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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별의 서재.

내가 어떻게 로맨스를 써

웹소설 > 작가연재 > 일반소설, 드라마

완결

밝은스텔라
작품등록일 :
2015.03.18 10:32
최근연재일 :
2015.08.07 17:27
연재수 :
10 회
조회수 :
10,083
추천수 :
235
글자수 :
86,352

작성
15.08.04 14:45
조회
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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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20쪽

4화. 국제전화

DUMMY

나래는 그동안 그토록 외모찬양에 기울어져 있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엄마나 아빠는 그렇게 못 생긴 얼굴을 하고 있지만 모두 열심히 살아가는 선량한 사람들이다. 고모도. 외모 때문에 번듯한 사회활동도 못 하는 형편이지만 사실 착하긴 누구보다도 착하다.


“젠장. 예쁘면 다냐고. 잘 생기면 다냐고. 반반하게 생긴 것들은 꼭 못 되 쳐 먹은 짓이나 하고. 그러고도 잘 만 살아. 아무리 착해도 못 생기면 늘 손해만 보고!”


나래는 욕실에서 나와 포근한 옷으로 갈아입곤 전화기를 들었다. 간밤에 아빠가 던져서 부서졌나 싶은 전화기가 그래도 멀쩡하게 기능을 한다. 그래서 부랴부랴 메모지를 놓고 통화기록을 살폈다. 분명, 간밤에 아빠가 ‘오늘은 더 이상 전화 안 오겠지! 그 미친 애미X!’ 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생모의 전화번호가 어딘가 찍혀 있다는 말이다.


‘이제 와서 뭘 어쩔 건데. 날 보러 오겠다는 거야? 데려가겠다는 건가? 용서 못 해. 가만 두지 않겠어….’


- 고모

- 고모

- 고모

- 고모

- 07033*28591

- I+ 고객센터

- 긴급재난문자

- 010219*0452

- 고모

- 진천 이모님

- 00181882*2843

- 00181882*2843

- 00181882*2843

- 용진치과

- 하나 둘 치킨

등등…….


“…….”


나래는 양미간을 찌푸리곤 뚫어져라 금이 간 액정을 노려보았다.

저 국제전화 빼고는 딱히 의심스러운 전화번호는 없다. 워낙에 전화가 안 오는 집이고, 와도 보통은 핸드폰으로 오니까.


그런데 저 국제전화번호는 뭐지? 처음 한 통은 걸었지만 아무도 안 받은 모양이다. 두 번째는 10초 만에 끊어진 것 같았다. 마지막 통화기록이 통화량 17분이다. 엄마 아빠는 한 번도 해외에 나가 본 적이 없는 분이다. 아는 외국인도 없는 걸로 안다. 그런데 저 번호는….


나래는 서둘러 마루의 컴퓨터에 전원을 넣었다. 가슴이 쿵쿵 뛰고 있었다. 속이 미슥 거렸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귓가에는 아빠의 격노한 목소리가 아직 맴도는 것 같았다.


‘오늘은 더 이상 전화 안 오겠지! 그 미친 애미X!’


‘이유 없이 걸려온 전화가 아니야 저건!’


인터넷에서 저 국번과 지역번호를 검색해 볼 참이다. 어느 나라의 어느 도시에서 걸려온 전화인지!


- 훌쩍.


에이씨! 코가 막혀서 그런거다. 코가 막혀서. 나래는 흘러야 할 눈물 대신 차오르는 콧물을 들이 마시며 짜증을 냈다.


***


저녁 6시.

알바하는 편의점에서 낮 시간동안 나온 폐기 삼각 김밥 두 덩이와 바나나 빵, 오래된 라면 따위를 봉투에 주섬주섬 담아서 방에 돌아온 글고은. 우선 현관에 나래의 신발이 없는 것에, 그리고 자신의 방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는 것에, 순간 다른 집에 들어온 줄 알고 당황했다.


정리 된 식탁 위에는 나래가 남긴 메모지가 있었다.


