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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쟁이노야

북해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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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쟁이노야
작품등록일 :
2023.09.04 02:03
최근연재일 :
2023.10.15 22:43
연재수 :
36 회
조회수 :
22,924
추천수 :
587
글자수 :
187,081

작성
23.10.13 22:37
조회
303
추천
8
글자
12쪽

백의선인 - 3

DUMMY

#34

백의선인




암경이 짙게 깔린 밤 끝. 

추적거리며 쏟아지는 빗물 가운데, 백의선인(白衣仙人)이 향유에 절인 등나무 우산을 들고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홍등(紅燈)을 걸어놓고 어깨를 내놓은 여인들이 그 곱상한 얼굴에 추파를 던져보겠다고 입을 뗐다. 


“어머, 이런 곳에 뽀얀 미남자가 있었네?” 


창기(娼妓)들을 관리하는 포주가 심기 불편한 티를 내며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소리를 질러대며 앉아있던 의자 모서리를 발로 걷어찼다. 


“오늘 할당량 끝난 거 몰라?! 빨리 기어 들어가지 못해!” 


창기 하나에게 힐끗 돌아가는 포주의 시선. 

그는 그녀들 중 하나와 은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어차피 손님 하나 더 받는다고 해서 사정이 달라지지도 않으니, 그저 자기 것을 빼앗긴다는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


“퉤, 남자 새끼가 얼굴 반반한 걸 얻다 써먹는다고 지랄들이야, 지랄들은.”  


하지만 창기(娼妓)들은 화들짝 놀랐다가 다시 주책없이 떠들었다. 


“좋게 말로 하면 되지. 왜 소리를 질러!” 

“그나저나 저 미남자가 빈민가에 나타났다는 선인(仙人)이 아닐까?”

“어머, 내 피부도 곱디고운 옥석으로 만들어주려나? 꺄르르!”

“이년이 위아래도 모르고, 언니 눈가에 주름진 거 안 보이니?” 


경박한 고음이 번져나가서일까.

녹슨 기와가 틈새에 고인 비를 이겨내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와장창!


숙연함을 깨는 천박한 음성과 기와 파편이 쏟아지는 소리.

살짝 든 우산 위로 조헌앙의 살벌한 표정이 드러났다. 

그녀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것은 살기를 배제한 경고였다. 

이 이상 주인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고 닥치라는.


“어디서 눈깔을···! 허억!” 


치기로 맞서보려던 포주는 조헌앙의 눈빛을 마주하자마자 급하게 창기들을 가게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고,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감각.

그는 지금처럼 끔찍한 분위기를 느꼈던 적이 없었다.


“···야, 야! 빨리 들어가···!” 

“어··· 어···?” 


무복(武服) 등판에 적혀 있던 조(照) 자가 거리를 완전히 지나갈 때까지, 포주는 몸을 반으로 접어가며 연신 굽신거렸다.

이후, 그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포주는 홍등(紅燈)을 아예 꺼버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형님, 아직 손님들이 안에 남아 있는데요.”


그의 동생들이 가게 안에서 위협용 날붙이를 손바닥에 탁탁 쳐가며 물었다. 


“그, 그 사람들도 대충 마무리하고 빨리 다 나가라 그래.”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요.” 


포주는 경직감을 풀어내기 위해 옆에 놓인 수통을 들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크으···! 내가 얼마 전에 빈민가 구경하러 가겠다고 한 거 기억나냐?” 


“그럼요. 평소엔 한 명씩 내려오던 조가가 떼거리로 몰려있다길래 다음 투전에 나올 선수 눈여겨보러 가시겠다고···” 

“그러니까. 내가 잘못 봤나 싶었어. 그 싸움 귀신들이 칼 대신 삽을 들고 빈민들 똥 구더기나 묻고 있었거든.” 

“예? 그 조가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누가 들을세라 작게 소리쳤다.


“그래, 인마! 그 투귀(鬪鬼)들이 배 내놓은 개새끼마냥 선량한 눈을 하고 있었다고. 와, 그땐 단체로 벼락이라도 맞고 미쳐버렸나 싶었는데 이제 보니까 아니었어.” 


포주는 조헌앙의 눈빛을 잊지 못하고 양 팔을 감싸 몸서리를 쳤다. 

방금의 충격이 아직도 그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깔보면 깔봤지, 어떤 상대든 한 번도 살기를 뿜어낸 적이 없던 놈들이···” 


위층에서 들리는 교태음이 그의 말끝을 가렸다.


“후, 아무튼 이런 날에는 공(空) 치더라도 장사하는 거 아니다. 다들 숨소리도 내지 말고 그냥 지나가길 바라.”


