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건 강화!
“ 보스를 잡으려면 체력과 공속을 높이는 물약에 들어가는 재료가 필요한데, 사냥 가능하시죠? ”
난 지금 당장 필모 아저씨에게 무한 파밍을 시킬 생각이었다.
요리와 농사엔 빙빙이, 사냥엔 필모 아저씨. 아직 광석을 캘 수 있는 광부를 구하진 못 했지만 일단 지금 가장 급한 2개를 해결한 셈이었다.
“ 아니요. 그건 안 되겠습니다. ”
그런데 필모 아저씨가 단칼에 나의 부탁을 거절했다.
“ 왜죠..? ”
감히 내가 시키는 일에 안 된다고 한 길원은 처음인지라 난 적잖이 당황했다.
그렇다고 나보다 연세 많은 분께 함부로 말할 수도 없고, 이거 참 여러모로 곤란했다. 이래서 내가 힐러엔 나보다 어리고 상큼한 소녀를 선호했던 거다.
“ 보시다시피 제가 입고 있는 건.. 오르콘 갑옷 5강입니다. ”
“ 오.. 뭐요? 그거 처음에 마을에 오면 이벤트로 나눠주는 기본 갑옷 아니에요? ”
안 입은 지 하도 오래된 갑옷이라 이름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서버에 처음 접속했을 때 로라가 나타나서 퀘스트를 주겠다면서 함께 무기상에 가서 공짜로 얻어 왔던 기억이 있었다.
그 다음에 레노라 갑옷이 나왔고, 마지막으로 바로 내가 입고 있는 필로트 갑옷이 종결템으로 출시됐다. 한 마디로 지금 필모 아저씨의 장비는 완전 쓰레기란 말이었다.
이 아재는 나와 반대로 오로지 컨트롤로만 이 자리까지 올라온 무과금 고인물이었던 거다.
“ 왜 그 갑옷을 아직도 입고 계세요...? ”
“ 실은 전에 몸 담고 있던 길드가 있었는데 그 길드에서 탈퇴하면서 가지고 있던 템들을 전부 삭제하고 왔습니다. ”
이 게임상에서 무기와 장비들은 전부 귀속템이라서 본인이 아니면 함부로 남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 그래서 아재는 길드에서 파밍해서 맞춰준 장비들을 파괴하는 걸로 인연을 정리한 거다.
“ 거의 맨 몸으로 나온 거네요? ”
“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 ”
우리 무적 길드는 탈퇴하는 길드원이 솔플을 할 수 있도록 최소한 갑옷 정도는 가지고 가게 해줬는데, 아저씨가 있던 길드는 너무 인정이 없는 거 같았다.
예전에 우리 길드에서 비싼 무기와 장비를 맞추고 탈퇴한 길드원이 다른 길드에 들어가서 우리의 뒤를 쳤던 사태를 보면 또 그게 현명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 점은 이번 운영에 참고해야겠다.
“ 그럼 우선 갑옷부터 맞춰야 겠네요. 그러려면.. 광산에서 철이랑 다이아몬드를 캐야 하는데··· 혹시 부직업이 광부이신 분···? ”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우리 길드가 성장하려면 빠른 시일 내에 광부를 뽑아야겠다.
“ 전 부직업이 사냥꾼이라서요. 대장님은요..? ”
필모 아재가 나한테 물었다.
“ 전 길마인데요..? ”
내가 아는 한 길마가 광산에 처박혀서 광질을 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자꾸 예전 얘기를 해서 미안하지만 나때는 길드원들이 열심히 캐온 재료들도 딸각 딸각 강화만 하면 됐었다.
꼬우면 네들이 용캐 뽑아서 길마를 하든가.
“ 그럼 광부를 찾아야겠네요.. 그 전까지는 곰을 잡아서 레노라 갑옷이라도 입는 걸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
“ 그 의견 아주 좋습니다. ”
RPG 고인물이 들어와서 그런지 안건이 막힘이 없이 바로 바로 정해져서 좋았다. 드디어 예전 우리 무적 길드의 실제적인 전략가였던 부길마를 대신할 인물을 찾은 거 같았다.
앞으로 모든 결정은 필모 아저씨가 하게 하고 난 뒤에서 바지 사장 노릇을 하며 쉽게 갈 수 있을 거다.
***
그날부터 필모 아저씨는 곰가죽 파밍조로 투입되어 하루에 17시간씩 곰을 잡아왔다. 이 아저씨가 연세가 많으셔서 걱정이 많았는데 은근 근성이 있는 거 같았다.
그렇게 일주일 간 곰가죽을 모은 덕에 필모 아저씨와 빙빙이가 한번에 갑옷 강화에 도전할 수 있었다.
우린 마을로 내려가 대장간에 가서 대장장이 주석씨 앞에 옹기종기 모여 섰다.
“ 잘 들으시오! 1강은 90%, 2강은 85%, 3강은 80%, 4강은 70%, 5강은 60%, 7강은 50%, 8강은 40%, 9강은 30%, 10강은 20%, 그리고 11강은 10%, 이 후부턴 확률이 1%로 고정되어 강화가 진행되오! ”
주석씨는 전형적인 투 머치 토커로 묻지도 않은 확률을 쭉 읊었다. 한 마디로 가면 갈수록 첩첩산중이란 말이었다.
“ 적어도 사람 구실 하려면 10강 이상은 가야 하니까 다들 준비하세요. 일단 레노라 갑옷 30개씩 만들어서 트라이 해보고 안 되면 추가하는 걸로 할 게요. ”
우리의 목표는 레노라 갑옷 10강이었다. 1강을 올릴 때마다 곰가죽이 3개씩 들어가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1000개도 많은 게 아니었다.
