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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로 신대륙의 거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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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식마왕
작품등록일 :
2024.08.21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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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7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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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바야돌리드 논쟁 (2)

DUMMY

[···디에고 제독님이 신대륙 선교의 총책임자를 맡으신다면 10년 안에 복음의 물결이 온 대륙을 뒤덮을 것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디에고 제독님이 어떻게 우상숭배에 찌들어 있던 원주민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셨는지 원주민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어보겠습니다.]


“나, 디에고 님을 알게 된 이후 매일 같이 기도를 드리고 찬송을 부르는 게 일상이 되었다.”

“디에고 님을 알고 하느님이 진정한 신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제 아이티에서는 기독교에 정통하지 못한 사람은 부족장이 될 수 없다.”


이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거 아닌가?


회의를 지켜보던 체사레의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변하고 있었다.


분명 처음에는 원주민들의 정체성에 관한 토론이었을 텐데 어느순간 디에고 제독이 얼마나 뛰어난 선교사인지 찬양하는 시간으로 바뀌어버렸다.


하지만 눈앞에서 야만스러웠던 원주민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고 삶이 은혜로워졌다는 간증을 하고 있는데 이걸 어떻게 끊을 수 있겠는가.


“허허허, 역시 그리스도의 사랑은 대단하군요. 저런 야만족들조차 어엿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다니.”

“드럽게 말귀를 못알아처먹는 이슬람 놈들에 비하면 저들이 더 사람답지 않습니까?”

“그러고보니 디에고 제독도 개종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새신도가 아니었습니까?”

“허어···본인도 신앙의 길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면서 수십만의 원주민들을 전도하다니. 역시 성령이 역사하시면 세상에 불가능한 일 따위는 없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틀렸다. 참관인 자격으로 앉아 있는 인간들은 이미 흐뭇하게 원주민들의 재롱잔치를 구경하는 중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같은 하느님의 자녀 어쩌구 해도 그 누가 저런 야만인들을 자신들과 평등하다고 여기겠는가.


여기 있는 귀족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의 우월한 문화가 야만족들을 무릎꿇렸다는 사실 그 자체에 우월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디에고를 응원하는 마음도 사실 이 우월감의 연장선이나 마찬가지다.


동방에서 온 귀족이 기독교에 감화되어 개종한 뒤, 누구보다 열심히 선교에 앞장서서 새로운 대륙에 신앙을 전파하고 다닌다?


그야말로 기독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우월하고 올바른 진리라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게다가 따지고 보면 지금 이 흐름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게 아니었다.


기독교의 총본산인 교황청이 이 흐름에 자연스레 올라타는 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


오히려 발만 잘 걸치면 교황의 권위를 한층 드높일 수 있을테니 엄청난 이득이라 봐야하리라.


어차피 여기서 체사레가 반대해봐야 다음에는 이사벨이 직접 교황에게 신대륙에서의 선교 보호권을 요청할 게 뻔하다.


상식적으로 이런 중차대한 사안을 여왕과 아무런 교감없이 내지르지는 않았을 테니까.


‘전부 협의가 된 사안이라면 왕실이 공식으로 요구하기 전에 이쪽에서 먼저 움직이라는 뜻인가.’


확실히 세속 군주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보다는 교황이 선제적으로 필요한 조치를 취해주는 쪽이 그림이 더 아름답게 나오긴 할 것이다.


다만 이렇게 되면 가장 큰 이득을 얻어가는 게 누가 될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지 않나.


‘영악하군.’


교황이 예상한 그대로다.


디에고는 단순히 여왕의 도구가 아니라 신대륙을 통째로 집어삼킬 수도 있는 능력을 갖춘 요주의 인물이다.


만약 저 자가 정말로 수백만의 인구를 자랑하는 원주민 국가에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을 휘어 잡는다면?


지금까지 드러난 정보로만 판단했을 때는 결코 단시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나, 체사레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을 받았다.


이렇게까지 요란하고 화려하게 일을 터트린 이상 저자는 믿는 구석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어쩌면 그 원주민들의 국가에 대해서 이미 많은 정보를 수집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아니, 십중팔구는 이미 정보수집을 끝마친 상태임에 틀림없다.


