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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키 님의 서재입니다.

판상츠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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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키
작품등록일 :
2012.09.20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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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2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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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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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쪽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12]

DUMMY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12]




“알겠습니다. 간단히 확인해보지요.”


가닐영이 왕립학술원에서 데리고 온 사람은 꽤나 나이가 들어 보이는 백발의 남자였는데, 놀랍게도 안경을 쓰고 있었다. 여기도 안경이 있구나.


“애야. 수학을 배운 적이 없다고 했니?”


“아... 네...”


아이카의 대답에 노학자는 안경을 살짝 고쳐 썼다. 그리고 내가 건넨 문제집 표지를 슬쩍 훑어보았다.


“그래... 이 책을 봤단 말이지. 그럼 이쪽으로 오거라.”


그러잖아도 우리가 지켜보고 있었던 통에 아이카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상태였다. 늙은 수학자는 노련하게 그런 아이카를 창가 쪽 탁자로 데리고 가면서 뭔가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걸 잘 들어보렴. 잘 모르는 단어가 있거나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싶은 게 있으면 바로 물어보고. 혹시 필요하면 필기구를 사용해도 좋단다.”


“네, 넷.”


“내가 지금 어떤 완벽한 동그라미를 생각하고 있는데, 이런 동그라미가 동그라미 안이나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동그라미를 그리는 선 위에 위치해 있는 한 점을 향해 계속 일정한 비율로 작아져서 결국 점 하나가 되어버린다고 생각해보렴. 이런 경우...”


거리가 약간 멀어졌기 때문인지 자세한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하긴, 우리가 그걸 들어봐야 무얼 하겠느냐만.


“의외네.”


남은 사람, 그러니까 시아와 나, 가닐영 중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시아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사실 저 책 내용 정도만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어도 의외라고 생각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상정하지 않은 상황이란 것은 세 명 다 동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런 말과 함께 시아는 이 모든 일의 원흉... 아니, 원흉이라고 부를 건 없지. 어쨌든 발단이 된 책을 들고 있는 노학자를 힐끔 쳐다보더니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저 책, 그때 시험 때문에 보는 거라고 하지 않았어?”


윽, 그러고 보니 시아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었던 기억이 난다.


“뜬금없이 웬 시험이야? 학술원에 들어가기라도 하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고개를 갸웃거리지는 않았지만 가닐영이 매우 흥미롭다는 듯이 우리 대화를 듣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대답할 말이 곤궁해졌다. 따라서 나는 구차하지만...


“아, 그나저나 학술원이라고 하니... 아까 가닐영이 학술원 출신이라고 했나?”


“네, 맞습니다.”


다행히 시아 역시 딱히 궁금해서 물어본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면 대답을 들어봤자 별 의미 없을 거라고 생각했든가. 내가 이렇게 확신한 이유는, 우리의 대화에 시아가 금방 참여해왔기 때문이었다.


“2차 제국원정 때 초급 위관이 부족해서 학술원에서 임시로 징집한 한 적이 있지. 수학 전공이다 보니 포병대로 처음에 들어갔었어.”


“포병대?”


“곧 알데가르트의 부관으로 가기는 했지만.”


시아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가닐영이 약간 놀랍다는 투로 이야기했다.


“맞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소한 걸 다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호위대장으로 임명할 때 나도 이력을 보잖아.”


별 것 아니라는 투였다.


“그리고 사실 지금 와서 이야기하는 거지만...”


어쩐지 느긋한 분위기 속에서, 시아는 시아치고는 드문 방식으로 말을 꺼냈다.


“곧 학술원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해서 다음 호위대장은 어떻게 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돌아가지 않더라고.”


“네?”


“가닐영 말이야. 전쟁이 끝났으니 학술원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돌아가지 않았어.”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대화의 흐름상 나는 가닐영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가닐영은 명확한 표정 없이 잠자코 그런 시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수학에 꽤 재능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주위의 평가가 과분했지요. 많이 부족했습니다.”


내가 몰랐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귓가로 흘러들어오는 것은 다소 기묘한 경험이었다.


“그래? 최연소 수학과 선임 지도학사였잖아? 그 정도면 충분히 대단한 일이잖아.”


