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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숲에 사는 사냥꾼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하은수
작품등록일 :
2023.02.20 01:13
최근연재일 :
2023.03.29 03:39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1,044
추천수 :
39
글자수 :
126,367

작성
23.02.21 12:00
조회
133
추천
2
글자
12쪽

2. 반갑습니다 국장님

DUMMY

따뜻한 햇살이 나를 어루만지는 것이 느껴지자, 현실로 다가온 평화로움에 안도했다. 내가 거한에게 목이 졸리고 불타 죽을 뻔한 일들이 먼 옛날에 꾼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아니지. 현실의 내가 그렇게 죽을 이유가 없잖아. 살해 당할 만큼 원한을 샀던 적도 없고. 난 그냥 평범한 부모님 밑에서 평탄하게 초, 중,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그렇게 잔인하게 타인의 손에 죽을리가 없어. 그냥 꿈을 꾼거지. 그것도 생생한 개꿈을.


...진짜 꿈이었나? 하지만 아직도 눈을 감으면 누군가 목을 졸랐던 아픔과 온몸을 태우던 열기가 다시 나타날 것만 같다. 다시 눈을 감기 무서웠다. 눈을 감았다 뜨면 다시 죽기 직전의 그 상황으로 되돌아갈 것만 같다. 어쩐지 숨쉬기가 버겁다는 착각이 들려는 차에 머릿속의 목소리가 들렸다.


{배출되는 이산화탄소의 양이 평소보다 많습니다. 과호흡의 징후가 감지됩니다. 국장님, 긴장을 풀고 호흡을 편안하게 해보세요.}


나는 머릿속에서 울려대는 목소리 덕분에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 이 목소리 죽을뻔한 그때도 계속 있었잖아. 그게 다 꿈이 아니었던 건가. 대체 뭐야.


{국장님, 그 상태를 유지하면 과호흡이 옵니다. 잠시 숨을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으세요. 마음을 편하게 가지셔야 합니다.}


한결같이 밝은 톤으로 일정한 어조를 유지하는 목소리가 울려대는 통에 마음이 더 불편했다. 이건 뭔데 자꾸 말을 거는 거지. 어디서 말하는 거야. 갑갑해. 이 상황도 그렇고 일단 너무 숨쉬기가 힘들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숨쉬기 편한 자세를 찾아 뒤척이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채색의 방이 시야에 드러났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온 방안을 따스하게 비추고 있어서 그런지 거의 검은색으로 도배된 방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햇빛 아래에는 고동색의 넓은 나무책상과 그 위에 빼곡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많은 서류들, 커다랗고 검은 가죽쿠션이 달려서 편하게 생긴 사무용 의자가 있었다.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업무실 같았다.


멍하니 창을 통해 내리쬐는 햇빛을 받으며 내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건가 따위의 생각을 하고있는데 AI의 목소리가 다시 머릿속에 울렸다.


{AI.지비냐가 국장님이 기상하셨다는 소식을 공유했습니다. 비서실과 부국장실이 소식을 열람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내 프라이버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공유 알림에 당황하는 사이, 정면에 자리한 벽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똑-


"국장님. 일어나셨습니까. 부국장입니다."


중저음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벽 너머에서 들려왔다. 갑자기 나타난 낯선 목소리에 당황해서 아무런 대답도 못했는데, 회색빛 벽이 반으로 갈리더니 미닫이문처럼 좌우로 움직이며 열렸다. 깔끔하게 생겨서 벽인줄 알았는데 처음부터 버튼으로 열고닫는 미닫이문인 모양이다. 커다란 문이 내 의사와 상관없이 열리고 천장에 머리가 닿을 만큼 커다란 남자가 들어왔다.


우와, 키가 진짜 크네. 2미터 넘는거 아냐? 나도 어디가서 작다는 소리 한번도 못들어봤는데,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는 부피가 내 두배는 될거 같았다.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자랑하는 남자는 초면인 게 분명할텐데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 다가오는 저 거대한 실루엣. 분명 본 것 같은데, 왜 그렇지? 영문을 모를 데자뷰와 함께, 거한이 다가오니 나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내 움직임에 이불자락이 다리에 끌리는 느낌이 적나라했다. 스르륵 흘러내리는 것마저 그대로 느껴지는게 마치 맨살에 닿는 것 같았다. 잠깐만. 맨살? 나는 불길한 짐작에 내 몸을 내려다봤다. 안좋은 예감은 항상 적중률이 높다. 이번에도 그랬다. 나는 지금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맨몸이었다. 여기서 이불이 더 흘러내리면 나도 저 사람도 민망한 상황이 될 것이다. 아무리 같은 남자라도 날것 그대로의 내 몸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여기가 목욕탕도 아니고 말이다. 게다가 나만 벌거벗고 있잖아. 나만.