결국 어떤 각도로 고심해 봐도 나오는 결론은 하나.


“이 자리 덕분에 신대륙의 상황을 잘 알게 됐으니 성하와 논의해 긍정적인 결론을 내보도록 하겠습니다.”


교황과 보르자 가문이 가지고 있는 원대한 비원의 달성을 위해서는 아직 카스티야 왕실의 견제를 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니 이 결정으로 카스티야의 관심이 오롯이 신대륙에 쏠리게 된다면 보르자 가문으로서도 나쁠 건 없었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오히려 좋다.


디에고가 더 부각되면 부각될 수록 카스티야의 관심은 이탈리아가 아닌 저 서쪽으로 쏠리게 될 테니까.


보르자 가문이 주도하는 통일 로마냐 왕국의 수립.


체사레는 디에고가 교황과 자신이 그리고 있는 원대한 그림의 한 조각이 될 수 있겠다는 예감을 받았다.





* * *




카스티야 왕실과 교황청의 의견이 일치하고 여기에 그럴싸한 명분까지 더해지자 모든 일이 번개불에 콩 볶아먹듯 빠르게 진행 되었다.


[신대륙 원주민들에게도 이성과 문화가 있으며 이들 또한 우리와 같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교황청의 이름으로 선언한다. 이에 따라 원주민을 노예로 삼는 행위를 성서의 말씀에 위배되는 불법으로 간주한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카스티야-아라곤의 왕 이사벨과 페르난도에게 선교 보호권을 부여한다.

카스티야-아라곤은 신대륙에 참된 기독교 신앙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야하는 의무를 지며 이를 위해 선교 활동을 직접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은 히스파니올라 제독 돈 디에고 리를 대리인으로 삼아 선교 보호권을 집행한다. 히스파니올라 제독은 국왕을 대리해 신대륙에서 성직자를 임명하고 교구를 설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며 선교에 임하는 모든 이들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


그럴싸한 직위를 통해 권한을 확보했으니 다음에는 실리를 거머쥘 차례.


바야돌리드 회의가 치러지는 동안 투자자들을 왕창 끌어모아 몸집을 불린 나는 <디에고 신대륙 회사>라는 거대 주식회사를 정식으로 출범시켰다.


그리고 회사의 돈을 아낌없이 써서 각종 농기구와 관개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한 온갖 자재들을 사들였다.


추가로 농사를 지을 거라는 명목으로 대량의 소들을 히스파니올라로 옮기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당연히 개중에 일반 소가 아니라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뒤져서 찾아낸 우두에 걸린 소도 있었다.


우두에 걸린 소의 수포에서 고름을 체취해 간단한 천연두 백신을 만들기 위해서다.


물론 간단하다고는 해도 우두에 걸린 소의 개체수를 유지하거나 위생에도 신경을 써야 하니 이게 말처럼 쉽기만 한 건 아니다.


그러나 천연두가 퍼져서 부족 단위로 몰살을 당하는 위험에 비하면 이 정도의 리스크 따위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추가로 농사 운운 핑계를 댄 건 천연두 백신을 만든다고 말해봐야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소의 고름을 통해서 천연두를 막을 수 있다고 하면 그걸 믿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정신병자 취급을 받지 않으면 다행일 지경인데 굳이 말해 무엇하랴.


어차피 원주민들을 통해 결과로 보여주면 이런 건 다 알아서 퍼지게 되어 있다.


기존에는 자금의 압박 때문에 감히 시도할 엄두도 내지 못했으나, 이제는 당분간 돈 때문에 걱정할 일은 없어졌다.


이게 다 우리 욕심많은 귀족 고객님들 덕분이니 성의표시 겸 msg를 한통씩 보내주었는데 이게 또 기가 막히게 효과가 좋았다.


앞으로 회사의 VVIP 투자 고객들에게는 사은품으로 msg를 나누어주도록 하자.


아무튼 결과적으로 앞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일 기반과 그 돈을 벌어다 줄 원주민들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벽은 마련 됐다.


거기에 무려 교황이 인정한 선교라는 명목으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는 명분까지 손에 넣었으니 더는 거칠게 없다.