- 고모. 어제 고모 생일이었는데 내가 너무 고생시켜 드린 것 같아 미안해요. 밥 잘 먹었고요, 저 이제 집에 가요. 어젠 정말 정신없었죠? 그래도 걱정 하지마세요 전 강하니까. 그리고 고모. 고마워요.


“짜식… 다 컸네. 정말 죽도록 힘들텐데…….”


글고은은 아기자기한 손글씨 메모지를 냉장고 문에 자석으로 붙였다. 마치 있지도 않은 딸의 백점짜리 시험지를 걸어놓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의 나래가 얼마나 힘들지는 감히 추측할 수도 없다.

하지만 기특한 나래는 무너지기 보다는 맞서 싸우기를 선택한 모양이다. 그 정신이 아니고서는 이 상황에서 이렇게 깨끗하게 정리해 두고 나갈 수가 없다.


글고은은 문득 오빠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이의 생모는 신분 확인이 되었지만, 생부에 관한 정보는 생모가 남긴 말 한 마디 밖에 없었다고. 그런데 그 정보라는 것이 묘한 것이라고.


“이 아기의 생부는 저 위의 세상 사람이에요. 아빠에게 맡기면 아기의 미래는 걱정 없겠지만, 아빠와 무관히 주변이 용납하지 않겠죠.”


라고 했다지.

하늘나라는 아니라는데, 분명 ‘위’에 사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리고 아빠의 의지와 무관히 단지 ‘주변’ 때문에 아이를 아빠에게 줄 수가 없다는 사연이 대체 무얼까?


글쟁이 본능에 충실하여 노벨클럽의 글고은과 정유나는 나래의 입양 당시, 그 문제를 두고 거의 소설 두 권 어치의 스토리를 엮기도 했었다. 하지만 죄 없는 아기를 두고 그런 장난 하는 건 미안한 일이라, 도중에 때려 쳤지.


글고은은 문득 그 때 끼적대던 노트 페이지들을 눈앞에 떠올랐다.


가능성 1. 대한민국인 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만한 정치계의 대물의 실수. 대통령? 총리? 국회의장?


가능성 2. 대재벌 총수가의 나이 어린 도련님의 실수.

드러내놓고 이 꼬마 망아지 녀석의 자식이다. 라고 할 수 없을 테니까….


가능성 3. 군 장성 계급의 실수. 저 하늘의 별인데, 불륜으로 생긴 아이를 어떻게 가족들이 받아 주겠노.


가능성 4. 식물인간이 되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하늘나라 근처에 있는데, 가족들이 아기까지 돌볼 여력이 안 되는 거다.


아무튼 아빠에게 맡기면 아이의 미래가 걱정 없다는 말로 짐작컨대 돈 걱정 없는 집안 남자라는 것이다.


“…….”


아무튼 지금 분명한 건, 나래가 갈수록 추남추녀의 한 씨 집안의 DNA에 반하는 아름다운 성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꼭 어제와 같은 사고가 없었다 할지라도. 결국 언젠가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래는 마치 유나의 고교 시절을 보는 것 같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그런 아리따운 아가씨를 작고 못생긴 자기 집안의 피라고 우기는 것도 사실 인간의 양심으로 할 짓이 아니겠지.


“결국은 거쳐야 할 일이었어….”


***


그 때 나래는 이제 거의 표백된 표정으로 컴퓨터에 앉아 멍해져 있었다. 국번은 일본. 지역번호는 아키다. 아키다가 뭐 하는 지역인지도 검색했다. 일본의 북서부의 현. 우리나라로 치면 강원도 두메산골 분위기의 지역인 모양이었다. 만약에 정말로 그 번호가 생모에게서 온 번호라면, 그녀는 그 커다란 섬나라의 그런 시골 외진 지역에서 살고 있다는 것인가?


차라리 하나둘 치킨 전화번호가 생모의 번호일까? 치킨집 사장이라던가….


