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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쟁이노야

북해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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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쟁이노야
작품등록일 :
2023.09.04 02:03
최근연재일 :
2023.10.15 22:43
연재수 :
36 회
조회수 :
22,925
추천수 :
587
글자수 :
187,081

작성
23.09.23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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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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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귀가 - 2

DUMMY

#18

귀가




염제가 뛰어오는 발자국에 눈이 치익, 소리를 내며 녹았다.

두꺼운 옷을 세 겹씩이나 껴입고도 오한을 떨쳐내지 못했던 표사, 쟁자수들의 숨이 골라졌다.

콧등에 맺힌 고드름이 녹아 북해 바람이 어떤 향인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빨리 뛰던 심장 박동만큼은 느려지질 않았으니, 그게 다 악귀(惡鬼) 같이 이목구비가 벌어져 있는 염제의 면상때문이었다.

염제가 백연에게 면상을 들이대며 말했다. 


“못 본 새 얼굴이 꽤 피셨소 궁주 나으리? 앙!?”


지옥에서 아득바득 기어 온 듯한 얼굴이 코앞에 있으니 아무리 백연이라도 시선을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연은 살짝 아래로 눈을 깔다가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영문도들이 벽에 몸을 숨긴 채 어깨만 슬쩍 내밀어 이 상황을 훔쳐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그중 한 명과 눈을 마주쳤다.


백연은 시선 아래 허리쯤에서 손가락 마디 하나만 슬쩍 접어 염제를 가리켰다.

얘 왜 이러냐고.

은근한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무언의 물음에 화영 문도들은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뿐. 

그들은 이미 못 말리는 염제에 학을 떼어 포기한 상태였다.


백연이 양 손바닥을 내보이며 염제를 타일렀다.


“자자, 일단 화 좀 누그러뜨리고. 사람들이 무서워하잖나.”


하지만 누군가가 그랬다.

대노(大怒) 한 이를 말리면 그다음은 실성이라고.


“흐, 흐흐.” 

‘···이제 침까지 흘리네.’ 


애써 끌고 온 묵상회의 수레들을 염제가 모조리 불태우는 장면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재빨리 손가락을 튕겨 그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유를 알아야 대답을 해주지.”


그러자 염제의 눈빛이 십자 눈깔이 되기 일보 직전에 겨우 돌아오기 시작했다.

백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너, 이 새끼···”


염제가 부들부들거렸다. 


“나한테 꽃꽂이를 시켜!?”


주위 사람들은 앞뒤를 다 잘라먹은 염제의 말에 ‘백연이 저 개차반의 심신 수양을 위해 꽃꽂이를 시켰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럴 만하다는 끄덕임과 함께.

백연이 물었다.


“설마 등꽃을 말하는 건가?”

“그래! 내가 꽃꽂이나 하자고 여기 눌러앉은 줄 알아!?  네가 자리를 비웠을 동안 피운 거만 해도ㅡ”

“그래서 잘 되던가?” 


백연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바꿔 물었다. 

염제는 그것이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 생각한 다시 입을 떼 성을 토하려 했다.

하지만 그때, 백연이 먼저 힐끔힐끔 보고 있는 화영문도 하나를 불러 품 안의 마화를 건네받아 손에 쥐었다.

염제의 손에도 하나 쥐여주고, 동시에 등꽃을 피워보자고 제안했다. 


“씨팔, 지금 뭐 때문에ㅡ”


염제의 말문은 눈앞에서 피어오르는 등꽃을 보자마자 막힐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피워낸 것보다 훨씬 짙고, 나풀거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퍼져나가는 범위조차 넓었다.


백연이 무릎을 굽혀 눈바닥 한 치 위로 등꽃을 비추었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그림자의 일렁임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보는 눈이 편안하고 몽롱해지는 기분까지 들었다. 

백연이 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염제에게 말했다. 


“너무 급하게 출발하는 바람에 깜빡하고 말하는 걸 잊었군.” 


이것이 화온공의 묘리라고.

너희들의 원류가 탄생한 이유라고 덧붙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화온공의 진수는 면(面)에서 선(線)으로, 선에서 점(點)으로 향하는 거야.” 


