들여다본 걸 뼈저리게 후회하네. 아니, 애초에 이 성지에 발을 디디게 한 것부터가 실수였어. 주변에서 성녀라 부르든 말든, 스스로가 지칭한 게 아닌 이상 서로 관련하지 말았어야만 했네.”

“그렇기에 처분을 서두르신 겁니까?”

“두려움에 쫓긴 나머지 그랬었지. 미련할 정도로 생각이 짧았어.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선택이 과연 옳은 것이었나 의심뿐이네. 혹시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른 게 아닌가······, 그러한 생각에 몹시도 불안하네.”


이런 말과는 달리 이미 음색에는 후회가 가득했다. 미간을 찡그린 교황은 분명 섣불렀던 지난날의 자신을 질책하는 중이리라.


이제 와―― 다른 미래를 모두 떠올려서 할 수 있는 소리지만, 실로 경이로운 직감이 아닐 수 없다.


다른 미래에선 이스피리아는 최강의 성기사, 크루세이더가 되기도 하는 데다, 무엇보다······ 혈혈단신으로 인간 전체와 싸워 이긴 ‘하얀 악몽’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어중간한 자와는 잠재력 자체가 남다른 거다. 이를 단숨에 알아본 교황이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가이란에겐 너무나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이스피리아는 다른 성녀들과는 달리 무능력한 자가 아니라고, 다른 어떤 특별한 능력을 지녔을지도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모른다네. 혼을 들여다보고 그랬던 적은 없었으니. 하나 확실한 건 그 소녀는―― 그건 인간의 탈을 쓴 무언가라는 거네. 솔직히 실수를 범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네. 그래서 조만간 안락사하여 정중히 장례를 치를 예정일세. 자네도 더는 관여하지 말게.”

“어째서입니까?! 마법이라면 더욱 자세히 분석할 여지가 있는데!”

“분석이라면 진작에 끝났다네. 예전 당대의 성자와 성녀가 협력해준 결과 간략화한 [정화]는 7급, 완벽한 [정화]라면 8급에도 달하는 고등의 마법이라는 게 밝혀졌지. 대부분의 성자, 성녀들이 쓸 수 있는 건 간략화한 [정화]이고.”


7급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고등의 마법이라는 게 일반적인 상식. [정화]가 그 끝자락에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러하기에 신의 기적, 혹은 신의 축복을 받은 자만이 쓸 수 있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현대에는 그것이 완전히 굳어진 것이고.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한 [정화]는 끝자락조차 넘어 8급이라는 한계에 마저 도달한다고 하니.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조사를 끝낼 수 없었다.



“이스피리아는 특별하다지 않았습니까? 그런 그녀이니 기존의 [정화]와는 다른 새로운 [정화]를 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걸 밝혀낸다면 분명 세상에―― 우리의 이웃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교황은 어째서인지 안타까운 눈을 했다.


잠시 그렇게 잠자코 쳐다보던 교황은 작게 숨을 내쉬고는 등받이에 기대 눈을 감았다.



“내 실수는 한 개가 아니었군. 하지만 모두 나 자신이 초래한 일. 나만큼은 어떠한 경우라도 자네를 긍정하겠네.”

“그 말씀은······.”

“뜻대로 하라는 소리네. 마음껏, 자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나. 내가 이를 허락하겠네.”

“감사합니다.”


용건은 끝났다. 나머지는 스스로 알아가면 될 터. 바쁜 교황을 더 붙잡을 순 없으니 조용히 예를 보이고는 돌아섰다.



“······자네를 일신성단에 넣은 건 내 일생의 실책이었네.”

“저는 무척이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스피리아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는 재개되었다.


마력이 주입되지 않는 원인의 해명도 빠뜨리지 않고 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성녀의 자질이 있기에 그런 것인지, 보다 많은 샘플을 확보하고 싶어 성녀님의 도움을 얻고 싶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힘드니 더욱 철저히 다방면에서 검증해보았다.


이스피리아가 죽을 때까지······.