하지만 나래는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가슴은 덤프트럭에라도 깔린 듯 갑갑해져 호흡도 힘에 벅찼고, 온 몸은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엄지는 액정에 뜬 그 문제의 전화번호를 선택하고 눌렀다. 생모가 아니라면, 잘 못 걸려온 전화로 끝내면 그만이니까. 오히려 더 마음이 가벼워 질 것이다. 그 국제전화의 주인이 생모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 통화 버튼을 누른 것이다.


통화 연결 음이 괴기스럽게 늘어진 음원처럼 들렸다.

그대로 영원히 아무도 받지 않을 것 같았고, 어쩌면 내심 그러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하이. 모시모시. 야마베 데스.”


뭔 소리래. 나래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면서 그대로 꽁꽁 얼어붙었다. 간드러지는 여자의 목소리다. 그냥 대 놓고 일본 사람인가?


“모시모시? 도나타 사마 데스까?”

“아, 저…….”

“……?”

“저……, 어제 이 번호로 전화가 와서….”


납빛 같던 나래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냥 일본인거고, 그냥 일본인인거다. 게다가 일본말은 못 알아듣겠고 할 수도 없다. 이건 거의 장난전화 수준이 아닌가. 하지만 마지막 한 마디 다음에는 뭐라 되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 꿀꺽


나래는 침을 삼켰다. 딱 한 마디 아는 일본말 ‘스미마셍’을 던져놓고 빨리 끊어야 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광광 두드렸다. 그런데,


“나래… 니?”

“!!!”

갑자기 일본 사람이…, 일본 사람이…….

나래는 터질 것 같은 눈물을 참기 위해 온 몸의 힘을 얼굴에 집중시켜 쭈글쭈글한 표정이 되었다. 이건 감동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었다. 터질 것이라 여겼던 분노도 어디로 도망갔는지 모르겠다. 나래는 이를 악물고 고문의 고통을 견디는 사람처럼 그 멈춰진 시간을 버틸 뿐이었다.


“…….”

“…….”


얼마나 서로 침묵을 지켰던가. 그제야 다시 냉정함을 되찾은 나래가 먼저 입을 땠다.


“어제, 왜 전화 했어요?”


그러자, 나래에 뒤지지 않게 덤덤함을 되찾은 ‘그 여자’도 희한한 억양의 한국말로 더듬더듬 이야기를 시작했다.


“길게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나는 아직도 이 일을 ‘죄’라고 여기지 않는다. 너는 나보다 훨씬 좋은 사람들에게 잘 크고 있어. 하지만 한 가지 죄책감을 떨치지 못 한 일이 있어서 전화 했단다. 네 생부는 네가 세상에 있는지 알지도 못 해. 내가 몰래 너를 낳았기 때문이지. 나는 네가 아니라 네 생부에게 죄를 지었다.”


무슨 이런 X같은 소리가 다 있어.

나래는 속이 뒤집히는 역겨움을 느끼면서도 강인한 정신력을 물려받은 덕에 그 일방적인 이야기를 묵묵히 다 듣고 있었다.


“네 생부를 찾아가려무나. 가서 네 모습을 보여주기만이라도 하렴. 내가 바라는 건 딱 그것뿐이란다. 당신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끼게라도 해 다오.”

“…….”

“내가 네게 뭘 부탁할 자격이 없다는 건 안다. 하지만, 아무 죄 없는 네 생부만큼은 살려주지 않으련? 사람 하나 살린다. 셈 치고.”

“……. 아줌마 정말, 이기적이네.”


싸늘하게 식은 나래의 목소리. 하지만 ‘그 여자’는 아무런 타격도 입지 않는다. 이미 그녀는 온갖 거친 세상풍파를 다 겪은 영혼이다. 세상 어떤 종류의 슬픔도 그녀의 앞에서는 힘을 쓸 수 없다.


“그래. 인정해. 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건 인정했어.”

“……. 그래서, 그 불쌍한 생부란 사람은 누군데?”


