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불씨를 지피는 아궁이

글에 관해


[글에 관해] 자아도취와 자기혐오의 사이

글을 쓰노라면 가끔 아니, 종종, 아니아니. 꽤나 높은 확률로 스스로의 글에 빠져들 때가 있다. 스스로가 이만큼이나 쓴다는 사실에 도취 되어서 ‘캬, 명문이다.’ 혼잣말 하고, 글을 올린다. 독자들이 자신의 생각에 동의를 표하길 바란다.

자신의 글을 보노라면 가끔, 아니, 종종, 아니아니. 제법 높은 확률로 스스로의 글에 자괴감을 느낄 때도 있다. 스스로가 이따위밖에 쓰지 못했다는 사실을 비관해서 슬럼프가 찾아온다. 손이 자판을 떠난다. 또는 억지로 어떻게든 써내고, 그 불만족스런 결과물을 여기저기 기워서 올린다. 그리고 불안에 떤다. 누군가 손가락질 하지 않을까.


무슨 약에라도 취한 듯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붕붕 떠다니다가 순식간에 나락으로 곤두박질 친다. 덤덤하게, 무소와 같이, 거센 바람에도 끄떡 없는 바위와 같이 꾸준하게 써나간다면야 얼마나 좋겠냐만, 이 기복은 글을 쓰는 도중에도, 쓴 글을 읽을 때도, 타인의 글을 보던 중간에도, 누군가의 말이나 감상 한 줄에도 느닷없이 찾아온다.


예전에는 자아도취가 많이 찾아왔다. 손가락이 자판을 노닐며 한 시간에 몇 천 자씩 마구 써 내려 갈 무렵, 나는 백지 앞에 두려운 것이 없었다. 금세 검은 활자들로 가득해지는 화면을 보며 희열을 느꼈다. 허나, 나는 지금 백지가 두렵다. 텅 비어버린 공간을 채워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거기에 아무 것이나 채워 넣어선 안 된다는 것이 두렵다. 더욱 두려운 건 그 위에 보이는 졸필들.


기껏 머리를 쥐어짜고, 드문드문 손가락을 놀려 예전의 반도 안 되는 속도로 써내려간 내용들은 한숨을 불러일으킨다. 그 긴 세월 동안 손가락을 놀려댄 결과가 고작 이건가. 고민과 고심을 넘어 자기비하로 응어리 진다. 속 깊이 자리를 잡고 앉은 그것은 백지를 마주 할 때마다 튀어나와 더 없이 답답하게 만든다. 아무리 써봤자 제자리. 대가들의 길은 저 멀리 있는데, 나는 아직도 지하 십 몇 층 쯤을 맴돈다.


그러다 그러다, 그러다 간혹 머리가 훤히 트이는 날이 온다. 손가락이 예전 그 날처럼 바쁘게 춤을 추고, 한 없이 가라 앉았던 기분이 끝 없이 솟아오른다. 내가 이만큼 쓴다고 입가를 실룩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글을 써 내린다. 하지만 통재라, 하루만 지나도 숭숭 뚫린 구멍이 보인다.  다시 익숙한 친구가 찾아온다.


괴로운 시간, 높이 올랐다 추락하는 아찔한 경험들을 하면서도 나는 이 길을 간다. 걷고, 또 걷다가 돌아보면 나의 출발점은 어느덧 저 멀리 점이 되어있으니까. 오르고 떨어지고, 정신병이라도 걸릴 것 같은 감정의 요동을 겪었기에, 그걸 밟고 지나갔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


백지를 지도 삼아, 한 번씩 내딛는 타자를 걸음 삼아, 나는 오늘도 걷는다. 오르막과 내리막. 모두가 길일 따름이다.


댓글 0

  • 댓글이 없습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글목록
번호 제목 작성일
19 글에 관해 | 방향이 엇나간 것 같다 18-08-09
18 글에 관해 | 가끔. 아니, 종종. 아니, 자주 이런 때가 있다. 18-07-22
17 글에 관해 | 열패감 16-05-29
16 글에 관해 | 풀이 16-05-27
15 글에 관해 | 드디어 안테나가 섰다 16-04-30
14 글에 관해 | 손아귀 가득 사탕을 쥐었다. 손이 항아리에서 빠지지 않는다. 15-06-13
13 글에 관해 | 주인공을 굴려야하는 당위성 14-11-08
12 글에 관해 | 강박증 *2 14-05-18
11 글에 관해 | 적정선 14-04-29
» 글에 관해 | 자아도취와 자기혐오의 사이 14-04-25
9 글에 관해 | 물꼬가 트이지 않는다 14-01-11
8 글에 관해 | 그냥 써라 *3 13-06-04
7 글에 관해 | 클래스는 영원하다 *3 13-04-18
6 글에 관해 | 글로 돈을 번다는 건 *1 13-04-16
5 글에 관해 | 글 쓰기의 어려움 *1 13-03-20
4 글에 관해 | 잘하는 것을 해야 성공한다. *2 13-02-16
3 글에 관해 | 쓰는 이, 읽는 이의 입장 *2 13-02-14
2 글에 관해 | 단순함이 복잡함을 이긴다. 13-02-10
1 글에 관해 | 타인의 글을 보다보면 *2 13-02-07

비밀번호 입력
@genre @title
> @subject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