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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르소 님의 서재입니다.

저격병과 장미와 늑대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완결

비르소
작품등록일 :
2020.11.27 23:39
최근연재일 :
2021.02.13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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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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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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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7
글자수 :
350,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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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3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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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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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진실 혹은 침묵

DUMMY

“대단해요. 더할 나위 없이 대단합니다!”


재활실에서 레빈의 운동능력을 테스트하던 피르슈 박사가 탄성을 질렀다.


레빈의 의수와 의족이 생각보다 빠르게, 그리고 완벽하게 적응되어 동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일한 단점은 찰칵거리는 소음 정도였다.


“이게 그만큼 대단한 건가요?”


“물론이죠. 솔직히 이 정도까지 될 줄은······.”


레빈의 질문에 피르슈는 데이터를 종이로 한가득 뽑더니 말을 이었다.


“이 정도까지 완벽한 운동능력을 인공물이 보여주는 건 가히 기적에 가깝다 할 수 있어요. 보세요. 원래의 팔다리와 거의 똑같은 근력과 지구력을 보여주고 있어요. 착용 부분에 괴사도 없습니다. 이건 기적이에요. 기적!”


피르슈 박사의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레빈은 알 수 없었지만, 그냥 좋다고 그러는 거니 더 묻지 않고 넘어가기로 했다.


다만 저 좋다고 하는 데이터에 끼니마다 면역억제제나 진통제를 한 움큼씩 먹어야 하는 사정은 반영되어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피르슈 박사의 얘기가 끝나갈 무렵 노크 소리와 함께 마리온이 들어왔다.


“선생님. 모리스 수석비서관님께서 재활이 끝나는 대로 하사님을 모셔 오라고 합니다.”


“알겠어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일주일 정도면 퇴원도 가능할 거 같네요.”


“언제나 감사합니다. 박사님.”


레빈은 피르슈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마리온을 따라 병원 꼭대기 층에 있는 면회실로 향했다.


두터운 면회실의 문을 열자 호른이 팔짱을 낀 채로 앉아 있었다. 그는 레빈이 들어오자, 아무 말 없이 손만 까딱거려 마리온을 밖으로 나가라고 했는데 그 모습이 크게 거슬렸다.


“무슨 비밀 이야기이신지 모르겠지만 용건만 간단히 말씀하시죠. 제가 시간이 없어서.”


“좋아. 송골매씨. 내가 포말하우트 13인의 용사에 대한 특혜를 잘 설명해주지 않은 것 같아서······. 그리 삐딱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네. 내 불찰이야.”


“······.”


“우선 기존의 포상은 유효하네. 하지만 13인의 용사들은 특별하니, 여기에 새로운 혜택들이 기다리고 있지.”


모리스는 보험 특약을 읊는 것처럼 레빈이 받을 혜택에 대하여 설명해주었다.


“우선 명예제대를 시켜줄 예정이야. 복무기간이 얼마 남아있든 즉시 제대하는 거지. 여기 있는 병원비는 물론 공짜고, 앞으로의 재활 비용도 전부 국가에서 지급할 예정이야.

연금도 다른 이들의 1.5배로 지급될 예정이고. 게다가. 원하는 드브리에 대해 100% 획득이 가능하네. 심지어 해당 드브리가 이미 다른 이에게 소유권이 결정되었어도 정부에서 이를 이관시켜 줄 거라네. 국민의 영웅으로 살 수 있는 건 덤으로 쳐주지.”


“꽤 좋은 조건이긴 하네요. 용사들때매 엄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는 건 빼고요.”


“하지만 이 모든 건 내일 행사가 끝난 뒤에 생각해볼 문제야. 내일 무슨 일이 있는지는 알고 있겠지? 국가적인 행사이고 공화국 전역으로 생중계될 거야.”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내일 이런저런 개소리 하지 말라는 거죠?”


“샌님인 줄 알았건만, 꽤 거칠게 말할 줄도 아는군. 그래 맞아. 잘 알고 있군. 내일 말을 많이 시키거나 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피할 수 없는 인터뷰 같은 때는 말을 가려서 하는 게 좋을 거야.”