백연이 다시 몸을 세우며 손바닥 위 등꽃을 염제에게 내밀었다.


“그 모든 것이 고작 그저 천장 아래를 밝히고 싶었을 뿐이었단다. 그것이 우연히 무학(武學)과 맞아떨어졌던 것뿐이고.” 


염제가 쉽사리 등꽃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백연이 억지로 그의 가슴에 내밀며 건넸다. 

얼떨결에 그것을 품에 안은 염제는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화즉재(火卽災)라, 강한 불꽃은 재앙임이 되려 당연한 것이지 않을까. 

불꽃이 따스하다 한들, 하찮을 정도로 작고 약한 게 그 이유라고.

그게 그가 여태껏 들어왔던, 그리고 구태여 깨달을 필요조차 없었던 진리였다.


그런데 고작 저 좁은 천장 아래를 비추기 위한 게 자신들의 원류였다고? 

쉽게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이런 불꽃을 피워낼 수 없는 것도 사실.’


생각을 거듭한 염제는 결국 이해로서가 아니라 아집으로서 이해하고자 백연에게 말했다.


“그 끝을 보여다오.” 


화천신녀와 달리 염제가 북해에 있는 이유가 무리(武理)를 위함이란걸, 백연은 알고 있었다. 

또한 염제 안에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한, 그것보다 깊은 무언가가 속에 자리 잡고 있음도.


‘스스로 납득할 구석이 필요한 거겠지.’


백연은 비록 흉내에 불과하겠지만 팔백 년 전을 재현해 그에게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고작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리며 불꽃을 피워올렸다.


“······!”


처음은 마디 하나쯤 되는 작은 불꽃.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것은 얇게 곤두서다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결국엔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점이 되었다.

변화를 지켜보는 염제의 표정은 가히 경이롭다,라고 이야기는 듯했다.


“허억···”


점화가 응축해나감에 따라 백연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염제와 처음 마주했을 때 말했던 것처럼, 가지고 태어났고 그 과정을 지켜봤기에 미약하게나마 다룰 수 있었던 것뿐.

실낱보다 작은 점화(點花)를 피워내는 것조차 무리가 가는 행동이었다.


“그만!”


염제가 다급하게 외쳤다.

슬슬 한계임을 느낀 백연도 고개를 끄덕이고 점화를 역순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스스로 휘저으면 꺼지는 염제의 불꽃과 다르게, 그것은 아슬아슬하게 휘청이다 다시 작은 불꽃이 되고 나서야 사라졌다.

그것을 목도한 모든 이들이 주변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휴우.” 


염제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백연을 응시했다. 

거의 가진 내력을 다 소모한 백연이 창백한 얼굴로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이제 화 좀 풀렸으려나.”


미친놈처럼 굴었던 적은 언제고, 염제가 고개를 얌전히 끄덕였다. 

저 뒤에서 훔쳐보던 화영문도들의 입도 떡하니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아래로 내려 자신들이 피워냈던 등꽃을 바라봤다. 

왠지 그것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흐, 흐흐.” 


염제가 그늘진 얼굴로 서 있더니 갑자기 웃어댔다.

그 모습을 본 화영문도들이 속으로 문주의 광기에 경악했다.


‘저걸 보고 지랄병이 안 풀렸단 말이야!?“ 


하지만 빙궁 전체로 시원하게 염제의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흐하하하! 그래, 저 정도는 돼야 배신자 소리 들으면서 여기 머문 보람이 있지.”


문도들이 숨어봤자 문주 손바닥 안.

염제가 뒤를 돌아 숨어있는 문도들을 향해 두 팔 벌려 호탕하게 외쳤다. 


“애들아! 꽃꽂이 하러 가자!” 


붉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다가오는, 중원 양강계 최고수라 불리는 염제.

그를 따르는 화영문도들은 만장일치로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미친놈인가?’


그리고 백연과 염제 발밑에서 몰래 두 손을 모아 몸을 데우던 단소현도 백연에게 물음을 던졌다.

따뜻해서 좋긴 한데, 저 미친놈은 누구냐고.

백연은 민망한 표정으로 허허 웃다가, 애써 시선을 하늘로 옮기며 답해주었다.