얻은 건······ 없었다. 완전히 망가진 이스피리아는 재차 [정화]를 쓰지 못하였고, 죽는 그 순간까지도 마력이 주입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때 처음으로 분하고 아쉽다는 감정을 느꼈다.


그리도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협조해주었음에도 무엇 하나 밝혀내지 못했고,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었던 거다. 그 사실이 사무치게 괴로웠다.


그걸 셀 수도 없는 무수히 많은 미래에서 반복했다. 하지만 매번 어떠한 것도 얻지 못하고 씁쓸히 이스피리아를 매장할 뿐이었다.


그 허탈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를 여신님께서 불쌍히 여기셨나 보다. 기적처럼 이때의 기억이 돌아왔다. 그저 이스피리아 자인 디바오러란 이름을 들었을 뿐이건만 모든 기억을 되찾은 것이다.


이 기회를―― 여신님의 자비를 어찌 저버리겠는가. 한달음에 이스피리아를 만나러 떠났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모두 해명하기 위해.


이스피리아도 참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다. 성국에 제 발로 귀의했다면 디바오러의 성명을 계승한 자로써 만인의 존경을 받았을 텐데······.


성녀 사칭범으로 잡혀 온 때와의 차이는 오직 이 하나뿐. 범죄자로 잡혀 오질 않았으니 예하에게 조사당하지 않게 되고, 감옥에 들어갈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얄궂게도 그러지 않았다. 지금 이스피리아는 성녀 사칭범의 그 이스피리아였다.


아니, 성녀 사칭범을 넘어, 사도를 사칭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진짜 계승자였던 이스피리아 자인 디바오러였다면 또 모른다. 만약 그랬으면 애당초 해명하러 오지도 않았다. 그러한 위인에게―― 대주교이자 성녀, 성기사 단장을 모두 역임하는 분께 어찌 실험에 응해달라는 무례를 끼칠 수 있겠나.


성국을 공격한 것조차도 겸허히 받아들였겠지. 분명 우리들이 잘못한 것이라며.


그러나 지금의 이스피리아는 아니다. 연구를 재개하는 데에 아무 거리낌도 없다. 되려 마음이 앞선다. 하얀 악몽이라 불리며 인간에게 맹위를 떨칠 수도 있는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기도 하니 뿌듯함마저 생겨났다.


그래. 사랑하는 이웃을 도울 수 있게 되어 긴 여정의 매 순간이 행복하기만 하였다.


그랬는데 드디어 만나게 된 이스피리아에게 공격당했다. 아서라는 용사에게 마력을 주입하려던 게 들켜서.


들킨 것 자체는 놀랍지 않았다. 이스피리아 자인 디바오러 때 진짜 말도 안 되는 탐지 능력을 지닌 걸 봤으니 말이다.


오히려 놀란 건 아서 쪽이다. 용사란 게 호기심을 자극하여 마력을 주입하고는 추이를 지켜보려 했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전혀 들어가지 않았던 거다. 추후 만날 약속을 잡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여태 구할 수 없었던 다른 샘플이 손에 들어온 것이다. 놓칠 수야 없었다.


이러하듯 미수에 그친 사건이건만······ 눈을 뽑으려 드는 건 도대체 무슨 경우인가.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괜찮았다. 연구에 힘을 보태주는데, 살짝 투정 부리는 것 정도야 크게 마음 쓰이지도 않았다.


다만, 너무 기가 사는 건 좋지 않다. 원활한 연구를 위해서는 순종적인 편이 낫다.


그래서 주변인들을 언급한 것이었다.


이스피리아의 기본적인 마음씨는 성녀와 다름없다. 사과만을 하며 다 망가진 상태에서도 베르다드의 룸메이트와 여신님의 곁으로 돌아간 가족들의 이야기엔 반응할 정도이니 말이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살짝 위협하면 순순히 따를 터였다. 분명 그랬어야만 했다.


그런데 죽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가이란은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아베라의 교육은 그만큼 완벽했었다. 이런 대답이 나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어떻게 된 거지? 왜 이런 반응이······.’



“설마. 기억이―― 떠올리지 못했다고? 하지만 아까 이 대륙의 최강이라고······. 거기다 이 분위기도······.”


