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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메의 불쏘시개 공방

요수전기 키리아

웹소설 > 일반연재 > 공포·미스테리, 판타지

냐메
작품등록일 :
2021.05.12 14:52
최근연재일 :
2021.06.25 23:40
연재수 :
4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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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4 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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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키리아(1)

DUMMY

1.

악몽의 밤이 끝났다.

군청이 내려않고 하늘에 아침이 찾아온다.

태양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지금부터는 인간들의 시간···.

어둠의 존재들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때인 것이다.


“이럴 수가···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요?”

“불량배 닉슨이 당했대!”

“거짓말! 간밤 사이에요?”


변방의 사람들에게 요괴는 재앙이다.

낙뢰나 지진, 혹은 산사태와 같은 천재지변.

그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해, 결코 피할 수 없다.

그렇기에 인간들은 달리 누군가를 원망하지도 못한다.

단지 희생자들이 운이 나빴다고, 여신이 일찍 생명을 거둬들인 것뿐이라고 묵묵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곳까지 요괴가 나타날 줄은···.”

“그러게 말이에요. 조금만 더 있으면 축제일인데 이런 흉흉한 일이 터지다니요.”

“아아, 무서워요. 이제 겨우 자리를 잡기 시작했는데···.”


축제를 앞두고 활기와 웃음으로 넘치던 마을에 불안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들어오던 고대의 괴기스런 전설을 떠올리고서 겁에 질려 어머니의 품에 안겼고.

사내들은 창고 구석에서 먼지가 쌓여가던 창을 꺼내들었다.

그간 평소 일이라고는 마을의 순찰이나 사소한 싸움을 말리는 정도가 전부였던 자경단이었다.

그렇기에 요괴의 출몰은 전대미문의 혼란을 가져온 것이다.

마을의 젊은이들은 시체의 잔해를 수거하는 과정에서 연신 토악질을 해댔다.

결국 이들 중 가장 비위가 강한 젊은이 몇이 겨우겨우 주변을 정돈하긴 했지만···.

역시 한기가 서린 샛바람에 얼어붙은 벽과 바닥의 핏자국을 완전히 처리할 순 없었다.

그리고 그 흔적은 전날의 비극을 상기시켜, 마을 사람들에게 공포를 각인시켰다.


“···생명의 왕이여. 만물의 주인이여. 부디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소서.”


그나마 사제가 마을에 새로 들어온 것이 다행이었다.

사제의 부임이 더 늦었다면 장례식이 오래걸렸을 지도 몰랐기에.

자칫 왕복 하는데 이틀이나 소요되는 이웃 마을에서 성직자를 불어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부디 정화된 세계에서 편히 잠 들길.”


넬은 성당에서 가져온 물병을 주머니에서 꺼내들고 뚜껑을 열어 골목의 입구와 양 쪽의 벽면에 조금씩 물을 적셨다.

그것은 의식을 목적으로 축성한 물이었다.

사제는 양손을 마주잡고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의식에 정해진 기도문을 중얼 거리기 시작한다.

넬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연신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는 강풍에 얽매이지 않아, 주변에서 지켜보는 이들에게 또렷한 발음으로 전해졌다.

뚝.

이어서 무릎을 꿇은 넬의 아래로 물방울이 떨어진다.

···그것은 성수가 아니야.

바로 사제가 울고 있었기에.

단지 형식적인 일이 아니었던가?

그것은 구절 하나하나에까지 모두 진심이 담겨진 기도였다.

진심으로.

사제는 희생자들의 불행을 정말로 슬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놈들에게 기도는 과분해.”

“그렇지. 닉슨 녀석이 저지른 잘못들을 생각하면···.”


사제를 바라보던 마을사람들은 생각했다.

저 사제는 어째서 그들을 위해 저런 기도를 하는 것일까?

닉슨과 그 친구들이 과연 저런 성스러운 손길을 받을 자격이나 있는 걸까?

닉슨 패거리는 마을의 질서를 어지럽히던 폭도.

자주 자경단과 마찰을 일으키고 비행을 일삼았다.

힘겹게 정착한 부모들을 바보취급하며 대가없는 자유만을 누리던 불량배들이었다.

그 누구도 닉슨 패거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마을 사람들 중에서는 사실 그들의 죽음을 기뻐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야.

요괴에게 죽은 것을 천벌을 받았다고 여겼다.


“···여신의 축복이 언제까지나 함께 하길.”