그는 홍등가가 위치한 좁은 골목을 지나서, 개오동나무 한 그루 너머에 있는 극도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들이 돌아가는 길은 이곳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면서. 



***



극도문주는 긴장감에 연신 손을 쥐었다 폈다. 

북천맹에서 나온 암자(暗者)가 조그만 사각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암자의 좌안(左眼)은 얼굴에 선명하게 나 있는 칼자국으로 인해 시력을 잃은 지 오래였지만, 남은 하나의 안광만으로도 자신의 명줄을 틀어막기엔 충분해 보였다. 

그가 갈라진 입술을 찻잔에 기대 홀짝 마시더니, 불편함을 드러냈다.


“조금 늦는다고 생각하지 않나?” 


극도문주가 움찔거리며 흐르는 달에 시선을 옮겼다.

예정대로라면 밀명을 받은 문도가 흑마병의 균체(菌體)를 퍼트리고 이미 돌아왔을 하는 시간. 

혹시 불상사가 생긴 건 아닐까라는 걱정이 들었지만, 애써 불안감을 떨쳐내며 암자를 달랬다.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입니다. 서둘러서 일을 그르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암자는 달을 휘감은 밤 구름을 안주 삼아 금세 또 한 잔을 들이켰다.


“모를 일이지. 신중하고 있는 건지, 망치고 있는 건지는.”

“······”


공손한 태도를 갖춰 지키던 극도문주의 표정이 찌그러졌다. 


‘제기랄, 들키면 독박은 이쪽이 다 쓰는데 저따위로 다그치다니! 애초에 이 일에 손을 대는 게 아니었어.’ 


아무리 북천맹의 사주를 받고 일을 벌였다고 하지만, 일의 전면에 나선 건 극도문.

빈민가에 병을 퍼뜨렸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모든 오명을 뒤집어쓰고 쫓겨날 수밖에 없다.

사실 북천맹의 사주를 받고 벌인 일이라고, 그때 가서 짖어봐야 누가 범죄자의 말을 들어주겠는가. 

 하지만 이미 되돌이키기엔 너무 늦어버려 두 눈이 멀었던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는 것 외에는 마땅한 도리가 없었다.


극도문주가 속으로 한탄 섞인 울음을 머금자, 암자가 그 속내를 꿰뚫어보고 낄낄대며 비웃음을 날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패도를 숭상한답시고 극도(極刀)라는 이름을 단 주제에, 새외에서 굴러온 돌 하나 처리하지 못해서 이런 짓까지 벌이는 게.” 


마치 자신은 아무 연관이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흑마병의 균체가 담긴 유리병을 전해준 것이 자신이었음에도. 


“뭐요!?” 

“더 웃긴 건 너희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놈들이 더 있다는 거지. 사강문이나 적사문같은.”


극도문을 포함한 사강문, 적사문이 북천맹에 협조하는 대신 요구한 건 다름 아닌 창산 조가의 몰락이었다. 


조가가 북해에서 쫓겨나 이리저리 떠돌다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게 백 년 전.

그 이후부터 인근 문파들은 모두 ‘그래봐야 조가한테 안 되는’, 딱 그 정도 취급을 받아왔으니까.

그런 인식이 백 년 넘게 이어져오고, 극도문은 그 넓었던 장원을 한 칸씩 팔아넘겨야 할 정도까지 내몰린 상태였다.


극도문주가 분개하며 술병을 벽에 집어던졌다. 


“당신들이 그 미친놈들을 상대해 보지 않아서 할 수 있는 말이오!” 


암자가 혀를 차며 손가락 사이로 술잔을 굴렸다. 


“못난 놈. 지 아비에 비해선 그야말로 고양이새끼니. 쯧.” 


암자가 죽은 지 십 년도 더 된 아버지를 언급하자, 극도문주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당신이 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그래, 그래도 전대 문주는 극도(極刀)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사내였지. 가진 수명이 짧아 단명(斷命) 하긴 했지만. 그에 비하면 너는 어중간한 재능에 헌앙도, 품격도, 심지어 인성조차 턱없이 부족하구나.”


극도문주의 얼굴이 치욕과 굴욕감으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멈칫하며 눈가 주름만이 파르르 떨렸다.


“잠깐, 그럼 당신은··· 아버지와 인연이 있었으면서도 나에게 이런 파렴치한 제안을 했단 말이오···?” 


암자의 표정이 차갑게 식어가며 살기를 머금었다. 


“그깟 대수롭지 않은 인연보단 ‘그분들’의 결정이 더 중요하니까.”

