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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님의 서재입니다.

북쪽 나라의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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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평장
작품등록일 :
2022.08.15 21:42
최근연재일 :
2023.04.30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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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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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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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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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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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04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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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3화 쥐덫 -4-

DUMMY

‘리경옥’. 30여년만에 다시 귓속에 메아리치는 이름이었다. 리경옥에서 리징위. 그리고 앨리스 리로. 강에서 강으로, 다시 바다 건너 지구를 한바퀴 건너는 오랜 여정 동안 정체성 세탁이 이뤄졌건만 이 없앨 수 없는 근원은 끝끝내 저편으로 사라지기는 커녕 기어코 다시 그녀를 휘감고 있었다. 앨리스는 이 아련하고도 잊고 싶었던 이름이 영국인 입에서 튀어나왔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다.


“그래. 내 이름이 일반 중국인들과 약간 다를 수 있으니 한국계로 추정할 수도 있겠죠. 당신네들은 원래 정보 전문가들이니까. 그런데 그게 전부인가요? 나에 대해서 대체 얼마나 알고 있죠?”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죠.”


“계속해봐요.”


월터스는 책상 한 켠에서 수십 페이지는 족히 되어 보이는 보고서를 하나 꺼내들었다.


“한번 보죠. 생년월일은 1970년 12월 29일. 출생지는 길림성 연길시. 중국계는 아니고 한국계, 중국어로는 조선족이라 하죠. 아 그리고 뭐라 하더라 적관(籍贯), 한국어로 ’본적‘이라 한다죠?.”


조선족에다가 본적이란 한국어 단어가 또 다시 영국인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앨리스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본적은 한국 함경북도 회령시 화풍면 인계리. 당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출생지죠. 어느 도로 몇번인지 더 정확한 주소도 우리가 알고 있는데 여기서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겠죠. 어쨌든 당신 아버지가 2살이었던 1934년, 당시 일본령 조선 출신이었던 당신의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데리고 중국으로 갔고. 15살 터울의 맏오빠와 10살 터울의 맏언니, 5살 터울의 둘째 오빠가 있고 당신이 막내고.”


앨리스는 이미 이 대목에서 이 사람들에게 그 어떤 거짓말이나 진술 거부도 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들은 자신의 과거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본적에다 본적 주소의 리 단위까지.


“초중학교 시절까지 연길에서 보냈고. 당신은 그때 아버지,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중국인의 정체성보다는 한국계로서의 정체성을 더 강하게 가지고 이를 자랑스러워했고. 1985년 연길시 초급중학교를 마친 직후 공무원이던 아버지의 발령지 때문에 가족과 함께 산동성 청도로 이주. 1988년 북경대 어문학부에 진학하여 당신 혼자 북경으로 이주. 이듬해 6월에 천안문 사태가 터졌을 때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학생 지도부 일부와 친분이 있었다는 이유로 당국의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었고.”


앨리스는 눈을 잠시 감았다. 33년 전 그 곰팡이핀 벽에서 나는 퀘퀘한 냄새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퇴학이나 농촌 하방은 일단 피했으나 이때 불만을 품었던 당신은 청도로 돌아와 8월에 남중국으로 단신 월남했지. 그 바람에 가족 전체가 청도에서 도로 연변으로 추방당했지. 군 장교로 있던 맏오빠는 강제 예편 후에 자살했고. 몇 년 뒤에 북한이 무너지자 한국인들을 통해 남은 가족들의 소식을 간간히 들으려고 했지만 이미 소식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였고.”


앨리스는 머릿속 한편에 일부러 묻고 있었던 기억들이 강제로 끌어올려지는 기분이었다. 그들이 협박을 하지도 않았고 몸에 고통을 주고 있지도 않았지만 고문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인정을 하고 이들이 뭘 하는지 알아야 했다.


