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냐메의 불쏘시개 공방

요수전기 키리아

웹소설 > 일반연재 > 공포·미스테리, 판타지

냐메
작품등록일 :
2021.05.12 14:52
최근연재일 :
2021.06.25 23:40
연재수 :
42 회
조회수 :
3,933
추천수 :
578
글자수 :
309,390

작성
21.05.15 07:00
조회
86
추천
17
글자
17쪽

키리아(4)

DUMMY

4.

넬은 레렌과 키리아를 성당 지하로 안내했다.

전날 시냇가에서 길러온 물로 키리아를 씻기기 위해서였다.

사제로서도.

남자로서도 외간여자의 알몸을 함부로 봐선 안 되기에 넬은 레렌에게 키리아의 목욕을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을 지하로 보낸 뒤.

넬은 성당에서 홀로 깊은 사색에 잠길 수 있었다.

하지만 사실 넬의 마음은 전혀 여유롭지도, 평화롭지도 않았다.

넬은 홀로 창가에서 차를 들이켰다.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힘겨워 보였다.

나른한 자세와 반쯤 감긴 눈 뭔.

가 복잡한 고민이 담긴 표정이었다.

지친 상태.

레렌의 앞에선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사실은 쭉 무언가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다.

전날 안타깝게 죽은 남자들.

그리고 아들의 주검을 바라보며 오열하던 노인···.

다시금 그것을 떠올리자 사제의 미간이 살짝 떨려왔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넬의 마음속은 답답함으로 타들어갔다.

요괴는 자연재해.

결코 대처할 수 있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재앙은 그저 일어날 뿐.

묵묵히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것이 이 세계의 법칙이며 변방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이 남자, 넬 노튼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넬은 요괴에게 잡아먹힌 사람들의 죽음을 결코 납득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그들이 살아날 방법이 있었을 것이라 간절하게 믿었다.

적어도 한 명이라도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가능성에 대한 믿음.

그것은 넬의 여신을 향한 신앙심보다도 더욱 강한 감정이었다.


‘어쩌면···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알아챘더라면···.’


허나 사실은 넬도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자신이 제아무리 빨리 골목을 방문했다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란 사실을.

그렇게 생각하니 무력감이 사제의 정신을 좀 먹어갔다.

순간 뇌리에 과거의 기억이 스쳤다.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찻잔을 든 넬의 손가락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넌 그 무엇도 지키지 못해.


사제의 얼굴이 슬픔과 괴로움에 일그러졌다.

넬은 필사적으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과거를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아.

이를 악물고 욱신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사제의 마음은 안식처를 찾기 위해 버둥거리고 있었다.


-사제님께서는 저 아이를 지켜주셨잖습니까?


넬의 머릿속에 한 소녀.

키리아의 얼굴이 그려졌다.

구해주었다거나 지켜주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넬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그래도 지금 그 아이는 살아있다.’


그랬다.

죽지 않았다.

소녀는 살아있어 주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주검의 골목에서, 홀로 공포에 떨고 있으면서도 소녀는 무사히 살아남았다.

사제가 소녀를 구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소녀야말로 사제의 영혼을 구원해준 것이었다.

넬은 생각을 이어갔다.

그것은 단순히 사제의 업무만이 아닌 좀 더 큰 고민이었다.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에 대한 것들,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래, 지금은 순차적으로 해결해가자. 언제나 그래왔듯··· 우선 순위부터 정해서···.’


우선 순위···.

어째서일까?

그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넬의 얼굴이 한층 더 조금 어두워졌다.

차의 맛이 쓴 것인가?

그는 미간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성당 안은 빛으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음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실례합니다. 아무도 안계신가요?”


저벅.

요란한 발소리에 깊은 고민에 빠져있던 넬이 깨어났다.

사제는 몽롱한 얼굴로 자신의 상념을 깨뜨린 방해자를 바라봤다.


“아, 계셨군요. 안녕하세요, 사제님.”


고운 목소리가 느닷없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어, 저··· 당신은?”


넬은 반사적으로 대답하긴 했지만 상대를 알아보지 못했다.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넬로서는 아직 마을 사람들을 모두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사석에선 처음 뵙네요. 저는 네프리티나, 농가에서 일을 돕는 천한 여자랍니다.”


가혹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는 소개말에 사제는 당황했다.

이런 인사는 변방에서는 흔하지 않은, 도시에서 천민이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나 올리는 예였다.


