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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님의 서재입니다.

북쪽 나라의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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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작품등록일 :
2022.08.15 21:42
최근연재일 :
2023.04.30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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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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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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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0.02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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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4화. 귀국선 -4-

DUMMY

최 대표가 내민 것은 더러우면서도 매혹적인 제안이었다. 아니 애초에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내곡동에 있는 그 회사,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 국가안전기획부의 레이더에 들어온 이상 철혁이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더 이상 군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었던 그는 공안 기관들이 넌지시 내미는 제의도 몽땅 뿌리치고 서해를 건너왔다.


그러나 이 지독한 놈들은 연예기획사에까지 손이 뻗어있었고 철혁에 대한 정보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군 인사기록은 물론이고 자신을 최덕철에게 소개시켜 준 창익 선배조차도 한패였으니까. 최가 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도중 창익을 불렀을 때 철혁은 살짝 놀라면서도 결국 그럴 줄 알았다는 눈치였다. 자기 같은 무명배우 나부랭이에게 뜬금없이 영화계 ‘거물 인사’를 소개시켜주겠다는 건 인맥을 생각해도 너무 진도가 빨리 나간거니까 말이다.


옆 자리에 나란히 앉은 창익은 철혁에게 조금 미안한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엄밀히 말하면 절반의 진실만 얘기했지 속인 건 아니라면서 약을 치려 했다. 국가를 위해서라도 한번 생각해보자고 설득을 시도했다. 대가는 후하게 쳐주겠다면서. 그리고 한국만 얽혀있는 문제가 아니라면서. 말은 참으로 잘했다. 오랜 전우 사이라는게 이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


사실 그럼에도 철혁은 마음을 강하게 먹으면 제안을 거절할 수는 있었다. 최 대표는 굳이 막으려 들지 않겠다고 했다. 죽일 일은 없다면서. 그러나 그의 입에서 ‘6월 17일 CS호텔 407호’란 말이 튀어나왔을 때 철혁은 머리에 총알을 맞은 기분이었다. 자고로 사회생활에서 죽음이란 물리적 죽음 이외에도 여러 형태가 있는 법이다. 이들을 상대로 거절이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군 경력에 연기 능력, 함경도 출신에 조선족들과 어울리면서 익힌 그들의 언어, 중국어까지 최덕철은 철혁을 적임자로 보았다. 그리고 그거 외에 아주 중요한 이유들이 몇가지 더 있었다.


“자네 고아 출신이잖아. 고난의 행군때 부모에 친척들 다 굶어 죽고 갓 태어난 자네만 겨우 살아남았지. 부모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이제 살아있는 일가친척도 전혀 없고. 그게 군대에 들어왔던 이유 중 하나잖아? 결혼은 물론이고 지금은 사귀는 사람조차 없지. 가족이나 애인이 없다는 건 부담도 없다는 뜻이지.”


“잠시 잊었던 그 사실 다시 떠올리게 해주셨군요. 그래도 의문이 풀리지 않습니다. 활동하는 현역 요원들이 분명히 많을 텐데 왜 저를?”


“솔직히 자네 같은 요건을 완벽하게 충족하는 사람이 회사에 지금 없어. 언론에도 나온 얘기니 말하겠네. 어떤 쥐새끼 덕분에 동북 3성쪽 인력이 지금 궤멸해버렸어. 엄청난 대참사지. 죽거나, 추방당하거나 신분이 탄로 당해 더 이상 일할 수 없거나.”


철혁은 아침에 봤던 바로 그 기사가 떠올랐다. 설마 그게 이런식으로 자신과 연관될줄이야.


“우방국에서 도와줘서 다행히도 그 쥐새끼를 찾아내 처리하기는 했어. 그런데 이 건에 얽힌 나라들이 많고 좀 빨리해야 하는 일이야. 우리 사원들 중에서 인력을 차출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야. 그러니까 외부에서 사람을 다시 구해와야지. 조건이 맞는 예비역들 중심으로.”


철혁 옆에 앉아 있던 창익이 최 대표의 말을 이어받았다. 철혁은 속으로 이 ‘친절한’ 선배의 뚝배기를 깨버리고 싶었지만 마음 속으로 조용히 삭힐 수밖에 없었다.


“음...”


“이번 일만 성공하면 보수를 두둑하게 주지. 자네가 특전사에 있을 때나 여기 중국에 와서 번 돈은 푼돈에 불과한 수준으로. 그리고 메이저 영화에 출연하는 것도 보장해주고. 주연으로.”


최덕철이 우는 아이에게 사탕 주듯이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시겠죠?”


“난 거짓말 안 해. 그리고 설령 거짓말을 한다 해도 자네는 협조할 수밖에 없잖아.”


“...”


“국가에 다시 충성할 기회라고 생각해. 일을 끝마치기만 하면 자네가 원하는 성공도 보장되어 있고.”


“...선택의 여지가 없군요.”


“탁월한 선택이네 김 하사.”


최덕철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책상에서 다시 일어나 보고서를 들고 철혁에게 다가갔다. 철혁이 받은 보고서에는 사진들이 몇 장 끼어있었다. 그리고 그 사진 중에 눈에 띄는 여자가 있었다.


“이 여자가 아까 전에 말씀하신...?”


“그래. 앨리스 리.”


보고서를 뒤적거리던 철혁은 이제야 알았다는 투로 말을 내뱉었다.


“아 그 드라마 작가가 이 여자였군요. 한창 주가 올린다는. 요즘 사진입니까?”


“당연하지. 몇 달 전이야. 옛날 사진이면 곤란하지.”


“그 나이 답지 않게 예쁘군요.”


“허. 철혁이 너 전혀 관심이 없을 것 같았는데?”