“정말 오랜만에 떠오르는 기억들이군요. 그런데 내가 이 나라에 무슨 반역이라도 저질렀나요? 내 머릿속에 나도 모르는 어떤 정보가 있나요? 아니면 설마 33년 전에 북경에서 내 뺨을 후려친 그 냄새나는 공안 놈이 누군지 알아내려고 날 여기 부른 건 아니겠죠? 왜 내가 이런 얘기들을 들어야하나요? 내 과거는 어떻게 알아낸거죠? 나랑 비슷한 배경 가진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 왜 하필이면 나를 타겟으로 삼은거죠?”



“일단 설명하기 전에 앨리스. 제가 사람을 한명 소개시켜드리죠. 존 스코트 씨입니다. 이 분은 랭글리에서 오셨죠.”


앨리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녀가 뒤돌아보니 안경 쓴 40대 백인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당신은...?”


앨리스는 아는 사람을 만났다는 듯 반가움과 놀라움, 당혹감이 섞인 얼굴로 존 스코트란 사람을 바라보았다. 존 스코트는 살짝 웃었다.


“기억이 나시나보군요. 앨리스.”


상해에서 만난 바로 그 문화원 직원이었다. 음식을 굉장히 많이 먹어댔다던 그 사람. 동북아시아 문학과 역사에 대단히 해박한 그 사람.


앨리스는 알코올이 씻어내렸던 그때의 기억이 물길 거슬러 올라오는 연어마냥 뇌를 휘감고 있음을 느꼈다. 통제 사회에서 살았던 그녀는 그때 이 남자가 하던 말들이 백인이 하는 말들 치고는 익숙한 것에서 이상함을 느꼈어야 했다. 그러나 자유의 웅덩이에서 오랫동안 수영하고 있던 그녀는 그 아늑함에 잠시 마음을 놓았고 존의 말들을 그냥 흘려넘겼다.


그는 중국과 일본의 대문호들뿐만 아니라 최남선, 이광수, 김동인 등 한국의 문학가까지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김학철처럼 기껏해야 중국 동포나 잘 알 법한 사람까지? 앨리스가 김 선생을 막 알았을 때 그는 이제 막 복권되서 작가협회에서 일하던 노인이었다. 앨리스가 그의 문학을 비로소 제대로 접하게 된 건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잠시 머물 때였다. 어떻게 김학철 선생까지 잘 아냐고 물었을 때 그는 한국 문화원에 근무하면서 알게 되었다고 얼버무렸다. 그땐 그런가보다 했다.


“당신도 잘 알겠지만 우리 두 나라는 서로 한 몸이나 마찬가지요. 한쪽이 도움이 필요하면 반드시 도와주지. 양국 간 긴밀한 협력이 당신을 이 자리로 오게 한 셈이요.”


존 스코트가 월터스의 옆에 서서 말을 던졌다. 조용하면서도 약간 의기양양한듯한 어조로.


“그러니까 나에게 일부러 접근했었군요. 그때?”


“일종의 떠보기였소. 우리는 당신의 대한 정보를 대강 알고 있었지만 직접 만나볼 필요성을 느꼈고. 한번만 해본 대화였지만 교차검증하기에는 있어서 그 정도도 충분했지.”


“나에 대해서 이렇게 잘 알고 있으니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근데 이게 당신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 이유와 뭔 상관이 있죠?”


“사진 하나를 보여주겠소.”


스코트는 사진을 하나 보여줬다. 위성 사진이었다.


“뭐하는 데인지 알아보겠소?”


“발전소 같은데. 원전처럼 생겼군요.”


“맞소. 원자력 발전소요. 핵시설이기도 하지.”


“근데 왜 이걸 보여주는 거죠? 조금만 지식이 있으면 다 답할 문제인데요.”


“당신한테도 꽤 익숙한 동네거든. 요령성이니까.”


“그래요. 나도 옛날에 가본 적은 있어요. 그렇다고 치고 그래도 내 궁금증을 해결하지는 못하는군요.”


