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짜고 쓴 튀김 우동 국물
사니는 천천히 물러나 처음에 기대고 있던 나무에 다시 등을 대고 말했다.
“나는 네가 누군지 관심 없어. 스페셜 포스 나이트든 말단 병사든 상관없다고. 내 일을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그런데 이미 내 정찰 드론을 파괴한 데다 전파를 역추적해 여기까지 왔단 말이지. 그래서 묻는 거야. 보른 백작의 성에서 뭘 하는 거지?”
제이드는 웃음기를 지우고 사니의 말을 진지하게 들었다.
사니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 일에 방해가 된다면 치우고 일을 진행해야 되겠지.”
“하아!”
제이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니까 나로서는 누군지도 모르는 너에게 내 이야기를 하기가 곤란하다니까?”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지만, 그는 처음과 달리 싸움의 의지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사니의 입꼬리가 살짝 비틀어졌다.
“정신 못 차리네.”
“뭐?”
“내 정찰 드론을 부쉈으니 너는 가해자, 나는 피해자야. 게다가 전파를 역추적해 여기까지 왔다는 건 공격 내지 추궁 의지가 있었다고 봐야지. 그런데도 나는 너를 살려줬단 말이야.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이곳은 지구인 기지가 아닌 황야잖아.”
지구인 기지에서는 지구의 법이 적용되지만, 그곳을 벗어나면 약육강식이라는 야생의 절대 법칙이 적용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구인 탐험가는 기지를 벗어나도 지구의 법이 적용된다. 힘이 세다고 상대를 함부로 죽이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라스매니아는 매우 넓고 탐사단의 공권력은 지구인 탐험가들의 행위를 모두 파악하여 벌할 만큼 충분하지 않았다.
밝혀진 행위는 지구의 법이 적용되지만, 알려지지 않으면 약육강식의 법칙에 사실상 맡겨진다는 것이다.
이곳은 기지가 아니다!
이곳은 황야다!
라스매니아로 온 지구인 탐험가들이 가장 먼저 배우고 항상 유념해야 하는 격언 같은 말이었다.
제이드는 사니의 말을 확실히 이해했다.
너보다 강한 내가 너를 죽이지 않았으니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느냐고 돌려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주목한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지구인 기지?’
라스매니아에서 활동하는 지구인 탐험가들은 ‘지구인’ 기지라고 말하지 않는다.
보통은 그냥 ‘기지’라고 말한다.
물론 라스매니아의 어떤 장소와 대비하여 ‘지구인 기지’라는 말을 쓸 때도 있지만, 사니의 말은 왠지 강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마치 자신은 지구인이 아니라는 듯이.
‘마나 활용 능력도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고······, 정말로 라스매니아인인가? 그럼 정찰 드론은? 스페셜 포스 나이트는 어떻게 아는 거지? 포섭된 기사인가? 아니면 반대쪽?’
탐사단이 라스매니아인을 포섭하듯이 반대의 경우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었다.
물론 후자의 경우는 전자보다 훨씬 희박했다.
정찰 드론까지 사용하는 라스매니아인은 상급 기사는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때 사니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머리 그만 굴리라니까.”
“······!”
“역시 황야에서는 황야의 법칙대로 해야 하나?”
“그, 그게 아니고······.”
“너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 테니 이 정도는 말해 주지. 나는 라스매니아인이 아니야. 네 일을 방해할 생각도 없어. 보른 백작에게 있는 물건 하나만 가지고 떠날 거야.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야. 그는 아마도 자신이 그걸 가지고 있는지도 모를걸?”
“음······.”
“믿든 말든 알아서 해. 내가 알려주는 건 여기까지야. 내 정찰 드론을 부순 대가로 목을 내놓을지 순순히 협조할지는 네가 선택할 문제겠지.”
사니는 검집에서 다시 검을 뽑았다.
그의 눈빛이 전쟁을 앞둔 후쿠족 전사처럼 살기로 번뜩였다.
제이드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더니 사니를 노려보며 소리를 빽 질렀다.
“젠장! 거지 같은 세상! 약하면 뒈져야지!”
그러나 말과 다르게 그는 플라즈마 소드 손잡이를 바닥에 거칠게 팽개쳤다.