마지막 구절이 끝났다.

넬은 핏자국에 고개를 두어 번 더 조아리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매를 얼굴로 가져가 눈가를 닦는다. 사제는 애써 웃는 얼굴을 지어보였다.


“죄송합니다. 이런 곳에 오래 있고 싶지 않으셨을 텐데··· 제가 너무 기다리게 만들었군요.”


넬의 어설픈 미소가 향한 곳에는 자색 머리의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진한 다홍색 눈동자에 사제의 모습이 비춰질 뿐이었다.

무표정 일색.

아무런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소녀의 모습은 넋이 나간 듯 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위장에 불과했다.


‘짜증 나···.’


소녀, 아니 소녀의 가죽을 뒤집어 쓴 요괴는 속이 뒤집어지는 기분이었다.

계속해서 벌어지는 예상 못한 일.

마음에 들지 않는 일들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날이 밝아오자, 요괴의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제의 탓이다.

그가 주변의 집에 들어가 마을 자경단에게 연락을 취해 사람들을 끌어 모운 것이었다.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어, 새벽 내내 북적거리며 떠들어댔다.

요괴는 여러 방향에서 날아드는 시선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 특히 소란스러운 소리가 듣기 거북했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인간들을 짓이겨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러게 내가 말했지? 다 쓸모없는 짓이라고. 열 받는다면 차라리 터뜨려버리지?’

‘···참을 거야. 이걸로 인간이란 것들에 대해 더 많은 걸 알 수 있게 될 테니까.“

‘시시하구만. 쓸데없이 인내심이 많다고 해야 하나?’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어. 이 하찮은 연기를 끝내는 날 몽땅 죽여 버리면 그만이니까.’

‘잘 해보셔. ···이크, 저 얼빵한 놈이 다가온다.’


갑자기 사제가 옷을 벗는다.

펑퍼짐한 망토.

이미 모포까지 걸치고 있음에도 또 뭘 건네는 것인가?


“여전히 피부가 창백하시네요. 많이 추우시죠? 저, 이거라도 괜찮으시다면···.”


요괴는 그것을 받아들일지 고민해야만 했다.


‘큭큭, 하기야 인간이란 것들은 미개해. 털이 없으니 다른 짐승의 가죽과 피부를 이용해 극복하는 거야. 하등한하고 약해빠진 녀석들이지. 고작 체온을 유지 못해서 죽기나 하고.’

‘이건···.’

‘왜 그러지? 네가 원하던 인간의 의류 아니냐?’

‘아름답지 않아.’

‘까다롭긴. 옷이라면 다 거기서 거기 잖냐?’

‘아니야. 이건 뭔가 달라. 아름답지 않아.’


넬이 건넨 망토는 답답하고 몸의 활동을 제한했다.

괜히 화려한 장식도 거슬리고 묘하게 사제의 채취도 감돌고 있어.

요괴는 불만스럽게 사제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하지만 사제에게 소녀의 시선은 전혀 다르게 비춰졌다.


“아, 저는 괜찮습니다. 날이 많이 풀렸으니 이 정도 냉기쯤이야 거뜬하죠.”


사제는 소녀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그것을 걱정하는 눈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말과는 달리 코와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숨결이 눈에 뻔히 보였다.

추위에 노출된 상태이면서도, 그는 생글거리는 얼굴로 허세를 부리고 있었다.


‘주제에 누굴 걱정한다는 거지? 저 놈, 머리가 이상한 놈 아닐까? ···아니, 그런데 너는 결국 받아들인 거냐?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더니?’

‘시끄러워. 뭐든 상관없어. 전부 내꺼야.’

‘이런 면에선 괜히 또 탐욕스럽기는···.’


요괴의 또 다른 목소리가 투덜대는 사이.

사제가 다시금 소녀에게 친한척 말을 걸어왔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정화 의식을 끝냈으니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정화 의식?’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는 두 목소리가 동시에 의문을 표했다.

당연하게도 요괴들이 그런 것을 알 턱이 없었다.


‘방금 저 녀석이 웅크리고 중얼 거리던 걸 말하는 게 아닐까?’

‘켁! 맨땅에 물을 뿌리고 몇 분간 앉아있는 짓거리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

‘낸들 알겠어?’


당연하게도, 요괴들은 남자의 말과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사제님이 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앞으로는 요괴가 나타나는 일은 없겠군요. 이 마을에도 여신의 손길이 닿을 테니까요.”

