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소용돌이 생산공장

우리 세계의 규칙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드라마

Girdap
작품등록일 :
2024.06.01 21:52
최근연재일 :
2024.06.27 14:18
연재수 :
11 회
조회수 :
175
추천수 :
8
글자수 :
51,360

작성
24.06.19 04:53
조회
13
추천
0
글자
10쪽

2.중요한.(3)

DUMMY

그러자 슬슬 불안해졌다. 청선은 오빠가 학교를 간 후 마저 식사를 마치고 습관처럼 텔레비전을 틀었다. 부자 사모님이 결국 커다란 자동차로 아들의 연인을 치려 하는 장면을 보면서도 놀라지 못했다. 아들이 나타나 연인을 감싸 도로를 구르는 장면을 보면서도 청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시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많은 것을 했지만 '일'은 아니었다. 생활은 너무나도 편안했다. 평생 쓸 운을 한번에 다 쓴 기분이었다. 잠자리는 늘 편안했고, 깨끗하고 맛있는 식사는 모자란 적이 없고 외려 넘쳐났다. 아침저녁 깨끗한 물로 씻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아직도 청선은 밤이면 깊이 잠들지 못하고 문가에 앉아 방 밖의 동정을 살피다 잠들었다.


왜 자신은 여기에 있는 걸까.

있을 수 있는 걸까.


여태 자신에게 먹을 걸 주거나 잠자리를 주거나 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을 시켰다. 청소나 설거지, 쓰레기 버리기, 밭 갈기, 물 주기, 열매 따기, 남은 짐승 내장 버리기 같은 많은 일을 시켰다.


그러나 오빠와 스승님은 자신이 '싱크대'를 배운 후에 설거지하려 하자 기겁을 하며 말렸다. 자신이 해도 되는 일이란 자고 일어나서 이불을 정리하는 것 말고는 없었다.

이런 상황을 꿈꿔 본 적이 딱 한 번은 있었다. 너무너무 힘들고 피곤한 날, 딱 하루만 배부르게 먹고 푹 자고 싶었다. 단 하루만이라도, 정말 단 하루만이라도 아무 일도 안 하고 그저 먹고 자고 싶었다. 그래도 그날도 어김없이 일어나 일을 하고 식사를 구걸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꿈꾸던 날이 열흘 가까이 되니 슬금슬금 불안함이 치솟았다. 이거, 이래도 되나.


-네가 짐승이 아니라 사람 새끼면 일을 해야지.


개새끼도 아니고 저주받은 새끼도 아니게 살고 싶어서 일을 열심히 했는데. 여기서는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넌 그런 거 안 해도 된다.


오빠가 설거지를 말리며 한 말이었다. 하지만, 스승님의 제자인 오빠도 매일 같이 식사 준비를 하고 청소를 하고 많은 일을 하는데 더부살이인 자신이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청선은 그저 불안했지만, 이것을 스승님과 오빠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몰랐다. 주는 것도 잘 받아먹지 못한 배부른 아이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아니, 배부른 건 맞는데.


“아가, 밥은 먹었니?”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식사 준비 할까요?”


성은이 비척비척 나오자 청선은 소파에서 냉큼 일어나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성은은 푸스스 웃으며 청선의 머리를 조금 쓰다듬고 고개를 저었다.


“내가 챙겨 먹을 수 있으니 아가는 가서 드라마나 마저 보렴. 오늘은 아들과 엄마가 대판 싸우나 보는구나.”


성은은 절룩이는 발걸음으로도 능숙하게 냉장고에서 빵을 꺼내 프라이팬에 구워 식탁 앞에 앉았다. 청선은 그 광경을 멀거니 바라만 보았다.


**


낮의 불안함은 가시지 않아 청선은 오늘도 결국 문틈을 조금 열고 스며 들어오는 거실의 빛이 닿지 않는 자리에 쪼그리고 앉았다. 밤이면 오빠는 스승님의 방으로 간다. 그 '중첩된 세상'의 문을 관리하는 법을 배우고 있겠지. 그건 한 사람이 단 한 사람에게만 가르쳐주는 법이 있기에 자신에게는 가르쳐주면 안 된다고 한다. 그런 걸 배우길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언제까지 여기 이렇게 아무 일도 안 하고 살 수 있을까. 청선은 그런 생각을 하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귓가에 언뜻 소리가 들린다, 오빠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스승님의 웃음소리가, 또 발소리가······. 아, 자는 척해야 하는데, 근데 일어날 수 없어.