우와, 지도학사라고? 가닐영이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단 말이야? 물론 나는 그게 뭔지는 몰랐지만, 일단 수식어들이 장황한 걸 보니 분명 대단한 자리인 것은 확실하겠지. 그러나 놀랄 일은 정작 따로 있었다.


“...옛날 일입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떡 벌리...려고 했지만 가닐영 앞에서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은 가닐영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 같아 필사적으로 평정을 가장했다.

지금... 가닐영... 얼굴 빨개졌는데...? 서, 설마... 부끄러워하고 있는 건가? 나는 처음 보는 그 광경에 할 말을 잊었고, 가닐영도, 시아도 입을 다물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저쪽 대화가 살며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렇지. 바로 그 이야기야. 그럼 앞의 값들과 마찬가지로, 여기 있는 이 값에 모르는 어떤 수를 제곱한 값을 계속 추가한다고 생각해보자꾸나. 이쪽에 있는 모든 값들을 모두 더한 값은 여기 있는 이 제곱수를 넘어가지 않으며...”


으음, 안 돼. 이 분위기를 바꿔야겠어.


“어... 어쨌든 가닐영이 그런 때가 있었다니 좀 의외네.”


아이카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지만, 우리가 여기서 이름을 꺼내면 아이카가 보나마나 긴장하겠지. 나는 고심 끝에 가닐영 이야기를 다른 쪽으로 끌기로 했다.


“내가 볼 때는 군인 그 자체인 사람인데.”


“그야... 사령관님을 처음 만나 뵐 때 군인이었으니까요.”


그것도 그렇지만. 나는 가닐영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선이 굵고, 키가 크고, 덩치가 건장한... 음, 이런 말을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늙으면 알데가르트 씨처럼 될 것 같은...


“후회하지는 않아?”


다행히 시아가 질문을 하나 더 던져 침묵이 공간을 지배하는 상황을 방지해주었다.


“후회라뇨?”


“전쟁이 아니었다면, 학술원에서 좋아하는 수학 연구를 마음껏 하고 살고 있었을 거잖아.”


시아가 던진 질문에 가닐영은 잠시 침묵했다. 딱히 움직임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닐영이 생각에 잠겨있다고 확신했다.


“돌아갈 기회가 있다면, 돌아갈 거야?”


시아치고는 다소 감성적인 질문인데.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가닐영에게는 나름 적절한 질문이었던 모양이었다. 가닐영은 계속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뇨.”


짧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가닐영이라는 사람이 가진 진심을 엿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목소리는 진중했고 힘이 있었다. 아쉬움은 있지만 돌아가지 않을 거라는 신념이 그대로 묻어나는 한 마디.


“만약 이번 전쟁이 끝난다면?”


하지만 그런 가닐영의 대답에 시아가 냉큼 새로운 관점의 질문을 던졌다.


“그건...”


상정하지 않은 질문이었는지, 약간 당황한 목소리였다.


“아직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되겠네.”


얘는 은근히 심술궂은 면이 있군. 나는 여전히 당황한 채 억지로 답을 짜내고 있는 가닐영을 힐끔 쳐다보았다.

역시 겉모습으로는 알 수 없는 게 사람이군. 가닐영이 군인이 아니라 수학도였다고? 나는 가닐영 대사관이 군복이 아닌 평범한 옷을 입은 채 등불을 앞에 두고 종이에 정신없이 수식을 끄적거리고 있는 장면을 상상해보았다.

엄... 막상 생각해보자니 의외로 또 어울린다고 볼 수도 있겠는데... 그러고 보니 이걸 진작 알았다면 시험 공부할 때 가닐영한테 이것저것 좀 물어보기라도 했을 텐데. 나는 시아와 가닐영 사이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는 대화 속에서 멍하니 그런 잡생각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시답잖은 대화 사이 속에서 얼마나 앉아있었을까.


“...그래. 그럼 일단 여기까지 이야기하자꾸나. 자, 따라오너라.”


결코 짧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오래지도 않은 시간이 지난 어느 즈음에, 노학자의 그런 나지막한 한 마디가 귓가로 스며들었다. 목소리라기보다는 배경음 정도로 느껴지던 대화의 마무리에 곧 이어 둘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하자 우리는 자연스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주님.”


“끝났어?”


벌써 끝났냐고 묻기에는 좀 애매하고, 이제야 끝났냐고 묻기에는 더 애매한 시간이었기에 시아의 질문은 실로 중립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딱히 정말로 궁금해서 던진 질문도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어때?”