“그러게요. 이제 안심이에요.”


사제, 마을 사람들이 남자를 그렇게 불렀다.

그 이름은 일생을 여신에게 바친 자를 의미해.

교리에 복종하면서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스스로를 다그치며 그렇게 평생을 살아가는 부류를 가리킨다.


‘후후후··· 어째서 저 놈이 별종인지 이제 알 것 같아.’

‘뭔데?’

‘녀석은 신앙을 가진 개체야. 무리에서 존경받는··· 일종의 정신적 지주 같은 거지.’

‘책임감의 노예라는 걸로 들리는데?’

‘정확해. 나중에 목숨을 빼앗는 보람이 있겠어.’

‘알까보냐? 그냥 죽이라고.’

‘···하지만 시끄럽네. 여기나 저기나 재잘재잘. 어딜 가든지 인간들이 몰린 곳은 짜증 나.’


귀가 좋은 탓에 작은 속삭임까지 들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요괴의 기분을 거슬렀다.

인간들의 반응은 대부분 비슷했다.

혈흔이 남은 주검의 조각들을 보고 구역질을 하며 애써 그것을 외면하려했다.

그리고 동시에 모두가 자신이 희생당하지 않은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어떻게 하죠?”


한 중년 여자가 소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소녀에 대한 처리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자 사람들의 논의 주제가 통일되었다.

시선은 여지없이 소녀에게 집중되었고 요괴는 그것이 엄청나게 거북했다.

그 불쾌감은 자길 쳐다보는 무리들의 눈을 모조리 도려내고 싶을 정도로.

이 시점에서 사제는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


“이 아이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당연히 가족에게 돌려보내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 질문에 군중 속의 한 남자가 답했다.


“그럴 수가 없으니까 하는 말이지.”

“어째서입니까?”

“이 마을에는 저 아이의 가족이 없거든.”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군요.”

“저 아가씨는 우리 마을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야. ···아마 망나니 닉슨 패거리가 멋대로 아랫마을에서 데려온 거겠지. 노예를 샀더나.”

“맙소사, 설마 그 놈들이 그렇게까지 했을까 봐요?”

“놀랄 일도 아니야. 그 놈들은 자주 마을의 물자를 빼돌려서 타지에 팔아넘긴 다음에 온갖 것들을 다 사왔거든. 이번에 여자를 사왔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아.”

“닉슨··· 그는 평판이 좋지 않은 분이었나요?"

“분? 경칭은 생략하시게. 평판이고 뭐고···. 그 녀석은 마을의 수치니까. 얼마나 악독했는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군. 차라리 죽어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될 정도야.”


사제를 앞에 두고서 중년 남자는 격하게 말을 뱉어냈다.

무척이나 감정적이고 일방적이야.

몰아붙이는 중년 남자의 표정 변화를 요괴는 주시했다.

한눈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겠어.

바로 경멸이었다.


“하기야 그 놈들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사람만 안 죽였을 뿐이지 온갖 나쁜 짓은 다 했다니까.”

“이 평화로운 마을에 아까운 놈들이지. 배고픈 시절을 겪질 않아서 철이 들질 못했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도 죽은 닉슨과 그 친구들에 대한 험담이 이어졌다.

그들은 일생의 평가가 모두 악행으로 시작해 악담으로 끝이 났다.

요괴는 오히려 닉슨이라는 사람을 잡아먹음으로 감사를 받을 지경이었다.


“죄값을 치룬 셈이지.”

“쓰레기 같은 놈들!”

“잘 죽은 거야, 아무렴.”


그러나, 사제는 망자에 대한 욕설들이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저 침묵으로 일관.


‘어라? 이 녀석은 왜 함께 조소하지 않지? 인간들에게 있어서 나한테 잡아먹힌 놈은 같은 집단에 어울리지 못하고 떨어져나간 쓰레기잖아? 무리에서 스스로 이탈한 패배자잖아?’


사제는 핏자국만 남겨진 바닥을 쓸쓸한 눈길로 바라보며 결심을 한 듯 입을 열었다.


“저··· 여러분, 죽은 사람에게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요괴는 사제의 말에 폭소를 터뜨릴 뻔 했다.


‘아핫, 아하하하! 무슨 헛소리야?! 죽었기 때문에 욕을 할 수 있는 거잖아? 뒈져버렸으니까 반박도 못해, 보복도 할 수가 없으니까 실컷 침을 뱉고 뭉갤 수 있는 거잖아?’