“아, 아까 자리에 없어서 소개를 못 했군. 중원에서 염제(炎帝)라고 불리는 아이야.”


묵상회 정도 규모가 되면 중원의 주요 무인들의 이름 정도는 대부분 파악하고 있기 마련.

하지만 단소현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한참을 갸우뚱거리다 결국 머릿속에 머무르는 말을 참지 못하고 내뱉고 말았다.


“저딴 게 염제?”



***



한바탕 소란이 일고, 묵상회와의 인연을 축하하는 자리가 열렸다. 

가진 식량을 최대한 아껴 먹어야 했던 북해였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묵상회의 수레에는 천악성 백성들이 몰래 구겨 넣은 보리 한 말까지 껴 있었고, 단소현과 집사 또한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았기에 가는 길에 흘리더라도 최대한 실어 오고자 하는 마음 덕이었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남색 어두움이 내려왔고, 땅 아래는 희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득 찬 건물에서는 주홍빛이 비췄으니, 적어도 걷는 발아래를 비추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거리에 좀 넓다 싶은 건물은 모조리 사람들이 가득 차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흥겨운 자리 속에서 백연은 민망한 얼굴로 거의 술잔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아니~! 우리 궁주님이 거기서 딱 손을 뻗으시면서 뭐라 했는지 알아?” 

“뭐라 했는데!?” 


백연이 기련에서 처음 구출해냈던 무리, 그 속에 있었던 사내가 비장한 표정으로 팔을 내뻗으며 말했다. 


“두고 가라···!” 

“오오!” 


취기가 오른 주민들이 너 나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 몸짓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백연의 옆에 있던 관구자, 우기도 눈이 풀린 채로 목을 긁으며 외쳤다.


“그러니 두고 가거라!”

“···자네들까지 이러긴가.”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분위기를 어쩌겠는가. 

철영마저 잔뜩 취해 자신은 평생을 모실 주군을 만났다는 둥, 천악성에서 겪은 일들을 풀어내고 있었다.


백연은 낯이 부끄러워 도저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쉬고 바깥에 나와 찬 공기를 쐤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북풍조차 자꾸 볼을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참 이상한 날이구나.’


그래도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발걸음을 옮기는 백연의 뒤를 단소현이 따라나섰다. 

그녀는 왜 또 심통이 났을까. 

뾰로통한 얼굴을 보며 백연이 물었다. 


“다들 웃고 즐거운데 자네는 왜 그런 표정을 하고 있어.”

“아나 저게! 고구마좀 구워달랬더니 꺼지라 하잖아요!”

“저거?” 


백연이 말의 취지를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단소현은 구석에서 술을 훌쩍이며 여전히 등꽃을 피우고 있는 염제를 가리켰다. 


“저거요! 저거!” 


염제와 단소현의 나이 차이는 부녀지간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정도였다.


‘저거라니···’


백연은 낮게 깔린 웃음을 뱉으며 슬쩍 자리를 피했다. 

계단을 올라 궁으로 오르고 소설관을 지나 대궁 옆에 자리한 사관실 문을 열었다.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건 백연뿐이라, 그동안 쌓인 한기가 피부를 스쳤다. 

그래도 유독 다른 오늘이라 그런지, 그것들이 금방 가버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백연은 괜히 앞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사관들의 자리를 쓸었다. 


여전히 눈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해 얼음 먼지들이 쌓여 있었다.

이전과는 다른 느낌의 그것을 두 손 모아 쓸어 담았다.

재였던 것들을 한 줌 모아, 바깥으로 나왔다. 


궁 아래, 새로이 달린 등꽃과 그 불빛에 얼굴을 밝히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웃고 있었다.

백연은 흐뭇하게 바라보곤 두 손에 모은 먼지들을 날렸다. 


─휘이잉.


그리 강하지 않은 바람에 빙궁의 성벽조차 넘어서지 못하고 곧 땅에 스며들었다. 

미처 떠나지 못하고 손가락에 묻은 것들을 털어냈다.

그것들은 발아래에 스며들었다.


눈은 녹고 올라 결국 다시 떨어지기 마련.

백연은 미소를 띠고 북사(北史)를 펼쳐 오늘을 적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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