나는 내려가려는 이불자락을 움겨쥐고 목 근처까지 단박에 끌어올렸다. 그러다보니 앉아있는 자세마저 다리가 오므려져 쪼그려앉은 모양새가 되었는데 기분이 참, 그랬다. 맹수 앞에서 움츠려든 사냥감이 된 기분이라고 해야하나.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남자는 그런 나를 보고도 아랑곳하지않고 90도 인사를 깍듯이 하더니 제 할말만 했다.


"부국장 '고상현'입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깍두기 머리를 한 거대한 머리통을 보고있노라니, 내가 이 사람을 어디서 봤었는지가 떠올랐다. 이 사람, 다짜고짜 내 목을 조르던 그 사람이잖아! 강렬한 깨달음에 나는 이불을 쥐지 않은 한 손과 다리를 이용해 재빠르게 뒤로 더 빠졌다.


침대의 헤드보드에 막혀서 더이상 이동할 수 없자, 하는 수 없이 양손으로 이불을 턱 끝까지 올린 채로 몸을 옹송그렸다.


나를 죽이려했던 저 거대한 인영을 잠깐이나마 잊고있던 스스로의 멍청함이 놀랍다.


살면서 나보다 더 큰 사람을 얼마나 봤다고 그걸 잊어버려. 저 사람이 들어오자마자 또 목을 조르려했으면 맥없이 당할 뻔했잖아. 뭔가, 뭔가 나를 보호할 수 있는 물건 같은 거 없나. 호신용품 같은 거. 한 손을 이불 속으로 내리고 조금이라도 이 상황에 도움이 될 도구를 찾아 뒤적거렸으나 내 맨살과 이불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젠장. 저 거구가 맷돼지처럼 날 들이박으면 어떡해야 하지. 지금의 나는 누군가 달려들면 그걸 곧바로 피할 체력이 없었다. 가슴이 갑갑하다. 내가 왜 이런 고민이나 해야하지.


{국장님, 과호흡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세요.}


AI의 목소리에 머리가 아프다. 내가 지금 마음이 편하게 생겼어?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벌거벗고 모르는 거한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있는데 마음을 어떻게 편하게 가져? 나는 고개를 들어올리고 있는 거한을 노려보며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되는 조언이나 하는 AI에게 화풀이를 했다.


그렇게 궁지에 몰린 쥐처럼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동안 또다시 노크소리가 들렸다.


똑똑.


"국장님, 수석비서입니다. 실례가 안된다면 들어가겠습니다."


새로운 누군가가 또 문 너머에 나타났다. AI가 비서실과 부국장실에 내가 일어났다고 알렸다더니, 두 군데에서 다 나를 찾아오는군. 수석비서마저 거한의 부국장처럼 내 대답은 듣지않은채 곧바로 문을 열었다.


안경을 쓴 날카로운 인상의 여자가 또각또각 구두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왔다. 잠깐만. 나 아무것도 안입었다고. 실례가 아닐 때 들어오겠다며. 지금 완전 실례니까 밖으로 나가줄 수 없어? 남자에게도 보여주기 싫은 내 나체를 여자에게 보여주는 건 더 싫었다. 나는 양손으로 이불을 꽉 쥐고 온몸을 최대한 밀착했다. 이불로 꼭꼭 가리면 안보이겠지. 그래도 가까이 다가오면 틈새로 보일까봐 불안하다. 그러니까 스톱. 둘 다 거기서 멈춰. 더 다가오지마.