“일단 체계적으로 수학을 배운 적이 없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아니, 그런 걸 말하라는 게 아니라고. 그러나 그런 내 조바심 너머로 노학자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딱히 이제 와서 수학을 가르칠 필요도 없어 보입니다.”


“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그러나 당황한 나와는 달리, 시아는 그 대답에서 노학자가 하고픈 말을 읽어낸 모양이었다.


“그 말은...”


“네. 가르쳐서 알 수 있을 수학적 지식 정도는, 이미 이 아이에게 별로 의미가 없는 수준입니다.”


뭐?


“물론 제가 전공한 분야만 확인했을 뿐입니다만...”


그렇게 조건을 달면서, 백발의 수학자는 군더더기 없는 손길로 안경을 고쳐 썼다.


“평범한 내용은 굳이 가르칠 필요도, 굳이 배울 필요도 없어 보입니다. 수학적인 표현이나 약속에 무지한 관계로 소통이 잘 안 되어서 그렇지, 이미 내면에 독자적인 수학적 체계가 완성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 정도라면 기존 수학의 기본적인 틀만 습득해도 충분하지요. 그 이후엔 당장 마음가는대로 아무 분야나 연구해도 빠른 시간 내에 수학적인 결과물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낸 노학자는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이 남자가 매우 흥분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능하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수학과로 데리고 가고 싶습니다. 당연히 좀 더 확인을 해봐야 알겠지만, 지금 이야기해본 바로는 학생으로 들이는 것도 우스운 일 같습니다. 당연히 지도학사... 혹은 교좌까지 생각해볼 수도 있겠군요. 응당 그 정도는 되어야 하리라 봅니다.”


*


서류를 보면서 다소 늦은 점심을 챙겨먹고 있자니 똑똑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핀 님, 아이카입니다.”


“아,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아이카가 들어와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블라도스 님이 오셨는데요.”


“응?”


어?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무슨 일이지?


“...들어오시라 그래.”


“알겠습니다.”


여전히 단정한 인사. 나는 그렇게 방을 나가는 아이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이카를 어떻게 할 것인지는 일단 당장 결정하지 않기로 했다. 좀 더 이것저것 확인을 해본 다음에 결정을 해도 늦지 않을 거라는 의견에 아이카 포함 모두가 동의했고, 그래서 아이카는 일단 그대로 내 방 전속하인을 맡기로 했다.

아, 물론 아이카와 이야기를 나눠본 수학과 할아버지는 이러한 결론에 동의하지 않기는 했지만. 말이야. 그 할아버지는 조금이라도 바삐 아이카를 수학과로 데리고 가고 싶어 안달이 나보였지만, 시아가 차후로 결정을 미루기로 결정한 마당에야 딱히 자기 주장을 고집할 엄두가 나지 않은 눈치였다.

그리고 아이카도 그렇겠지만 사실 실감이 안 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카가 이런 사람이었다고? 아무리 사람은 겉보기에는 모른다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수학 잘할 것 같은 사람의 모습하고는 어마어마한 괴리가 있는데.


“여어.”


어쨌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호쾌한 인사와 함께 블라도스 씨가 들어왔다.


“오, 식사중인가? 꽤 늦게 먹는군.”


“시간이 좀 안 맞아서요.”


“음, 머리가 흔들렸을 땐 이런 소화 잘되는 음식이 좋지.”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궁금한 점이 있었다.


“머리가 흔들린 거랑 소화 잘되는 음식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그거야 나도 잘은 모르지.”


뭐야, 그럼 이야기를 왜 꺼낸 거야?


“하지만 머리를 강하게 맞은 뒤에는 구토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걸 보면, 위장과 뇌는 비록 떨어져 있어도 뭔가 상호작용을 하지 않을까... 하는 가설이 있다네.”


“그래요?”


그건 또 처음 알았군.


“그나저나... 무슨 일로?”


“아, 공주님께서 자네가 다쳤다고 말씀하시기에... 혹시나 해서 상태를 한 번 보러왔지.”


그리고 블라도스 씨는 실험용 쥐를 관찰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붕대는 풀었군?”


“아, 예. 리체가 아침에 잠깐 들렀거든요.”


