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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쟁이노야

북해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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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쟁이노야
작품등록일 :
2023.09.04 02:03
최근연재일 :
2023.10.15 22:43
연재수 :
36 회
조회수 :
22,927
추천수 :
587
글자수 :
187,081

작성
23.09.04 02:04
조회
2,435
추천
46
글자
6쪽

백 사관(史官)

DUMMY

한기(寒氣)를 머금은 서고에 들어섰다. 양쪽으로 배치된 빈 책상들과 의자들이 나란히 눈에 들어왔다. 


소궁주가 방문했으면 반갑게 맞이해줄 법도 하건만, 생기 하나 없는 쓸쓸한 침묵만이 돌아왔다. 


나는 천천히 주인을 잃은 것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이 앞에서 항상 나를 가로막던 일 사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궁주께서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라고 누차 말씀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오직 내 머릿속에서만 울려 퍼지는 그 기억. 그 기억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라 무심코 대답을 속삭였다.


“미안. 근데 이제 여기밖에 읽을 책이 남아있지 않은걸.”


이제 다시 대답을 들려올 차례였다. 


소궁주가 되서 책만 읽으면 어떡하냐고.

북해를 다스리는 자는 강인해야 한다고. 

나가서 단련이라도 좀 하라고.


상상 속 일 사관의 목소리가 나를 호되게 나무랐다. 머릿속 그의 음성이 아리도록 따뜻해서 미소가 지어졌다.


단호한 척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숨기지 못했던 걱정스러운 표정. 나는 그것이 좋아 매일같이 서고를 방문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선대 궁주는 일찍이 돌아가셔서 얼굴도 뵌 적이 없었고, 궁주였던 아버지는 백성에게는 따뜻하나 자식에게는 엄격하기 그지없으셨다. 


나는 그 심정을 십분 잘 이해했으나, 가끔은 도란도란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적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일 사관을 유독 따랐다. 따랐다기보단 어울렸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가 십 년 넘게 소궁주 담당 교육관을 하다 사관이 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아버지보다도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조손(祖孫) 같은 사이였다. 


꾸지람을 하다가도 울먹거리는 내 표정을 보곤 어쩔 줄 몰라 했던 그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그게 장난인 지도 모르고.

​​

“하하···”


하지만 기억은 흐물거리는 아지랑이로 남겨뒀어야 했을까. 너무나 많은 것들을 떠올린 탓에 현실감각이 선명해져버리고 말았다.


결국 지금 내 눈앞에 놓인 것들은 이미 주인을 잃었고, 이곳엔 더 이상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 넓은 서고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공백. 홀로 서 있는 것은 나뿐임이 온몸으로 실감되었다.


─스윽···


희고 마른 손으로 책상 위를 쓸었다. 얼음들이 맺히다 녹기를 반복해 먼지가 되어있었다.

저것들이 꽃에 내려앉으면 예쁜 눈꽃이 된다.

하지만 책상 위에 내려앉은 이것은 무어라 불러야 할까.


​마치 재 같았다.


나는 챙겨왔던 품 속의 단지를 꺼내 그것들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일 사관의 책상에 서린 재부터, 십 사관의 책상에 서린 재까지. 허리를 굽히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쓸어 담았다. 


책에서 읽기론 불교에선 화장(火莊)과 윤회라는 개념이 있다고.

 

죽은 이들을 기리며 불에 태운 시신의 재를 흩뿌려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의미를 담는다고 한다.


그러나 북해에서 죽음이 가지는 의미란 그야말로 무에 가까웠다. 얼어 죽는다는 것은 살아남은 자보다 나약하다는 증표일 뿐,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나는 이들을 나보다 나약한 체로 남겨두고 싶지 않아 난생 처음 화장이란 걸 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그것들을 모두 담아 서고 바깥으로 나섰다. 


─휘이잉


문을 열자마자 불어오는 북해 바람에 속눈썹과 앞머리가 얼어붙었다. 나는 그것들을 떼어내거나 녹여버릴 수 있음에도 내버려 둔 체 앞으로 걸어나갔다.


“후우···”


그리고 마침내 성 가장 높은 곳에 도착했다. 


북해에 살고 있는 온 백성의 가옥과 구조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나같이 얼어붙어 그중에 온기가 느껴지는 곳은 어느 곳도 없었다. 


모피로 몸을 감싸고도 호들갑을 떨며 달려가는 필부 하나 정도는 보일 만도 한데 이 넓은 성에 온기라곤 하나 느껴지지 않아 한숨을 내뱉으니.


.

.

.


내 숨이 유일한 숨이었다.


나는 뭉게뭉게 흘러가는 숨을 바라보다, 고개를 떨궈 사관들의 재를 담은 단지의 뚜껑을 열었다.


손을 넣어 한 줌 집어 흩뿌리려 하자 기묘한 북풍이 불어왔다. 그리고 그 기묘한 북풍은 마치 회오리치듯 단지 안속까지 파고들어 재를 들고 오름을 일었다.


그들은 더 이상 내 손에 닿지 않을 정도의 먼 곳으로 흩어져 멀리멀리 날아갔다. 


“···다행이다.”


손에 쥔 마지막 한 줌을 서서히 놓아주었다. 그들도 멀리멀리 날아갔다. 가는 길 외롭지 말라고 얼음꽃 한 송이도 함께 날려주었다.



***



나는 화장을 마치고, 다시 서고로 들어왔다. 그새 얼어붙은 헝겊으로 사관들의 책상을 깨끗이 닦고, 서고 한 편을 뒤지기 시작했다.


북사(北史). 북해빙궁의 역사를 기록하는 서책을 모아놓은 구획. 그 앞에 서서 나는 사람의 손길을 타다 만 책을 찾고 있었다. 


“여기 어디쯤에 있을 텐데··· 아!”


1권부터 1224권까지는 전부 완필(完筆) 되어 있었다. 거기까지가 사관들의 마지막 기록이었다. 


다음부터는 빈 책들. 그것들 중 하나를 집어 들어 일 사관의 책상에 앉았다. 보란 듯이 굳어있는 붓과 먹 덩이에 살며시 손을 뻗었다.


아버지가 남기고 가신 빙백(氷白)과 어머니가 남기고 가신 구양(九陽). 빙궁을 대표하는 두 신공이 마른 손을 타고 퍼져나갔다. 


딱딱했던 붓끝이 풀어지고, 종이가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처럼 파르르 떨었다. 숯같은 형상으로 갈라져 있던 먹이 출렁 내려앉았다.


나는 첫 책장을 넘겨 그 위에 글씨를 새겨넣었다. 


북사(北史) 제 1225권.


-전례없는 추위에 모두가 죽고 나 혼자만이 살아남았다. 과연 이게 단순한 재해일까?

  

사서(司書). 북해빙궁 12대 궁주 겸 제 1사관 백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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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산중 의인 - 4 +1 23.09.29 411 1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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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귀가 - 2 +1 23.09.23 526 1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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