나는 동화 속에서 침대 밑 괴물을 무서워하는 어린애처럼 이불 밖으로 두눈만 빼꼼 내놓은 채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내가 알몸이니까 다가오지 말아달라는 말은 민망해서 못하겠다. 하지만 지금 비언어적 메세지를 보내고 있잖아. 그만 다가와.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이런 내 몸짓을 무시하고 이목구비가 또렷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운 침대 맡까지 다가왔다. 여자 쪽은 경계하는 내 모습을 보면서도 이 방을 들어오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시종일관 부드럽게 미소짓고 있었다. 여자는 내 꼴이 어떤지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는건지 아니면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지고 있는건지, 사회인의 부드러운 대면용 미소를 띄운 채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차우진 국장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앞으로 국장님을 물심양면으로 보필할 비서실의 수석비서 엘레나입니다. 비서실의 대표로서 먼저 인사드립니다."


나는 수석비서의 이름을 듣고나서야, 이 사람이 짙은 블론드에 어두운 초록빛 눈을 가진 백인이라는 걸 알았다. 한눈에 보이는 특징도 바로 못 알아보다니. 내가 이렇게 관찰력이 없었나. 나는 스스로의 안목에 반성하며 내 목을 졸랐던 부국장도 다시 찬찬히 살펴봤다. 깍두기 머리의 거대한 남자인 건 알고있고. 이름이 고상현이랬던가. 나처럼 한국인 이름을 가진 사람답게 생긴 것도 북동아시아 사람처럼 생겼다. 이목구비와 덩치가 나에게 했던 짓처럼 험악해서 그렇지.


사회성이라곤 쥐톨만큼도 없는 사람처럼 침대 위에서 이불을 둘둘 말고 쪼그려앉아, 아무 말없이 사람을 관찰하는 내게 엘레나가 말을 걸었다. 엘레나는 나의 이런 한심한 꼬라지를 보면서도 여전히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를 유지했다.


"아까보단 저희가 익숙해지셨나 보네요. 다행입니다. 부국장님과 저희 비서팀은 국장님을 보조하기 위한 사람들이니 편하게 여겨주세요. 저희에게 바라시는 것이 있나요?"


직장인의 투철한 대인용 미소와 말투는 나의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왔다. 나는 손톱만큼 회복한 사회성으로 내가 온전한 사회적인 체면을 차릴 수 있도록 두 사람에게 부탁했다.


"...그럼. 크흠. 제가 옷을 입을 수 있도록 나가 주시겠어요?"


눈을 뜨고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더니 듣기 싫을 정도로 갈라져서 나왔다.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 최대한 정중하게 들리도록 목을 쥐어짰다.


엘레나는 마치 내 한심한 꼬라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매우 자연스럽고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간이 옷장은 좌측 벽면과 맞은 편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AI.지비냐에게 물어보세요. 그럼 저희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엘레나는 항공사 광고에 나오는 친절하고 모범적인 승무원처럼 미소 띈 얼굴로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거대한 부국장까지 데리고 나가는 완벽한 일처리에 감탄이 나오고, 두 사람이 완전히 빠져나가고 문이 닫히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이불 속에서 나올 수 있겠군.'


나는 왼쪽에 있다는 옷장을 열기위해 침대의 좌측으로 다리를 내렸다. 정신없는 상황을 연달아 겪어서 그런가. 어쩐지 온몸에 힘이 없고 꼼짝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문 밖에서 두사람이 날 기다린다잖아. 멀끔하게 차려입고 맞이해야겠지.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들고 왼쪽 벽면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옷장이 있다는 왼쪽벽은 아무것도 없이 그저 깔끔한 회색빛 벽일 뿐이었다. 옷장이 어디있다는 거야.


어쩐지 지끈거리는 머리를 만지며 엘레나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헤이, 지비냐! 옷장이 어딨어?"


이렇게 부르는거 맞나? 옛날에 핸드폰에 내장된 AI는 이렇게 불렀는데.


{네, 국장님. AI.지비냐입니다. 옷장은 지금 앞에 있는 벽을 두번 두드리면 나타납니다.}


벽을 두번 두드리라고? 이, 이렇게 하면 되나. 나는 AI의 말에 따라 아무것도 없는 회색벽에 두번 노크를 했다.


옛날의 첩보물 영화에서 멋있게 등장하던 무기창고처럼 벽이 천장 위로 사라지더니 환하게 빛나는 옷장이 나타났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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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 재카로프 안전보안국 23.02.22 86 2 12쪽
» 2. 반갑습니다 국장님 23.02.21 134 2 12쪽
1 1.안녕하세요, 국장님 23.02.20 203 3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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