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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숲에 사는 사냥꾼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하은수
작품등록일 :
2023.02.20 01:13
최근연재일 :
2023.03.29 03:39
연재수 :
2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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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39
글자수 :
126,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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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29 0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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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DUMMY

AI의 도움을 받으니 서류작업은 일사천리로 빠르게 진행됐다. 집중력이 흐트러질라 하면 끊임없이 새로운 자료와 이야기로 내 관심을 돌려 일을 하게 만드는 AI의 능력은 정말 탁월했다. 덕분에 일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뻐근한 어깨를 풀기 위해 기지개를 한번 켜는 순간, AI가 말했다.


{외부조작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비가시모드가 활성화됩니다. 비서실에서 손님의 방문에 대한 알림이 왔습니다. 문을 열까요?}


손님? 벽시계를 보니 시간이 벌써 4시 50분이다.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은 조금 남았지만 이정도는 면담이 끝나고도 금방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며 AI에게 대답했다.


"들어오시라고 해."


정면에 자리한 미닫이 자동문이 열리며 엘레나와 한 노인이 들어온다. 알이 작고 동그란 안경을 쓴 점잖은 할아버지보다 한발 먼저 안으로 들어온 엘레나가 그를 소개했다.


"국장님. 이분은 면담을 요청하신 아스트로노미아 대학의 심재원 교수입니다."


온화한 인상의 노인이 손을 건네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생물학 교수 심재원이라 합니다. 재카로프 안전보안국의 국장님을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어르신께서 먼저 정중하게 악수를 청하시기에 깜짝 놀라서 바로 받으며 인사했다. 일흔은 넘어보이는 할아버지께서 저렇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시는데 받지않으면 그건 사람이 아니다. 예절과 노인공경도 모르는 후레자식이지.


"아, 네. 저는 차우진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나는 거의 90도로 몸을 굽히다시피하며 교수님이라고 하시는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렸다. 사람 좋아보이는 너털웃음을 터뜨린 노인은 나와 똑같이 고개를 숙이며 같이 인사를 나눴다. 교수님과 함께 깍듯한 인사를 나누느라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리니 어딘가 언짢아 보이는 엘레나와 눈이 마주쳤다. 머릿속에서 AI가 말했다.


{국장님. 수석비서의 AI에게서 음성메세지가 왔습니다. 수석비서의 권한으로 음성메세지는 자동으로 재생됩니다.

"국장님. 과도하게 자세를 낮추시면 안됩니다. 심재원 교수는 국장님보다 15살이나 어리기 때문에 '장유유서'라는 가치에 맞는 대우도 아니며, 재카로프 안전보안국장이라는 품위도 손상됩니다. 주의해주세요."

음성메세지는 여기까지입니다.}


AI.지비냐의 목소리와 엘레나의 목소리가 번갈아가며 머릿속을 울렸다. AI에는 이런 텔레파시 기능도 있구나. 텔레파시 같은 건 초능력으로나 가능한 의사소통 방식일 줄 알았는데 과학의 힘으로 이루어내다니 신기하군. 그걸 상사를 꾸중하는데 사용하는 줄도 처음 알았다. 꾸중받은 포인트도 이상하고 말이다. 척 봐도 할아버지인 분께 나보다 15살 어리니까 우대하지 말라니. 물론 내가 서류상으로는 88살이긴 한데, 88살로 살아본 시간은 고작 이틀이라 적응이 안된다고. 그리고 88살이 73살에게 예의차릴 수도 있지. 그게 이상해? 머릿속에선 AI원격조종으로 꾸중을 듣고 내 신세에 대한 불평이 메들리처럼 쏟아졌지만, 입에서는 날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는 인삿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이렇게 서 계시지 말고 편하게 앉으시죠. 이쪽으로 오시죠."


