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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메의 불쏘시개 공방

요수전기 키리아

웹소설 > 일반연재 > 공포·미스테리, 판타지

냐메
작품등록일 :
2021.05.12 14:52
최근연재일 :
2021.06.25 23:40
연재수 :
4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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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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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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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키리아(5)

DUMMY

5.

레렌은 키리아를 데리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지하로 내려가자 벽돌로 지어진 성당과는 어울리지 않는 오래된 목제 기둥들이 보였다.

건물이 세워지기 이전에 곡물창고로 쓰이던 흔적이었다.

이 시대에는 산적의 약탈을 피하기 위해 성역에 식량을 보관하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지하실 아래는 그렇게 어둡지 않았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와 지하 천장에 스스로 빛을 내는 신비한 돌인 자광석이 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벽과 바닥에는 판자만 대충 깔려있고 조금 눅눅한 습기가 스며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불안하게 바닥이 삐걱거렸다.

레렌은 혹여 키리아가 넘어질까 앞장서서 조심스레 발을 내딛었다.

계단 바로 아래 구석에 나무로 만든 커다란 욕조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는 전날 넬이 시냇가에서 길러온 물이 담겨있었다.

바닥에는 작은 틈이 여러 군데 경사지게 만들어져.

아무래도 물을 내려 보내도록 만들어진 모양이었다.

아직 밖은 쌀쌀하기 때문에 시냇가에서 몸을 씻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물론 지금 두 소녀 앞에 채워진 욕조에 담긴 물도 딱히 데워지거나 하진 않았다.

그래도 찬바람을 감수해가며 밖에서 목욕을 하는 것 보단 훨씬 나았으리라.

성당의 지하는 이미 충분히 훌륭한 목욕탕이었다.


“저기··· 키리아?”


그러나 지금 레렌은 여러 가지로 복잡한 심정이었다.

우선 마을의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자처해 키리아를 씻기러 오긴 했지만, 당장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무너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레렌의 부름에 키리아가 돌아봤다.

고양이를 닮은 커다란 눈동자를 깜박이며 레렌의 말을 기다렸다.


“어, 으음. 그러니까···.”


하지만 레렌은 말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인가?

어떤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키리아는 실오라기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 상태였다.

귀여운 얼굴.

레렌보다도 자그마한 키.

힘줘서 만지면 자국이 남을 것 같은 하얀 피부.

보호해주고 싶을 정도의 여린 몸매···.

덜 여문 꽃봉오리라는 것은 바로 키리아를 말하는 것이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키리아의 모습은 같은 여자인 레렌이 보아도 매력덩어리 그 자체였다.

···다행히 흉부 쪽은 레렌이 조금 더 크다.

그것으로 레렌은 작은 승리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마저도 밀렸다면 레렌의 자신감은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으리라.

키리아는 여전히 레렌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마치 머리 위에 커다란 물음표라도 떠있을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그, 그런 얼굴로 바라보지 마. 이건 반칙이잖아.’


순진하기 짝이 없는 키리아의 얼굴. 위험하다.

이 상태에서 고개를 살짝 갸웃 거리기라도 한다면···.


“···왜 그러시죠?”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다.

잔득 경계한 채 의아한 듯 얼굴을 기울이는 소녀의 앙증맞은 모습에, 그만 레렌의 이성이 날아가 버리고 만 것이다.


“너···.”

“네?”

“넘나 기여운 것!”


레렌이 키리아를 습격.

아니 껴안았다.

몸을 부둥켜안고 강아지라도 다루는 마냥 얼굴을 맞대고 뺨을 비빈다.


“귀여워, 어쩜 이렇게 귀여워! 키리아, 키리아아!”


방금 전까지 키리아의 머리 위에 물음표가 떠있었다고 한다면 지금은 느낌표가 달려있을 것이리라.

그만큼 키리아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서려있었다.


‘뭐지, 뭐야? 이 계집애가 갑자기 왜 이래?’

‘나한테 묻는다고 알겠냐? 그보다···.’


소녀의 모습으로 위장한 요괴는 레렌의 돌발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키리아는 몸을 껴안고 부비는 레렌을 떨쳐내지 못하고 꼴사납게 버둥거릴 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냐? 네가 반응하지 못하다니? 한낱 인간의 움직임 따위에···.’

‘몰라, 그런 거 몰라!’


요괴.

랑페르에서 흘러온 자들의 동체시력은 인간의 능력을 가볍게 초월한다.

그들은 고양잇과 동물의 날렵함과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재빠르고 맹금류의 예리함을 넘어선 정확함을 가지고 있었다.