‘크큭, 내가 누누이 말 했하아. 저 놈은 어딘가 이상하다고.’


사제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비록 생전에 잘못을 많이 저질렀다고 해도 그들은 비참하게 죽었어요. 다신 돌아오지 못한단 말입니다! 죽으면··· 죽어버리면 아무것도 못해요. 반성은커녕··· 사죄하거나 용서 받지도 못한단 말입니다!”

“진정하세요, 사제님. 저희들은 그런 게 아니라···.”

“이런 건 천벌이 아닙니다! 그 어떤 것도 인간을 이런 식으로 벌하진 않아요. 요괴에게 잡아먹힌 자들을 비웃다니, 저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사제님···.”

“사람이 죽었단 말입니다!”


씩씩거리면서 성을 내는 꼴이라니?

요괴는 남자가 도무지 무엇에 열을 올리는 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게 무지하게 재미있었다.

어느새 지루함을 다 잊을 만큼.


“다들 무슨 생각입니까? 이건 선인이나 악인을 가리지 않아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이란 말입니다!”


사제는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전하려 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어렴풋이 그것을 알아챘지만 쉽사리 납득하지 않았다.

그들도 할 말은 있었다.

그만큼 닉슨 패거리들에게 당한 것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닉슨 놈들은 정도가 지나쳤습니다.”

“녀석들은 아주 악질인데다 그리고 또···.”

“사제님은 마을에 오신 지 얼마 안 되셔서 잘 모르시겠지만요.”

“···잠깐 실례 좀 하리다.”


이야기가 요괴에게 막 흥미진진한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순간.

갑자기 사람들의 수근 거리는 소리가 멈춰버렸다.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돌연 한 노인이 나타났기에.


“앗, 당신···?”

“부탁드리오.”


지팡이를 가지고 힘겹게 앞으로 걸어 나가는 움직임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불안해 보였다.

노인은 느린 발걸음으로 요괴가 남긴 흔적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반짝이는 은색의 쇠붙이, 그것은 팔찌였다.


“그 녀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것만큼은 품에서 떼어놓지 않았지. 죽은 아내의 유품이었거든···.”


갑자기 노인은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떠들어대던 사람들의 웅성임이 멈췄다.

넬은 노인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드님, 이셨습니까?”

“그래, 내가 이 못난 자식의 애비라네···.”


노인은 닉슨의 부친이었다.

그래서 방금 전까지 험담을 이어가던 자들이 침묵한 것은 그러한 이유였다.

설마하니 아무리 생전 망나니였다 해도 차마 혈육의 앞에서 죽은 사람을 앞에서 욕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하지만 아무리 못난 놈이라도 이렇게 죽어버리다니···."


노인이 바닥에 쓰러진 채 자신의 아들인지 아닌지 확실치 않은 주검의 흔적을 바라보며 통곡했다.


“믿지 못하겠지만 어릴 때는 누구보다도 착했던 녀석이었어. 어른이 되면 자경단에 들어가서 가족들을 지키겠다며 으스댔었지. 닉슨이 이렇게 된 건 모두 나 때문이라네. 매일같이 술에 찌들어 아내를 힘들게 했지. 술에서 깬 다음에는 흉년이 겹치고 겹쳐서 맨 정신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핑계를 댔어. 결국 병에 걸려 죽기 전까지 나는 내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했어. 나는 아들조차 망쳐버렸어. 닉슨··· 모두 이 아비 탓이다. 용서해라, 용서해···.”


요괴는 다시 짜증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노인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변했어, 자신의 즐거움이 방해받은 것이 화가 났다.

다 죽어가는 송장이 귀에 거슬리게 울어대고 있는 것이 가당찮다.

하지만 요괴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든 것은 사제가 뒤에 이어간 발언이었다.


“···죄송합니다.”


이해할 수 없어.

왜 여기서 사과를?


‘뭐가 미안하단거야? 그런데 어째서 용서를 비는 거지? 마치 네가 그 닉슨인지 뭔지 하는 녀석을 죽인 것처럼 말하고 있잖아?’

‘킥킥, 가관이다! 이거 아주 미친놈이군!’


공생하는 다른 요괴는 폭소했지만, 주인격의 요괴쪽은 기가 막혔다.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웃음조차 나오질 않았다.