“그러지 마시길, 저는 귀족도 아닌데다 여신 앞에서는 그 누구라 할지라도 동등합니다. 심지어 저도 농가출신이고요.”


넬이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네프리티나라고 이름을 밝힌 여인은 활짝 웃어보였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네요.”


상대는 엷은 색의 갈색머리.

청옥과 같이 파란 눈동자를 가진 젊은 여인이었다.

마을 주민 특유의 수수한 차림이었지만, 자세히 보니 키리아나 레렌보다 몸매가 더 풍만했다.


“죄송해요. 노크를 했어야했는데 정문이 열려있기에 그냥 들어와 버렸네요.”

“아닙니다. 성당은 마을 사람들 모두의 것인걸요. 이곳은 누구나 원할 때 오고가는 곳이랍니다. 부디 사양하지마시길.”

“어머나, 친절하기도 하셔라.”

“당연한 일입니다. 그보다 아가씨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아가씨.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네프리티나의 얼굴에 당황스런 기색이 떠올랐다.

넬은 자신이 상대의 나이 대를 잘못 짚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연한 눈썹과 순한 눈 모양.

작은 코와 입술은 젊은 아가씨처럼 보였지만···.

은근히 나긋한 인상에 어른 특유의 성숙한 여유가 담겨있다.

어쩌면 그녀는 넬보다 나이가 많을 지도 몰랐다.

네프리티나는 곧 싱긋 웃으며 입을 연다.


“젊게 봐주셔서 고맙네요. 저급한 추파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주셨다니.”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후후, 괜찮아요. 저는 마을에서 축제 이야기로 사제님에게 전해드릴 이야기가 있어서 왔답니다. 장작 기둥을 불태우기 전에 기도문을 읊어주실 수 있나 해서요.”

“기도문이라···.”

“거절하셔도 되요. 교단의 입장에서 봄 축제 같은 건 이단의 행사나 다름없잖아요. 촌장님께서도 혹시나 싶어서 여쭤보라고 하신 거니까요.”


장작을 높게 쌓아 불태우는 마을의 전통은 교단이 자리 잡기 전에 유행하던 마을의 토속신앙.

넬이 몸을 담고 있는 종교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즉, 사교도의 의식.

이런 부탁은 어찌 보면 여신을 모독하는 것이라 받아들여도 무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네프리티나는 혹여 사제가 기분 나빠하기라도 할지 걱정스런 얼굴이었다.

다행히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그 누구도 아닌, 이 넬 노튼이라는 사제에게 있어서 교리란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었다.


“물론입니다. 당연히 해드려야지요.”

“무리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아뇨, 기꺼이 하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쯤이야.”


넬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네프리티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후, 다행이에요. 사실 이번 축제는 봄을 기리려는 것도 있지만 새로운 마을의 가족을 반기는 환영식이기도 하거든요. 거기다 귀하신 분이기도 하시니까요.”

“귀하다니, 과한 말씀입니다. 애초에 저는 평민 출신이고······.”

“충분히 귀하신 분이세요.”

“네?”


되묻는 넬의 말에 네프리티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이 성당은 저희들에게 자랑이랍니다. 이렇게 작아빠진 마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건물인걸요? 그리고 드디어 그 성당에 주인이 들어왔다고 다들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사제님은 조금 거만한 흉내를 내주셔도 된답니다.”


점잖게 미소를 보내는 네프리티나의 모습에 사제는 눈앞의 여자가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넬은 조금 더 네프리티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처음만난 사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모습 대화를 나누어도 부담스럽지 않은 여인이었다.

당장 넬은 자신의 기억 속에서 네프리티나와 닮은 이를 확실히 떠올리지 못했다.

어렴풋이 떠오르긴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이 여인은 사제의 기억 속의 누군가와 닮아있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슬아슬한 기분···.

하지만 그 묘한 친근감이 넬로 하여금 여인에게 호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저, 바쁘시지 않다면 기왕 오신 거 차라도 한잔 하고 가시죠. 좋은 차가 있거든요.”


사제는 손에 든 잔을 들어 보이며 여인에게 차를 권했다.


“어머, 잘 됐네요. 마침 목이 말랐었는데.”

“금방 내오겠습니다. 부인께선 저기 의자에 앉아서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네프리티나는 넬이 가리킨 창가 자리에 다소곳이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넬이 예배당에서 새 찻잔을 꺼내왔다.

찻잔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흘러나왔다.