“단순 협박만으로 가능할까요?”


“뭐라고?”


“기본이 안 되어 있으시군요. 제게 뭔가 부탁하러 왔으면 그쪽도 뭔가 합당한 대가를 추가로 주셔야 하지 않나?”


“흐흐흐······.”


모리스가 겸언 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이거 우리 송골매님 보통이 아니시네? 이 몸. 토크란 제일의 협상가하고 거래하겠다? 좋아. 그 정도는 우리도 준비하지. 뭘 원해? 돈? 명예? 여자?”


“진실. 전쟁에 대한 모든 진실을 밝히는 것.”


“왜지? 송골매님은 선의의 거짓말도 할 줄 모르나?”


“선의? 뭐가 선의지? 전사자 수를 속이는 거? 공화국 공군은 이미 전멸한 것을 밝히지 않는 거?”


“내가 말 실수를 했군. 엄밀히 말하자면 거짓은 아니고 침묵이지.”


모리스가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난 그저 진실만을 얘기하되 할 말 안 할 말 구분하자는 거야. 지금 우리 공군은 각지에서 승전을 거두고 있어. 이는 전혀 왜곡되지 않은 사실이야. 그들은 온 국민의 응원을 받고 있지. 그런데 그들의 사기를 굳이 떨어뜨릴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그 보안 사항들을 굳이 밝혀서 말이야.”


“아니, 그럴수록 더 밝혀야지. 지금은 마지막 발악에 불과하고, 공화국 공군이 이런 최악의 상황이라 마른 수건까지 쥐어짜고 있고, 보호되어야 할 여성과 노약자까지 사지로 몰고 있다. 이제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말해야 하지 않나? 살 사람들은 살려야지, 남은 국민마저 전부 죽일 셈이야?”


“역시, 큰 그림을 볼 줄 모르는군. 바르카슈 하사.”


“그런 큰 그림 따윈 너희들이나 신경 쓰라고. 지금 필요한 건······.”


“진실을 밝혀라?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진실을 밝힌 다음엔 무얼 해야 되지? 제국에 항복이라도 할까? 그래, 우린 이제 끝났으니 항복합시다. 했다고 치자. 그럼 제국은 어떻게 나올까? 어이구 항복하셨으니 이에 합당하게 대우해드리겠습니다. 할까? 툴레브 왕국을 기억 못 하는 걸 보니 역사 시간에 졸았나 보구먼.”


“툴레브?”


“디아라코이 전쟁 당시 툴레브는 유력한 왕국이었고, 운이 좋았다면 트란잠 대신 디아라코이를 통일하고 주인이 될 수 있었지, 그러나 한 번의 격전 후, 패배했고 결국 수도 코앞까지 몰아닥친 트란잠 군에 자국민들이 희생되는 것을 막고자 항복했어. 싸우지도 않고 말야······. 저들의 기사도를 믿었다나? 근데 어떻게 되었을까?”


“그건······.”


“800만의 왕국 주민이 하나도 남김없이 몰살당했어. 어린애, 여성, 노인, 심지어 젖먹이들까지 말야. 역사는 이를 알다지흐 대학살이라고 기억하고 있지. 제2의 알다지흐 대학살이 공화국에서 벌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토크란은 그때의 툴레브보다도 더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데? 진실? 좋지! 한데 너야 진실이랍시고 그렇게 분탕질 치고 끝낸다 쳐도 국민들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여기서 그만둘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니까.”


“······.”


“때로는 그보다 더한 진실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이 감춰야 하는 법이야. 그러니 괜히 어쭙잖은 정의감에 헛 소리 말고, 나라에서 주는 꿀이나 맛있게 빨아먹어. 왜 그좋은 걸 마다하는지 모르겠군. 정의의 투사 양반.”


모리스의 말에 레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레빈으로서는 지금 당장 그를 논파할 자신이 없었다. 모리스가 괜히 디스커스 궁의 호른으로 불리는 것은 단순히 큰 체구와 쩌렁쩌렁한 목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탁월한 웅변가이자 독설가였다.