나는 두세시간 전까지만 해도 불새가 드러누웠던 고급스러운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번엔 잠시 앉았던 것만으로 내 방을 태우고 가길래, 그을린 곳이라도 있을까봐 걱정했지만 소파는 새 것처럼 깨끗했다. 심적으로는 살짝 불편하지만 내가 국장이니 상석에 앉고 맞은 편에 엘레나와 교수님이 앉았다. 소파는 넓어서 두 사람이 서로 떨어지기 위해 끝을 향하여 앉지 않아도 둘 사이의 간격이 넉넉했다. 편하게 앉은 자리에서 대화가 시작됐다. 엘레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심재원 교수님은 기억을 잃어버리신 국장님께 현재의 생태계에 대해서 설명해주시고자 합니다. 그와 함께 사회적 토픽에 관한 이야기도 가능한 만큼 나누고 싶다고 하네요. 현세에 밝지 못하신 국장님께 좋은 기회가 되실거라 판단해 요청을 수락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국장님께서 기억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가슴이 아팠습니다. 앞으로 국장으로 일을 하시다보면 거시적 관점으로 보실 일이 참으로 많으실텐데, 기억을 잃어서 거사에 지장이 생기면 여러모로 곤란한 일이 많지 않습니까. 물론 국장님께선 영웅적인 면모를 갖추신 분이라, 그런 역경을 잘 헤쳐나가실거라 믿습니다. 이 늙은이의 쓸데없는 참견일 수도 있지요. 국장님이 저보다 훨씬 어른이시니 이런 말은 좀 그런가요? 허허허."


심재환 교수는 부드럽게 말을 받으며 딱딱한 분위기를 편안하게 만들어줄 농담까지 곁들였다. 나는 표면적으로는 농담에 웃었지만 진심으로는 웃지 못했다. 저 인자한 할아버지보다 내가 더 어른이라니. 그게 말이 돼? 난 제대로 된 기억도 없는 27살인데. 서류상만 88살이지. 그러나 나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다정한 노인의 말이 이어졌다.


"저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많이 당황스럽기도 하셨을 거라 짐작합니다. 하지만 오늘 만다라의 방문과 국장님의 다양하고 복잡한 일과들을 보니 저 같은 노인이라도 조금은 돌아가는 지금 세상을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도움이 간절한 순간에 말도 못하고 위기를 맞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변에서 도움이 간절한 이를 발견하면 도와주는 것이 옳고 말이죠. 허허허. 제가 꼬맹이 적에 국장님께 들은 얘기를 이렇게 국장님을 위해 꺼내게 되네요. 참 살다보니, 별일이 다 있지 않습니까. 괴수에게서 목숨을 구해준 꼬마가 이렇게 노인이 되어 도움을 주러 찾아왔으니 말이죠."


그런가. 내가 이분을 구해드린 적이 있던가. 기억이 없으니, 내가 이뤄냈다는 무용담도 그저 남일처럼 들릴 뿐이다.


"저... 죄송하지만 저는 교수님을 구해드린 일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 그랬죠. 생태계가 완전히 뒤바뀐 사건과 그 이후 일에 대해 기억을 완전히 잃으셨다고 들었는데 제가 깜빡했습니다. ...저 혼자만의 추억이 되어버렸지만서도 국장님이 저를 구해주신 영웅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저의 주책에도 부담을 갖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과거의 영웅이라니. 완전 부담스럽습니다... 나는 바퀴벌레 하나에 덜덜 떠는 소시민이다. 정말 어쩔 수 없으면 바퀴벌레와 싸워서 이겨보려고 노력은 하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도망친다고. 그런 나에게 훌륭한 스나이퍼라느니, 영웅이니 하는 칭호는 너무나 부담스럽다. 국장이란 직위도 부담스러워 죽겠는데.


"이제 지루한 노인의 추억은 그만 집어넣고, 지금의 생태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국장실은 정남쪽에 창이 커서 그런가 채광이 아주 좋군요. 아스트룸 시티의 전경이 아주 훌륭하게 잘보입니다. 다양한 마천루들이 솟아오른 푸른 하늘. 그 아래에는 각종 훌륭한 건축물들과 그 사이에 푸른 인공강 갈락시아스와 간간히 만들어진 공원 녹지가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죠. 국장님께선 팬옵티콘에서 나와, 아스트룸 시티를 자유롭게 걸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자유로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전에는 건물을 나와 비를 맞으며 열심히 돌아다니긴 했다. 그런 경험을 말해도 되려나.


"제 의지는 아니었지만 오늘 오전에 하류운하가 있다는 움브라에 다녀오긴 했습니다."


지역구 이름이 움브라 맞겠지? 한번만 들어서 헷갈리는데 맞았으면 좋겠다.


"오, 움브라에 다녀오셨군요. 드넓은 수평선과 함께 소금기가 섞인 바닷바람을 약간이나마 겪어볼 수 있는 매력적인 동네입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아파트들과 철제 다리가 운하와 어우러져 절경을 만들어내는 곳이죠. 국장님께선 그 아름다운 풍경을 충분히 즐기셨습니까?"