이상함에 이스피리아를 보았다.


그녀는―― 의아할 정도로 자그마한 이스피리아는 미소 짓고 있었다. 실로 순수하기 짝이 없는, 아이다운 미소였다.



“허세를 부렸을 때 걸려들었어야지.”

“허······세?”

“그래. 너네 교황이라든지, 세스가 떠들었던 걸 토대로 가상의 나를 그려 대충 허세나 떨어본 거지. 그걸로 물러났으면 한 번은 봐줄 생각이었어. 그런데 욱해서 덤벼들면 어쩌냐.”


전부 연기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지금도 몸을 짓누르는 압박감과 분위기는 이전에 알던 이스피리아, 그 자체였다. 되려 하얀 악몽에 더 가까운 기분마저 들었다.


이해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초월자인 게 이해할 수 없었다. 떠올리지 못하였는데 어떻게 16세에 한계를 돌파했단 말인가.


아무리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저 나이에 생물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단언할 수 있다. 그게 가능했다면 이미 자신부터 돌파했을 테니. 한 시도 수련을 개을리하지 않았는데 뛰어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애당초 이스피리아 본인조차도 이 이른 시기에 도달한 적이 없다. 하물며 용왕을 쓰러뜨린 때의 미래에서도 40세가 넘겨서야 간신히 발을 걸쳤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지만.


그나마 하얀 악몽 때가 가장 근접하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약 2년 후였다. 이처럼 빠르진 않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다. 그렇지만 할 일은 변함없다. 내가 욱했다는 것도 그저 도발하기 위함이야. 신경 쓰지 마.’


그래. 상황이 어떻든 간에 여신님께서 주신 이 기회를 헛되이 보낼 순 없는 것이다.


목적을 재차 상기한 가이란은 입가를 끌어 올렸다.



“날 죽인다라······. 쉽진 않을걸? 물론 제대로 싸운다면야 분명 네가 이기겠지. 하지만 여긴 베르다드야. 학생들이 널린 이곳에서 우리가 붙는다면 위험하지 않을까? 이래 봬도 난 적과 청의 세계에 돌입했다고? 뒤에 있는 학원장님들도 위험할걸?”

“호오······.”


놀라며 이스피리아가 감탄했다.


하지만――



“근데 그게 뭐? 적과 청의 세계에 들어선 건 좀 대단한데, 나보고 어쩌라고?”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양 이스피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나 답답했지만 가이란은 차분히 재차 이해시키기 위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싸우면 학생들에게 여파가――”

“――아니. 그럴 일은 없어. 백의 세계에 진입했다면 또 모를까, 겨우 적청가지고······. 그딴 걸로 적수가 될 거라 생각하다니 꿈이 너무 야무진 거 아니야?”

“백의 세계······라고?”

“모든 게 새하얀 세계인데······, 어째 처음 듣나 봐? 그럼, 그다음으로 암흑의 세계가 있다는 것도 모르겠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놀란 이스피리아는 배를 붙잡고는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아하핫! 자꾸 까불길래 뭘 믿고 그러나 싶었는데, 겨우 그거였어?! 푸풉. 아, 진짜 미치겠네······. 날 웃겨 죽일 셈이야?”


정말 웃음을 참기 힘들었는지 이스피리아는 눈가를 연신 훔쳤다.



“후우. 야야, 근데 너 그거 알아?”

“뭘 말이냐······.”

“니들이 보냈었던 세스타스 말이야. 걔도 이미 적청의 세계에 진입한 상태였어. 근데 같은 적청으로 앵기다니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거기다 너, 적청 상태를 얼마나 유지할 수 있어?”

“······.”

“거기서 입을 다무냐. 뭐, 됐어. 직접 알아보면 그만이니. 어디 보자······ 네 마력레벨은 466이니까, 대충 1~2분이 고작이려나? 오히려 겨우 그 마력레벨로 잘도 적청의 단계를 밟았네. 이래저래 재능이 있기는 하나 봐? ······왜, 틀렸어? 그럼, 한 3분······ 아니, 그 정도까진 될 리가 없는데.”