개체마다 조금 다를지라도 보통 이 세계에 살아가는 어느 개체보다 월등히 뛰어난 힘과 속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놀라운 요괴의 반사 신경은 지금 한 소녀에 의해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전혀 눈치 채지 못했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 계집, 뭔가 특별한 힘이라도 가지고 있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깨닫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자신을 덮칠 수 있을 리 없다,

요괴의 속도를 따라올 수 있을 리 없다고 또 다른 공생체는 생각했다.

그저 악의나 살기가 전혀 없기에 가능한 일이라곤 전혀 짐작조차 못하는 눈치였다.

반면 몸의 주도권을 가진 쪽의 요괴, 키리아는 약이 올랐다.

인간에게 휘둘리고 있단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정신없이 키리아와 몸을 밀착하고 꺄아꺄아 연신 소리를 질러대는 레렌을 노려보며, 키리아는 이를 갈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 썩을 나무 열매를 씹어 넘긴 것도 다 이 계집 때문이었지. 질릴 정도로 가득 담아 와선 나한테··· 나한테···.’

‘크으, 그렇다. 저 년 때문에 나는 과일을 소화시키기 위해서 위장 구조를 송두리째 바꿔야 했다.’


얼굴을 오만상 찌푸리는 키리아였다.

오죽이나 분했을까, 잘 보면 눈가에 눈물도 맺혀 울상이었다.


“키리아, 키리아 귀여워! 동생 삼고 싶어! 내 동생하렴. 응응? 키리아아! 듣기론 나이도 나보다 한 살 더 적다면서!”


질겁할만한 발언이었다.


‘아아아아! 이 계집은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번엔 날 네 아랫사람으로 두고 싶다는 거야? 감히··· 용서 못해!’


키리아는 완력으로 레렌을 뿌리치려했다.

이렇게 작은 몸이지만 그 안에 담겨진 것은 요괴의 육체.

인간의 몇 배는 넘어서는 근육이 압축된 것이었다.

키리아가 제대로 힘을 발휘하다면 레렌은 반항도 못하고 나가떨어질 것이 뻔했다.

하지만 키리아는 그럴 수 없었다.

미약한 버둥거림을 난폭하게 바꾸어버리려던 찰나 레렌이 어떤 제안을 꺼내든 것이다.

그리고 그 제안은 키리아에게 너무도 솔깃한 것이었다.


“키리아, 내가 선물도 잔뜩 줄 테니까!”

“선···물?”


일순간 키리아의 버둥거림이 멎었다.


“응, 우리 집엔 내가 어릴 적 입던 옷이 잔뜩 있거든. 아버지께서 행상인이라 귀한 옷감으로 만든 예쁜 옷들을 자주 가져와주시는데 말이야! 지금은 아쉽게도 내가 너무 커버려서 이젠 입을 수가 없거든. 키리아는 몸이 아담하니까 분명 맞을 거야. 그러니까, 응응?”

“동생이 되면 옷을 주는 건가요? 주는 거예요?”

“그럼!”


착각이었을까?

레렌은 키리아의 눈동자가 일순간 별모양으로 반짝거린 것처럼 보였다.


‘언니, 들었어? 옷을 준대.’

‘야, 너 설마 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혹하고 넘어가는 건 아니겠···.’

‘그것도 예쁜 옷이라고 했어.’

‘에라이, 미친···.’


아주 기쁜 듯이 키리아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졌다.


“그럼 결정한 거야! 키리아는 오늘부터 내 여동생!”

“아니···.”

“아아! 꿈만 같아. 여태 외동딸로 지내온데다 마을에 내 또래 친구는 겁쟁이 한스 밖에 없어서 너무 심심했거든. 이제 수다도 하고 바느질도 같이 하고··· 우후후, 앞으로가 기대되는걸.”


기쁘게 키리아를 다시금 껴안는 레렌, 그 품속에서 키리아는 처절하게 꿈틀거릴 뿐이었다.

뭔가 후회되는 선택을 한 것이 아닌지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한 키리아였다.


‘흐흥, 착각하지 마! 내가 바라던 건 처음부터 의복뿐이었어. 네 동생이든 뭐든 그런 건 하나도 관심 없단 말씀이야.’

‘···요괴가 인간의 흥정 따위에 넘어가다니.’

‘내가 필요한 건 옷이야, 옷이라고! 그 이외엔 아무것도 필요 없어. 일단 새 옷을 받아야하니까 그때까지만 살려두는 거야. 그러니 멋대로 착각이나 하고 있으라고. ···으, 그러니까 이제 좀 떨어져! 이 망할 계집아!’

“키리아 귀여워! 자아, 언니라고 불러봐. 레렌 언니하고!”

‘떠, 떨어져. 떨어지란 말이···.’


얼마 지나지 않아 키리아의 정신은 제발 떨어져달라고 애원하는 지경까지 가고 말았다.


6.

키리아의 목욕을 끝마치고 나온 레렌을 맞이한 것은, 친숙한 이웃의 얼굴이었다.

연한 빛의 장발.

