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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별의 서재.

내가 어떻게 로맨스를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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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밝은스텔라
작품등록일 :
2015.03.18 10:32
최근연재일 :
2015.08.07 17:27
연재수 :
1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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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89
추천수 :
235
글자수 :
8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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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8.06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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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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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8화. 서민용의 눈물

DUMMY

일요일 아침 11시.

일찍부터 한나래가 고모 집에 놀러간 시간.

나래의 아빠 한택수와 엄마 이숙희는 그야말로 대 멘붕에 빠져 있었다. 나래에게는 비밀로 했지만, 전 날에는 아키다에서 구구절절한 편지와 함께 나래의 입학선물로 명품 만년필과 그 외의 필요한 것들은 한국에서 구하시라고 제법 두둑한 국제환이 도착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

“…….”

믿을 수가 없었다.

나래의 생모에게 도착한 15장의 편지 속에나 존재하는 인물.

나래의 생부인 서민용. 유성 블루 사파이어 호텔 사장이 나래의 부모님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두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린 것이다.


그의 말은, 한택수가 원치 않는데 데리러 가겠다는 게 아니었다.

그저, 그간 세상에 있는 줄도 몰랐던 자신의 딸을 저렇게 씩씩하고 건강하게 잘 키워 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죄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는 서민들의 마음을 상처 입히지 않는 법을 아는 자였다. 다짜고짜 돈 봉투를 들이밀지도 않았고 고급 선물상자를 쌓아놓지도 않았다.


정말 진솔한 마음 하나만을 가지고 그렇게 인사차 온 것이었다.

그래도 자주 만나게 해 달라느니 보는 건 괜찮냐느니. 그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얼굴은 나래에의 그리움에 초췌한 기운이 만연했음에도, 나래를 키워준 부모 앞에서 감히 그런 말은 꺼내지 않았다.

감사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그 뿐이었다.


그러니…,

나래의 엄마아빠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싸가지 없게 나왔으면 뭐라고 쏘아 붙이기라도 할 텐데. 너무 경우 바르게 나오는데다가, 지난 번 유성 호텔의 스파 여행 때 이미 나래와 만남을 가졌다고 하니….


그런데도 나래는 다녀와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고민에 빠져든 우울한 모습을 보인 것도 아니다. 아이는 믿을 수 없는 노력으로 엄마아빠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결국 나래 엄마는 눈물을 보였다. 아키다의 생모가 보낸 편지 내용을 모두 소화시킨 후의 눈물이었다. 두 생모 생부는 당시 정말로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장 서민용은 아직도 알지 못 하는 생모의 진실한 사연까지 알게 되었기에, 결국 나래가 자신의 딸이 된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뜻’이며 ‘운명’이었구나. 하는 것을 이제는 받아들이게 된 것이었다.


***


그 시간,

전 날 저녁부터 카톡으로 소환수 글고은이 자신의 방으로 나래와 유나를 소환장을 발동한 떡밥인 사진들을 나눠 주고 있었다.


“이전에 찍었던 사진들! 각자 한 장씩 갖도록 뽑았어. 봐봐.”

“우와아! 내 친구들이 보면 어디 외국 여행 다녀왔냐고 할 거야! 자랑해야지~! 진짜 사진으로 보니까 완전 으리으리하다!”

“근데 우리 정말 튀긴 튄다. 나래랑 나만 계속 하와이안 패션이었네. 뒤에 사람들은 다 점잖게 있는데 우리만….”

“으! 그러고 보니 계속 그러고 다녔었구나!”

“그렇게 입고 있으니 정말 너네만 유럽의 고성에 놀러온 유원지 알바 같아 보이기도 하네. 쿡쿡.”

“아! 이 아저씨?”

“어. 그 총지배인이라던 댄디 아저씨네.”

“기분 나쁘게 왜 이렇게 많이 찍혀 있는 거야? 심령사진 같잖아!”

“어! 여기 봐! 사장 아저씨도 있다.”

“헐…….”


셋은 처음엔 신나서 와아와아 보다가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들어 조용해졌다. 정말 군데군데에 총지배인도 있고 사장도 있고…. 그들의 ‘지켜보고 있다’ 분위기에서 놀았던 건가 싶어 조금 오싹해졌다.