가이란은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모두 다 들어맞았기에.


마력레벨조차도 그러했다. 완벽히 알아맞혔다. 매일매일 아티팩트로 그날의 성과를 확인하였기에 틀림없었다.


그래. 아티팩트로 확인했다.


잃어버린 기술인 아티팩트로 측정해야 할 만큼 마력레벨의 정확한 수치는 쉬이 알아낼 수 없다. 그마저도 측정할 수 있는 횟수와 수치에 한계가 있는 게 대부분이다. 특히 고마력레벨인 사람을 측정할 방법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 모든 제약이 없는―― 리카드가 찾아낸 세베브리나의 눈이 괜히 전설급 아티팩트로 취급당하는 게 아니다.


가이란도 똑같았다. 임무 중 아티팩트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여태 몰랐었다. 느껴지는 감각으로 대략적인 수치만을 예측했던 게 전부였다.


――근데 이스피리아는 보는 것만으로 정확하게 알아냈다.


‘어떻게······.’


타인의 마력레벨을 측정하려 들려거든 접촉은 필수다. 하지만 그런 것도 없었다. 무언가 느껴지는 것도 전무했다.


완전한 미지. 백의 세계니, 암흑의 세계니 모두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게 있다는 건······.


부들.


의사와는 무관하게 가이란의 몸이 살짝 떨렸다. 동시에 뇌리가 번뜩였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이지만, 여태 이스피리아의 전력은 한 번도 못 봤었던 게 아닐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전율했다.


물론 전력을 보긴 많이 봤다. 투기장의 폭군―― 가베인의 부인이었을 때는 무려 심판관 7명을 상대로 4명이나 죽이기까지 했다. 그마저도 자신이 돕지 않았다면 전멸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전례가 없는 막강함이 아닐 수 없다.


더 놀라운 건 당시 이스피리아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는 거다. 제힘을 낼 수 없는 상태였음에도 그만한 전과를 기록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그땐 초월자가 아니었다.


이스피리아의 전력을 무수히 보긴 했지만, 머리가 하얗게 센―― 초월자가 된 때의 전력을 과연 자신은 본 게 맞는가.


기억상 이스피리아가 초월자인 미래는 크루세이더 때와 하얀 악몽, 오직 이 둘 뿐이었다.


크루세이더 때는 토벌대에 참가하지 못해 제대로 전력을 봤다고 하긴 힘들다. 결투에 패배했을 당시는 초월자가 아니었고. 이후 간간이 대련 형식으로 몇 번 맞붙어봤지만, 봐주는 기색이 역력했기에 분명 전력은 아니었다.


하얀 악몽 때는······ 모르겠다. 성국에서 연락이 와 복귀하는 도중까지만 기억하고 있다.


어째······ 몸이 근질거리는 듯한, 주체가 되지 않는 기괴한 기분이 든다.


‘진정해라.’


이스피리아가 순순히 따르지 않을 경우도 당연히 생각해뒀다. 전투를 치를 수 있다는 것도.


기억을 되찾는 게 영향이 있는지는 몰라도, 다행스럽게 지금의 자신은 꾸준히 노력하여 동 시기에선 어떤 나보다도 강하다. 눈앞의 이스피리아에게 꿀릴 이유 따윈 없다.


혹시 역부족이라면 도망치면 된다. 꼭 지금 데려가지 않아도 그전까지는 새로운 소재인 아서로 연구를 진행하면 될 일이다.


그렇다. 문제는 없는 것이다.



“근데 보다보다 하니까 진짜 무슨 배짱이었던 거지? 어딜 어떻게 봐도 세스보다 한참 약해 보이는데. ······응? 표정이 왜 그러냐. 혹시 정곡이었어? 꽤 화나 보이는걸?”

“무슨 헛소리냐?”

“으응······?”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이 이스피리아가 쳐다본다.


너무나 이상한 반응이다.


도리어 당혹스러웠던 가이란은 무의식적으로 동지인 리시타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마치 무언가를 목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게 아니겠는가.



“야. 너, 안네 씨에게 개수작은 왜 부렸던 거야?”