어느 틈엔가 나래는 존대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역겨움이 목구멍을 틀어막고 성난 영혼이 귀도 틀어막기 직전이었다.


“유성 그룹의 서민용.”


짧은 한 마디였고, 말도 안 되고 택도 없는 한 마디였다.


“뭐?”

“유성 그룹의 5남 서민용. 유성호텔 사장.”


X발 뭐래. 나래는 순간 끊어버릴 뻔 했다. 장난전화 보다 더 장난 같았다. 유성 그룹이면 이 나라 삼대장 대기업중 하나고, 세계적으로도 20위 권 안에 드는 거대한 기업이다. 때로는 인터넷 경제 뉴스 란의 반을 잡아먹을 때도 있는 거대한 로열패밀리. 3남 2녀의 계열사 사장들이 있고, 5남 서민용은 그 중에 가장 늦둥이로 태어난 막내이면서 모든 핸섬 배우들을 그 앞에 무릎 꿇린다는 총각 사장이다. 오죽하면 기업 사장을 사모하는 여성 팬 카페까지 있다.


그 정도까지 되는 사람. 17살 나래까지도 알고 있는 거물.

나래의 반에도 오야지슈미(아저씨취향)의 몇 명이 그 팬 카페 회원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뭐? 라? 고?


***


“그래서 오빠네 부부가 밤 새 펑펑 울었대. 어쩜 애가 그렇게 기특하지?”


다음날 오전 11시 50분.

글고은은 유나에게 전화로 조카 자랑을 늘어놓고 있었다.


나래는 전 날, 퇴근해서 돌아온 엄마 아빠를 마루에 앉으라 하곤 그 앞에서 큰 절을 올렸다. 그리곤 엄마 아빠에게 폭 안겼다고 한다. 감사하다고, 그동안 못 되게 굴었던 것 죄송하다고.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하다고…….


이야기를 전해 듣는 유나까지 코끝이 찡해질 정도니 그 부모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정말, 무슨 애가 그렇게 기특할 수 있지?


“셋이서 그렇게 끌어안고 한참을 울고 났더니, 그제야 나래가 용건을 꺼내더래. 역시 똑똑한 애야.”

“용건?”

“정확히 말하면 요구사항이겠지. 자신의 엄마아빠는 누가 뭐라 해도 당신들이라고. 앞으로도 그건 결코 변치 않을 거며 꼭 열심히 살아서 보답 할 것이지만, 생부는 한 번 보고 지나가겠다는 거야.”

“엥? 생모가 아니라?”

“어제 애가 집 전화 통화기록들을 뒤져서 일본에 살고 있는 생모랑 통화를 했던 모양이야. 그런 것들도 솔직하게 다 털어놓았대.”

“헐! 세상에! 그게 패닉에 빠진 17살이 할 수 있는 일이니? 네 조카 진짜 대단하다! 나 같으면 다 때려 부수고 미쳐 버렸을 거야. 요구사항이고 뭐고 없이 그냥 우오아오으어러~!! 거리고 난리를 쳤겠지. 사람을 벗었을 거야. 그런데 네 조카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냐!? 게다가 생모가 일본에 살고 있어? 나래가 그럼 자기 추리력 하나 믿고 국제전화를 한 거야? 그리고 정말 추리는 맞아 떨어져서 생모가 받았고!”


진심이었다. 유나는 포장하다가 흘리거나 모양이 깨져서 재껴둔 한과들을 주워 먹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나이 39의 자신도 그런 상황에선 도저히 그렇게 이성적으로는 행동하지 못 할 것 같은데….


“암튼! 그래! 그래서 생모랑 통화를 했고, 생모랑은 그걸로 완전히 끝냈대. 서로 평생 볼 일 없을 거고 보고 싶지도 않다고 했대. 하지만 생부의 경우는 상황이 다른가봐.”

“그럼 생부가 누군지는 알았다는 거야?”

“어. 그런데 나래 자기가 혼자 찾을 수 있다고. 한 번 만나고 오는 정도만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더래.”

