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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세계의 규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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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rdap
작품등록일 :
2024.06.01 21:52
최근연재일 :
2024.07.03 14:48
연재수 :
13 회
조회수 :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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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글자수 :
6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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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03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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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3.일반적인.(1)

DUMMY

“오랜만입니다.”


집에 태혁이 방문하자 청선은 바짝 긴장하여 성은의 뒤에 몸을 숨겼다. 성은은 그런 청선이 귀엽다는 듯 머리를 한 번 쓸어주고 태혁을 자리에 앉혔다. 자신과 청선 역시 태혁 앞에 앉았다.


“청선 양의 신분증을 비롯하여 관련 서류를 가져왔습니다.”


태혁은 들고 온 가방에서 갈색 봉투를 꺼내 성은에게 내밀었다. 성은은 그 봉투를 받는 대신 손바닥을 청선을 향해 내밀었다.


“내 신분증이 아니잖아. 주인이 먼저 봐야지.”


태혁은 안경을 한번 쓱 밀어올리고 청선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청선은 겁이 나 고개를 얼른 숙였지만, 어쩐지 서서히 고개가 들리는 느낌이 났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그러나 성은은 곧 손바닥으로 청선의 눈 앞을 가렸다. 청선은 제 눈앞에 보이는 손바닥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가리시지. 호기심이 일었지만 청선은 스승님의 뜻에 따라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


“쓸데없는 일은 아니고, 의중이 궁금해서 봤을 뿐입니다. 청선 양은 글은 압니까?”

“그럼. 내가 얼마나 잘 가르쳤는데.”

“영준 군이 한 건 아니고요?”

“내가 다했어!”


······그건 아닌데. 영준 오빠도 학교 다녀오고 시간 날 때마다 가르쳐줬고, 받아쓰기도 시켜주고 맞을 때마다 사탕도 줬다. 그러나 여전히 청선은 아무 말 안 했다.


“청선 양은 미성년자니까 어쨌든 보호자이신 성은 님이 먼저 보시는 것이 맞다 생각합니다만,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제야 성은의 손바닥이 내려왔고, 태혁이 봉투를 청선 쪽으로 밀어줬다. 청선은 성은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가 성은이 고개를 끄덕이자 봉투를 열어보았다.

흰색 종이에 까만 글자가 가득했다. 청선은 눈을 부릅뜨고 한 글자 한 글자 읽어갔다.


“이름. 유청선.”

“보호자이신 성은 님의 세속성을 가져왔습니다.”

“좋네. 우리 집 대 끊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이어가네.”


세속성? 청선이 고개를 갸웃했다.


“성. 어느 집안인지 설명하는 건데, 난 성을 버려서 없어. 내 옛날 성을 세속성이라고 해.”

“네.”


청선의 볼이 붉어졌다. 이해는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최소한 ‘스승님’의 ‘집안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깨달아서. 생전 가져보지 못한 것들. 두근거림에 잠깐 읽는 것이 멈췄지만 곧 다시 이어졌다. 성은과 태혁이 저를 계속 보고 있었으니까.


“어, 성별 여자, 보호자 성은. 동거인, 영준. 동거인?”


보호자는 대충 알겠는데 동거인이라는 말뜻을 몰라 성은을 돌아보았다. 성은이 같이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설명해줬다. '오빠'는 동거인이구나.


“그리고 주소······.”


주소부터 전화번호까지 지난 한 달간 성은과 영준이 글과 숫자를 가르쳐주며 달달 외우게 한 것들이 나와 이름보다 능숙하게 읽었다.


“본 증명서는, 차······원 과, 관리구욱과 대하안 미인국 헌법이 보······장 하는 신분 확인, 서로······.”


그리고 이어지는 글씨는 작기도 작거니와 알지 못하는 단어들이 너무 많이 나왔다. 청선이 글을 배우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글씨를 읽을 줄 안다고 글을 읽을 줄 아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금고, 형, 이상을 받을 경우······우리 차원에서 추, 방 되며······.”


글을 배우는 동안 청선이 제대로 못 해낸 경우 자체가 별로 없긴 하지만, 청선이 모른다고 할 때 스승님과 오빠가 면박 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청선은 지금 제대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자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결국 거의 마지막 줄에서는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웅얼거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 아가 잘했어!”