총지배인은 24일. 1층 로비에 도착해서부터 찍혀 있었고, 디너 정찬 시간에 식당 문 뒤로 찍혀 있었고, 스카이라운지 에서도 출입구 부근에서 찍혀 있었다. 반면 사장 서민용은 24일. 런너 바 윗 층에 있는 모습이 심령사진처럼 찍혀 있는 것 외에는 25일 아침에 체크아웃 하기 전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찍은 사진 속에 있었다.


“헐… 무서워. 혹시 이 방에서 아무렇게나 찍어도 어딘가 구석에서 저 아저씨들 찍히는 거 아닐까?”


글고은 나름. 써늘해지는 분위기를 나름 돌려보고 싶을 뿐이었는데

책상 위로는 유나의 주먹이, 아래로는 조카의 발차기가 날아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글고은은 이제 투고는 그만하고 인터넷에 연재를 해 볼까 싶은 생각에 이곳저곳을 조사 중이고 유나는 그동안 글고은이 써 둔 로맨스 소설을 읽느라 조용했다. 그런 옆에서 나래는 여전히 사진을 보면서 뭔가 생각에 빠져 있었는데,


“아 참. 유나 고모.”

“아. 어?”

“우리 반에 내 친구네 이모가 남산 도서관에서 알바 하고 있었는데요. 임신해서 이젠 그만 좀 쉬고 싶다고 하더래요. 거기를 유나 고모가 가면 어때요? 지금 일하는 데는 여기서 너무 멀잖아요 솔직히.”

“남산 도서관?!”

그러자 글고은도 눈이 동그래져서 나래를 바라보았다. 뭔데? 더 얘기해 봐! 우와! 남산 도서관!?


글고은과 나래는 북가좌동. 같은 동네이지만 골목 몇 개를 지나야 하는 서로 다른 곳에서 살고 있고, 정유나는 부모님이 예나가 보태준 것을 합쳐 삼거리 길 저 건너에 있는 상암 DMC의 새 아파트를 사셨기에 거기서 살고 있었다. 그러니 위치상 그간 유나가 일하고 있던 파주 창고까지는 확실히 먼 것이었다. DMC로 이사 오기 전에는 일산에서 살고 있었으니 그나마 다닐 만 했는데, 아닌게 아니라 요즘은 그 박한 돈 몇 푼 때문에 파주까지 다니는 게 힘에 벅차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고모가 좋다고 하면, 나 지금이라도 전화 할 수 있어요.”

“그 이모란 사람은 몇 살쯤 되는데? 나 너무 나이가 많아서….”

“괜찮을 걸요? 유나 고모 또래인걸로 알아요. 늦은 나이에 첫 아기를 가졌으니 몸조심하겠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코, 콜!!! 완전 좋아! 짱이다! 우와~!! 남산이라니! 도서관이라니!”


유나는 난리가 났다.

파주 창고 일도 사실 엄마 친구의 친구 창고로, 초반에 사람이 너무 안 구해져서 의리상(?) 투입된 일이었다. 그것을 요즘은 무슨 핑계로라도 관둘 생각을 하고 있었던 차에 이 무슨 떡이냐! 게다가 남산 도서관이라니. 듣기에도 너무 번듯하고 ‘남산’하면 일전에 갔던 호텔 스파의 추억이 떠올라 더더욱 설레는 것이었다.


“어우야…. 나도 부럽다. 나래야 거기 한 명 더 자리 안 나나 물어볼래?”

“미안해요. 고모는 일하는 편의점이 요 앞이라서 생각 안 해 봤어요. 당장에 매일 파주에 다니는 유나고모가 힘들 것 같아서….”

“이야! 나래야 내 뽀뽀를 받아라! 너 내 조카 하자!!”

“꺅!”

“야!”


그렇게 해서 유나는 당장 다음 날부터 남산 도서관에 일단 나가보는 것으로 정해졌다. 우선은 가서, 후배의 조카인 나래의 친구의 이모라는(복잡하다) 사람을 만나고 하는 일에 대해 설명을 듣기로 정하고는 창고 주인에게도 전화를 했다. 거긴 어차피 일당잡부의 일이었고 지금은 인근에 사는 사람들도 구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었으니 창고 주인도 크게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나래야.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고모가 고마워서 뭐 맛있는 거 사 줘야겠네~!”