은둔자 이미지의 알렌 버나드 대통령과 달리 할 말은 다 하는 사람이라서 비교적 차분한 이미지의 대통령이 욕을 하고 싶을 때 대신 그의 입을 통해서 한다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그런 것들을 차치하고서라도 매주 텔레튜브의 정치 좌담 프로에 나올 수 있는 것은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방증하는 바였다. 소위 말하는 말빨이란 것에 대해 레빈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네······. 그럼 잠자코 있겠습니다. 호른님.”


“허허허, 이제야 말이 통하겠군. 호른. 그거 제가 좋아하는 별명입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꼭 이름을 불러주셨으면 좋겠네요. 뉴스만 봐도 제 이름이 나오니 통성명을 따로 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룸나의 소녀들만 보지 마시고, 가끔 뉴스 같은 것도 좀 보세요. 그럼 내일 디스커스 궁에서 뵙겠습니다. 레빈 바르카슈 하사님.”


완패였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레빈은 입술을 깨물었다.


레빈은 오랜만에 환자복을 벗고 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어색해 보였지만 그가 입던 군복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너덜너덜해져 버렸기 때문에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옷은 환자복 외엔 제복이 전부였다. 이번 정부 행사에 제복을 착용하고 참석하라고 했으므로 따로 옷값이 들지 않는 건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공제병원이 있는 크라프 언덕에서 살라니케 호수 한복판의 섬에 있는 디스커스 궁까지는 셔틀을 타고 갈 수도 있지만, 레빈은 땀을 내고 싶어, 걷기로 했다. 회중시계를 보니 집합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다.


피르슈 박사는 감탄했지만, 그래도 인공적인 게 원래의 것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이물감과 면역억제제는 평생 가지고 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포말하우트 전투 이후 처음으로, 레빈은 자신이 살아있는 것에 대해 신께 감사해했다.


레빈은 위대한 공화국의 수도 벨마덴(Belmarden)의 거리를 걸었다.


벨마덴의 중심가인 체르펠 가를 지나자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상점이 몰려있는 이 거리에서 그는 한때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던 적이 있다. 고객이 주문한 물품을 집까지 가져다주는 배달원의 역할이었는데, 일은 힘들었지만, 보수가 넉넉하진 않았다.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일을 하다가 결국, 소년병 모집 - 공식 명칭은 16~18세 소외계층 자녀의 자립 우대권 획득을 위한 베르그 특별법 시행 -공고를 보고 입대를 결심하게 된 거였다.


“송골매다!”


“송골매야!”


삽시간에 사람들이 레빈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텔레튜브의 영향이 컸다. 레빈은 만들어진 자신의 인기가 굉장히 부담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좋다고 오는 사람들에게 나쁘게 대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인해줘요!”


“포말하우트 전투 얘기해줘요!”


“아, 네······. 포말하우트 얘기는 좀 기니까 이따가 텔레튜브를 통해서 할게요. 물론 사인은 가능합니다.”


사실 레빈에게 특별한 사인 같은 건 없었다. 입대동의서에 사인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쓰는 걸 몇 번 연습했을 뿐이었다.


“음, 굉장히 정직한 사인이네요.”


“정자로 또박또박 쓰여진 사인은 처음이에요.”


“내가 써도 이거 보단 잘 쓰겠다. 하하하.”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좋아해 주니 레빈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와, 이거 멋져요. 보통 팔처럼 움직여요?”


“째깍째깍 소리도 나네. 시계같다.”


“이야~ 직접 보니까 더 신기하네.”


게 중에는 의수를 만지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다들 최신기술이 들어간 그것에 놀라워하는 분위기였다.


“죄송하지만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긴, 늦으면 호른한테 욕먹겠죠? 우리도 보내줄게요!”


“아저씨, 의수로 해주신 사인 고마워요!”


레빈은 사람들을 빠져나오며 다시 한번 손을 흔들었고 그들도 웃으며 그가 가는 길을 배웅해주었다. 감회가 남다르다 생각했다.