그래도 성은은 박수까지 치며 잘했다고 칭찬한다. 그에 더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태혁아. 너는 박수 안 치니?”


거기에 태혁에게 박수까지 강요하니 더더 부끄러웠다. 지금 청선의 얼굴은 새빨갰다. 태혁의 영혼 없는 박수 소리 세 번이 추가되자 청선은 식탁 밑으로 숨고 싶었다. 오빠가, 스승님께 짜증 내는 이유를 아주 조금, 아주 조금 알 것 같았다.


“뜻은 알겠습니까?”


태혁의 냉정한 목소리에 새빨갛던 얼굴이 이제는 새파래졌다. 청선은 입 안쪽을 꾹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아니요.”

“죄송할 건 없지! 모르는 건 죄송할 일이 아니지!”

“······확실히 이해도 못 한 주제에 부끄럽다고 아무 말 안 하는 성인들보다는 낫군요.”


청선은 저도 모르게 끄응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여기, 첫 줄은 세계와 세계를 이어주는 문을 관리하는 차원관리국과 이 나라의 법이 청선 양의 신분을 보증한다는 내용입니다.”


냉정한 얼굴과 마찬가지로 딱딱한 목소리로 풀어서 설명해주는데 여전히 모르겠어서 막막한 얼굴만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당분간 공적인 업무 처리는 성은 님이 대신 할 거라는 것, 그것은 18세까지라는 것, 그리고 18세 이전이라도 금고형, 즉 감옥갈만한 범죄를 저지르면 본래 세계로 돌려보낸다는 이야기입니다.”


청선은 순간 흠칫 굳었다. 그 세계를 떠나온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고향’인데. 너무나도 두렵고 끔찍하게 여겨졌다. 날마다 춥고 배고팠다.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다정하지 않은 말과 행동들. 저주받은 아이. 청선은 제 손목에 걸린 푸른 구슬을 보았다.


“괜찮아. 아가, 나쁜 짓 안 하면 되는 거야. 내가 알려준 규칙들 있지?”

“네······.”

“그것을 지키면 되는 거야. 거리는 신호를 보고 건너고, 물건을 사면 돈을 내고, 남의 물건은 건들지 말고, 사람을 때리면 안 되고.”


성은이 청선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하자 태혁이 생경한 것을 본다는 듯 눈썹을 올리면서도 제 할 말을 했다.


“흠. 청선 양 나이대면 확실히 그 정도만 알면 되겠지요. 물건 훔치지 말고, 사람 때리거나 죽이지 말고.”

“안 죽여요!”


청선이 기겁하여 목소리를 높였다가 어른들 앞이라는 것을 깨닫고 또 흠칫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스승님과 오빠가 너무 잘해주니까 자기도 모르게 건방져진 것 같다.


“그래, 우리 아가는 그런 짓 안 해.”

“참······.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

“뭐? 나 뭐?”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어른들끼리 편안하게 이야기를 이어가자 청선은 어깨에서 힘을 뺐다. 앞으로는 이러지 말아야지.


“그리고 그다음 서류부터는 정말로 보호자 분이 보셔야 하는 겁니다.”

“응? 뭔데?”

“학교 입학 관련입니다.”

“아!”


성은은 청선이 읽었던 서류 밑에 깔린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흐음, 으음, 하는 소리만 내고 눈으로 서류를 읽어내렸기에 청선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학교.

오빠가 그랬다. 이 나라에서는 학교는 누구나 가야 하는 곳이라고.

학교에 나도 가는 것일까. 아침 TV 드라마에 학교도 나오긴 했는데, 그런 학교는 다 큰 어른들이 다니는 곳이었는데. 나는 학교에서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 스승님과 오빠가 아무리 칭찬해줘도 모르는 게 너무너무 많은데. 배우고는 싶어. 그런데 무섭다. 학교에 가면 스승님과 오빠가 옆에 없을 텐데.


“알겠어. 다음 주에 교육청에 들렸다가 학교에 상담 신청하고 편입시키면 된다는 거지?”