***


그 시간, 한나래의 집을 나선 서민용은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한 마음을 어찌 달랠 길이 없어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거대한 고급 세단 차 안이었고 그는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목까지는 자신의 몸의 감각인데, 어째서인지 누군가가 목 위로 달린 머리를 빙빙빙 끝도 없이 돌리고 있는 것 같이 어지러웠다.


“사장님…. 괜찮으십니까?”

“…….”


괜찮지 않았다. 출발하라는 말과 거의 동시에 세우라고 했으니까.

그가 그렇게, 나래가 사는 아파트에서 조금 떨어진 어느 주택가 골목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 하고 있는 동안. 어떻게 신기하게도 눈은 그녀들을 발견하는 것인가….


걱정스러운 눈빛의 운전기사가 자신을 바라보던 백미러 뒤로 비친 골목 저 건너에서 폴짝폴짝 뛰는 나래의 포니테일. 그리고 ‘두 고모’의 웃는 얼굴이 정말 1초쯤 잠깐 꿈처럼 지나갔다. ‘녀석, 뭐가 그리 좋은지….’ 이미 사라진 나래의 모습이 아직도 잔상에 남는 서민용의 붉어진 눈동자에는 다시금 눈물이 맺혔다.


“사, 사장님?!!”

“…… 출발하세요.”


서민용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비비면서 신음을 흘리듯 그리 말했다. 출발이다. 어디로? 호텔? …… 호텔. 가서 뭐 하는가? 일? 일…….


“미안합니다. 세워주세요.”


결국 그는 다시 끽! 하고 차를 세운 후, 미련 없이 내렸다.


“김 기사님. 미안합니다. 오늘은 혼자 돌아가겠습니다.”

“네!? 사, 사장님! 지금 편찮아 보이시는데 어떻게!”


서민용은 아무 대꾸 없이 홀로 뚜벅뚜벅.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목적도 없이 검은 명품 코트자락을 펄럭이며 겨울바람이 부는 골목 어딘가로 사라져 갔다. 놀란 김 기사는 서둘러 비서실에 연락을 걸었고 서민용은 나래의 부모님이 들려주신 ‘편지’의 이야기를 곰씹으며 DMC 역을 향해 그냥 걸었다.


- 그 사람은 나래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제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말 한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요. 우리의 관계는 ‘아무것도’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끝났지요. 저는 그렇게 끝나게 될 것을 알면서 도전했어요. 세상 모두에게 미안했어요. 사람을 좋아한다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 한 것에 대한 벌은 당연히 제가 다 받아야 했는데, 제가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제 아기는 보호소로 맡겨진 후였어요.


저는 몹시 가난했습니다. 몸과 정신에 심한 병이 든 아버지 한 분을 모시고 달동네에 살았는데, 돈이 필요 했어요. 온갖 일들 다 했지만 점점 무거워지는 몸으로는 한계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의 누나들을 찾아 갔어요. 일이 그렇게 되기 전에 이미 한 번. 그 쪽에서도 사람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래도 전 고집을 부렸거든요. 그 아이는 제가 낳고 제가 키울 것이라고요. 하지만 절망의 절벽. 그 끝에 이르니 결국 자존심 한 가닥도 남지 않았어요.


만삭의 몸으로 고민하던 중에 그 달동네 단칸방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초상을 치룰 돈이 없었던 전 그 사람의 누나들이 주는 돈을 받았어요. 그리고 아버지를 초상을 치러 드렸지요. 하지만 너무 과로한 탓에 장지에서 정신을 잃고 말았고, 눈을 떠 보니 아이는 이미 보호소에 맡겨진 것이었지요. 달동네 방도 모두 처분한 무연고자가 된 제가 한 생명을 책임질 수 없다는 나라의 판단이었어요. 누님들께 받은 돈으로 다시 자리를 잡고 아이를 데리러 가고 싶었어요.


달동네에서도 살 수 없을 만치 경제력이 없었던 제가 갑자기 출처를 알릴 수 없는 돈을 국내에서는 쓸 수 없었지요. 누님들과 그렇게 약속을 했으니까요. 그래서 일단 가까운 일본으로 건너갔어요. 우선 그곳에서 기반을 다지고 아이를 데려갈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일본이라는 나라가 말도 모르는 여자 한 명이 갑자기 자생하기 위한 터전으로 삼기에 그리 만만한 나라는 아니었죠. 무엇보다 세상 어디를 가도 ‘여자 혼자’라는 점은 온갖 불행과 불가능을 다 초대하는 것이니까요.