나는 이사벨과의 면담을 통해 2년 간 사탕수수 농장을 아이티와 쿠바 전역으로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들려주었다.


이어서 작업이 끝나는 대로 신대륙 본토에 상륙할 테니 그동안 선교사들을 보호하기 위한 군대를 편성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사벨은 확실한 수익만 들여온다면 어렵지 않다는 확답을 주었고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그리고 완전히 채비를 마치기 전.


“감사합니다. 추기경님께서 힘써주신 덕분에 모든 게 잘 풀렸네요.”

“성직자로서 복음 전파를 위해 힘쓰는 제독님의 진심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성하께서도 당연한 결정을 내렸을 뿐입니다.”

“그렇군요. 추기경님게 실망을 드리면 어쩌나 했는데 만족하셨다니 다행이네요.”


나는 스스로 똑똑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은연중 깔려 있고 그런 자신이 놀아난 거 같으면 조금 기분이 상한다.


이득이나 손해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능력있고 똑똑한 내가 다른 사람의 의도에 이용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아냐면 나도, 내 연수원 동기들도 대부분 다 그랬거든.


“추기경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정보도 드렸고, 제 능력을 증명도 해보였으며, 교황청에 이득이 가는 방향으로 논의가 흘러가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어쩔텐가.


나는 진짜로 교황청 정상화를 위해 모든 걸 다 해줬는데 다 해준 게 문제라는 답을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유능하기 때문에 조금 긁혔다고 해서 대승적인 판단을 그르치지 못한다.


그게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상당히 직설적으로 말씀하시는군요. 그럼, 우리 그냥 이제부터 허례허식은 내려놓고 진솔하게 속내를 털어놓기로 할까요?”

“좋습니다. 솔직히 이미 서로가 뭘 원하는지 다 알고 있는데 빙빙 돌려서 말하면 시간만 끌리지 않겠습니까.”

“하하, 이거 참 제 예상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군요. 이런 경우는 흔치 않은데 나름대로 신선한 기분입니다.”


한 차례 의미심장하게 웃어보인 체사레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제가 제독님이 신대륙 전역에 영향력을 뻗치려는 야망가인 줄 알았다면 전략을 조금 다르게 가져갔을 겁니다.”

“그렇겠지요. 저도 제가 이겼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전에 가지고 있는 정보의 차이였을 뿐이죠.”

“···정보의 차이요?”

“추기경님이 속한 가문의 입장을 고려하면 카스티야의 눈이 서쪽으로 쏠리면 쏠릴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카스티야 왕실과 사이가 나쁘지 않다고 해도 어제의 친구가 내일의 원수가 되는 건 한순간이니까요.”


이번 회의를 통해 지켜본 결과 체사레와 갈라서거나 그를 찍어내는 것보다는 협업관계로 가는 게 더 이득이라는 판단이 섰다.


내 노림수를 다 알고 본인이 이용당한 걸 알고도 대승적 판단으로 최대한 빠르게 이를 승인한 것만 봐도 그의 능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제 스무살이 된 청년이 이 정도라면 저 재능이 만개했을 때 어떤 모습일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가.


옆에 있는 인재라고는 꼴랑 콜럼버스나 벨라스케스 같은 인간들이 전부인 나로서는 교황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하지만 그런 내 마음과는 별개로 정곡을 찔린 체사레는 이번에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로서는 이해가 잘···.”

“추기경님이 조건만 맞으면 저를 포섭하려고 한 이유도 저것 때문이 아닙니까. 신대륙과 지중해, 이탈리아는 영역이 전혀 겹치지 않으니까요.”

“······.”


이 정도면 나는 다 알고 있다고 돌직구를 박아버린 거나 마찬가지.


체사레는 이놈은 대체 뭐지 하는 표정으로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세속적인 권력을 확대하려 한 교황은 발에 채일만큼 많지만, 자신의 가문을 이용해 이탈리아 전역을 차지하려 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외가 있다면 그건 바로 현 교황인 알렉산데르 6세 한명뿐이지만, 그도 아직 본격적인 야심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툭 튀어나온 동양인이 자신들의 속내를 제대로 꿰뚫어 보았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설마 여왕 폐하께서 저를 떠보라고 하셨습니까?”

