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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관해


[글에 관해] 글 쓰기의 어려움

사실 작정하고 앉아서 꾸역꾸역 쓰면 늦어도 한 시간당 일천 자. 빠르면 사천 자에서 오천 자 정도를 쓸 수 있다. 평균적으로 일만 자를 쓰는데 네 시간 정도. 자잘하게 딴 짓 하는 시간까지 포함한 경우다. 단순하게 계산하면 하루를 샐 경우 6만 자를 만들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덟 시간만 일 한다고 쳐도 이만 자.

하지만 여기에는 여러 전제조건이 붙는데, 일단 글을 쓸 마음이 들어야 한다는 거다.

써야지, 써야지 생각은 한다. 밥 먹으면서도, 일어나서도, 웹 서핑 하면서도, 게임 하면서도, 책을 보거나 티비를 보거나. 가끔은 꿈 속에서 원고 독촉을 당하기도 한다. 근데 문제는 정작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는게 힘들다는 사실이다.

앉아도 문제는 또 있다. 끈덕지게 꾸역꾸역 쓴다는 게 말이 쉽지. 그런 게 말처럼 쉽게 가능했으면 세상에 숙제, 과제, 업무가 밀려서 빌빌 거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을 거다. 불행하게도 나는 방학 숙제는 몰아서 하는 것도 모자라서 제출해야 하는 수업이 있는 날까지 파악해 그 전날까지 죽어라 방학숙제에 매달려야 했던 유형의 인간이다.

컴퓨터라는 것이 있어서 생각의 속도에 가깝게 글을 쓸 수 있어졌지만, 그와 함께 인터넷과 게임을 함께 주었다. 세상에 맙소사. 글을 쓰는데는 꾸역꾸역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이지만 웹서핑을 하다가 정신을 차리면 두 시간. 게임을 하다가 정신을 차리면 네 시간이 지나가 있다.

글 쓰면서 밤 새기는 힘든데, 잡다한 걸로 밤 새기는 어렵지 않다. 더군다나 그다지 인내심이 강하지 않은 내 경우는 더하다. 자료 조사해야지 하고 웹페이지를 열었다가 정신을 차리면 유투브에서 웬 동영상을 보고 낄낄 거리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여튼 위의 것들을 물리치고 글을 쓴다고 치자. 글을 빠른 속도로 쓰려면 일련의 계획이 잡혀서 머릿속에 명확하게. 최소한 대략적으로나마 그려져 있어야 한다. 그게 없으면 당연하게도 한 시간에 이천 자도 간신히 쓴다. 단순히 글로 줄거리를 짜놓는 게 아니라 대충이나마 각각의 상황이 영화나 연극처럼 그려져야 한다. 그래야 한 시간에 최대 오천 자까지 분량을 뽑아 낼 수 있다.

이게 굉장히 사람 피곤하게 만든다. 남이 보면 손가락만 까딱거리는 쉬운 일로 보이지만 네 시간을 넘어선 순간부터는 노동이라 불림직하다.

진짜 노동이다. 농담이 아니다.

일만 자를 찍으면 피로해지고. 일만 오천 자를 찍으면 지긋지긋해지고. 이만 자를 찍으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매우 드물게 삼만 자를 돌파하는 날은 제정신이 아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컴퓨터 앞을 벗어나서 어디로든, 아무 곳이라도 도망치고 싶다. 물론 이쯤 되면 스스로 일을 막장으로 해놨거나 본의아닌 사고들로 인해서 원고 독촉이 밀려드는 상황이기에 도망 칠 수도 없다.

조금 더 핑계를 대보자면 글 외의 것. 일단 위의 경우들은 멀쩡하게 글을 쓸 수 있는 여건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고, 약속이나 일이 있을 경우를 생각해 보면 더욱 힘들어진다. 예를 들어서 좋아하는 이성과 약속을 잡았고, 오늘이 그 날이라고 생각해보자.

글에 집중이 될 턱이 있나. 백지 앞에 앉아 있지만 떠오르는 건 오늘은 뭘 할까, 무슨 옷을 입고 올까, 무슨 말을 할까 따위의 것들이다. 글에 관한 생각 따위는 조금도 떠오르지 않는다. 친구와의 약속도 그렇다. 약속 전에 준비하고 나갈 시간도 그렇고, 그 전부터 설레발 치는 것도 그렇고 역시나 글 쓸 정신상태가 아니다. 약속시간 세 시간 전부터 글 쓸 생각은 엷어져가고, 해당 시간에 가까워 질 수록 중증이 되어간다.

불의의 사고나 일이 생겨서 아예 글을 못 쓸 상황이 되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일을 꼭 해야 하는데, 오늘 못하면 마감을 지키지 못하는데 하필 이런 때 중요한 일이 땋 하고 터진다. 얄짤 없는 펑크다. 그런 일들이 꼭 기한을 빠듯하게 남겨 놨을 때 터진다는 게 문제다. 이러면 며칠을 아득바득 해보다가 결국 펑크. 이런 경우의 정신적 데미지는 심각하다.

나영팔 사 권을 반 년이나 끌어 올 때가 그랬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도 정신줄을 놨었다.

글은 죽어라 안 풀리지, 딴짓 할 건 많지, 친구들과 약속도 줄줄 생기고 누구는 결혼식에, 누구 애가 한 살이 되었고, 누가 돌아가셨고, 집안이 어렵다고 징발 당하고, 가세 기우는 게 느껴지고, 거기다가 갑자기 썸씽도 생겼겠다. 솔직히 내 스스로도 반 년이나 질질 끈 건 지나쳤다고 생각은 하지만 남들이 내 상황이었더라도 크게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매우 성실한 몇몇은 아니겠다만 사람이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니까.

지금 이 글만해도 그렇다. 당장 글을 써야 하는데, 지금 삼십 분에 걸쳐서 이런 글이나 끼적거리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난 왜 이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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