나긋한 얼굴과 성숙한 자태를 가진 여인이 두 소녀들에게 미소를 지었다.

바로 네프리티나였다.


“네프 아줌··· 이 아니라 네프 언니!”

“좋아, 레렌. 그나마 도중에라도 말을 바꾸었으니 봐줄게.”

“안 그러면 때릴 거 잖···.”

“어머, 무슨 소릴? 물론 조금 혼나긴 하겠지만. 후후후.”

“그, 그보다 언니가 왜 여기 있는 거죠?”

“잠깐 볼일이 있어서란다. 그렇죠, 사제님?”


살짝 사제에게 윙크를 보내는 네프리티나의 모습에 흠칫하는 레렌이었다.

네프리티나는 그런 레렌의 반응을 즐기듯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틀림없이 레렌을 도발한 것이었다.

마주보는 레렌과 네프리티나의 시선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

마치 뱀과 다람쥐의 신경전.

두 사람은 천적과도 같았다.

무언가 분하다는 듯 바라보는 레렌과 우월한 태도를 보이는 네프리티나.

둘의 사이에는 넬이 알지 못하는 승부가 이어지고 있었다.

넬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결국 자신이 직접 중재를 나서기로 했다.


“아, 그렇지. 막 말씀하신 조리법, 나중에 자세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얼마든지 환영이랍니다. 우후후.”

“감사합니다, 네프리티나 양.”


레렌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에? 네프리티나··· 양?”

“무슨 불만이라도 있니, 레렌?”


찌릿, 레렌의 읊조림에 네프리티나가 미소를 유지한 채 노려본다.

생글 웃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레렌은 알고 있었다.

그 미소 속에 무서운 무언가가 담겨있다는 사실을.

허튼 소리를 더 늘어놨다간 가만두지 않겠다는 기운을 풍기는 네프리티나.

그 무언의 위협에 레렌은 그만 고개를 픽 돌리고 그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레렌에게도 감사를 전해야겠네요. 이렇게 키리아 양을 돌봐주시고···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사제와 네프리티나가 담소를 나누는 모습에 레렌이 샘내기 시작할 무렵, 넬이 격려의 말을 건넸다.

역시 사제님 밖에 없다니까.

라며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레렌이었다.


“아이, 그러지 마시래도요. 이런 일쯤 아무것도 아니에요.”


레렌은 가슴을 펴고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나름대로 사제에게 높은 점수를 딴 것이 기분 좋은 모양이었다.


“어, 그런데 키리아 양은?”


하지만 곧이어 넬이 키리아의 안부를 묻는 바람에 레렌의 들뜬 마음은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레렌은 자기도 모르게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키, 키리아는 지금 옷 갈아입고 있어요. 웬일인지 하얗게 질려서 극구 혼자 입겠다고 절 밀어내지 뭐에요? 수줍음이 많은가 봐요. 같은 여자끼리 뭘 부끄러워하는 거람···.”

“역시 낯가림이 심한 게 아닐까요? 키리아 양은 아무래도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을 테니.”


레렌은 스스로에게서 환멸감이 몰려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동생이라느니 어쩌니 부대껴놓고 순간의 질투 때문에 저런 소릴 하다니.

자신에게 언니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게 아냐··· 마음의 상처 때문일 거야. 사실 나라도 모든 게 싫을 거 같아. 어찌 보면 인신매매 당해서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건데··· 목욕을 도울 땐 깊게 생각하지 못했지만, 팔려온 여자 아이의 외모가 아름답다는 건··· 저주나 다름없으니까.’


레렌은 키리아의 몸을 씻기며 잡티 하나 없는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말라붙은 핏물을 씻겨낼 때마다 드러나는 유려한 곡선.

신기할 정도로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을 보고서 어쩌면 귀족의 자제, 그것도 높은 직위를 가진 명문가의 딸일지 모른다고 짐작했다.

출신부터가 달라.

적어도 평범한 집안의 아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 지방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보라색 머리.

다홍빛 눈동자는 주로 서쪽 지역에서 살아가는 민족의 특징이었다.

대륙 너머에 살아가는 서쪽 사람이 이런 변두리 마을에 다다를 일이라면 전쟁 포로나 그와 비슷한 이유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더욱 키리아를 더 비극적으로 만든다.

홀몸의 소녀가 대륙의 반대편으로 흘러들어오기까지 거쳤을 그 험난한 과정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조심스러운 가정.

그러나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


‘···응, 키리아가 그렇게 날 밀어낸 것도 이해할 수 있어.’


레렌은 키리아가 처음부터 버둥거리며 싫은 티를 낼 적에 알아봤어야 했다.

끌어안았을 때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뿌리쳤던 행동들이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 그럴만한 행동이었다.