“제가, 조금만··· 조금만 더 빨리 도착했더라면···.”


요괴는 얼굴을 찌푸렸다.

조금이라도 빨리 왔더라면 무언가가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 하는가?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것도 유분수지. 달라지는 건 없어. 죽을 녀석이 셋에서 넷으로 늘어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네가 늦게 온 것은 불행이 아니라 행운이었단 말이야!’

‘킥킥, 말 그대로다. 만일 네가 식사하고 있을 때 나타났더라면 너는 망설이지 않고 저 놈을 베어버렸을 테니까.’


이어서, 자책하는 사제를 누군가가 위로한다.


“그래도 사제님께서는 저 아이는 지켜주셨잖습니까?”


어떤 남자가 사제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하자, 연달아 다른 이들이 사제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죄송해요, 사제님. 사제님 말씀대로 저희가 심했어요.”

“반성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고개를 드세요.”

“사제님은 훌륭하신 분이세요.”

“저희들 잘못입니다. 사제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돼요.”


주변의 모든 인간이 사제를 훈훈한 눈길로 바라봤다.


‘킥킥킥! 이건 무슨 싸구려 연극이 따로 없군.’

‘동감이야, 언니.’


누가 누굴 지켜줬다는 건지, 요괴의 혼란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여러분···.”


겨우 그것으로 기운을 되찾은 것일까?

사제는 곧 미소를 되찾았다.

이제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소녀를 향한다.

덩달아 모든 사람의 이목도 소녀에게 집중되었다.


‘···뭘 보는 거야?’


아무 할 말 없어.

지금 요괴의 역할은 그저 무서운 사건에 휘말려서 아무 말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 가녀린 소녀였기에.

적절한 반응을 찾기 못해, 요괴는 무표정으로 사제를 따라 얼굴을 마주보았다.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교단의 사제, 넬 노튼입니다."


사제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요괴는 그것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예법이라고 얼핏 들은 것이 떠올랐다.


‘이 녀석은 내가 자신의 이름을 몰라서 말하기를 망설이고 있다고 생각한 건가?’

“저, 아가씨의 이름은?”

“이···름?”


그것은 타인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수단.

하지만 요괴에게 있어서 그런 개념은 무의미했다.

서로 접촉할 일이래 봤자 영역다툼뿐.

드물게 먹이를 두고서 싸우는 정도가 전부인 '랑페르에서 흘러온 자'들이 이름 따윌 가질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요괴들이 이런 경우에 직면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딴 건 없다.

따라서 당연히 말해줄 수도 없었다.

너.

혹은 나.

지금까지 이 두 요괴에겐 그것이면 충분했으니까.


‘관둘래.’


대답이 막히자 요괴의 짜증은 극에 달했다.

궁지에 몰린 기분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 드디어 할 생각이 드셨나?’

‘그래, 인간 놀이는 여기까지 해야겠어.’


침묵을 유지한 채 오른손에 신경을 연결하면서 요괴는 생각했다.


‘그냥 다 쓸어버릴 거야.’

‘그래, 단순하게 생각해라! 이것들은 그냥 너를 귀찮게 하는 날벌레니까!’

‘···이들의 장단을 맞추기보다 조용한 장소에서 몸을 쉬겠어. 아, 그렇지. 이런 옷이라도 준 건 고마워. 마침 필요했었으니까.’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절체절명의 순간.

사제는 과묵한 소녀의 눈을 맞추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정신적인 충격에 의한 일시적인 기억상실증이군요.”

“···아?”

“불쌍하게도···.”


요괴의 사고는 일순간 정지했다.


‘내가··· 기억상실?’


요괴의 손아귀에 이어진 신경이 제멋대로 풀려버렸다.


“전쟁이나 요괴 피해자들에게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만큼 이 아가씨가 끔찍한 경험을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겠죠.”

“어쩜, 얼마나 무서운 일을 당했으면···.”


한 여자가 소녀를 동정의 눈길로 바라보자 요괴는 그쪽을 노려봤다.


‘웃기지마! 누가 납치를 당했다고! 누가 기억상실이란거야! 그딴 걸 누가 믿어?!’

‘···야, 아무래도 통한 모양인데? 다른 인간들은 속아 넘어간 눈치다.’


또 하나의 목소리는 흥미롭다는 듯 낄낄 거렸지만, 소녀의 얼굴 쪽은 이 상황이 유쾌하지 않았다.