“아가는 또 여기서 잠이 들었네.”


스승님 목소리 같은데.


“얘는 왜 침대를 두고 맨날 바닥에······.”


오빠 목소리 같다. 뭔가 크고 따뜻한 품이 자신을 안아 드는 것 같다. 딱딱해. 따뜻해.


“오빠······.”

“깼냐?”

“저 정말 아무 일 안 해도 되어요?”


소리가 끊긴다. 꿈인가. 오빠랑 스승님은 자신의 말에 항상 대답해 주는데. 소리가 없는 거 보니까 꿈인가 보다.


“저······여기 언제까지 있을 수 있어요?”


묻고 싶은 말이 꿈결에 흘러나온다.


“정말 아무 일 안 해도 되어요?”


가만히 등에 따뜻한 것이 닿는다. 배 위로도. 그리고 이마 위로도. 꿈이라 그런가. 두 분은 아무 말도 없었고, 아무 일 하지 말라는 말도 없었다. 그리고 언제까지 있어도 된다는 말도. 그 침묵에 청선은 몸을 웅크렸다. 가만가만 청선의 눈꼬리에 작은 물방울이 맺혔다.



***



청선은 잠에서 깨 일어났다. 얼른 이불을 정리하고 잠옷을 갈아입었다. 이것도 오빠가 사준 옷이었다. 카드 값는 스승님이 내신다지만, 오빠가 골라준 옷이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안녕.”


오늘은 오빠도 편한 옷을 입고 서두르지 않고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오빠가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니까. 청선은 싱크대 앞에서 움직이는 오빠 옆에 멀거니 앉았다가 도와드릴게요, 라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식탁 앞에 앉으려 했다.


“야.”

“네?”


갑작스러운 오빠의 부름에 청선이 움찔하며 얼른 답했다. 오빠는 포크 세 개와 나이프 세 개를 내밀었다.


“식탁 위에 올려놔.”

“아! 네!”


청선은 환하게 웃으며 얼른 달려가 오빠의 손에서 그것들을 받아 식탁을 차렸다. 그리고 오빠는 아무 소리 없이 깔개도 내밀었다. 청선은 눈치껏 그것을 받아 스승님 자리에 먼저, 그리고 오빠의 자리 그다음으로 자신의 자리에 깔았다. 곧 오빠는 잼과 버터가 담긴 작은 그릇도 손끝으로 가리켰고, 청선은 얼른 그것도 오빠가 늘 두던 자리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가서 스승님 좀 깨워.”

“······깨워요?”


스승님이 일어나시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청선은 오빠의 명령에도 얼른 달려 가기 보다는 눈을 크게 뜨고 말대꾸를 했다. 그에 놀라 청선은 얼른 입을 합 하고 가렸다. 그러나 영준은 청선의 반응이 어떻든 간에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갈 곳이 있어서. 본인이 일찍 일어나시겠다고, 깨우라고 하셨다.”

“아, 네.”


그럼 깨워야지. 청선은 스승님 방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스승님, 일어나셔야 해요, 하고 청선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부엌에서 영준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거 가지고 일어나는 양반 아니다.”

“앗, 네!”

“문 열고 들어가도 된다.”


청선은 문 고리를 잡아 돌리고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갔다. 스승의 방 안에 들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안에 가구는 자신의 방과 달리 전부 큼직큼직했고, 그리고······. 조금 지저분했다. 아니, 많이. 자신은 이런 거 치우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는데.


“스승님, 스승님. 일어나세요, 아침이에요. 오늘 어디 가신다면서요.”


청선은 이불을 둘둘 말고 자고 있는 스승님을 흔들었다. 으으응, 으으응 하는 잠투정하는 소리 몇번 하다가 스승은 눈을 떴다. 가느다랗게 뜬 눈이 청선의 눈과 마주했다. 잠이 덜 깬 스승의 눈이 청선을 바라본다. 그 눈에 청선에 움찔했다. 그때 그 나라에서 온 사람의 눈과 비슷해서.