내가 뒤통수에 눈이 달리진 않았으니까 확실치는 않지만. 아, 달려있다고 해도 이건 확인 못하나?


“어, 그런가?”


블라도스 씨는 약간 의외라는 듯이 반문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 아가씨, 의술에도 조예가 있었나?”


“의술요?”


“자신 있게 붕대를 걷어낸 걸 보면, 의학에도 지식이 좀 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의학?”


“후두부 피격에 붕대를 감을 필요는 없다는 걸 알고 있다는 거지.”


“...뭔 피격이요?”


“후두부 피격.”


갑자기 뭔가 전문용어가 나오는 덕에 나는 약간 긴장했다.


“후두부 피격...이요? 뒤통수를 맞았다는 건가요?”


“그렇지.”


뭔가 이 아저씨가 유식한 말을 쓰니까 별로 안 어울리는데. 아니, 그나저나...


“그거랑 의술에 조예가 있는 거랑은 무슨 상관인데요?”


“뇌가 있으면 생각을 해보게. 붕대를 감아놓는다고 뇌가 놀란 것이 회복되겠나?”


...왠지 바보 취급당하는 기분인데?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대개 머리를 다치면 머리에 붕대를 감아두는 게 맞다고들 생각하지. 사실 뇌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는데 말이야.”


그리고 블라도스 씨는 자기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뇌는 머리 뼈 안에 있잖나. 하하하핫.”


웃어야 되나? 이 아저씨 농담은 따라가기 힘든 면이 있단 말이야.


“그럼 붕대를 감을 필요가 없다는 건가요?”


“그건 아니지. 피가 흐르잖나.”


그럼 뭐야?


“다만 마법사가 상처를 치료해주면, 그 뒤는 이제 감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거야. 어차피 뇌는 마법사도 안 건드리니까.”


오호, 이건 리체가 하던 말과 같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편으로 의학에는 관심을 갖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의학에 관심이 많으신가 보네요?”


“응? 나?”


블라도스 씨는 내 질문에 그렇게 반응하고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사실 내 전공은 치유계통이라네. 그쪽에 관심도 많고.”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도 그것 때문에 만났지. 나는 라미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을 때를 떠올렸다. 그런데 마침 블라도스 씨 역시도 나와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자네가 들개한테 거시기를 물려서 질질 짜고 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러니까 그거 저 아니라니까요?”


“어, 그랬나? 그럼 손가락이 잘려나간 게 자네였나?”


“그것도 저 아닌데요.”


“이상하군. 둘 중 하나라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블라도스 씨는 약간 시큰둥한 반응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나는 딱히 대꾸할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머릿속에 뭔가 익숙한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라미. 그때의 기억과 함께 자연스레 떠오르는 얼굴. 나는 갑작스레 떠오르는 라미의 모습에 순간 잠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아, 그나저나 말이야.”


“네?”


“자네 요즘 아라미르를 만나지 않고 있는 모양이더군?”


블라도스 씨는 이번 역시도 나와 비슷한 사고단계를 밟은 모양이었다.


“아...”


나는 대답을 잠시 주저했지만...


“네...”


자신 없는 대답.


“흠, 그렇군.”


블라도스 씨는 턱수염을 한 번 매만졌다.


“아니, 요즘 보면 매일매일 혼자 있어서.”


“...네?”


“매일 도서관에 있더군.”


블라도스 씨가 담담하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라미, 아직 성에 있어요?”


“음? 그 반응은 뭔가? 마치 몰랐다는 듯한 눈치인데.”


블라도스 씨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되물어왔기에 나는 좀 더 당황했다.

하긴 누가 나한테 물어봐도 아마 성에 있지 않을까 대답했을 것 같긴 한데, 그걸 다른 사람 입으로 듣는 건 또 다른 기분이었다.


“나름 서로 친하지 않나?”


“어, 그게...”


용이라는 게 밝혀진 시점 이후에 평범하게 라미를 대한 적도 있었던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블라도스 씨는 그런 내 주저 속에서 이미 내 대답을 읽어낸 모양이었다.


“자네도 그녀가 무섭나보군.”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다른 사람들이 라미를 꺼리는 모습을 보면, 라미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내가 왠지 이상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대신 말을 돌렸다.


“블라도스 씨는 괜찮나요?”