“아니, 어린애가 혼자서 어떻게 사람을 찾아. 그거 위험한 거 아니야?”

“생모가 주소 같은 걸 자세히 가르쳐 줬나보지. 자세한 이야기는 생부를 한 번 보고 와서 하겠대. 그래도 자신의 아빠엄마는 변함없다고 안심 시켜 주면서 말이지. 위험한 함정 아닐까 사실 나도 조금은 걱정 돼. 그래서 생부를 찾으러 갈 때, 그 날만 편의점 하루 쉬고 가는 길만이라도 함께 해 줄까 싶기도 하고.”

“그럼, 생부는? 정말 하늘에 사는 사람이래? 높은 사람이래?”

“모르지. 만나고 와서 모든 걸 다 말 하겠다니까.”

“그래도 그렇지. 꾸린 가정이 있을 텐데, 애 혼자서 어떻게….”


유나가 이야기에 정신이 팔린 동안 함바집 식사가 도착했다.

글고은도 편의점에 손님들이 와서 통화를 끝내야 했다.


“아무튼 별 일 없으면 이따 저녁에 와. 간만에 뭐 칼칼한거 먹자.”

“오케이. 콜.”


안 그래도 유나는 요즘 정신이 없는 집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오늘 같은 날은 안 그래도 무슨 건수라도 만들어 글고은네 집에 쳐들어갈 참이었다.


‘부유하시고 너그러우신’ 갑계의 동생님께서 유채꽃 필 때 까지 내려와서 좀 즐기시라고. 제주도 별장 키를 부모님께 드린 모양이라.

부모님 댁에 얹혀살고 있는 유나는 내일부터 유채꽃 필 때 까지 제주도에 내려가 있겠다고 짐을 부리시는 부모님의 설레는 모습에서 괜한 죄책감과 자격지심을 느껴 괴로웠던 것이다.


쌍둥이이긴 하지만 장녀는 자신인데, 자신은 부모님께 뭐 하나 해 드리지도 못 하고 얹혀살고 있는 마당에. 잘 나가는 대기업 사모님인 동생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별장들 중 제주도 별장을 턱 하니 부모님께 내어 드린 거니까. 지난해 겨울에는 밍크코트랑 시드니 별장을 내어 드렸고 말이다.


시집도 잘 가, 쌍둥이 아들들도 건강하고 예쁘게 잘 크고 있어. 사위도 완전 착해. 돈도 다 못 쓰고 죽을 만치 많아….

그런데 언니인 자신은 지금 조립식 창고 건물에서 한과 박스를 싸고 함바집 된장찌개 백반을 먹고 있는 것이다. 사실 동생만 아니었으면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소박하고 평범한 생활이라고 만족할 수 있는데. 젠장, 예나 때문에!! 그 미칠 듯한 상대적 빈곤감은 날이 갈수록 유나의 숨통을 옥죄는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괴로운 건, 자신을 바라보며 이젠 더 기대할 것도 없다는 듯한 부모님의 눈빛. ‘너는 어차피 진즉에 포기한 자식이다.’ 하는 그 차가운 눈빛. 그리고 정말로 혼자 살다 죽을 거면 예나에게 잘 보여라고.


“너 같은 것도. 늙으면 그래도 언니라고 적어도 연명 정도는 시켜주지 않겠니? 예나가 네 보험이야. 고마운 줄 알고 잘 보여. 모지리 모지리. 저런 모지리가 있을까! 저런 게 어떻게 내 배에서 나왔을까?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걸 낳았을까?! 예나랑 임 서방 귀찮게 사고나 치지 말고 곱게 살아!”


어머니께 그런 말씀을 들을 때면 열불이 터져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 마당에, 내일부터 집이 빌 터라. 한 편으로는 해방감과 설렘으로 속이 다 울렁거렸다. 저녁이면 글고은과 함께 칼칼한 찌개라도 끓이고 소주 한 잔씩이라도 나누며 마음을 달래야지.