리시타가 왜 그러는 건지 너무 궁금했으나 애써 떨쳐내고 묻는 이스피리아에게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게 누구냐?”

“대략 10년 전에 여기, 아네픽시르의 빈민가에서 여자아이에게 단검을 꽂아 넣은 적이 있을 텐데? 기억 안 나냐?”

“아아. 그런 적이 있긴 했었지.”


보통 저리 오래된 일은 기억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강렬한 특징이 있었던 만큼 가이란은 곧장 떠올릴 수 있었다.



“근데 그게 어쨌다는 거냐?”

“순순히 인정은 하는구나. 나야 편해서 좋지만. 어쨌든, 그때 안네 씨를 죽이려고 했잖아? 그런데 수작질은 왜 부린 거야?”

“루시아스 교에―― 여신님의 감사함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뭔 개소리야?”

“이해하지 못하겠나? 내 기억으로는 분명 그 여자아이는 굉장한 잠재력을 품고 있었다. 용솟음치는 듯한 마력의 맥동을 느꼈을 땐 깜짝 놀랐을 정도였지. 하지만 환경이 나빴다. 여신님에 대한 믿음이 전무했다.”

“그래서 수작질을 했다고?”

“루시아스 교에 귀의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이상 성국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씨앗을 어찌 놔두겠나. 하지만 잠재력이 아까운 것도 사실. 시련을 준 것이다. 만약 살아남는다면 생의 소중함과 루시아스 님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겠지.”

“······.”


이스피리아는 입을 벌리고는 멍하니 쳐다봤다. 그러다가 거칠게 머리를 긁적였다.



“여러 가지 할 말이 있었는데, 지금 걸로 싹 다 머리에서 날아갔네.”


그렇게 말한 이스피리아는 눈을 가늘게 했다.



“아아. 당신은 진짜 대단―― 아니, 순수해. 어느 누구보다도. 당신처럼 순수한 사람은 보지 못했어. 하지만 그거 알아? 너무나 깨끗한――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물은 오히려 맹독이야. 너무나도 손쉽게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지. 그렇기에 [식수]로 만들어지는 물 또한 이거저거 적당히 불순물이라 할 수 있는 미네랄 등등이 섞여 있지.”

“예하께도 비슷한 말을 들었었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 과연 오래 산 사람답긴 하네. 보는 눈이 좋아. 하지만 올곧다는 뜻으로 말하진 않았지? 넌 그저 순수하기만 할 뿐이니까. 그렇잖아? 올곧은 녀석이 마구 죽이고 다니진 않을 거 아냐? 눈 하나 꿈쩍이지도 않고. 거기다 질투할 리도 없지?”

“내가 질투 따위를 한다고? 누구를?”

“······거기서부터 모르는 거냐. 혹시 교황 씨는 너에게 자신을 들여다보라고는 안 하디?”


비슷한 말을 듣긴 했었다. 과연 자신이 나아가는 길이 옳은 것인지를 언제나 의심하라고.


하지만 인정할 순 없었다.


이스피리아가 저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 자체가 자신은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걸 의미했기에. 그렇지 않고서는 저런 소리를 할 리가 없다.


그렇지만 어디서······. 도대체 무엇을 보고 그러는 것이란 말인가. 짐작 가는 부분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쯧. 남이 걱정해주면 귀담아들을 것이지, 자기한테 취해서 늪에 빠지는 줄도 모르다니. 좀 불쌍하네. 하지만 전부 당신 선택이야. 자업자득이지. 난 그걸 존중해. 그러니까 이제 죽어.”

“정말로 날 죽이겠다고? 사자를 죽인다면 외교적인 문제로 번진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전쟁이든 뭐든, 언제든 오라지. 이 내가 직접 뿌리까지 싸그리 뽑아버릴 테니. 그러면 문제없잖아?”


차가운 눈빛. 감정 따윈 조금도 담기지 않은 눈이다. 그건 마치 인형을 닮은 무언가―― 아니,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무언가였다.


또다시 몸이 근질거리고 뭔가가 주체가 되지 않는다.