“말했잖은가. 바다로 간다 어쩐다 그런 소리만 하지만 않으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존재라고. 그리고 마법사로서 배울 점도 많아. 대화를 할 기회가 좀 있었으면 좋겠는데.”


“마법사요?”


“물론 그녀가 마법사라면 말이지만.”


블라도스 씨는 조건을 달았다.


“하지만 그녀가 마법사라면, 적어도 그녀만한 마법사는 세상에 없겠지.”


블라도스 씨는 그렇게 중얼거린 다음, 이내 설명이 약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곧 말을 이었다.


“후작 저택에서 있었던 일 기억하나?”


“네?”


“그때 아라미르가 심장을 찔렸잖은가.”


아, 그때의 기억이 순간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랬지. 그랬었지.


“그런...데요?”


“그런데도 아라미르는 살아났지.”


나는 순간 약간 혼란스러워졌다. 블라도스 씨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그 뒤로 고민을 해봤는데, 결론은 간단하더군.”


“결론이요?”


“그녀의 능력은 별다른 게 아냐. 다만...”


“다만?”


블라도스 씨는 턱을 한 번 매만졌다. 그리고 약간 침울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상상할 수 없는 것이 없는 듯하더군.”


“네?”


“말 그대로일세. 별다른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것이 없다는 거지.”


나는 멍하니 블라도스 씨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블라도스 씨는 잠시 침묵했지만, 이내 설명을 약간 이어주었다.


“예를 들어볼까. 심장이 꿰뚫린 사람을 마법사가 살려낸 기록은 없네. 이유는 뭐냐면...”


“...아, 그건 그 자리에서 들었어요.”


“그런가? 뭐라고 하던가?”


“어... 심장을 제대로 상상할 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블라도스 씨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뭐지? 그러나 그런 내 의문 너머로 블라도스 씨의 말이 이어졌다.


“설명이 조금 부족했군.”


“네?”


“심장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심장의 상처를 회복시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거야.”


“...무슨 말이에요?”


블라도스 씨는 구레나룻을 한 번 만지작거렸다.


“심장은 매우 복잡하게 생긴 장기지. 만약 상처가 생길 경우 잘못 회복시키면 즉각 피가 역류하고, 조금만 늦게 회복시켜도 과다출혈로 사망하든지, 피가 돌지 않아 죽든지 하지. 아무리 마법을 사용한다손 쳐도 약간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데다가 시간제한까지 있는 셈이야.”


블라도스 씨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조금 달랐지만, 정확히 어디가 다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복잡하게 생겼다고 해도 결국은 고작 주먹만 한 장기 하나야. 그깟 것쯤이야 대여섯 개 해부해보면 누가 모양을 못 외우겠나.”


으에... 뜬금없이 잔혹한 이야기가 나와서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눈살을 찌푸린 것과 블라도스 씨의 이야기를 납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모양을 외울 수 있다면... 왜 상상하지 못하는 거죠?”


“심장은 상상할 수 있어.”


“상상할 수 없다면서요?”


“상처를 회복시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지.”


이야기가 이상해지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이죠?”


솔직한 설명 요구에 블라도스 씨는 턱을 한 번 쓰다듬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상에 대해서는 상상할 수 없다는 거야.”


“네?”


“예를 들어 자네가 심장을 찔렸다고 생각해보세.”


예시는 별로 마음에 안 들었지만, 나는 내색하지는 않았다.


“마법사가 달려왔어. 피가 분수처럼 흘러나오고 있으니 심장을 찔린 걸 알아차렸다 치세.”


“...네.”


“하지만 심장은 보이지 않잖나.”


“그렇...죠?”


“그렇다면 찔렸다는 것은 알고 있어도, 어디를 얼마나 찔린 것인지는 모르잖나.”


아.


“어디를 얼마나 찔렸는지조차 사실상 우리가 상상할 수밖에 없는 영역인데, 그걸 다시 회복시키는 상상을 한다는 것은...”


블라도스 씨는 말을 잠시 끊었다.


“상상이 겹치는 셈이지.”


“그건 안 된다는 말인가요?”


“안 되지.”


대답은 단호했다.


“그냥 상상이라면 모를까, 상상에 상상을 다시 덧붙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지. 마법은 무한의 가능성만을 가졌을 뿐이야. 그 무한의 가능성 하나하나마다 또 다시 무한의 가능성을 덧붙이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


“어, 그 표현...”