“가엾어라, 남자들에게 납치까지 당한데다 요괴에게 습격당해서 기억상실까지···.”

“음, 이래서야 저 아이의 출신을 알아낼 방법이 없군.”

“어쩌면 좋죠?”


요괴는 넋이 나가버렸다.

자신을 아랑곳하지 제멋대로 착각해버리는 인간들의 행상을 더 이상 내버려 둘 수 없어.

결국 요괴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아니, 아니야! 나는!”


요괴는 참았어야만 했다.


‘···바보같이, 저질러버렸군.’


주목.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던 소녀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모든 시선들이 소녀가 이어갈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나, 나는···.”


그러나 요괴가 자신의 실수를 눈치 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요괴는 그대로 말문을 닫아버렸다.

어느새 조금 전의 북적이는 상황보다 지금의 침묵이 더욱 부담스러워졌다.


“아가씨는?”


되물어오는 넬의 시선을 피해버린다.

이 상황을 타파할 무언가가 필요해.

어째서였을까?

동요한 마음이 팔을 내지른다는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기다려! 그녀만은 해치지마!’


요괴의 깊은 무의식 속, 편린에서 절묘한 무언가가 떠올랐다.


‘부탁이다, 그만둬! 이렇게 간청하마! 제발···!’


그것은 요괴가 소녀의 모습을 빼앗을 때의 기억이었다.

그 동안 의미 없던 상념.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기억이 좋은 돌파구를 마련해주었다.


‘···그랬었지, 나는 보라색 머리가 가지고 싶었어. 얼마나 오래된 일인지는 생각이 나질 않아. 그래도 분명히··· 그 아이는 발이 빠른 세 마리 동물이 끄는 수레를 타고 있었다. 귀족가의 딸, 아니면 부유한 평민? 어느 쪽이든 좋아. 나는 단지 그것이 가지고 싶었을 뿐이었으니까. 차가우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신비한 자색의 머리와 아담한 몸이 탐이 났어. 작은 얼굴과 예쁜 얼굴이 마음에 들었지. 함께 있는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수레를 끌던 짐승들을 베어내고 그 안의 여자를 끌어내려했어. 동행하던 인간들은 필사적으로 나에게 달려들었지. 반항이 심해질수록, 내 흥미는 보라색 머리를 가진 여자에게 향했어. 결국 놈들은 그 어떤 저항도 부질없음을 깨달았지. 절망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박악하던 그 얼굴이 아직도 생생해. 정말 우스꽝스러웠는데! 단말마로 뭐라고 그랬더라? 아, 맞아! 분명···.’


잠시 후, 소녀는 입을 열었다.


“···리아.”

“네?”

“키리아.”


어색하면서도 이상한 어감.

요괴는 속으로 몇 번이나 자신의 그 것을 되뇌어봤다.

여자를 지키려 했던 남자가 최후의 순간 뱉어냈던 이름.

이것으로 요괴는 소녀의 모든 것을 빼앗았다.

목숨.

그리고 얼굴 가죽.

심지어 그 이름마저도.

행복해.

요괴의 마음이 들뜬다.

비록 개념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뭐든지 자신만의 소유물이 생긴다는 건 기쁜 일이었기에.


“그게 제 이름이에요.”


마무리까지 완벽해.

원인모를 자신감에 도취되어 목소리마저 당당해졌다.

요괴는 이걸로 당분간 의심 없이 인간 행세를 할 수 있을 것이란 확신에 가득 찼다.


“키리아 양이군요. 예쁜 이름이에요.”

“네.”


그 칭찬이 기뻤던가?

요괴는 의기양양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것이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별로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원래 살던 곳이 어디죠?”

“으, 아?”

“자, 말씀해주세요. 키리아 양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어리석게도, 추가적으로 물어오는 질문공세까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애초에 뭐 하러 거기서 말을 이어갔던가?


‘쯧, 이 멍청이가··· 스스로 무덤을 팠군.’


눈을 빛내며 소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사제.

이제 무엇이든 대답을 해야만 했다.

요괴는 결국 비장의 카드를 뽑아 들 수밖에 없었다.


“···기억이 안나요.”


스스로 패배를 인정해버린 것 같아, 요괴의 기분은 급속도로 나락에 처박혔다.


작가의말

중간에 자르면 어색한 파트라 분량이 좀 넘쳐도 그냥 올렸슙니당.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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