월터스가 스코트의 말을 이어받아 입을 열었다.


“이 곳이 영국, 그리고 자유 세계의 안보와 관련이 있소. 몇주 전 스트랫포드에서 폭발사고 난거 기억나시오?”


“그 폭탄 작업하던 놈 하나 죽은거? 그냥 차 하나 날아간 거 아닌가요?”


“그런 줄 알았지.”


월터스는 발해만에서 스트랫포드까지 벌어졌던 사건들을 앨리스에게 설명했다. 이 작은 플루토늄이 만들어낼 수 있었던 대참사가 어떻게 행운의 여신 덕에 피할 수 있었는지를. 앨리스는 이 흥미로운 소설 같은 실화에 관심을 보였지만 아직도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왜 내가?


“내가 참 인내심이 많은 여자라는 걸 오늘 깨닫고 있군요.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번 더 묻겠어요. 그래서 내가 왜 이 일에 연관이 되어야하는거죠?”


“사진 속의 이 남자, 알아보겠소?”


스코트가 일어서서 한 남자의 프로필 사진을 건네주었다. 앨리스는 바로 그 남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35년전 그녀가 장난감 탱크를 가지고 같이 놀아주던 6살의 소년이었다. 그는 세월의 흐름 속에 이제 40대 초반의 남자가 되어있었지만 그 이목구비는 아직도 그대로였다.


“이 사람 혹시...”


“당신 조카요. 자살한 당신 맏오빠의 그 아들.”


“지금 당신네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거죠?”


“타겟.”


앨리스는 그제서야 왜 자신이 여기에 왔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진작에 혈육의 연을 끊고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운명의 끈은 결코 끊어지지 않았다. 그녀만 몰랐을 뿐. 이 지독하리만큼 질긴 끈은 30년의 세월을 넘어 지구 반대편까지 기어코 찾아와 그녀를 옭아매고 말았다.


월터스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 조카는 바로 그 핵시설에 근무하고 있소. 연좌제를 극복한 촉망받는 전문가지. 겉으로는 매우 충성스러운 공산당원이오. 하긴 그래야 그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지.”


“죽이겠다는 건가요?”


“전혀. 우리는 그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당신을 부른거지.”


앨리스는 여기까지 온 이상 거절을 할 수도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 거대한 물결에 휩쓸리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물을 수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군요. 내가 해야 할 일은 뭐죠?”


“간단해요. 당신이 할 일은 단 하나, 설득하는 거지. 서방으로 오도록. 마침 당신 조카는 요즘 불만이 많다고 하더군. 그러나 그는 마음을 아직 열지 못했소. 그러니까 가족의 힘을 이용하려는 거지. 당신만이 우리가 확보한 유일한 연결고리요.”


“내가 대체 뭘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건가요? 나는 저 망할 곳을 떠난 지 30년이 넘었어요. 저 애가 나를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나는 그냥 글을 쓰는 여자일 뿐이에요. 거기 가서 문제가 생기면 나 스스로 어떻게 보호하죠? 대학에서 잠시 군사 훈련을 받아본 것 외에는 총 한방 쏜 적도 없어요. 내가 쓴 것들은 죄다 자료를 참고했을 뿐이라고요.”


“걱정마시오. 우리가 당신을 도울거고 또 투입되면 당신을 도울 사람이 동행할 거니까.”


월터스가 간단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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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화 쥐덫 -4- 22.09.04 84 1 10쪽
6 3화 쥐덫 -3- 22.08.28 84 1 7쪽
5 3화 쥐덫 -2- 22.08.27 89 1 8쪽
4 3화 쥐덫 -1- 22.08.21 111 1 15쪽
3 2화 장기말 찾기 22.08.17 127 2 7쪽
2 1화 칼춤 추기 +2 22.08.17 196 3 12쪽
1 프롤로그 22.08.15 298 3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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