“어머나, 준비가 대단히 빠르시네요? 신기한걸요. 말린 찻잎을 빻아서 가루로 만들어낸 건가요?”

“네, 요즘 수도에선 이런 차가 유행하더군요. 맛도 진하고 물만 부어넣으면 끝이라 간편해서 다들 좋아한다고 합니다.”


여인은 살짝 눈을 감았다.

향을 즐기는 모양이었다.

네프리티나가 싱긋 웃으며 차를 입가로 가져간다.

한 모금을 들이키더니 맛을 음미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넬은 역시 네프리티나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교단에서 생활하던 때에도 수많은 귀족영애들의 모습을 보아왔지만 이 여인의 기품을 따라올 만한 사람은 드물었다.

남을 얕보거나, 으스대지 않는 품위.

그러나 자신을 과하게 낮추던 모습은 위화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귀한 물건이네요. 마시기 아까워요.”


네프리티나가 충분히 향취를 즐긴 뒤에 입을 열었다.

차의 가치를 알아챈 여인의 총명함에 넬은 미소를 지었다.


“부인의 미모를 생각한다면 차의 가치 따윈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쩜! 짓궂기도 하셔라. 빈말을 정말 잘 하시는 걸요?”

“아니, 그런 의도는···.”

“그렇겠지요. 하지만 사심 없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더 문제죠. 레렌의 고생이 심하겠어요.”

“음?”

“후후, 다 그런 게 있답니다.”


넬은 그제야 이 여인이 누구를 닮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가씨는 저희 어머님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어머, 그런가요?”

“네, 모친께서도 언제나 제가 잘 모르는 이야기를 하시곤 뭔가가 있다며 넘겨버리곤 하셨죠. 대부분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지만···.”

“하긴 저도 한 잔소리하죠?”

“아, 죄송합니다. 제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넬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자신에게 친숙한 느낌이라 해서 상대도 같을 리 없었다.

네프리티나의 입장에선 넬이 괜히 혼자 들뜬 경솔하게 떠드는 것에 불과했다.

여인에게 농이나 던지는 못난 사제라고 남에게 비난받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 큰 아들을 얻은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네요.”


다행히 네프리티나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이런 와중에도 재치 있는 농담을 건네며 재미있다는 듯 쿡쿡 소리를 낸다.

기지가 넘치는 입담에 넬은 그만 네프리티나를 따라 웃어버렸다.

이제야 밝고 화려한 성당에 어울리는 분위기가 되었다.

한참동안이나 경박하지도, 어수선하지도 않은 점잖은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사제님은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저는 사제는 모두 엄격하고 딱딱한 사람들만 있는 줄 알았거든요.”

“그렇습니까?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군요. 전 항상 동료들한테 재미없는 녀석이란 소릴 곧잘 들었었거든요.”

“우후후, 그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가 아닐까 생각하지만요.”


넬이 이처럼 허물없는 대화를 나눠본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몇 마디 나눈 것도 없음에도 이렇게 금방 친해지는 사람이 있다니 넬 스스로도 신기했다.

네프리티나는 지금 창가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묘한 애수가 담겨져 있어.

마치 곧 깨어날 예정인 꿈속을 관찰하는 한 눈길이었다.


“좋은 마을이죠?”


여인은 사제에게 뜬금없는 말을 건넨다.

네프리티나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을 향해있다.

그리곤 넬이 대답하기도 전에 살며시 고개를 돌리더니 사제의 얼굴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사제님도 잘 아시겠지만 이 마을은 많은 타지의 사람들이 모여서 정착한 이방인들의 마을이에요. 그래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들의 슬픔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죠.”


이방인들의 마을.

넬은 네프리티나의 절묘한 표현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 일대의 험준한 지형과는 달리 마을 안은 풍족하고 여유가 넘쳤다.

보기 드물 만큼 비옥한 땅.

그리고 상류 강으로부터 흘러오는 깨끗한 물이 마을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

이 땅에 노동력을 착취하는 땅의 주인이나 강압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영주는 없었다.

그저 촌장의 지시로 가족의 수에 따라 나누는 정도로 충분했다.

마을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서로 협력했어.

자잘한 항상 분쟁은 있었지만 큰 싸움으로 번지는 일은 없었다.

어쩜 이토록 행복한 촌락이 있을 수 있을까?

넬은 처음 사실 이 마을을 방문했을 때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이 시골 마을은 이상할 정도로 외지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없었기에.