“ 다 말았습니다! ”
“ 좋습니다. 그럼 다들 잘 들으세요. 이 강화란 말입니다. 박자가 중요합니다. 한 번 따라해 보세요. 딱! 따악! 딱! 따악! ”
강화도 해본 놈이 안다고 난 그들에게 이 서버 최고 축용캐의 강화 잘 하는 비법을 손수 전수해줬다.
“ 딱! 따악! 딱! 따악! ”
나의 선창에 필모 아재와 빙빙이가 입을 모아 합창했다.
절대 안 할 거 같은 필모 아재도 이렇게 열심히 참여하시는 걸 보니 이제야 우리가 진정한 한 팀이 된 거 같았다. 이제 시작이었지만 우리 무적 길드의 미래가 밝았다.
“ 그 박자 잊지 마시고 일단 7강까지 만들어 두세요! ”
난 그들이 작업을 할 수 있게 뒤로 빠져 기다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주석씨와의 치열한 공방전을 시작했다.
< 강화에 성공하였구려! 축하하오! >
미친듯이 들리는 강화음에 내 도파민도 폭발할 거 같았다.
내가 저 소리를 들으려고 매일마다 길드 창고를 털어서 강화쇼를 벌였었는데, 지금은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본장비가 터지면 복구를 할 수가 없어서 가만히 구경만 해야 했다. 우리 길드에 5성급 광부가 들어오기 전까지 난 시도조차 안 할 거다.
“ 대장님! ”
잠시 후, 빙빙이가 해맑은 표정으로 달려왔다. 결과가 좋은 모양이었다.
“ 7강 몇갠데?! ”
“ 저 7강 무려 17개 만들었씁니다! ”
“ 잘했어, 빙빙아! ”
30개를 트라이 해서 7강 17개면 얘도 나만큼 운이 좋은 축캐였다. 내가 우리 길드에 귀한 보물을 데리고 온 거다.
그 뒤를 이어 필모 아저씨가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워낙에 표정이 한결 같은 양반이라 결과를 짐작할 수 없었다.
“ 아저씨는 몇갠데요?! 궁금해서 현기증 나니까 빨리요! ”
“ 5개요··· ”
“ 예..? ”
평균회귀론에 따라 우리 길드에 축캐와 망캐가 동시에 들어왔다. 근데 왜 빙빙이가 축캐고 아재가 망캐인지 모르겠다.
빙빙이는 하루 종일 농사만 지어서 갑옷은 필요없을 텐데···
“ 그럼. 10강 트라이는 빙빙이부터 하자! 지금부터는 내가 직접 지휘해줄 테니까 내 신호에 맞춰서 누르는 거야. 딱! 하면 바로 눌러! ”
“ 예! 대장님! ”
“ 자, 8강부터 시작한다! 딱! 딱! 따악!!!!!!! ”
신들린 나의 지휘에 맞춰 빙빙이는 열심히 주석씨와 일대일 전면전을 벌였고, 그 결과 9강을 3개나 뽑았다.
원래 안전하게 하려면 9강을 최소 5개 이상 킵해두고 시작해야 했지만 필모 아저씨에 비하면 꽤나 선방한 거다.
“ 그럼.. 9강 하나는 지금 착용하고 나머지 2개로 해보자! ”
“ 네! ”
“ 그 전에 다들 모여서 눈 감아! 기도부터 한다! ”
10강 트라이를 하기 전에 우린 원으로 모여 저 하늘에 계신 신에게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 제발 10강 하나만 주세요! 제발!!!!!! ”
“ 제발!!!!! ”
빙빙이는 광신도처럼 하늘을 향해 두 팔을 올리며 날 따라 외쳤다. 얜 그냥 내가 하라고만 하면 죽는 시늉까지 맛깔나게 할 거 같았다. 자고로 대형 길드에 소속되려면 이 정도 연기력은 필수였다.
“ 자, 하나하나에 목숨을 걸고 누른다! 시작! 딱!!!”
“ 딱!!! ”
그런데..
[ 강화에 실패해서 장비가 파괴됐구려! 미안하게 됐수다! ]
순간 열이 뻗쳐서 주석씨한테 죽빵을 날릴 뻔했다.
곰가죽을 그렇게 처먹어 놓고 미안하면 다냐!
이제 남은 9강은 딱 1개였다. 이 하나에 일주일 무과금 엔딩이 나느냐, 아니면 레노라 갑옷 10강 오너가 되느냐가 달려 있었다.
“ 괜찮아. 아직 한 발 남았어! 다들 갑옷 위에 손 모아! 기합을 넣는다! 흐아압!!! ”
내 말에 두 사람은 내 위에 손을 올려놓고 기합을 모았다.
원래 강화는 이렇게 오두방정을 떨며 진심으로 임해야 하늘에서도 우리의 절실함을 알고 축복을 내려주시는 거다. 그냥 마우스질 몇 번 딸깍 딸깍해서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놈은 망하는 게 맞았다.
축캐가 되고 싶거든 그만큼 정성을 보여야 할 거다!
“ 지금이야! 따악!!! ”
그리고 빙빙이가 마지막 한 발을 날렸다.
< 강화에 성공하였구려! 축하하오! >
“ 빙빙아!!!!!!! ”
“ 대장님!!!!! ”
우린 서로를 얼싸안고 방방 뛰며 좋아했다. 지금 이 순간 난 100만원을 시원하게 현질해서 회피율을 20%로 맞췄을 때보다 훨씬 뿌듯했다.
이게 바로 강화의 손맛이었다. 내가 이 맛에 산다!!!!
“ 추..축하한다··· ”
그리고 뒤로 암울한 필모 아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우리에겐 커다란 산이 하나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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