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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숲에 사는 사냥꾼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하은수
작품등록일 :
2023.02.20 01:13
최근연재일 :
2023.03.29 03:39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1,063
추천수 :
39
글자수 :
126,367

작성
23.02.2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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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4. 玉手箱

DUMMY

엘레나가 만들어낸 화면에는 신분증 같은 작은 카드가 있었다. 카드에는 내 이름 석 자가 적혀있었고 그 옆에는 ID번호라는 주민번호 같은 것이 적혀있었다.


ID번호: BC10038490


BC는 뭐야. 기원전? 그 뜻으로 써놓은건가. 그런데 내가 그 시절 사람은 아닌데. 나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 그것만은 정말 확실해. 갓난아기 때 사진까지 찍었다고. 발바닥 도장이랑 같이. 기원전 사람은 그런 거 안했을 거 아니야....아닌가.


내가 이상한 생각을 하는 사이에 엘레나의 손가락이 화면의 ID번호를 가리켰다. 곧이어 엘레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는 ID번호는 국장님의 신원을 증명하는 번호에요. 이 번호를 한번 눌러보시겠어요?"


저 말에 따르면 안될 이유도 없던터라, 나는 얌전히 엘레나가 시키는 대로 화면 속의 숫자를 건드렸다. 까만 글씨가 붉게 물들면서 ID카드 화면보다 훨씬 커다란 화면이 나타났다. 화면 상단에는 '주민등록등본'이라 적혀있었다.


홀로그램으로 보는 새로운 주민등록등본이었지만 내가 아는 것과 구성이 다르지는 않았다. 가족관계 구성원과 생년월일 같은 정보들이 적혀있었다. 화면 속에는 내가 기억하는 부모님의 성함과 그들의 생년월일이 정확하게 적혀있었다. 그래도 내가 기억이 없는거지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었구나. 남들에겐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나에겐 이 작은 사실관계가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위안 속에서도 나는 금방 충격받을 정보를 찾아내고 말았다. 부모님의 인적정보칸의 맨 끝에는 사망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사망...? 두 분, 다?"


물론 두 분의 마지막에 대한 기억은 없다. 대체 언제 돌아가신거지? 머리가 혼란스러워서 그런지 시야도 어지럽다. 화면 속의 글씨들이 이리저리 눈 앞에 휘몰아치는 느낌이다. 그중에서도 상단에 있는 조그만 숫자가 복잡한 머릿속에 또렷하게 들어왔다. 년도와 월일을 알려주는 것이 분명한 숫자들 중에 년도가 한번도 본 적도 없고 상상해본 적도 없는 숫자였기 때문이다....그냥 오류가 나서 잘못 찍힌 게 아닐까. 확인하기 위해 그 부분을 가리키며 엘레나에게 물었다.


"여기, 이 숫자는 서류 발행일자죠?"


"네, 그렇습니다. 오늘 새벽에 캡슐에서 나오셨기 때문에 아침에 바로 발행한 서류들이에요."


"년도에 오류가 난 건 아닙니까? 제가 기억하는 년도보다 너무 앞서 갔는데요."


"한 글자의 오류도 없는 정확한 날짜입니다. 캡슐 안에 계시다가 나와서 날짜감각이 혼란스러우신 거에요."


"..."


나는 엘레나의 말을 듣고 등본에 쓰인 오늘 날짜와 내가 태어난 년도를 계산했다. 이게 진짜 맞는 날짜라면, 내 나이는 여든이 훌쩍 넘는데?! 이게 정확한 날짜라고? 나는 등본에 쓰인 내 생년월일을 다시 읽었다. 기억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는 서류상으로도 88살이었다. 다리에 힘이 빠졌다.


"국장님! 괜찮으십니까?"


깍두기 머리의 거한이 주저앉는 나를 부축했다. 내가, 내가 88살이라고. 그렇지만 외모는 27살의 모습 그대로인데. 부국장의 도움으로 검은 가죽으로 덮힌 네모난 보조의자에 앉은 나는 엘레나에게 질문했다.


"저 서류가 정확한 서류라면. ...저는, 제 나이는 정말 88세인 겁니까?"


"네. 그렇답니다."


"그런데 저는 제가 27살이라 알고 있는데요. 외모도 그렇고 말이죠."