어느 날 저는 오사카의 한 번화가 뒷골목에서 불행한 일을 당했어요. 그 일로 인해 저는 몸도, 돈도 빼앗기고…… (중략) ……


“…….”


미칠 것만 같은 서민용은 제 손으로 머리를 험하게 헝클었다.


그녀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던 시기, 서민용은 본격적인 최고경영자 코스를 밟느라 몇 개월간 그녀를 만나지 못했었다. 누님들이 그 코스를 무사히 패스하면 서민용이 소개시켜주겠다는 여자를 흔쾌히 만나주마 하셨기에, 그 말 하나 믿고 적성에도 맞지 않는 공부에 온전히 전념 했었다.


그런데 서민용 자신은 대체 송진경에 대해서 무얼 알고 있었던 걸까? 그녀의 무엇을 알고, 그녀의 무엇에 그토록 모든 순정을 다 바쳤던가? 정작 편지 내용을 듣기 전까지, 그는 그녀가 달동네에서 어렵게 사는 사람인 줄도 몰랐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의 모든 걸 숨기고 그저 자신이 좋다는 이유 하나로. 번듯한 중산층 가정의 딸로 둔갑해서 모든 걸 다 바쳤다. 그리고 젊었던 서민용은 순진하게 그녀가 꾸며서 보여준 모든 가짜 상황들을 믿었고 그 모든 연극에 휘둘려 지금까지의 평생. 오직 그녀만을 온전히 사랑했다.


그런데…….


나래의 부모님은 그 편지내용을 통해 심한 충격을 받으셨다고 하셨다. 왜 아니겠는가. 그런 처절한 내용들과 유성 그룹 패밀리와 연결을 짓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이야기다.


서민용이 그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걸 알게 된 건 그녀가 돈을 받고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누님들께 들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미 아이를 때고 나라 밖으로 튀었다는 이야기로 들었기 때문에 그로선 피붙이인 누님들의 이야기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또 아무리 그렇다 해도 자신에게 한 마디도 남기지 않고 그렇게 사라 질 수는 없다고. 누님들에게 터트릴 엄청난 분노의 감정을, 당시 그로서는 모습을 지운 송진경에게 모두 쏟아 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슬프지만 가시지 않는 배신감…….

그 끔찍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지금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민용은 지금 혼란과 분노로 머리가 터져 나갈 것만 같아 어쩔 줄을 몰랐다. 그 분노는 이제 누구를 향해야 하는가.


너무나 사랑했던 송진경. 그러나 그 긴 세월 동안 떠올릴 때마다 미웠던 그녀가 지금만치 미울 수가 있을까! 그리고 지금만치 가여울 수가 있는가! 그 모든 어지러운 감정이 한나래에의 그리움으로 뭉쳐지는 것을 느끼며 서민용은 터벅터벅…. 걷고 걸었다.


그 어린 아이에게, 모두가 죄를 지었다.

하지만 당돌한 그 아이는 어른들이 그러던 말던.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당신들은 결코 나의 행복을 좌지우지 할 수 없다는 듯 씩씩하게. 자신의 평화를 너희 따위에게 맡기지 않겠다는 듯이….


나래는 생모를 ‘일본 아줌마’라고 했고 생부를 ‘아저씨’라고 불렀다.


그 어린 아이에게 이제 와서 무얼 구걸하랴….

아빠라고 불러달라고? 필요한 건 뭐든지 말하라고?


그 때였다.


서민용은 핑- 하고 정신이 가물거리는 중에 깔깔대며 웃는 나래의 목소리를 들었다. 어쩌다 보니 자신의 발걸음이 본능적으로 나래를 뒤 쫓은 것인가?


“유나 고모 남산 도서관 알바 뛰면 거기도 자주 갈 수 있겠네! 사파이어 호텔! 책 빌려서 거기 로비에서 읽으면 진짜 멋있겠다! 도서관에서 호텔까지 다니면 자연히 운동도 될 거고!”

“그르게 말이야~. 설마 로비에서 책 읽는 것 정도로 쫓아내지는 않겠지?”

“언니야. 용감도 하다. 도청기 생쑈를 해 놓고, 눈치도 안 보이냐?”

“뭐 어때? 그 사람들 벌써 잊어 버렸을 걸? 하루에 스치는 사람이 몇 명이냐 그런 걸 일일이 기억하고 사냐?!”