이창익이 살짝 놀리는 듯한 말투로 받아쳤다. 철혁은 자신의 약점을 그동안 천연덕스럽게 모르는 척 했던 이 선배에게 더더욱 배신감이 들었지만 한마디만 참고 넘어가기로 했다.


“형. 저도 이런 거 판단할 능력은 있습니다만.”


“하긴 너와 한동안 같이 지내야 할 테니까.”


“이 여자는 군 쪽 경력이 전무한 것 같은데요. 애초에 총을 본 적은 있답니까? 이 아줌마가 임무를 제대로 수행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상황이 그래도 그렇지 이름도 꽤 알려져서 위험할 것 같은데...”


“그러니까 이 여자가 제대로 임무 수행할 수 있게 보조해주는 게 자네 일이지. 그리 어렵지도 않잖아?”


최덕철은 뭐가 문제냐는 어투로 간단하게 대답했다. 철혁은 왼쪽 창가를 바라보았다. 바로 건너편 마천루 유리에 한낮의 햇살이 반사되어 눈을 찌르고 있었고 바로 앞 대로는 아무 생각 없이 점심을 먹으러 나온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인파는 누래지고 있는 하늘빛에 젖어 마치 황하가 진흙을 싣고 맹렬하게 흐르듯이 이곳저곳을 쑤셔대고 있었다.


이 지난 기억들을 계속 뇌까리다 보니 철혁은 입국심사대에 섰다. 키오스크 앞에서 여권을 스캔하고 생체 정보를 제공할때도 그는 이 기억을 매초 순간순간 쪼개서 다시 되내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철혁은 마침내 입국장 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가도 어느새 마음을 다잡고 가야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어느새 그는 공항철도 승강장에 서 있었다. 플랫폼에는 온갖 말들이 섞여나오고 있었다. 함경도 사투리는 기본이요, 중국어, 영어에 간간히 러시아어도 들려왔다. 캐리어를 들고 있던 어떤 젊은 스튜어디스는 빨리 집으로 가고 싶은 듯 피곤함이 온 얼굴에 배어있었고 중국인 커플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큰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온성행 KTX 931 열차는 특실임에도 이미 나진역에서 탑승해있던 인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철혁은 오른쪽 창가 좌석에 앉았다. 살쾡이가 가을 낙엽 밟듯이 조신조신하게 플랫폼을 출발한 열차는 어느새 속도를 내고 호수와 터널을 지나 두만강 변을 달리고 있었다.


철길과 나란히 닦여있는 7번 국도 한 켠에는 전국 시도 경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안보홍보표지판이 걸려있었다. 표지판 맨 아래쪽엔 ‘안보 한뜻 대한민국 힘찬 내나라’에 그 위로는 경원읍성(慶源邑城) 사진이, 바로 그 위로는 ‘경원경찰서’와 경찰 엠블럼, 그리고 홈페이지 주소까지. 열차가 경원시(慶源市)에 들어온 것이다.


신아산(新阿山)까지만 해도 국경 변은 빽빽한 녹음만 우거져 그 거리를 가늠하기 힘들다가 여운(如雲)쯤에 들어서자 탁 트인 벌판이 강 양쪽에 펼쳐져 있었다. 한국 쪽으로는 허연 곤포 사일리지 더미가 논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었고 ‘농포가든’, ‘두만강 장어탕’ 류의 가정집 식당들이 강변에 드문드문 박혀있었다.


그 주변으로는 중년, 노년 가릴 것 없이 낚시꾼들이 겨울에 고기 좀 잡아보겠다고 낚시대를 얼음물에 처박아두고 수다나 떨고 있었다. 그들 뒤로는 때마침 국경경비대란 글자가 엠블럼과 함께 큼지막하게 박힌 스타렉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반대로 강 건너 북중국 쪽은 적막에 쌓인 듯 했다. 그 곳에도 논이 있고 집이 있었지만 인기척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가끔 점처럼 보이는 인간들은 누가 강을 건너 탈출하려는 지 감시하려는 인민무경들이라는 걸 철혁은 직감할 수 있었다. 강 중간 중간에는 빨간색 배경에 하얀 색 간체자가 빼곡히 적혀있는 선전물이 박혀있었다.


‘당의 영도를 따라 백전백승하자’, ‘사회주의의 핵심가치를 준수하자’ 이런 류의 문구는 물론이었다. 혹여 좀더 세련된 선전물은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고속도로변 전광판 스타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 역시 만리장성과 경계하는 여군을 배경으로 깔고 ‘군과 민이 일심으로 강철의 장성을 쌓아가자’ 류의 문구로 도배된, 한자를 모르는 누구라도 내용을 대충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뭐 자기네 영토 안에서 그러는 거야 누가 뭐라하겠다마는 왜 알아듣지도 못할 강 건너편 한국인들도 그걸 볼 수 있게 해놓았는지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열차는 경원역에 도착했다. 이 함북선(咸北線) 열차는 온성까지 갈 수 있지만 철혁은 이곳에서 내렸다. 그는 역 앞 광장에서 택시를 탔다. 국경을 넘기 전에 먼저 들를 곳이 있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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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4화. 귀국선 -3- 22.09.25 70 1 11쪽
9 4화. 귀국선 -2- 22.09.18 79 1 11쪽
8 4화. 귀국선 –1- 22.09.11 91 1 7쪽
7 3화 쥐덫 -4- 22.09.04 83 1 10쪽
6 3화 쥐덫 -3- 22.08.28 84 1 7쪽
5 3화 쥐덫 -2- 22.08.27 89 1 8쪽
4 3화 쥐덫 -1- 22.08.21 111 1 15쪽
3 2화 장기말 찾기 22.08.17 126 2 7쪽
2 1화 칼춤 추기 +2 22.08.17 196 3 12쪽
1 프롤로그 22.08.15 297 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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