사니는 답답한 군인들과 달리 융통성 있는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연기력은 실력이 바탕이 될 때 더욱 잘 통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
“정찰 드론 부순 건 미안하게 됐다. 난 또 탐사 금지 구역을 무시하는 경솔한 탐험가 놈들이 온 줄 알았지. 그놈들을 쫓아 버릴 겸 경고해 주려고 온 거야.”
“무슨 경고?”
“이 근처가 당분간 전쟁 지역이 될 수 있으니 목숨이 아까우면 꺼지라고 말이야.”
이 근처가 전쟁 지역이 된다?
“무슨 뜻이지?”
“하아!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뭐 좀 먹으면서 해도 될까?”
사니는 아침을 대충 때웠지만, 더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
“컵라면 먹을래?”
제이드가 자연스럽게 물었다.
사니는 알았다.
그의 자연스러운 질문과 행동도 모두 자신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한 것임을.
스페셜 포스 나이트 정도 되면 군사 훈련만 받는 것이 아니다.
라스매니아 깊숙이 침투하기 때문에 비밀 요원으로서의 훈련도 받는다.
그러나 사니는 특수작전국에서 어릴 때부터 길러진 요원.
그의 속셈이 빤히 보였다.
“튀김 우동 있어?”
제이드는 사니의 자연스러운 반문에 당황했지만, 티를 내지 않고 대답했다.
“당연하지.”
그러고는 아공간을 열어 비상식량 자루를 꺼내 거기에서 튀김 우동 두 개를 꺼내고, 물을 끓일 냄비와 나무젓가락도 준비했다.
사니는 스페셜 포스 나이트도 아공간 반지를 지급받는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작전에 투입되는 대원만 받는 것이겠지? 설마 다 줄 리는 없을 거야.’
아공간 아이템을 만들 수 있는 마법사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중 한 명을 찾아낸 것이 바로 사니였기 때문에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이 임무가 중요하다는 뜻이구나! 그러니 개죽음을 피하는 쪽을 선택한 것이겠지.’
사니는 아공간에서 물건을 꺼내는 것을 보고 놀랄지 말지 순간적으로 고민했으나 놀라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그러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정찰 드론을 조종하고 모니터링 하는 장비가 이곳에 전혀 보이지 않으니까 아마도 아공간 사용 가능성을 염두에 둘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이 어디 있는지 알아. 내가 물을 떠올 테니까 넌 불을 피워.”
“어? 어.”
제이드는 사니가 모닥불을 피운 곳에 다시 불을 지폈고 그 사이 사니는 냄비를 가지고 가서 물을 떠왔다.
물이 끓자 두 사람은 용기에 물을 붓고, 나무젓가락으로 튀김 우동을 후루룩후루룩 먹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제이드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머릿속이 헝클어져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확실히 알게 된 것들은 있었다.
눈앞에 있는 오라 마스터급의 실력자가 튀김 우동도 알고 아공간 반지에도 놀라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더욱 혼란에 빠졌다.
그때 사니가 라면을 한 젓가락 집으며 말했다.
“어이! 먹으면서 얘기해. 엄숙한 회의 자리도 아닌데. 다 먹고 나서 말할 거야?”
“그럴까, 그럼?”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제이드는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여전히 상대를 탐색하면서 조심스럽게.
“라드니스 제국 서쪽 지역에 있는 다크 홀들의 장벽을 개방한 걸 알고 있나?”
“벌써 몇 년 된 이야기 아니야?”
“아는군. 그렇다면 이해가 쉽겠어.”
사니는 튀김 우동을 후루룩 먹으며 이야기를 들었다.
“사냥감이 부족하다는 민간인 탐험가들의 불만을 해소해 주려고 장벽을 열었다는 게 공식 입장이지만, 사실은 다른 이유가 있었어.”
그러면서 제이드는 사니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사니가 버럭 화를 냈다.
“떠보지 말고 시원하게 말해! 인내심 테스트하니?”
“응! 미안! 알았어.”
제이드는 사과가 빨랐다.
***
장벽.
다크 홀에서 나온 마물이 바깥세상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건설한 거대 구조물.
그런데 이 장벽을 건설한 것은 바로 지구에서 온 신세계 탐사단이었다.
라스매니아인들은 생존하기도 버거워 다크 홀을 차단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지구에서 다크 홀을 차단하는 벽을 만든 경험이 있는 지구인들은 다크 홀 주위에 지형을 고려하여 장벽을 하나씩 건설해 나갔다.