“언니, 니가 그냥 스쳐 지났냐? 아주 징하게 점을 찍고 지나갔지.”

“아무튼 유나 고모! 나중에 돈 모아서 우리 고모랑 거기 한 번 더 가면 되겠네.”

“됐어. 내가 왜 돈 모아서 니네 고모랑 커플룸 쓰냐.”

“얼쑤! 누가 할 소릴! 저번에 다녀온 것도 내 덕에 묻어갔다 온 주제에!”


여자들의 발랄한 티격태격 소리다.

남산 도서관 알바? 도서관이라면 호텔에서도 보이는 곳이다. 서민용은 정신을 가다듬어 이야기를 되새겼다. 저 유나고모라는 왈가닥 아가씨를 통하면 어떻게 해서든 나래와는 거리를 두면서도 연결은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순간 들었다.


‘도서관이라…….’


“나래 먹고 싶은 거 쿠폰 받았어? 오늘은 내가 쏜다! 맘껏 먹어! 하지만 글고은. 너님은 니가 사 먹어.”

“하아…. 그럼 언니야. 너 그동안 내 집에서 먹고 마시고 쓴 것들 다 내놔. 관리비를 내 놔야 할 양반이 지금 할 소리냐 그게!”

“아오 진짜 유치해 죽겠어! 고모들, 오늘 하루라도 좀 얌전히 지내면 안 돼?!”


17살 소녀에게 ‘유치하다’고 타박 받는 38, 39 노처녀들은 서로를 보며 “흥이다!”를 외친다. 서민용은 이제 걸음을 멈추고 ‘맛 집’을 향해 씩씩하게 행진하는 그녀들의 뒷모습을 배웅하듯 바라보며 한숨을 내 쉬었다.


눈에는 쓰라린 눈물이, 입에는 실성기 담은 미소가. 가슴에는 불에 지져지는 듯한 아픔이… 넘쳐흘렀다.


***


2월 말.

유나는 남산 도서관 알바를 시작했고,

3월 초. 나래는 고등학교에 입학 했으며,

마찬가지 3월 초. 글고은은 소설책 리뷰로 파워 블로거가 되었다.

집필중인 로맨스 소설은 꽤 진전 되어서, 주인공 여자가 조폭 보스 아들을 만나는 씬 까지 갔다.


각자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삶을 살아 나갔고 그쯤이 되니 서민용 사장도 조금씩 정신이 들어 마음을 잡아 나갔다.

재산이 얼마나 많고 사회적인 지위가 얼마나 대단하냐와 무관히, 딸에게 부끄러운 아빠가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보다 더 열심히 업무에 매달릴 수 있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한 가지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사무실에서도, 프라이베이트 룸에서도, 호텔 외부 정원에서도.

계속 남산 도서관을 흘끔 흘끔 쳐다보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혹 그 쪽에서 유나 고모가 책 한 권을 들고 올라오지는 않을까, 그렇다면 우연을 가장해서 다가가 나래의 근황을 물어 보고 싶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공기는 따뜻해져 오고 간간히 봄비도 내리는 남산은 이제 조금씩 연두색이 기지개를 펴는 것처럼 보송보송해 보였다.


나래는 반에서 누구보다 성숙한 학생으로 선생님들 사이에서 유명해 졌다. 그리고 예전 같았으면 수업시간에 열심히 돌려 봤을 로맨스 소설책에도 흥미를 잃은 듯 했다. 오히려 로맨스 관련의 글을 본다면 글고은 고모의 황당한 소설 프린트 아웃 한 것을 들춰보며 오타 체크를 한다던가 문맥상 이상한 부분을 체크 하는 작업을 했다.


그러다가 나래는 새삼스레 느꼈다. 고모가 너무나 외로운 사람인 것을. 그 외로움이 어쩐지 그 바보 같은 글에 너무 노골적으로 묻어 나오는 것만 같아서 나래까지 우울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이런 글을 써 대는 고모를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나래는 종종 그런 걸 고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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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5화. 가자~! 사고치러~!! 15.08.04 542 3 19쪽
4 4화. 국제전화 15.08.04 442 2 20쪽
3 3화. 출생의 비밀? 하! 그게 뭐? 어쩌라고? 15.08.03 613 3 17쪽
2 2화. 하늘이 내린 루저들 15.08.03 846 3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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