‘그분들이라고? ···’


하지만 극도문주에겐 ‘그분들’의 정체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누군가가 짜놓은 판위에서 놀아나고 있으며, 그들에게 극도문은 장기판 위에 놓인 말 하나 정도의 위치밖에 안 된다는 사실. 

아니, 더 정확히 얘기하면 저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언제든 갈아끼울 수 있는 바둑알 정도라는 사실이었다. 

그 대답으로 쐐기가 박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언제든지 갖다버릴 속셈이었구나···!’ 


그제야 흐려졌던 극도문주의 분별력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북천맹주는 이따위 짓을 벌려놓고 용서받을 수 있나 생각하는 건가!” 


암자가 쿡쿡대며 웃었다.


“그건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싶은데.”


─툭.


선명하게 들리는 대문 밖 발자국 소리. 

둘은 동시에 그것을 감지했다.

밀명을 받은 극도문도가 멍청하게 대문으로 복귀할 리도 없고, 사람 수도 하나가 아니었다. 

그것은 결코 가볍지 않으며 땅을 짓이기고 있었다. 

즉, 호연(好聯)으로 찾아온 이들은 아니라는 것. 


‘쯧, 이미 일을 그르쳤나.’


극도문주가 이를 악물고 암자를 째려봤다. 


“이제 와서 당신들이 발을 빼게 내버려 두진 않겠소.”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당신들? 여기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나? 거기다, 나는 여기서 술 한잔 얻어먹고 가는 것뿐인데?” 


암자는 마지막 한 잔을 목구멍에 털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은 지킬 테니, 어디서든 다시 자리를 잡으면 연통을 보내보거라. 그런다고 무너져 가는 문파가 다시 설 리는 없겠지만. 흐흐.”


흑마병을 퍼뜨렸다는 만행이 밝혀지면 중원 안에서 그들을 받아줄 곳이 있을 리가 없었다.

어디에 있을지도 모를 암자에게 연통을 보낸다는 것도 불가능하고, 북천맹에 직접 서신을 보낸다고 해도 답신을 기대한다는 건 바보가 아니고서야 하지 않을 짓.

그야말로 자신들은 바둑알들이었으니까.

손가락을 튕겨 판 밖으로 내보내면 그만이었다.

깨지든 말든 그게 저들에게 알 바일까.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암자가 창밖으로 몸을 기울이자 극도문주가 목에 도를 들이대며 말했다. 


“이 일에 대한 벌을 받게 되더라도, 혼자 죽지는 않을 거요.” 


목에 칼이 들어왔음에도 암자는 비소를 터뜨렸다. 


“이 칼이 내 목에 닿는 게 빠를까, 네 손목이 날아가는 게 빠를까?”


암자의 하나 남은 안광이 극도문주를 향해 쏟아졌다.

시력을 잃은 반대쪽 눈도 자연스레 슬며시 뜨였다. 

이미 동공의 쓸모 따위 저버린 그곳엔 천(天) 자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오히려 극도문주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죽음을 각오했다. 


“나 혼자 죽으면 적당히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자신이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는다면 모든 걸 문주의 독단으로 치부하면 될 일이라고.

최소한 자신의 우둔함이 문파 전체에 폐를 끼치는 것만은 막으리라고, 극도문주는 결심을 내렸다.


“네깟 게 잠시라도 나를 잡아둘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느냐?”

“크윽···!”


사나운 눈초리에 나오려던 말조차 도로 들어갔다. 

이를 악물었기에, 극도문주는 차마 그 대답을 공백으로 채워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찰나의 머뭇거림.

그것을 포착한 암자는 순식간에 목에 닿아있던 날붙이를 튕겨내고, 극도문주의 얼굴을 통째로 쥐어뜯어버리기 위해 팔을 내뻗었다. 


─쩌저적. 


어디선가 들려온 서늘하게 얼어붙은 목소리 하나.


“그럼 네까짓 건 여기서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백연이 극도문주가 채우지 못했던 공백을 대신 채우며,

암자의 머리통을 부여잡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Lv.24 별랑(別狼)
    작성일
    23.10.13 22:57
    No. 1

    이번편은 좀 아쉽네요. 좋은 소설은 독자를 납득시키기위해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텍스트를 읽다보면 캐릭터의 행동을 납득하고 받아들이니까요.

    이번엔 설명이 좀 길어져서 아쉬웠음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9 나니얀
    작성일
    23.10.14 00:44
    No. 2

    오 재밌어요 앉은 자리에서 쭉 다 봤어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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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산중 의인 - 4 +1 23.09.29 411 1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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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귀가 - 2 +1 23.09.23 525 1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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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마신제 - 3 +1 23.09.20 533 14 12쪽
15 마신제 - 2 +2 23.09.19 531 17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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