“아가구나······.”


그러나 곧 청선이 알고 있는 다정한 눈으로 바뀌었다.


“일어나야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아가도 잘 잤니?”

“네.”


꾸물거리며 눈을 뜬 것 치고는 일어날 때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스승이 일어난 것을 확인 하자 청선은 밖으로 나왔다. 어느 새 식탁에는 식사가 준비 되어있었다.


“먹자.”


스승은 곧 따라 나와 식탁에 앉았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스승이 커피 반 잔을 다 마셨을 때즘 말했다.


“오늘은 우리 가게에 갈 거야.”

“가게요?”

“응. 우리 가게.”


스승님이 가게도 있었던가. 솔직히 매일 집에서 뭐 하시나 싶긴 했지만, 그래서 카드값은 어떻게 갚으실지 걱정하긴 했지만, 가게 주인이라니! 마을에서도 잘 사는 사람들만 운영하는 것이 아닌가. 이 곳은 좀 다른 것 같지만.


“가게가 있었나요?”

“그래, 오랫동안 안 가도 했으니 슬슬 다시 열어야 하고.”


무슨 가게일까. 스승님은 뭘 파시는 걸까. 그리고 자신도 거기 가도 될까. 그런 청선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스승은 눈 한쪽을 찡긋했다.


“물론 아가도 갈 거야.”

“네? 진짜요?”


청선의 눈이 더 휘둥그래졌다.


“그래. 너도 우리 식구인데.”

식구.

“가서 할 일이 아주 많거든. 아가가 도와줘야 해.”

“네! 저 잘 할 수 있어요!”


청선의 단호한 대답에 영준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데서나 뭐든지 잘한다고 답하지 마라. 내 꼴 난다.”


영준의 말에는 세월의 한탄이 묻어났지만, 청선이 어찌 알겠는가. 청선은 그저 스승의 일을 도울 수 있다는 말에 신이 났을 뿐이었다.


식사가 끝나자마자 청선은 얼른 이를 닦고 나왔다. 그 사이 영준은 설거지를 모두 마쳤고 스승은 옷도 갈아입었다. 청선은 동동거리며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으려 했다. 그러나 영준은 주머니 하나에 청선의 신발을 챙겨넣었을 뿐이었다. 자신의 신발도 같이.


“현관으로 가는 게 아니야.”

“아.”


청선은 순간 깨달았다. 그때 책상을 사러갔을 때처럼.


“좋아, 준비 되었지?”


스승은 청선을 향해 눈을 찡긋거렸다. 한쪽 눈만 찡긋하려 한 것 같은데, 어쩐지 두 눈 다 찡긋거리며 콧잔등까지 찡그려졌다.


“하나, 둘, 셋.”


스승은 자신의 방 문을 열었다.


“우와와!”


청선은 이제 감탄을 감추지도 않았다. 아니, 못했다. 가구가 가득한 상점이 나타났을 때 겪었다지만, 여전히 신기했다. 스승의 방은 없고, 보이는 것은 나무로 만들어진 가게였다. 조금은 어둑한 가게에는 색색이 유리병이 있었고, 편안해 보이는 의자와 소파가 늘어서 있었다. 여기, 이 '세계'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가게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우리 세계의 규칙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1 2.중요한.(5) 24.06.27 8 0 12쪽
10 2.중요한.(4) 24.06.24 9 0 10쪽
» 2.중요한.(3) 24.06.19 14 0 10쪽
8 2.중요한.(2) 24.06.16 23 0 10쪽
7 2.중요한.(1) 24.06.13 11 0 10쪽
6 1.소소한(5) 24.06.10 15 0 10쪽
5 1.소소한(4) 24.06.07 12 1 12쪽
4 1.소소한(3) +2 24.06.05 20 2 12쪽
3 1.소소한(2) 24.06.03 18 2 12쪽
2 1.소소한(1) 24.06.01 21 2 12쪽
1 0.만남 24.06.01 25 1 4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