“아니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여왕 폐하의 충실한 신하이기는 하지만 이번 건은 별개입니다.”


이사벨이 내 제일가는 후원자라는 건 지금도 앞으로도 변하지 않겠지만, 거래처를 하나만 가지고 있는 회사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불보듯 뻔한 법.


고객의 풀을 넓히고 판로를 다각화 하는 건 어떤 사업에서도 필수적으로 해야만 하는 일이다.


“저희 둘만 있으니 말씀드리는 거지만 저는 보르자 가문이 이탈리아를 통일하든 말든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중요한 건 지금처럼 신대륙에서의 제 권리와 입지를 교황청이 인정해주는 거죠.”

“···유럽의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시다?”

“애초에 관심이 있다고 끼워나 주겠습니까? 아시아에서 굴러먹다 온 외국인 귀족을.”


지금 내가 이렇게 파격적인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는 이유도 실상은 내가 누구보다 자신의 주제를 잘 알고 선을 잘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영향력의 확대는 오롯이 신대륙에서만.


그렇게 얻은 돈을 충실히 국내로 들여오고 카스티야 본토 내에서는 눈에 띄는 지위나 실권을 탐내지 않는다.


즉, 아무리 내가 잘나가는 거 같아도 본토 귀족들의 눈에는 나는 그냥 돈 잘 벌어오는 복사기, 혹은 2군 리그의 패왕에 지나지 않는다.


1군에서 고고하게 알박기 하고 있는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할 일이 없으니 굳이 견제할 필요는 없다고 여기는 거겠지.


“확실히 말씀대로긴 하지만 겹치는 영역이 없다는 건 도움을 주고받을 영역이 적다는 뜻도 됩니다. 저희야 제독님께 명분이라도 쥐어줄 수 있지만 제독님이 저희에게 줄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요? ”

“신대륙에서 들어올 막대한 부. 그리고 언젠가 카스티야 왕실이 체사레 님을 견제하려고 할 때 최소한 한번 정도는 중재를 해드릴 수 있겠죠.”


보르자 가문이 진짜로 이탈리아를 꿀꺽하려고 한다면 나폴리를 노리고 있는 카스티야와 관계가 미묘해질 수밖에 없다.


체사레나 교황이 이를 모를리는 없을 테고 아마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 여기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지금이라면 무리지만 3, 4년 뒤의 나라면 그 시기를 조금이나마 늦춰줄 수 있다.


“···저희쪽에 바라는 건?”

“지금처럼 제가 신대륙에서 계속 확장할 수 있는 종교적인 명분을 주시면 됩니다.”

“······.”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후원해주는 이상적인 협력 관계.


유럽에 뿌리를 둔 집단이라면 아무리 동맹을 맺는다 해도 결국 서로의 욕망이 충돌하는 지점이 생기기에 절대 오래갈 수 없다.

그러나 원하는 영역이 전혀 겹치지 않는 나와 보르자 가문이라면 이 구도를 장기간 유지하는 게 가능하다.


체사레는 눈을 감은 채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이내 눈을 뜬 그가 다소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저희 가문에 대해 상당한 조사를 하셨을 테니 아시겠지만 저에게는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라는 여동생이 있습니다. 유럽 제일의 미녀라는 칭송이 자자할만큼 아름다운 아이죠.”


뭐야? 왜 갑자기 묻지도 않은 가족이력을 읊고 있는 건데.


설마하니 자기 여동생이랑 한번 만나보기라도 하라는 건가.


조금 뜬금없는 제안이기는 해도 유럽 제일의 미녀라고 하니 솔직히 한명의 남자로서 궁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럼 못이기는 척 한번 만나만 보···.


“그 아이는 2년전, 13살이 됐을 때 스포르차 가문의 조반니 스포르차와 결혼했습니다. 가문을 위해서였죠.”

“······예?”


지금 나랑 장난하나.

설마 지금 유부녀랑 뭐 어떻게 해보라는 소리를 하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15살 유부녀라고 하니 뭔가 굉장히 이상하게 들리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조승상님과는 다르게 유부녀라는 세글자에 흥분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아아,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분명 결혼을 하긴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애석하게도 그 아이의 남편인 조반니 스포르차가 남성으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으니까요. 아마 1, 2년 안에 혼인이 무효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요?”