‘난 호텔 레스토랑 같은데서 느끼한 고깃덩어리 칼질 하는 것 보다! 청양고추 송송 들어간 함바집 백반이 훨씬 맛있어! 젠장! 예나 년 처럼 막 굴리지 않은 내 정직하고 건전한 몸과 삶은 내게는 빛나는 승리라고! 그러니 누구도 내게 뭐라 할 수 없어! 우씨 오늘따라 겁나 맛있네!’


유나는 꼬득꼬득 잘 된 밥을 한 입 퍼먹으며 그녀 자신을 토닥였다.

상류층 인간들의 백 만 원 짜리 한 끼 보다, 자신의 소박한 한 끼가 훨씬 기쁜 것이라고. 숟가락을 꽈득 움켜쥐며 가슴으로 외쳤다.

엄청난 일을 겪으면서도 정신줄 꽉 잡고 홀로 전진해 나가는 어린 나래를 생각하며 힘내야지.


그나저나 문제의 로맨스 소설 재료들은 대체 언제 조립을 한다냐~.


***


그 시각, 나래는 다시 빈 집에서 인터넷을 통해 유성호텔 가는 법을 검색 중이었다. 가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당연히 모르겠다.


‘난 고작 17살이라고! 묵지도 않을 호텔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도대체 뭐가 있겠어!’


그래도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 준다는데, 산 사람의 처음이자 마지막 소원을 못 들은 척 하기엔….


‘미쳤어! 이렇게 착해 빠져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래 한나래!’


17살의 염세적 독백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가운데, 화면에 펼쳐진 사진들. 서민용……. 장난으로도 ‘아빠’라는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나래는 그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자신이 그와는 외형적으로 닮은 부분이 거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마흔 둘이나 셋 정도 되었을 그 남자는 분명 섬세한 이목구비를 지닌 엘리트 이미지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어딘가 모르게 어둡고 우수에 차 있는 듯 보였다. 그냥 간단히 표현하자면, 세상사는 재미가 없어 보였다.


자신과 전혀 닮지도 않은 부자 남자가 자신의 생부? 잔뜩 긴장했던 나래는 의자 깊은 곳으로 몸을 푹 가라앉히며 탈력감을 느꼈다.


‘저런 사람이 날 만들었다고? 웃기네~ 그럴 리가….’


나래의 이목구비는 모니터 속의 생부처럼 섬세한 선이 아니라 시원시원한 외국인 모델과 같은 선을 긋고 있었다. 지금의 아빠 엄마와 자신이 완전 딴 사람인 것처럼, 서민용과 자신도 얼굴로 보면 완전 딴 사람인 것이다.

결국 하나의 답만이 남았다.


‘그럼 내 얼굴은 그 일본 아줌마와(생모) 완전 판박이….’


그 정도라면, 서민용과 자신이 어떻게든 서로를 스쳐 볼 수라도 있을 경우. 서민용 측에서 먼저 반응이 나올 것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생모가 그의 하룻밤의 불장난 상대였을 뿐이라면 전혀 기억도 나지 않겠지만. 혹여 정말로 서로 사랑했던 사이였더라면, 서로 얼굴을 마주 했을 때 서민용 측에서 자신을 보고 그냥 넘어가지는 못하리라. 나래는 그 가능성 하나 밖에 걸어 볼 것이 없었다.


문제는 서민용과 어떻게 대면할 수 있느냐이다.

17살짜리가 미국 대통령도 묵은 적 있는 그런 특급호텔에 가서 다짜고짜 사장 좀 보자고. 나오라고 하면 어떨까? 미친 짓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그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을까? 유성호텔은 남산 어귀에 자리한 것 말고도 전국 여기저기에 많이 있다. 그 어디에서 그를 볼 수 있을까? 사장씩이나 되어서 항상 한 군데에만 머물러서 일을 하지는 않을 거고….


나래는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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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화. 하늘이 내린 루저들 15.08.03 845 3 19쪽
1 1화. 일란성 쌍둥이 15.08.03 1,269 14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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