갑자기 최면에 걸려서 스스로를 스무살이라 여긴 노인의 이야기가 나온 영화가 생각나네. 내 머리에 이상이 생겨서 내 눈에만 젊은 모습이 아니길 바랬다. 제발. 서른살이 된 기억도 없는데 아흔을 바라보는 노인이라니 너무한 거 아니냐고. 스물일곱살인 내가 어느 날 눈을 뜨니 여든여덟살이라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먹어버린 나이만큼 증발한 내 인생이 아깝고 억울해서 눈물이 날 거 같다. 하지만 우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아서 양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고개를 푹 숙였다. 정수리 쪽에서 부국장의 베이스 음색 목소리가 쏟아졌다.


"국장님이 스스로 스물일곱의 나이라고 여기는 건 지당한 일입니다. 실제로 국장님은 그 나이 때 큰 부상을 입고 이제야 회복되어 나오셨으니까요. 물론 외모도 그 당시와 당연히 같습니다. 캡슐 안에서는 노화를 겪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서류 상의 나이는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부국장님 말씀이 맞아요. 국장님께서는 그냥 자신이 기억하는 스스로의 모습대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국장님이 본래 소유하신 기억도 스물일곱의 나이까지니까요. 그 이후의 기억은 없는 것이 당연하답니다."


위로인지는 모르겠지만 위안은 되는 말들이었다. 그래. 그냥 나는 27살이라고 알던대로 살면 되겠구나. 고개를 들고 두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한결같이 상냥한 미소의 수석비서가 말을 했다.


"그렇지만 알고계신 사회지식이 지금과 동떨어졌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하실 거에요. 부국장님과 저희 비서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드릴거지만, 행정상으로도 노인복지 서비스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담없이 도움을 요청해주세요. 이러나저러나 해도 서류상으로는 노인이시니까요."


그렇군요. 서류상의 노인내는 지금 정신적으로 몹시 지쳤으니 쉬도록 내버려두시면 안될까요. 지금은 좀 혼자있고 싶어요. 나는 그저 눈만 떴을 뿐인데, 갑자기 미래 세상에 내던져져서는 부모님은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셨고 나는 노인이래. 아까까지 누워있던 침대로 되돌아가서 울고싶었다.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국장이 말을 걸었다.


"혼란스러우시겠지만 시민으로 행정등록까지 모두 마친 이상, 바로 업무에 복귀하셔야 합니다. 업무에 적응하실 수 있도록 저희가 전반적인 안내를 하겠습니다. 따라오시죠."


"부국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벌써 오후가 되어가고 있어서 빠르게 시작하는 것이 좋겠어요. 국장님의 AI를 저희와 공유하는 게 안내도 쉬울 듯 하니, 양해바랍니다. 지비냐, 가시모드."


분명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임에도 불굿나고 AI를 공유하겠다는 수석비서의 말이 이해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나와 달리 내 머릿속을 울려대던 AI는 찰떡같이 말을 알아들은 모양이다. AI가 여느 때보다 선명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재카로프 안전보안국장님을 보좌하기 위한 전용 인공지능, AI.지비냐입니다.]


"지비냐. 현재 국장님의 전반적인 상태를 알려줘."


[차우진 국장님은 자신의 신변소식에 당황하여 심박수가 증가하였지만 건강에 이상은 없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재생캡슐에서 나온 이후로 섭취한 것이 없어 혈당이 낮습니다. 현재 무기력과 어지럼증이 있습니다.]


AI의 말을 들은 엘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말했다.


"어머, 그렇네요. 캡슐에서 나온 이후로 쭉 공복이셨겠군요. 식사부터 하셔야겠어요. 지비냐. 국장님의 식사를 준비해줘."


[AI.지비냐가 비서실의 명령을 수행합니다.]


AI의 목소리가 들리고나서 바닥에 한뼘 크기의 네모난 틈이 생기더니, 그것이 앉아있는 내 가슴께까지 올라왔다. 갑자기 솟아오른 조그만 협탁은 가운데가 열리며 물이 담긴 유리컵 하나와 조그만 알약이 올라왔다.