장벽을 만든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마물로부터 안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아무리 무장을 했다 해도 마물이 활보하고 다니는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은 무척 위험했다.
장기적으로 이 세계를 식민화할 생각도 있었기에 장벽 건설은 필수였다.
둘째, 마력 구슬과 마물 부산물의 효과적인 수확을 위해.
마물이 마구잡이로 돌아다니는 것보다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이 사냥하고 부산물을 얻기가 훨씬 쉬웠다.
말하자면 장벽은 다크 홀에서 나온 마물들을 가둬 키우는 거대한 방목장이 되는 셈이다.
신세계 탐사단의 주요 임무가 바로 주기적으로 장벽 안에 있는 마물을 사냥하여 마력 구슬을 비롯한 각종 부산물을 획득하는 것이다.
장벽 내부의 마물은 온전히 신세계 탐사단의 공식 소유가 된다.
장벽을 건설했다고 해도 장벽 바깥세상에는 먼저 나온 마물들이 번식하며 살아가고 있었고, 지형에 따라 장벽을 지을 수 없는 곳으로도 마물들이 넘어가고는 해서 완전히 차단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장벽 덕에 대형 마물은 이제 바깥세상으로 아예 나올 수 없었고 다크 홀에서 새로이 나오는 중소형 마물의 수도 확연히 줄어 라스매니아가 완전히 마물에 뒤덮이지는 않게 되었다.
장벽 바깥에 있는 마물은 생존한 라스매니아 성채와 도시의 군대 그리고 지구인 민간 탐험가들의 몫이었다.
신세계 탐사단은 몇 년 전에 그 장벽을 일부 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라드니스 제국 서부의 다크 홀을 차단하고 있는 장벽들을 열었다.
그렇다는 말은 대형 마물을 비롯해 중소형 마물들이 바깥세상으로 쏟아져 나온다는 뜻이었다.
지구인 민간 탐험가들이 사냥감을 탐사단이 독식한다고 - 말하자면 정부가 독점한다고 - 불만을 토로하자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사냥감을 풀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니는 알고 있었다.
‘개소리!’
장벽 바깥세상에 퍼져 번식해 온 마물의 수가 여전히 어마어마했다.
물론 살아남은 성채와 도시 주변은 마물이 많이 소탕되었지만, 인간이 사라진 땅에 생긴 숲과 곳곳에 퍼져 있는 암흑 숲, 그리고 오지에는 마물이 바글바글했다.
그럼에도 장벽을 개방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을 사니는 잘 알고 있었다.
***
제이드가 나무젓가락을 라면 용기에 넣은 채 말했다.
“라드니스 서쪽에 살던 사람들이 난민이 되어 뮌스터 왕국으로 넘어오고 있어. 라드니스 서부는 마물의 땅이 되는 거지. 뮌스터 왕국은 라드니스와 완전히 차단되는 거야.”
“그래서? 그래서 넌 여기서 뭘 하고 있냐고?”
“말하자면 복잡한데······.”
“이봐! 우리 다시 만날 사이도 아니잖아? 잠꼬대한 셈 치고 시원하게 말하라고. 난 지나가다 네 잠꼬대를 들은 셈 칠게. 내 일 끝내고 떠날 거야.”
“······.”
“왜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 정말로 목 위에 머리가 필요 없나?”
“무슨 말을 그리 살벌하게 해? 같이 튀김 우동도 먹는 사이에······.”
제이드가 서운하다는 듯이 너스레를 떨다가 다 포기한 사람처럼 털어놓았다.
“난 보른 백작의 세력을 키우는 중이야. 난민을 받고 영역을 넓혀 나가는 거지.”
사니는 묵묵히 그의 말을 들었다.
“그 와중에 뮌스터 왕국에서 무법자 놈들을 쓸어버리고 말이야.”
난민을 받아들여 보른 백작의 세력을 키우고 무법자 무리를 소탕한다.
“그게 전부야?”
사니가 물었다.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왜 질질 끌어?”
사니의 구박에 제이드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사니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쿨 타임이 돌았나 보군.’
식민화를 주장하는 강경파의 입김이 다시 강해져 주장에 그치는 게 아니라 실행에 옮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니는 남은 튀김 우동 국물을 훌훌 마셨다.
무척 짜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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