레빈이 입대할 때 그의 가게주인은 그가 입대하는 것조차 모르고 3개월 치를 미리 주문받은 상태였다. 언제 한 번, 이 이상한 열기가 가라앉으면 가게에 들러 그때의 갑작스러운 입대에 대해 주인에게 사과할 참이었다.


물론 그와 별개로 매일 야근에, 쉬는 날도 없이 일을 시킨 것에 대해서는 강하게 따질 생각이었다.


체르펠 가를 지나 바리온 가와 켐프 가를 지나면 살라니케 호수가 나온다.


토크란 공화국 대통령의 관저이자 국회의사당인 디스커스 궁은 호수의 중앙에 있는 섬인 거미섬에 위치하고 있었다. 섬을 중심으로 육지로 다리들이 즐비하게 연결된 모습이 마치 거미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섬까지는 주로 다리를 이용하거나 조각배를 이용해 건너다니는데 특히 밤이 되어 호수의 분수가 가동되고 모든 다리에 형형색색의 가로등이 켜지면, 그 모습이 실로 장관을 이루었다.


레빈은 거미섬으로 가기 위해 조각배에 올랐다.


다리로 가려다가 다시 사람들에 휩싸이는 게 부담스러워서였다. 거미섬까지 와서 그 유명한 야경을 못 보는 게 아쉬웠지만 -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각배 위에서 야경을 구경하는 게 최고라고 생각한다. 지금 같은 때가 아닌 언젠가 한가해지는 날이 오면, 그땐 꼭 야경을 보리라고 다짐했다.


레빈이 탄 배의 양쪽으로 호수의 물살이 하얀 물거품을 내며 흩어졌다.


배는 현수교 밑을 지나기도 했고, 도개교 앞에서 다리가 열리길 잠시 기다리기도 했다. 그가 공화국군 제복의 깃을 세웠을 무렵, 저 앞에 섬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선착장에서 내려 언덕길을 오르자, 그 위에는 크나큰 문구가 양각된 단공식 아치문 하나가 서 있었다. ‘국민의 문’으로 불리는 그 위에는 고대어로 문구가 쓰여 있었다. 오라, 민주주의의 성지로.


‘오라, 민주주의의 성지로라······.’


레빈은 한동안 그 문구를 되뇌었다.




재미있게 읽으셨으면 선작, 댓글 및 추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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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73 자와라
    작성일
    20.12.12 15:10
    No. 1

    솔직히 상대가 이미 항복한 상대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몰살시킨 전적이 있는데 패배할게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항복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것같진 않네요.
    항복하나 항복하지 않고 싸우나 어차피 죽는다면 계속 싸워서 실날같은 희망을 붙잡으려 하는쪽이 낫고.

    찬성: 3 | 반대: 0

  • 작성자
    Lv.26 건의사항
    작성일
    20.12.14 00:28
    No. 2

    딜레마 상황이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물속의달
    작성일
    20.12.16 12:52
    No. 3

    제국이 적대국이면 그들의 대학살 같은건 반복해서 듣고 자랐을텐데 그냥 항복하자고? 주인공이 고구마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2 402호
    작성일
    20.12.22 16:44
    No. 4

    저렇게 800만 가까이 학살하면서 제국이 유지되는게 신기하네. 전투교환비도 압도적이지 않은데 ㄷㄷ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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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반국가적 영웅 +5 20.12.01 598 13 13쪽
7 용사의 날 +5 20.11.30 626 18 11쪽
» 진실 혹은 침묵 +4 20.11.30 660 19 13쪽
5 여성과 청소년과 노인을 위한 법 +2 20.11.29 737 15 11쪽
4 생환 +5 20.11.28 816 20 13쪽
3 포말하우트 전투 - 3 +2 20.11.28 907 24 13쪽
2 포말하우트 전투 - 2 +7 20.11.27 1,142 23 14쪽
1 포말하우트 전투 - 1 +9 20.11.27 1,878 35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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