“별 뜻은 없습니다. 그냥 앞으로 같이 협업을 하실 분께 제 가족 이력을 들려드렸을 뿐.”


아, 그렇구나. 정말 아무런 의도 없이 가족소개를 했을 뿐이구나?


이거 참 본의 아니게 오해를 할뻔 했잖아. 하.하.하.


한 차례 어색한 웃음을 주고 받은 나는 msg가 든 통을 꺼내 살짝 흔들어보였다.


“혹시 식사하셨습니까?”

“말로만 듣던 마법의 향신료를 맛볼 수 있다면 밤새도록 눌러앉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그럼 저녁이나 같이 하면서 상세한 논의를 해볼까요?”


이걸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여동생 이야기는···내 멘탈을 흔들어 보려던 고도의 심리전이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 * *



신대륙 원주민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포용한다는 역사적인 결정은 이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다만 디에고를 제외한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젠장! 이대로라면 카스티야가 저 광활한 신대륙을 모조리 집어삼키게 생겼잖아!”

“그래도 카스티야에서 얻어낸 정보 덕분에 인도의 왕조들과 더 효과적으로 교역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뭐하냔 말이다! 놈들은 저 끝도 없을 정도로 드넓게 펼쳐진 대륙에서 무한대로 설탕을 생산해 들여올텐데.”


사실 서인도는 인도가 아니라 사탕수수를 비롯한 미지의 가능성으로 가득찬 신대륙이라는 사실에 포르투갈의 복장이 뒤집어졌다.


당장 설탕만 해도 짜증이 나는데 저토록 넓은 땅이라면 은광이나 금광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게 광활한 땅은 우리에게도 있지 않습니까?”

“···아프리카를 말하는 건가?”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카스티야가 신대륙을 가져갔다면 포르투갈에게는 아프리카가 있다.


북부는 오스만이 장악하고 있어 쉽사리 엄두를 낼 수 없으나 끝도없이 펼쳐진 남쪽은 확실히 아직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상태다.


“그러면 뭐하나. 거기가 정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면 악귀 같은 오스만 놈들이 이미 개척을 했겠지.”

“하지만 그쪽도 원주민들이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병에도 잘 걸리고 허약하다는 신대륙 원주민들과는 다르게 강하고 튼튼한 검은 피부의 짐승들이.”

“···확실히······.”


교황은 신대륙 원주민들은 하느님의 자녀라고 인정했지만, 아프리카에 있는 흑인들은 그 범주에 들어가 있지 않다.


“아무리 신대륙이 넓다 한들 고작 수십만의 원주민들로는 금방 노동력의 한계가 올 겁니다.”


노동력이 부족한 이들에게 풍부한 노동력을 제공할 수만 있다면 이 또한 훌륭한 사업 수단이 되는 건 마찬가지.


실제로 포르투갈은 이미 거의 50년 전부터 라고스에서 아프리카 노예를 경매로 판매하고 있었다.


다만 아직까지는 가정이나 일반 농업의 노동력으로 쓰이는 게 전부였으나, 새로운 시장이 개척된 이상 앞으로는 수요가 폭등할 수도 있지 않나.


굳이 카스티야가 아니더라도 잉글랜드나 프랑스 등 새롭게 신대륙에 진출하려는 나라는 전부 고객이 될 수 있다.


“이것만큼은 선수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당장 아프리카 노예들을 대랑으로 수급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도록.”


꿩이 아니면 닭을.


아프리카 서해안에 위치한 엘미나 성이 금 무역이 아닌 노예 무역을 위한 거점으로 변모하는데는 1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작가의말

오늘은 분량이 거의 2편 같은 1편이 됐네요 즐거운 추석 보내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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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동방의 풍운아 +12 24.08.28 4,762 226 13쪽
4 극극극 극사실주의 +19 24.08.27 5,414 214 17쪽
3 주머니 속 기계장치의 신 +27 24.08.26 6,237 221 15쪽
2 높으신 분? +19 24.08.26 7,487 242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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