[식사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AI의 안내멘트와 함께 방 안에 있는 두 사람이 나를 쳐다봤다. 뭔데. 나더러 이 알약을 먹으라고? 이게 식사야? 내가 당황스러워 하는 것이 보였는지, 엘레나가 말을 보탰다.


"AI가 국장님의 건강상태를 고려하여 조합한 완전식품입니다. 영양소별 권장 섭취량과 당장의 건강상태를 고려하여 칼로리 계산까지 딱 맞춰서 제작되는 간편식이에요. 물과 같이 삼키면 바로 식사가 끝나기 때문에 바쁜 일정을 소화하기에 적합한 형태죠. 편하게 식사하세요."


"..."


그러니까, 내가 여든여덟살인 세계에서는 알약 하나에 영양소를 다 집어넣어서 식사를 끝낸다는 거구나. 하긴 내가 기억하던 시대에도 바쁜 나날을 보내느라 밥 먹는게 귀찮다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난 그런 사람이 아닌데. 나는 각양각색의 요리들과 그 맛을 음미하는 식사가 좋다.


'이거 먹기 싫다고 하면 밥투정이 되나.'


나는 곁눈질로 부국장과 엘레나를 살폈다. 둘 다 내가 빨리 알약을 집어먹기를 기다리며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부담스럽다. 그냥 먹고 끝내자. 독약은 아니겠지. 나는 새하얀 캡슐 알약을 물과 함께 삼켰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게 식사 끝인건가. 되게 허무하다. 이곳에는 미식이라는 개념이 없나. 신기하게도 알약 하나 먹은 걸로 배가 부른 느낌이 들었다. 미래의 기술이 정말 놀랍다.


"기운이 좀 나시나요? 캡슐에서 막 나오면 당연히 위장이 비어있을텐데 저희가 사려깊지 못했네요. 이제 어지럼증도 덜하실 겁니다."


확실히 먹고나니 더이상 어지럽지 않았다. 다리힘도 돌아온 것 같고. 정신적 충격을 받아서 그런 줄 알았는데 먹은게 없어서 더 그런 모양이었나보다. 이렇게 식사의 중요함을 한번 깨닫고 간다. 내 안색을 살피던 엘레나는 내가 괜찮다고 판단을 내린 것인지, 앞으로 해야할 일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현재 시각은 오전 11시 36분. 곧 점심시간이네요. 일단 보안국 사람들의 얼굴만 보고 점심시간에는 보안국 건물 내부를 살펴보면 되겠어요. 건물 안내는 저와 부국장님이 할 수 있으니까요. 간단히 둘러보고 오후에는 실무에 들어가도록 하죠. 그럼 이제 가보실까요?"


엘레나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부국장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움의 손길을 거절할 이유는 없어서 나는 얌전히 그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갈채비를 하는 우리에게 AI가 말했다.


[국장님은 아직 호신무기와 장갑을 챙기지 않으셨습니다. 만약을 대비해 외출준비를 단단히 해주세요.]


호신무기? 총 꺼내가라는 건가. 그런데 장갑은 왜 가져가라는 거야. 이 미래 세상에는 장갑끼는 게 예의인가. ...엘레나와 부국장은 안꼈는데.


내가 멀뚱히 서있는 사이에, 엘레나는 옷장인 척하는 무기고에서 권총을 하나 꺼내고 그 옆의 진짜 옷장에서는 가죽 장갑을 꺼내 나에게 건냈다. 나는 주는대로 검은 색의 가죽장갑을 바로 꼈지만 권총만큼은 받아들지 못했다. 총이라니 무섭잖아. 난 이런 모양의 물건은 비비탄 같은 장난감으로나 만지고 놀았다고. 하지만 엘레나는 머뭇거리는 내 손에 강제로 총을 쥐어주고 말했다.


"국장님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서 무기는 꼭 가지고 다니시는 게 좋습니다. 탄환은 챙기셨나요?"


엘레나가 숙제 검사하는 선생님처럼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다. 그렇지만 나는 떳떳하다. 지금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선량한 시민은 무장을 안하고 사니까.


"아니요... 챙기지 않았습니다. 쓰는 법도 모르니까요.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에도 너무 큰 물건들이기도 하고요."


내 대답을 들은 엘레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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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안녕하세요, 국장님 23.02.20 206 3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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