“네. 일단 교육청 이 세계 이주 아동 담당과로 연락하시면 자세히 안내해 줄 겁니다.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 넘어오는 아동은 잘 없다 보니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응. 알았어.”

“그럼 여기, 서류 받으셨다는 확인 서명해주십시오.”

“응.”


성은은 태혁이 내민 펜을 받아 스르륵 뭐라 휘갈겨 썼다. 청선은 눈을 깜빡였다. ······못 읽는 글자다.


“아가도 해야지?”


성은이 빙그레 웃으며 서류 수령 확인증을 청선에게 내밀며 서명한 곳 밑을 가리켰다.


보호자: 성은

본인: 유청선


청선은 침을 꼴깍 삼켰다. 뭔가 두근거렸다.


“여기에, 이름을 적는 거야. 예쁘게 꾸며도 되고.”

“성은 님.”

“왜? 또? 뭐? 사인이 예쁘고 멋있으면 좋잖아. 연예인들이 사인 연습 괜히 하니?”

“하아······.”


태혁이 길게 한숨을 내쉬고 청선은 두 어른의 눈치를 살피며 꼼지락꼼지락 제 이름 옆에 이름을 썼다.

삐뚤빼뚤. 교재에 나온 글씨와 너무도 다른 글씨다. 그럼에도 예쁘게 쓰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또······.


“이건 뭐니?”


청선이 쓴 이름 옆에 조그만 동그라미들이 달려있다.


“꽃······이요. 꽃은 예쁘니까요.”

“아하하하.”


성은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고, 내도록 냉정한 얼굴을 하던 태혁의 입술도 조금 올라왔다.

······안 예쁜가?

하지만, 어른들이 더 아무 말 안 했기에 청선을 얼굴을 붉히면서도 꽃을 지우지 않았다.


“다 했어요.”


청선이 두 손으로 서류를 태혁에게 내밀자, 태혁은 잠깐 청선을 바라보았다. 처음처럼 무섭기만 한 얼굴은 아니었다. 찡그리지도 않았고, 강렬하게 바라보지도 않았다. 태혁은 종이를 받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오른손을 청선을 향해 내밀었다.


“우리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유청선 양.”


그가 내민 오른손에 청선은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때리려고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아가. 이건 악수라는 거야.”


그때 성은이 미소 지으며 설명한다.


“인간 대 인간, 동등한 개체끼리 할 수 있는 인사이기도 하지. 아가의 오른손으로 마주 잡으면 된단다.”


아. 그래 TV에서 본 적 있었다. 청선은 조심스럽게 제 오른손을 내밀어 태혁의 손을 잡았다. 청선의 손이 태혁의 손의 반밖에 되지 않아 겨우 손가락이나 붙든 정도였지만. 태혁은 픽 웃으며 그 작은 손을 붙들고 가볍게 흔들어주었다.


“청선 양, 우리 세계에 잘 적응하길 기원합니다.”

“네, 열심히 할게요. 감사합니다!”




**



태혁이 왔다 간 후 일주일 동안 스승님은 바쁘셨다. 교육청이라는 곳에 전화도 하고, 서류를 받아야 한다서 다녀오시기도 하고. 청선이 다 따라갈 필요는 없다고 해서 집에 남았다. 그렇다고 청선이 멍하니 TV만 보면서 시간을 보낸 것도 아니었다.


“학교가려면 준비는 되어야지.”


영준때문이었다. 영준은 청선이 학교 가면 보게 된다는 책을 좌르륵 구해왔다. 그걸 ‘교과서’라고 부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청선은 더듬더듬 제목을 읽어보았다. 국어, 수학, 즐거운 생활, 바른 생활······. 청선은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9살이면 2학년이니까, 1학년 내용은 알고 들어가는 게 좋지.”


영준은 팔을 걷어붙이고, 식탁 의자를 끌어와 청선 옆에 앉았다. 오빠가 무엇을 가르쳐 준 적은 많지만, 뭐랄까, 저토록, 저토록 눈이 번쩍이는 것은 처음 보았다.


“넌 똑똑하니까 나중에 좋은 대학 가야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소리도 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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