소녀는 남자의 노리개가 될 뻔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몇 번이나 당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 키리아의 입장이라면 설사 같은 여자라 할지라도 누군가 자신의 알몸에 들러붙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레렌은 견딜 수가 없어졌다.

키리아에게 너무나 미안하고 넬을 볼 면목이 없어졌다.


“저··· 이만 가볼게요.”

“벌써요?”

“생각해보니 바느질 할 거리가 남아 있어서요.”


레렌이 창밖을 고개로 살짝 가리킨다. 해가 서서히 기울어지고 있었다.


“더 어두워지면 바느질을 못하잖아요?”


낭비하기 시작하면 양초 값도 만만찮다.

그렇게 덧붙이며 레렌은 급히 등을 돌렸다.

표정관리를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 그렇군요. 어쩔 수 없네요. 그럼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내일.

그 작은 한마디에 레렌의 마음이 얼마나 아렸는지 넬은 알지 못했다.


“네. 그럼···.”


서둘러 밖으로 나가버리는 레렌.

넬은 그런 소녀를 향해 뻗은 손을 내리지도 못하고 문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제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요?”


어리둥절해하며 넬이 질문하자 네프리티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저도 사춘기 때의 아이들 생각은 전혀 감이 안 잡히네요.”

“네프리티나 양, 또 어머니 같은 말씀···.”

“어머나, 그런가요?”


확실히 넬 또래 나이 여성에게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다. 넬은 조금 이상하게 여겼지만 정작 네프리티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제 생각에 레렌은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오히려 그 아이는 사제님이 눈치재지 못했길 바랄 테니.”

“저는 잘 모르겠군요.”

“모르시는 편이 더 좋죠. 이건 여자들만 아는 거랍니다.”

“그런가요?”

“그래요.”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는 네프리티나. 슬쩍 넬을 바라보며 짓궂게 웃는다.


“사제님은 죄 많은 남자시네요.”

“네?”

“우후후.”


묘하게 놀림당하는 기분.

넬은 무엇하나 네프리티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그녀가 괜한 장난을 치는 것은 아닐 거라 조심스레 생각할 뿐이었다.


“저도 이만 가봐야 봐야겠네요. 슬슬 저녁을 차려야하니.”


차 잘 마셨어요.

이어서 우아하게 웃으며 덧붙인다.

단 그 미소가 가리킨 것은 넬이 아니었다.


“거기 아가씨도 이만 나오세요. 무서운 언니는 이미 돌아갔으니까요. 그리고 저도 곧 사라질 거예요.”


넬이 네프리티나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열린 문 사이로 몸을 감춘 누군가를 찾아낼 수 있었다.

키리아가 구석에서 크고 동그란 눈으로 네프리티나를 숨어서 관찰하고 있던 것이다.


“키리아 양, 거기서 뭘 하고 계세요?”


넬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놀란 아기 고양이처럼 흠칫하는 소녀.

그 모습을 보며 네프리티나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쿡쿡 웃음소리를 냈다.

모습이 발각된 지금.

더 이상 모습을 감추는 행동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제야 키리아가 문 너머로 걸어 나왔다.


“어머나!”


그 순간 넬의 얼굴에 놀라움의 빛이 나타났다.

네프리티나도 감탄사와 함께 박수를 쳤다.

이런 반응들은 모두 키리아가 입은 옷 때문이었다.

그것은 상의와 치마가 한 벌인 하늘색 원피스.

가슴에 달린 리본과 어깨와 소매에 달린 레이스가 앙증맞은 귀여움을 뽐내고 있었다.

이 지방에서는 썩 흔한 편인 쪽빛 꽃의 염료을 입힌 수제 옷에 불과했지만 키리아에게 정말로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레렌이 마음고생 할 만하네요. 이렇게 귀여운 아가씨라니.”


네프리티나가 짓궂게 말했지만 넬은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어느새 입을 벌린 채 멍하니 키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

“키리아 양, 왜 그러시죠?”


그 눈길이 부담스러워서인가?

소녀는 시선을 상대와 맞추지 못했다.

고개를 숙인 그 모습이 어째 살짝 부끄러워하고 있는 듯 보였다.

묘한 분위기.

미지근한 침묵이 이어졌다.

한참이나 그런 상태가 계속되자 참다못한 네프리티나가 팔꿈치로 넬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앗?”

“사제 님, 이럴 때에 여자아이에게 해야 할 말이 있을 텐데요?”

“아··· 그렇군요.”


넬은 네프리티나의 지적에 뒤늦게나마 키리아에게 솔직한 감상을 건넸다.

다행히 이 사제에게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아주 잘 어울려요, 키리아 양.”


그 칭찬에 키리아의 입술이 물결치기 시작한다.

적지 않게 당황한 눈치였다.

···훈훈한 작은 일상의 대화가 흘러가는 사이.

어느새 창밖의 태양은 조금씩 하늘을 주황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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