"저는 아니마와 관련된 일로 갔던 터라 폭우가 쏟아져서 제대로 된 경치는 구경하지 못했습니다만 그 빗속에서도 운치있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약간의 립서비스가 발린 말이긴 했지만 완전 거짓감상은 아니다. 움브라의 풍경은 뉴욕의 브루클린이 연상되는 아름다운 곳이었으니까. 빨간 벽돌의 아파트 건물도 말이다. 아파트의 안에서는 34명의 죽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때를 떠올리니 갑자기 속이 안좋아지는 것만 같다.


"보통 그런 운하가 있는 동네라면 갈매기라던가 수달, 고양이와 도마뱀이 서식하기 마련이죠. 커다란 물이 있는 동네에서 듣는 갈매기의 울음소리는 상당히 운치가 있는데, 움브라에서 갈매기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갈매기는...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렇게 비가 쏟아졌는데 나타나는게 더 신기하지 않았을까.


"그 당시는 아니마로 인해 심한 폭우가 내려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셨군요. 그럼 지금 창 밖으로 아스트룸 시티의 전경을 한번 봅시다.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도시죠. 국장님께선 이런 도시에는 어떤 동물이 살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이런 초고층빌딩이 즐비한 도시라면 떠오르는 동물이 있긴 하다.


"글쎄요... 아마 비둘기가 살지 않을까요? 어느 도시에서나 서식하던 새로 알고 있습니다만."


"맞습니다! 이런 대도시에는 먼 옛날에는 전서구, 그 이후 시대에는 평화의 상징으로 비둘기를 날리는 풍습이 있었죠. 비둘기는 흔하게 볼 수 있는 야생동물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먹는 곡식을 노리는 쥐와 참새들, 그리고 그들을 노리는 포식자인 고양이와 개가 있죠. 그 외에도 도마뱀이나 모기, 파리, 바퀴벌레 등 도시에서 인간과 함께 살아가던 동물들은 매우 많습니다. 이런 고층 빌딩의 창문에는 날개를 쉬어가는 비둘기들이 있기 마련이었죠. 지금 창 밖을 둘러보십쇼. 국장님께서는 인간 외의 어떤 동물이 눈에 띄십니까?"


나는 심재환 교수의 말을 들으며 국장실의 커다란 창문 밖을 살폈다. 핑크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의 스카이라인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비둘기는 커녕 날파리 하나 보이지 않는다.


"...점처럼 작게 보이는 인간 말고는 그 어떤 동물도 보이지 않는군요."


"맞습니다. 그것이 지금 아스트룸 시티의 생태계입니다. 인간과 인간에게 해를 입히지 않을거라 확증된 조경용 식물 몇 종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지요. 국장님께서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을 하십니까?"


"...아니요. 전혀 모르겠습니다."


기억을 잃었다니까요. 제가 그걸 알고 있으면 교수님도 저를 찾아오지 않았을 거 아닙니까.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 외의 동식물들은 모두 인간을 해치려는 목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괴수라는 이름을 붙이게 됐지요. 국장님이 기억하시던 동식물들은 인간이 생태계를 파괴하는 행위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동화적으로 표현될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쉽게 표현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들의 적의는 노바레 파장과 만나 인간이 두려워하는, 혹은 인간을 효과적으로 해칠 수 있는 것으로 실현되었죠. 그래서 저희 인간들은 그들을 피해 우리 인간만을 위한 철옹성을 지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차우진 국장님께서 선두로 서서 지은 인간의 첫 번째 도시가 저희 아스트룸 시티지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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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2. 불새-2 23.03.27 14 1 11쪽
21 21. 만다라-2 23.03.24 15 1 12쪽
20 20. 고상현 23.03.21 15 1 12쪽
19 19. 비밀 23.03.20 14 1 12쪽
18 18. 재카로프 안전보안국-2 23.03.15 18 1 12쪽
17 17. 만다라 23.03.14 22 1 12쪽
16 16. 옥묘아씨 23.03.13 20 1 12쪽
15 15. 뱃놀이 +1 23.03.10 28 2 12쪽
14 14. 아니마 +1 23.03.09 27 2 13쪽
13 13. 수족관 23.03.08 27 1 13쪽
12 12. 폭우 23.03.07 26 1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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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9. 불새 23.03.02 41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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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7. 완(頑)-2 +1 23.02.28 47 3 13쪽
6 6. 완(頑) 23.02.27 51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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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 玉手箱 23.02.23 73 3 12쪽
3 3. 재카로프 안전보안국 23.02.22 86 2 12쪽
2 2. 반갑습니다 국장님 23.02.21 133 2 12쪽
1 1.안녕하세요, 국장님 23.02.20 203 3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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