가이란은 고개를 흔들어 애써 떨쳐내며 말했다.



“네 좌우명은 인간은 전원 실수를 한다는 것이었을 텐데? 그렇기에 언제나 한번은 넘어가 주지 않나?”


그랬다. 이스피리아는 사람이라면 실수를 하는 게 당연하다면서, 한 번의 갱생의 기회를 주었었다. 그건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범죄를 저지른 자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것이 맘 편히 이스피리아를 찾아올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생각 이상으로 힘의 차이가 커 맞상대할 수 없더라도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지기에 쉽게 발걸음을 옮긴 것이었다.


그리고 리시타나 주교들과는 달리 아직 그 기회를 쓰지 않았다.


분명 그랬는데······



“아아. 너도냐.”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이스피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긴 게임이나 상상 속의 세계가 아니야. 나는 나. 네가 아는 누군가와는 별개라는 거지. 도대체 왜 똑같다고 생각하는지를 모르겠네. 물론 어떻게 여기든 자유야. 그렇지만 반드시 그럴 거란 보증은 없지 않나? 목숨이 걸린 배팅으로는······ 썩 나빠 보이는데 말이야.”

“······.”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이 착각이 오늘 네가 죽는 이유인데 말이야. 네가 아는 누군가와 달리, 나는 무척이나 제멋대로거든. ――기회를 주는 것도 그때그때 내 맘이 내키는 대로라는 거지.”


입꼬리를 올리며 이스피리아가 웃는다.


가이란은 급하게 마력을 끌어올렸다.



“호오. 공포를 느끼긴 하나 봐? 꽤 다급하네?”

“공포······?”

“사색이 됐으면서 뭔 소리―― 아아. 그런가. 그러한 것도 모르는 거구나. 연민을······ 느껴서는 안 되겠지. 본디 기질이 그러니. 달리 말하면 장애를 갖고 태어났달까. 조금이지만······ 동질감이 생기는군. 이러나저러나 모든 게 너무 늦었지만······. 뭐, 저항하든 말든, 그것도 자유야. 어디 마음껏 발악해봐.”

“자, 잠깐.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냐?!”


가이란은 황급히 소리치며 리시타를 보았다. 도움을 요청할 요령이었다. 저 이스피리아를 상대로 얼마나 버텨줄지는 솔직히 미지수다. 그렇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혼자보단 나을 테니.


하지만 무리였다. 리시타는 모종의 방법으로 진즉에 제압되어 있던 것이다. 꼼짝할 수 없는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낑낑거릴 뿐이었다.


――도움은 없다.


죽는다. 죽음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원망하려거든 네 타고난 기질과 능력을 원망해. 만약 네가 무능력했다면 그냥 넘어갔을 텐데 말이야. 솔직히 말해, 너의 그 능력에 완벽히 대처할 방법이 마땅찮아서 좀 곤란한 처지였거든?”

“과, 과연 ‘대영웅’이시구먼. 나 따위는 쉽게 죽일 수 있다는 거냐?”


일부러 터부를 찔러보았으나 달라진 건 없었다.


조금의 틈이라도 생기면 바로 벗어나려 했건만, 극히 미약한 감정의 변화조차도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이스피리아는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넌, 누구냐······?”


드디어 조금 전 이스피리아가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여자는 자신이 알던 그 여자가 아님을.


그런 가이란의 깨달음을 뒤로한 채 이스피리아의 손이 올라갔다.


서서히 맞닿아가는 손가락을 보며 가이란의 머릿속에 교회에서 구해주었던 아이들이 떠올랐다. 왼쪽이고 오른쪽이고, 몸 여기저기를 타고 올라오며 미소 짓는 아이들의 모습이······.


실로 이상했다. 그 아이들은 벌써 다 커서 가정까지 꾸린 데다, 몇몇은 자식까지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제 와 그때가 떠오르다니······.


뭔가 웃기다.


‘아아. 다음에 보면 이 얘기를 꼭······.’


――딱!


콰직!


작가의말

오늘은 간만에 연참입니다~

자세한 인사는 바로 올리는 -2에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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