“여기서만큼은 써도 되네.”


윽, 다른 사람도 아니고 블라도스 씨가 너무 확신을 가지고 대답하는 바람에 나는 찍 소리도 못하고 입을 닫았다.


“어쨌든... 아, 그렇지. 하지만 아라미르에게는 그런 게 없는 것 같더군.”


“없다고요?”


“상상에는 상상을 덧붙일 수 없다는 제약.”


그리고 블라도스 씨는 부연했다.


“물론 그녀가 마법사라는 게 맞다면 말일세. 나는 그렇게 보지만.”


“...그냥 용이라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확신하고 있어. 아라미르는 마법사야.”


“근거는요?”


“마법사로서의 내 직감.”


뭐야? 그러나 블라도스 씨가 묘하게 진지했기에 나는 별달리 대꾸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블라도스 씨는 그런 침묵 끝에 잠시 입을 삐죽거리더니,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라미르처럼 상상에 제약을 가지지 않는 방법만 알아내어도, 인간이 이루지 못할 것은 없을 텐데.”


약간은 허탈하게 들리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결론이 약간 허무하다는 것은 블라도스 씨도 이해를 했는지, 블라도스 씨는 입맛을 쩝하고 다셨다.


“음, 이야기가 길었군. 뇌에 부담을 좀 줬겠는데.”


“재밌는데요.”


“나가보겠네. 혹시 모르니 푹 쉬도록 하게.”


“네.”


말을 마친 블라도스 씨는 주섬주섬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그렇게 막 걸음을 옮겨놓으려다가, 블라도스 씨는 막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말이야.”


“네.”


“음, 약간 염려가 되서 말이지. 그래서 묻는 건데.”


“네?”


블라도스 씨는 머리를 슬쩍 헝클어뜨렸다. 턱을 만지거나 하는 경우는 봤어도, 초조함이 저렇게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거의 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한 번 갸웃거렸다.


“지금은 아라미르를 만나지 않고 있는 거지?”


“네? 아, 그렇...죠?”


나는 조금 애매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런 내 반응에 이어진 블라도스 씨의 말은 약간 의외의 것이었다.


“그것도 공주님의 명령인가?”


“네? 명령이요?”


“별다른 뜻은 아니고... 혹시 작업의 일환인가 싶어서 말이야.”


그리고 블라도스 씨는 머리를 한 번 만지작거렸다.


“아니다. 내가 물어보면 곤란한 질문인가?”


“곤란...하다뇨?”


내 반응에 블라도스 씨는 잠시 대답을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아라미르를 설득하고 있는 건가 궁금해서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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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11] +2 20.10.22 69 7 20쪽
173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10] +1 20.10.21 67 5 16쪽
172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9] +1 20.10.20 69 5 26쪽
171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8] +1 20.10.19 62 5 20쪽
170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7] +1 20.10.18 64 5 28쪽
169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6] +1 20.10.17 68 6 15쪽
168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5] +1 20.10.16 68 5 16쪽
167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4] +1 20.10.15 77 5 28쪽
166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3] +1 20.10.14 73 5 14쪽
165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2] +2 20.10.13 81 6 19쪽
164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1] +1 20.10.12 86 6 23쪽
163 [판상츠모사][11장 “동전의 이면, 그녀의 옆면” - 프롤로그] +1 20.10.11 133 6 2쪽
162 [판상츠모사][10장 “그녀의 이면, 동전의 옆면” - 18 / 에필로그] +2 20.10.10 87 6 21쪽
161 [판상츠모사][10장 “그녀의 이면, 동전의 옆면” - 17] +1 20.10.09 94 5 22쪽
160 [판상츠모사][10장 “그녀의 이면, 동전의 옆면” - 16] +2 20.10.08 87 6 17쪽
159 [판상츠모사][10장 “그녀의 이면, 동전의 옆면” - 15] +1 20.10.07 93 5 19쪽
158 [판상츠모사][10장 “그녀의 이면, 동전의 옆면” - 14] +2 20.10.06 85 7 28쪽
157 [판상츠모사][10장 “그녀의 이면, 동전의 옆면” - 13] +1 20.10.05 117 5 20쪽
156 [판상츠모사][10장 “그녀의 이면, 동전의 옆면” - 12] +1 20.10.04 120 5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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