마을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 이방인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할 법도 한데, 단지 교단의 사제라는 이유로 푸근하게 감싸다니?

넬이 가진 변방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힘이 들었다.

이곳은 산자락에 위치한 외지의 마을이다.

산을 넘어가는데 만도 이틀이 넘게 걸리는 고립된 지역이라 도움을 요청하기 쉽지가 않다.

탐욕스런 약탈자들이 이런 좋은 먹잇감을 놓칠 리는 만무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 이름 없는 마을은 벌써 십 수 년이 넘도록 번영해왔다.

수도 주변의 번영한 도시보다도 행복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넬은 마을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마을의 구성원들의 피부색이 달라, 좀 더 관찰해보니 말투나 억양도 미묘하게 차이가 났던 것이다.

이곳 사람들이 외지인에게 친절한 이유는 바로 그들 자신이 이방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름 없는 마을은 다양한 지역에서 찾아온 외지인들로만 이루어진 마을이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그들은 노략질을 하던 산적들조차 감화시켜 마을의 일원으로 만들었고.

전장에서 도망친 패잔병들을 마을의 자경단원으로 뽑았다.

그 누구라 할지라도 안락한 평화를 거절할 사람은 없는 법이었다.

길게 이어진 전쟁은 많은 이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수없이 많은 마을과 도시가 잿더미로 변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겼다.

어떤 여인은 남편과 자식을.

어떤 병사는 돌아갈 보금자리를 잃었다.

그 싸움에 영광스런 승리는 없어.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오직 결코 잊지 못할 처절한 슬픔뿐.

전쟁의 희생자들은 어디에서든 환영받지 못했고 철저하게 배척당했다.

누구도 바라지 않은 비극에 그들은 무너져갔고 단지 소박한 행복과 희망을 갈구했다.

자신들을 거부하지 않을 보금자리를 바라.

그리고 오래도록 이어진 고난의 시간 끝에 그들은 자신이 있을 장소를 직접 만들기로 했다.

주인이 없는 척박한 산등성이 아래의 땅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이 마을은 그러한 아픔 속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버림받은 마을에 어설픈 집을 세우고 미흡한 밭을 일궈가는 수준에 불과했다.

땅을 개간하는 데에만도 수개월.

첫 싹이 올라오는 데에만도 꼬박 일 년이 걸렸다.

기다림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그들에게 달리 선택권이 없었다.

개척자들은 몇 번이나 신을 원망했고 몇 번이나 운명을 탓했다.

농작물 수확에 실패한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을 때 굶어죽은 이들의 시체를 묻어가면서 그들을 더욱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간 죽어간 가족들과 지나간 세월이 그들로 하여금 포기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런 그들의 노력을 여신이 지켜보기라도 한 것일까?

이윽고 다섯 번째 해가 지났을 무렵 드디어 결실이 맺어졌다.

그곳은 더 이상 주인 없는 황무지가 아니었다.

황량한 계곡과 들판이 사라졌다.

고향을 잃어버린 이들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된 것이었다.

시작은 그때부터였다.

그 이후로 소식을 들은 다른 지역의 피난민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규모는 점차 커져갔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왕국 자치령에 속한 하나의 마을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넬은 네프리티나의 미소에서 알 수 없는 쓸쓸함을 느꼈다.

분명 이 여인도 그간 힘들고 고된 시간을 보냈으리라.


“분명 사제님께서도 이 마을을 좋아하게 되실 거예요.”


네프리티나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머리를 쓸어낸다.

그 모습에 넬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네프리티나를 따라 부드럽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요수전기 키리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3 키리아(5) +2 21.05.16 58 12 18쪽
» 키리아(4) +2 21.05.15 87 17 17쪽
11 키리아(3) +4 21.05.15 79 18 19쪽
10 키리아(2) +3 21.05.14 96 19 11쪽
9 키리아(1) +3 21.05.14 94 20 24쪽
8 조우(7) +4 21.05.13 142 20 11쪽
7 조우(6) +1 21.05.13 110 21 13쪽
6 조우(5) +1 21.05.12 147 22 11쪽
5 조우(4) +3 21.05.12 154 24 19쪽
4 조우(3) +1 21.05.12 173 22 9쪽
3 조우(2) 21.05.12 234 27 13쪽
2 조우(1) +1 21.05.12 389 41 23쪽
1 프롤로그 +5 21.05.12 597 57 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